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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로마인 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보통상태, Publius Cornelius
모로코 술탄 물라이 이스마일의 전타를 말이 아니라, 마구를 장착한 그의 아내와 환관들의 무리가 끌고 있었다.
1755년에 일어난 지진은 최악의 파괴를 가져왔다.
1625년 7월 셋째 주, 콘월의 남서해안 플리머스 해군 기지..
1610년에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가 자기 땅에서 100만 명에 달하는 에스파냐계 무어인(Moriscos)들을 추방해 버렸다.
이 추방자 집단 가운데 가장 모험심이 많았던 어느 집단은, 그들이 살았던 안달루시아 지방의 산속 마을 이름을 따서 호르나케로스(Hornacheros)라고 불렀다. 그들은 거칠고 독립적이었으며 주저하지 않고 약탈을 해댔다.
남녀 부족 4000여명은 라바트의 폐허가 된 정착지를 눈여겨 보았다. 이곳을 뉴 살레라 이름 붙였다.
알제의 지브롤터해협을에서 1609년에서 1616년까지, 그들은 446척의 허둥대는 영국 무역선을 사로잡았다.
찰스 1세가 북아프리카에 억류되어 있는 포로들의 문제에 간섭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국왕은 1625년 권좌에 오른 지 몇 개월 만에 젋은 모험가 존 해리슨에게 비밀 임무를 부여하여 저 악명 높은 도시 살레로 파견했다.
저명한 법률가이자 콘월 출신 의원 이었던 헨리 마틴 경은 모로코 술탄과 직접 교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찰스 1세는 해적들과 직접 협상하는 게 더 성공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알제-유럽 노예의 최고 집산지-
역병이 1627년과 1627년에 돌아 모로코를 휩쓸었다.
찰스 1세에게 탄원서를 가까스로 전달할 수 있었다.
국왕은 그들의 탄원서를 읽었지만 행동을 취하기를 거절하였다. 살레의 시디 무하마드왕의 휴전이 어느 정도 예견되는 데다가, 영국의 해안 지방에 대한 공격도 잠정적으로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국왕의 인내심이 마침내 툭 하고 끊어졌다.
1637년 2월 출항..8월 중순에, 윌리엄 레인스보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1637년 가을에 영국을 향해 출발했다.
국왕은 곧 모로코 술탄과 체결한 휴전 협정이 불과 수개월 동아난 지속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국 상인들이 모로코 반란자(해적)들과거래하는 것을 찰스 1세가 중지시키지 못하자, 술탄은 평화 조약서를 찢어버렸다.
1640년대까지 최소한 3000명의 영국 남자들과 여자들이 바르바리로 끌려갔다.
노예 한 사람당 38파운드의 평균 가격을 치러야 했다. 여자 노예들은 훨씬 더 비쌌다. (1392 파운드나 지불했다. 이러한 금액들 어마어마한 거액이었다. 런던 점원의 연평균 수입은 10파운드 였으며, 부유한 상인이라 해도 1년에 40파운드 이상을 벌기 위래서는 운이 좋아야 했다.
모든 국가 가운네 에스파냐가 가장 가공할 만한 공격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어 대서양 연안에 있는 모든 마을의 주민들이 노예로 팔려갔다. 에스파냐 지중해 해안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1672년 마침내 좋은 소식이 희마하게 들려왔다. 지배자 술탄이 죽고, 모로코는 내전에 빠져들게 확실해 보였다.
1672년 4월 14일, 동트기 직전 미나레트 스물여섯살인 부왕 물라이 이스마일을...
술로 흥처앙청 과음을 하며 라마단이 끝난 것을 기념하고 있었다. 술탄 물라이 알 라쉬드는 말을 타고 마라케시의 정원을 달리다가 떨어져 “나뭇가지에 머리를 부딪쳤다.” 죽어 있었다.
물라이 이스마일이 물려받은 유산은 모로코 남부의 모래 바라이 불어대는 타필랄트라는 황무지에 있었다.
물라이 알 라쉬드는 1664년 경쟁관계에 있던 배다른 형제를 죽이고 가문의 땅을 손에 넣었다. 타필랄트의 지배자가 된 다음에 그는 북쪽의 리프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 산악 지대의 영토를 자신의 영지에 보탰다.그리고 페스시市를 함락시키고 메르네스 주민들이 즉시 투항하도록 만들었다.
