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심양, 성경 그리고 봉천 1
4박 5일 코스로 잡은 중국 심양. 패키지여행과는 궁합이 안 맞아 마음먹고 정한 배낭여행이다. 배낭여행은 배짱도 있어야 하지만 우선 말이 통해야 한다. 보디랭귀지라는 게 있지만 그것 믿다가는 정한 시간 의사소통으로 다 허비하고 돌아설 수도 있다. 하기야 말 못해도 재밌게 다닐 방도가 있기는 하다. 연암은 한자 실력이 출중해 먹지에 쓱쓱 써 뭉그적거리면 소통은 물론 가는 곳마다 공짜 술안주에 인기몰이까지 해가며 중국을 누볐다. 아마 그 비범함에는 눈치도 한 몫 했을 거다.
하지만 원숭이도 나무에 떨어진다고 1780년 음력 7월14일 말복 날 폼 잡고 쓴 ‘기상새설(欺霜賽雪)’이라는 글이 잘못 돼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 한바는 있다. 아이고! 글이 샛길로 새는 바람에 여행 첫 글부터 제 갈 길을 마다하고 해찰이다. 연암도 그러했다. 이왕 말이 나온 것 기상새설(欺霜賽雪)부터 설명을 해야 할 모양이다.
연암이 국제 망신을 당한 이 이야기는 열하일기에 수록된 성경잡지 편에 나온다. 성경잡지란 바로 이곳 심양에서 4박5일간 묵은 기록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여행 제목 ‘4박5일 심양록’이 바로 연암의 성경잡지인 거고 성경은 바로 심양을 말하는 거다. 성경잡지 중 기상새설의 일화는 글의 백미라 할만하다. 여행은 모름지기 그런 맛이 곁들여야 흥이 난다. 왜? 잘 모르니까 실수가 나오는 것 아닌가.
연암이 심양의 시가지를 걸을 때 한 점포 문설주에 " 기상새설(欺霜賽雪) " 이란 네 글자가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연암은 마음속으로 " 장사치들이 자기네들의 애초에 지닌 마음씨가 깨끗하기를 가을 서릿발 같고 또한 흰 눈빛보다도 더 밝음을 스스로 나타내기 위함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한 전당포에서 필법을 자랑하기 위해 액자로 다는 현판에 " 欺霜賽雪" 네 자를 썼는데 처음 두자를 쓸 땐 환호하다가 막상 다 쓰고 나니 사람들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다. 그간 잘 나갔는데 이상타싶은 연암, " 이런 궁벽한 곳의 장사치가 어찌 전날 심양 사람들만 할까. 제 깐 놈이 글이 잘되고 못된 것을 어찌 안단 말야" 하고 투덜거리며 가게를 나온다.
다음날 달빛이 훤한 밤에 한 점방에 들어간다. 탁자 위에 남은 종이가 있기에 남은 먹을 진하게 묻혀 "신추경상(新秋慶賞)" 이라 써 갈겼다. 그 중 한 사람이 보고 뭇사람들을 소리쳐 부른다. 연암이 쓴 글씨를 보더니 차를 내온다. 담배를 붙여 권한다. 분주하기 짝이 없다. 내 뭐라하던가. 공짜 차에 담배까지. 여행은 대접 받으며 다닐 때 흥도 절로 난다.
으쓱해진 연암은 주련(柱聯)을 만들어 칠언시 두 수를 써준다. 와아~ 사람들의 탄성소리. 술에 과일접대까지 받은 연암은 갑자기 생각하기를 " 어제 전당포에서 "기상세설"이란 넉자를 썼다가 주인이 영 마뜩찮아 했는데 오늘은 단연코 그 수치를 씻어 보리라" 하고는 점포에 다른 액자로 "기상새설"을 써준다.
그러자 주인이 "저의 집에선 부인네들 장식품을 매매하옵고 국숫집은 아니옵니다." 한다. 아뿔사! "기상새설" 이란 국숫집 간판이었던 것이다. 그 의미도 심지가 밝고 깨끗하다는 것이 아니라 국수가루가 서릿발처럼 가늘고 눈보다 희다는 뜻이었던 것. 비로소 실수를 깨달았지만 연암은 시치미를 뚝 떼고 이렇게 말한다. "나도 모르는 바 아니로되 애오라지 심심풀이로 써보았을 뿐이오." 한마디로 이 사건은 지적으로 잘 짜인 한 편의 꽁트다.
그런 연암과 달리 우리는 정말 무식하다. 한자도 모르고 중국어는 더욱 할 줄 모른다. ‘쎄쎄, 띵호아!’ 말고는 아는 게 없어 당연 역관이 필요했다. 지난해 늦가을 상해를 누빌 때 수고를 한 역관(곽부장이라는 근무처 선배님)을 다시 섭외했는데 전과 달리 배짱을 부리는 바람에 공술을 사고 공을 들였다. 그런 그도 연암 못지않은 술꾼에 끼가 넘친다. 어차피 해찰 하는 거 초장에 한마디만 더하겠다.
