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하여 세 가지를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1. 내 곁에 있을 때는 귀한 줄을 모릅니다. 얼마나 좋은 줄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내 곁을 떠나 내가 임의대로 만질 수 없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과 가까이 하는 것을 보면서 귀하게 대접을 받는다든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만드는 장면을 보게 되면 더욱 신경이 써집니다. 전에 느껴보지 못한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한편 질투도 일어납니다. 다시 찾고 싶은 마음도 생깁니다. 그래서 새롭게 접근하려 합니다. 긴밀한 관계를 만들고 있는 두 사람 사이를 떨어뜨리려 애써보기도 합니다. 그 자리를 다시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저러한 방법을 찾습니다.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 합니다.
이혼을 하고 시간이 지나 다시 화해를 하고 결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적인 경우이지만 많지 않습니다. 어렵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혼까지 이르는데 생각도 없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이 고민하여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뒤집는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가 없고서야 힘든 일입니다. ‘키스’가 ‘베스’에게 재결합을 시도하고 요구하지만 거절합니다. 그 사이에 아들 ‘벤’이 있습니다. 거부하면 아들의 양육권을 주장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키스가 유리한 입장에 있습니다. 물론 엄마로서 베스는 결코 아들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민합니다. 지금 또 새로운 남자가 자기 마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들과 남자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2. 세상에서는 ‘운명’이라고 말하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표현합니다. 어느 쪽이든 당하는 사람은 신비한 일입니다. 전장에서 어느 날 사진 한 장을 줍습니다. 두 남녀가 다정하게 나란히 웃음 짓는 모습입니다. 사진만 가지고는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당사자에게는 소중하리라 생각하여 부대원들에게 알아봅니다. 여기저기 알아봐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분명 이 남자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간직하며 그 전장까지 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주려고 애써봅니다. 결국 시간만 지나갑니다. 그러나 버리지 않고 지니고 있습니다. 그 후 그 사진을 지니고 있으면서 자신에게 운이 따르는 듯합니다. 여러 위험한 고비들을 넘나들며 죽지 않고 살아남습니다. 친구가 말해줍니다. ‘이 사진이 네 행운의 징표야.’
제대하여 고국에 돌아옵니다. 과연 이 사진이 자신의 운을 만들어주고 있는 것일까? 남자는 아마도 전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주변에서 찾을 수 없었겠지요. 어쩌면 그 남자의 목숨이 자기에게로 넘어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남은 이 여자에게 감사의 말이라도 전해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찾아보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 바람대로 또 운이 따라옵니다. 여자가 사는 곳으로 갑니다. 이름은 베스, 그 여자의 농장에서 임시 일자리를 얻습니다. 이혼하여 어머니와 아들과 살고 있으며 사진 속의 남자는 아끼던 동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아무튼 어떻게 이 사실을 말해주어야 할지 고민합니다. 물론 전사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떠올리면 더욱 마음 아파하겠지요.
차일피일 하면서 시간은 가는데, 마음이 더욱 착잡해집니다. 그 사이 베스의 어린 아들 벤하고 가까워집니다. 이혼의 아픔을 안고 사는 베스도 남자를 경계하며 지내다가 점점 이 남자 ‘로건’의 삶의 모습에 감동하며 친근해집니다. 아들은 친 아빠와 다른 다정다감하면서도 자신감을 키워주는 이 아저씨가 마음에 듭니다. 베스는 성실하면서 따뜻한 남자인 로건이 점점 좋아집니다. 그런데 그들의 사이가 심상치 않게 발전하는 모습을 한 마을에 사는 전 남편 키스가 지켜봅니다. 베스에 대한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 낯선 남자를 경계시킵니다. 얼마나 안다고, 그 남자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그렇게 가깝게 지내느냐 하는 것이지요.
어느 날 우연히도 로건의 소지품에서 사진을 봅니다.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찾아온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베스에게 알려줍니다. 이 남자가 어떤 꿍꿍이 속셈을 가지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태 나누었던 사랑도 모두 속임수라는 말인가? 배신감에 치를 떱니다. 그리고 당장 떠나줄 것을 요구합니다. 로건으로서는 이미 시간을 놓쳤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작 사실을 알려주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기쁜 소식도 아니고 아픈 소식을 어찌 전해야 할지 고민만 하다가 실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변명을 하겠습니까? 운은 여기까지다 싶지요. 떠날 차비를 합니다. 마음이 아픈 건 어른들만이 아닙니다.
3. 뜻하지 않은 사고로 새로운 운(?)이 만들어집니다. 인생이란 지나고 나면 쉽게 ‘운’이라고 간단히 표현할 수도 있지만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내 사진도 아닌데 뭐 중요하다고 가지고 다닙니까? 정작 당사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내게는 소용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장에서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정말 필요 없는 사진 아닌가요? 그 속의 사진의 주인공을 어떻게 찾습니까? 앞으로 내 살 길을 찾아야지 뭐하려 시간 내어 그 수고를 합니까? 그런데 ‘운명’처럼 마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처럼 터벅터벅 그 길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자기 인생을 만듭니다. 영화 ‘럭키 원’(The Lucky One)을 보았습니다. 2012년 작품이네요.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