메크네스는 대서양에서 4~5일가량 걸리는 곳에 있었다.
물라이 알 라쉬드의 승리의 군대는 남쪽으로 분홍색 벽돌로 둘러싸인 도시 마라케시까지 쓸고 내려갔다. 그리고 남부 사하라 정복을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전쟁과 부란의 5년 세월이 지나고 물라이 이스마일은 대부분의 모로코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심지어 살레의 해적들조차도, 이들은 새로운 술탄의 입장에서는 눈의 가시였음이 드러나는데.....물라이 이스마일의 커가는 권력을 염려하여 해적들은 그의지배에 복종하기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물라이 이스마일이 자신들을 무장 해제시킬 의도가 전혀 없음을, 오히려 자신의 사악한 목적을 위해 그들을 이용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페스는 전통적으로 제국에서 가장 윤택한 도시였다. 레오 아프리카누스가 1513년경 이 도시의 모습을 묘사했을 때도 여전히, 페스는 영원하리라는 인상을 주는 거대하고 장엄한 도시였다.
중세의 메레니드 왕들과..16세기 사아딘 왕조 하에서.....
술탄은 특히 지브롤터 해협을 지키고 있는 탕헤르를 공격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끌렸다. 영국은 이 항구를 살레의 해적들을 뿌리뽑는 전초 기지로 쓰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 생각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1680년, 찰스 2세는 조바심이 나서, 이 포로들을 가능한 한 빨리 석방시키고자 물라이 이스마일에게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대사 일행은 1681년 12월에 탕헤르를 출발해서 3주간의 항해 끝에 런던에 도착했다.
그들은 모로코에 있는 영국의 노예에 대해 토론하고자 하는 의햐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고, 국왕과 대신들도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이 문제를 가지고 그들을 압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에 대신들은 모로코인들을 데리고 관광 여행을 떠나, 윈저, 뉴마켓[잉글랜드 동부 서퍽주 서부의 도시],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등을 유람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거대한 환영 인파가 모여들었다. 마치 영국 전체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자신들의 선박을 공격하고 그 선원들을 노예로 끌고 간 나라의 대표들을 보고 싶어 환장한 것 같았다.
맺어진 조약은 1682년 3월에 서명되었는데 국왕이 최악으로 당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보였다.
기독교 군주들에게 지나체게 친절하게 굴었다고 꾸짖었다. 술탄은 대사를 “노새에 매달아 돌과 덤불이 있는 땅에서 19킬로미터를끌 다니라“고 명령했다.
누가 술탄에게 나쁜여자들과 사귀며 흥청망청 시간을 흘려보냈다고 일러바친것이었다.
찰스 2세가 모자를 벗어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나머지 수행원들은 창녀와 놀아났다는비난을 받고 발가벗겨졌다.
물라이 이스마일 역시 다시 예전처럼 열렬하게 반영국적이 되었다. 그는 조약을 포함해서 대사가 영국에서 한 모든 일을 부인해벌T다. 또한 탕헤르의 영국 주둔군이 모로코 포로들을 석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인 노예의 석방을 거부했다. 영국이 이에 항의하자, 물라이 이스마일은 조약을 재협상하기 위애 또다른 대사를 모로코에 파견하라고 요구했다.
찰스 2세는 아랍아러 쓴 친서를 물라이 이스마일에게 보냈지만, 술탄은 “그 어조가 좀더 비굴하게 아첨을 떨지 않았다”고 화를 냈다. 그는 자극적인 비난과 함께 답장을 보냈다.
찰스 2세는 이 모로코 거저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1683년 겨울 동안 그렇게 막대한 비용을 들여 건설했던 탕헤르의 항구와 요새는 체계적으로 파괴되었다. 뒤이은 2월에 마지막 병사들이 철수했다.
앤 여왕이 물라이 이스마일과 합세 하여 세우타 에스파냐 점령지에 대한 영국-모로코 합동 공격을 벌이는 데 흥미가 있다는 암시를 주자, 그들은(영국인 노예들) 석방되었다.
150년 만에 처으으로 단 한 명의 영국인 노에도 모로코 땅에 붙잡혀 있지 않게 되어다.
여왕이 결국 술탄의 세우타 공격에 파병할 것을 거절하자, 그는 살레 해적들에게 영국 선박들이 다시 합벅인 목표물이 되었다고 통보했다.
1714년 모로코는 영국과 평화통상 조약에 서명했다.
앤 여왕이 모로코의 술탄게 약속했던 선물을 결코 보낸 적이 없어 물라이 이스마일은 격분하였다.
톱스엄:영국에서 북아메리카로 출항하는 곳..
해적들이 선호하는 배는 지베크(xebec)였다. 이 배는 작은 데다가 세 개의 돛대를 갖추고 있어서 매우 빨랐다. 또 양옆이 낮아 상대방에게 잘 보이지 않았다.
물라이 이스마일의 첫 번째 조치 가운데 하나는 노예 시장을 패쇄한 것이다. 이는 자비나 인간에 대한 친절 때문이 아니라, 그가 모든 노예를 직접 소유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술탄의 강력한 상비군 15만 명정도 되었는데 이들은... 메크네스에 2만 5000명의 병력이 있었고, 7만 5000명은 살레 남동부에 있는 마할라 주둔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머지는 시골 국경 지대에 있는 카스바에 배치되어 있었다.
1681년 에스파녀의 거점지 마모라 포위 공격에서 사로잡힌 사람들은 가장 비참한 사람들이었다.
펠로우 선장과 선원들(여기에는 페로우 선장의 조카 토머스 펠로우도 끼어있음)이 1716년 가을 노예 우리에 도착했다.
물라이 이스마일의 13만 명의 검은 친위대 병사...
1716년 저점 더 많은 선박이 살레 해적들에게 나포되고 있었고, 이 위협을 억제할 만한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조지 1세는 메크네스의 영국인 노예들이 처해 있는 곤경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아다.
조지 1세 왕실에는 메헤메트와 무스타파라는 두 명의 터키인 고문관이 포함(물론 기독교로 개종한)되어 있었다. . 그들 가운데 한 명은 국왕의 비밀 지갑 관리자였다.
찰스 콘월 제독은 모로코의 주요 항구에 봉쇄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배교자들은 본국 정부가 진행하는 협상 대상에 포함될 만큼 가치 있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술탄의 배교자들은 노예 우리에 수용되어 있던 포로들보다 그 수가 훨씬 많았는게 그건 이들이 물라이 이스마일이 계속해서 권력을 쥐고 있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검은 친위대는 기니에서 창설되었는데 대부분 전투 주에 사로잡히거나 “소금, 철물, 작은 거울 및 베네치아에서 가죠온 기타 노리개”와 교환되어 노예로 팔려온 자들이었다.
술탄의 개인 경호원들은 매우 어렸고-열두 살에서 열다섯 살-그들의 어머니들은 대게 하렘에 거주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대다수는 경멸을 받았지만 한줌의 부자들-에스파냐에서 추방된 유대인의 후손들-은 왕실에서 높은 관직을 받았다. r 가운데 한 명인 모세 벤 하타르는 왕실의 재무상이 되어 물라이 이스마일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술탄의 총애를 받은 또 한 사람은 모로코에서 가장 부유한 요셉 메이마란의 아들이었던 아브라함이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술탄에게 살해되고 어마 지나지 않아서 왕실의 회계 감사관에 임명되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가난했고 폭정에 시달렸다. 유대인들은 멜라(mellah), 즉 소금의 거리로 알려진 게토로 주거가 한정되었다. 모두가 검은 망토를 입고 모자를 써야 했으며 메크네스, 페스, 마라케시의 더러운 거리를 맨발로 걸어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술탄의 노예나 다름업는 대접을 받앗으며, 지속적으로 폭력과 학대를 받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코란』은 사실 ‘꾸르안’이 올바른 발음이다. 꾸르안은 ‘읽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까리아’의 동명사형으로 ‘읽음, 읽기’라는 뜻이다. 끄르안은 20여년 동안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예언자에게 내린 계시를 한데 묶은 책으로, 이 계시의 첫마디가 “읽어라”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648년 3월 19일『코란』이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되었다. 사실 넉 달 전에 영국정부의 상하원은 “이슬람교도 예외가 아니고, 가톨릭도 예외가 아니며, 유대교도 예외가 아니게” 영국에서 모든 종교를 용인해야 한다는 데 찬성표를 던진적 있었다.1649년 5월 7일, 우여곡절 끝에 인쇄소가 다시 작업에 들어가『코란』을 출판했다.
1717년, 사보이의 오이겐 왕자가 터키 군대를 물리침.
1719년 가을에 앤터니 하트페일드 영사는 마침내 이제껏 생존해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확보. 영국 영사는 테투안에 머물고 있었다.
사이먼 오클리- 당대 최고의 이슬람 학자
알제 태수는 알제에 적대적인 선박에 타고 있는 모든 영국 국민을 노예로 만들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찰스 스튜어트는 1721년 5월이 되어서야-런던을 떠난지는 거의 8개월이 지난 뒤-마침내 서명된 조약을 손에 쥐고 테투안의 바닷가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6월 중순이 되어 메크네스를 향해 출발했다.
7울 2일 일요일 3주 동안에 걸친 지친 여행을 마치고..술탄은 바샤 하메트가 세우타가 에스파냐 주둔군을 다루는 데 소홀했다고 크게 야단쳤다. 물라이 이스마일은 바샤의 수해원 가운데 고위 장교들을 전부 소환해서 진짜 죄명과 날조명 죄명을 씌워 차레차례 벌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네 명의 검은 병사들이 공중으로 던져 아래로 꼬라박게 했다.. 검은 친위대 병사들은 땅에 떨어질 때 그의 목이 확실하게 부러지도록 만들었다.
톱질을 당해 몸이 두쪽으로 갈라진자도 있었다.
라마단은 7월 15일에야 겨우 끝이 났고....
살아있던 293명증..단 한명의 배교자도 자유를 찾지 못했다. (스튜어트를 따라 영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스튜어트 사령관의 배는 12월 4일 아침에 런던 다리 밑에 정박했다.
내향적인 인물이었던 조지 1세는 화려한 국가 행사를 멀리 했다. 여행을 할때 마다 그는 “몹시 거북한 상황과 많은 군중”을 피하기 위해 우회로를 선택했다.
조지 1세는 대중 앞에서 영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그는 프랑스어에 더 자신이 있었다)
150기니는 21실링에 해당하는 옛 금화, 아프리카의 기니산 금으로 만들었다.
1723년 10월 후반 , 1727년 3월 말경에 음산한 소문이-곧 사실로 드러나게 된-돌기 시작했다. 물라이 이스마일이 몇 개월 전에 쓰러졌다. 3월 22일 숨을 거두어다.
그의 임종을 지켰던 소수의 조신들은 그가 서거했다는 소식이 절대로 궁전에서 새나가지 않게 하겠다고 맹세해야 했다.
왕실의 엘리트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술탄의 죽음을 모르는 채 온전히 8주가 지나갔다.
아흐메드 에데헤비의 첫 번째 조치는 검은 친위대에게 22만 개의 금화-대단히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진 선물-를 하사한 것이었다.
술탄은 또 국고를 장악하고 메크네스 궁전에 널리 흩어져 있는 모든 금붙이의 목록을 만들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아내들에게서 모든 보석들을 벗겨내 자신의 금고에 보탰다.
아흐메드 에데헤비 술탄은 권좌를 지키기 위해 대단히 신중하게 행동했으나, 그에게는 자기 아버지가 그렇게 오랫동안 권력을 잡을 수 있게 마들어주었던 잔악함이라는 광맥이 부족하다는 게 곧 명백해졌다.
신임 술탄은 또한 식도락이자 예술 애호가로 대부분의 시간을 먹고 마시는 데 바쳤다. 사실상 국사를 저버리게 되었다.
토머스 펠로우와 러셀과 브레이스웨이트에게 아일랜드 출신의 무기 전문가 카르를 소개했을 것이다.
1728년 1월 10일, 영국 뱃사람들을 더는 사로잡지 않겟다고 약속했다. 1721년 조약의 비준이라는 목표를 이루었다.
유혈이 낭자한 혁명이 술탄과 그 후계자를 권좌에서 쓸어내고, 잇따른 혼란이 토머스 펠로우와 모로코에 있는 유럽 노예들과 수천 명의 배교자에게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었다.
검은 친위대가 술탄에게 반란을 일으켜 그의 형 압델말렉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1728년 금요일 모스크에 기도하러 갔을 때, 아흐메드 에데헤비는 너무 술에 취한 나머지 이슬람 관습에 따라서 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그만 포도주를 토하고 말았다.
압델말렉의 첫 번째 실수는 자기 동생이 메크네스에서 도망치도록 내버려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목소리는 높여 검은 친위대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이었다.
검은 친위대가 아흐메드 에데헤비를 다시 지지....
검은 친위대는 또 노예우리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비참한 노예들은(물론 유럽등에서 잡혀온) 검은 친위대에 맞서 자신들을 방어할 총도 칼도 없었다.
압데멜렉은 페스로 달아났다.
전투는 1728년 8월 16일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포등 무기 제도의 최고 기술자는 살레에 있었다.
토머스 펠로우는 정말로 위중한 상태였다.
1728년 12월 중순에 양 진영의 대표가 휴전 협상을 위해 마주앉았다. 놀랍게도, 회의는 즉시 결실을 맺었다. 물라이 이스마일의 오랜 통치 기간 내내 통일되어 있던 모로코를 둘러 나눈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압데멜렉은 페스의지배자로 임명되었고, 반면에 아흐메드 에데헤비는 메크네스에서 술탄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자기 동생을 살해할 계획으로 독침과 권총을 숨겼다.
1729년 3월 5일, 자기 형이 살해되고 고작 나흘 뒤에 그는 갑자기 허망하게 쓰러졌다.
술탄이 죽는 날, 물라이 압달라가 권좌를 넘겨받았다.
펠로우의 아내와 딸 이 사흘 사이에 차례로 죽게 된다.
나라는 전쟁과 도적질로 갈기갈기 찢겼고, 반면에 각 부족의 족장들은 물라이 압달라 술탄의지배에서 벗어나 많은 영토를 강탈해 갔다. 페스 시민들은 야만적인 술탄을 지배자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며 또 다시 들고 일어났다.
서해 세네갈강은 프랑스 노예 상인들은 1630년 대부터 이 강을 개척해왔다.
남쪽의 감비아강 어귀에는 제임스섬에는 영국 노예 무역의 거점이 있었다.
사하라는 가을과 봄 사이의 6개월 동안만 지나갈 수 있었다.
1672년에 설립된 왕립 아프리카 회사는 기니로 떠나는 노예 수집 원정대의 수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흑인 노예 예매는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영국이 저 악명높은 아시엔토 면허(에스파냐가 영국에 향후 30년간 해마다 4800명의 노예를 공급할 수 있도록 한 계약, 에스파냐어로 ‘asiento de negros'라고 하는데 ’흑인 계약‘이라는 뜻이다)를 취득하게 되었을 때 더 탄력을 받았다. 이 면허는 영국 노예 상인들이 14만 4000명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에스파냐계 아메리카에 추가로 공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많은 노예들에게는 북아메리카에 팔려가기 보다는 모로코 상인에게 끌려가는 게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1500만 명이 노예로 팔려갔다.
비록 영국과 네덜란드와 조약을 체결하기는 했지만, 살레 해적들은 종종 이 협정을 위합하는 행동을 했으며 물라이 압달라 술탄은 그들의 행동를 묵인했다.
1737년 탈출할 기회.....
의사 행세를 하며 먹고 사리가 상대적으로 쉽다고 했다. 그리스도가 몸소 병자들을 치료해 주었기 때문에-기독교인들이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으며, 덕분에 수많은 배겨자들이 하이아틀라스산맥의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베르베르인들 사이에서 선한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1738년 7월 30일, 펠로우가 탄 배는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갔다.
7월 31일 스파트텔 곶..
10월 15일 오후 4시, 펠로우가 런던에서 갈아탄 탄 배 팰머스 부두에 정박했다.
영국 뱃사람들이 포함된 가장 불명예스러운 사건 가운데 하난는 1746년에 인스펙터호가 탕헤르 만에서 난파당했을 때 일어났다. 87명의 생존자 모두 포로로 끌려갔다.
1757년에 시디 무하마드가 비어 있는 권좌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선임자들보다는 외국 세력에게 더 개방적인 태도를 보인 영리하고 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왕위 계승을 반대했던 살레와 라바트의 해적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해적들은 제국의 검은 친위대의 공격을 받아 곧 복종하게 되었다.
술탄은 승리의 뒤를 이어 허겁지겁 외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공격의 피해자였던 모든 국가에게 조약을 맺자고 제의했다. 1757년에 그는 덴마크와 평화 조약을 서명했다. 2년 후, 영국 및 네더란드와도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1763년에 스우덴이 선례를 따랐고, 곧이어 베네치아 공화국도 조약에 이름을 올렸다. 거의 결과적으로 모든 유럽 국가가 모로코 술탄과 협정을 체결했다. 프랑스와 에스파냐는 1767년에, 프르투갈은 1773년에, 토스카나, 제노바 및 합스부르크 제국은 몇 년 후에, 1786년에는 새로 독리반 미합중국 또한 휴전에 동의했다.
무하마드 술탄은 179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으 후게자 물라이 술라이만 2세는 자기 아버지가 서명했던 조약드을 인준하기는 했지만, 살레 해적들에게 얼마간 동정심을 드러내 보였다. 신임 술탄은 적대국들과 거래하는 유럽의 상선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려, 19세기 초까지 규모가 많히 축소된 함대를 바다에 내보내기까지 했다.
1816년 여름에-토머스 페로우가 메크네스에서 물라이 이스마일의 노예가 된 지 정확히 100년 후에-그들은 두 번 다시 회보할 수 없는 치명적인 공격을 받았다.
바르바리에 대한 전쟁 요구는 영국의 괴짜 제독 시드니 스미스경에 의해 주도되었다.
빈회의에서 부제로 토론을 조직해 북아프리카의 법 없는 지배자들과 군사적인 최후의 대결을 벌이라고 탄원했다.
지난 3세기 동안 최소 100만 명의 유럽인과 아메리카인을 옳아매었던..백인 노예들이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는 곳은 안제나 알제였다. 이 도시에는 1500년에서 1730년 사이에 계속해서 2만 5000명의 포로들이 있었고, 더러는 그 수가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같은 기간 동안에 약 7500명의 남자가 여자와 아이가 튀니스와 트리폴리에 억류되어 있었다.
막강한 권환을 가진 유럽의 지도자들은 스미스 경의 탄원서를 흥미롭게 읽었지만, 모든 형태의 노예 제도를 비난하는 결의안 하나 달랑 통과 시킨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남부 유럽의 통치자들은 시드니의 싸우자는 외침을 지지하며, 북아메리카에 대해 황소같은 행동을 취해온 미국 정부를 예로 들었다. 아메리카는 불과 몇 개월전 알제에 함대를 파견하여 알제 당국이 모든 미국 노예를 석방하도록 만들었다. 이 자건을 염두해 두고,남부 유럽의 통치자들은 영국 외무상 캐슬레이 경이 바르바리를 공격하는 데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고 비웃었다. 그들은 영국의 무역 경쟁국들이 공격을 받을 때마다 영국이 이익을 보는 까닭에 영국이 해적들의 파괴 행위를 일부러 눈감아주고 있다고 캐슬레이 경을 비난했다.
1816년 여름, 그는 영국 정부를 설득하여 대규모 함대를 지중해에 파견했다.
함대를 지휘할 사람은....지중해 함대의 부제도 엑스머스 경으로 알려진 에드워드 펠류경-토머스 펠로우와 같은 웨스트컨트리 가문의 방계 자손-이었다.
펠류의 가공할 함대는 1816년 8월 말 알제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의 기함 퀸샬럿호를 알제만에 정착시키고 지배자 태수 오마르 바샤에게 비타협적인 메시지를 보냇다. 오마를 한 시간 안에 무조건적으로 항복하고, 노예들을 석방하고, 사로잡아온 유럽인들의 매매를 영원히 단념해야 했다. 태수가 대답을 않자, 펠류는 전쟁을 선언했다. 펠류의 함대가 전투 대형을 펼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는 18척의 전함-일부는 백문이 넘는 거대한 대포로 무장하고 있었다-보유하고 있었다.
첫댓글 참고로 제가 올리는 이글들(스크랩해온것들)은 모두 일일히 친것들입니다. 이것치는데..얼마 걸렸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