아무리 외국어를 잘한다 해도 거기 사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가 나가면 첫날은 아무래도 떨떠름하다싶다. 그와 4번의 중국여행 동행으로 알게 된 경험이다. 그런 그는 아주 특이한 게 있다. 내가 당구를 술 취해서 배운 탓에 술을 마시면 잘 맞고 술 깨면 허당인 것처럼 그 역시도 술이 들어가야 술술 말문이 열린다. 아마 그 역시 취권 배우듯 술 마시고 중국어 공부를 한 것이 틀림없다. 하루 갈 길이 먼 우리는 그 때문 어쩔 수없이 꼭두새벽부터 술 시중을 들어야 했다.
아무튼 우리는 심양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하얼빈, 장춘, 요동, 안산을 다녀오는 일정으로 잡았다. 짧은 시간에 이 코스가 가능한 것은 근래 고속열차 개통으로 시속 3백 km 질주(2013년 연말 개통)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불과 일 이년 년 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된 것이다. 사실 나는 이를 노렸다. 옛 부여 땅, 하얼빈은 당연 안중근 의사를 만나보려는 것이다. 뜻을 기리는 제사장이 필요했다. 일원 중 제일 연장자이신 일흔이 넘은 도박사님을 정사 겸 제사장으로 모셨다. 부사 겸 돈 관리를 맡은 이박사, 사진 등 역사의 검증을 책임지는 현시대 화공 박 박사, 주절주절 떠드는 견마잡이 나, 그리고 연암 박지원 닮은 한량인 김 이사란 비장까지 하여 도합 여섯이 떠나는 유람이다. (이들은 30년 넘게 한 솥밥을 먹었던 직장동료이자 인생 선배들이다.)
그런데 왜 유명 여행사 탐방 주 종목에 끼지도 못하는 그곳을 가고자 한 것일까. 나의 대답은 간단명료하다. 고구려 우리 땅이니까. 그렇다면 고구려 발상지인 집안이나 우리의 영산 백두산으로 가야지 왜 하필 심양이냐. 그건 모르는 소리다. 심양이나 요동(현 요양)이 고구려전성기 때는 전선에 휘날리는 ‘삼족오’ 깃발로 더 휘황찬란했다. 어쩌든 중화 인들은 고구려 하면 질색을 하고 백두산이라고 해도 싫어한다. 그들에게는 곧 죽어도 장백산이다.
그들이 철저히 봉쇄를 하고 소수민족이라고 업신여기며 의도적으로 흔적을 지우려 하는 데 굳이 찾아가 고구려! 고구려! 를 외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우리의 백두산이 아니고 광개토대왕이 우리 역사가 아닌 게 되는가. 역사는 자연스럽게 시간의 굴곡을 쫓아 면면이 마음속에 존재하기에 억지춘향 격 동북공정을 떠들어봐야 지워질 것도 잊혀 질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한 번 이참에 큰 소리로 외치고는 싶다. 독도는 우리 땅, 요동도 우리 땅, 심양도 우리 땅, 만주는 몽땅 우리 땅.
실은 일행들 대부분이 이미 백두산을 다녀온 상황, 색다른 역사 루트가 필요했다. 나는 흉노를 적절히 묘사한 사마천처럼 툭 불거진 볼떼기와 눈두덩, 넓은 이마에 굽은 등(몽고인들도 이 모습과 유사하다)으로부터 영락없는 고구려인들이 여전히 그곳을 지배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 중국 남경 박물관이 소장한 양직공도(6세기 양나라 시대 제작한 사신도)를 보면 백제 사람들은 세련되어 보이고 고구려인은 북방 혈족답게 상체를 벌린 호기어린 모습으로 보이며 신라인들은 촌스럽기 그지없으며 왜(일본)는 옷도 입지 못한 초라한 야만인으로 그려져 있다.
대만 고궁박물원 소장 ‘당염립본왕회도’ 중 고구려·백제·신라·왜국 사신도(왼쪽부터). 한국목간학회 제공예로부터 예맥족(나중 예족과 맥족이 합쳐져 고구려)들은 콩 장류를 즐겨먹고 맥적, 꼬치 등을 잘 구워 먹었다. 뭐 그들 주식이 수렵이니 멧돼지고기가 늘 밥상에 나오지 않았을까. 개성에 ‘설야멱적’은 지금도 알아주는 명물이다. 발걸음 옮기는 족족 마늘을 빻아서 버무린 그을린 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나중에 천산이란 동네에서 우리의 막 된장 닮은 양념에 생파를 찍어 먹는 모습을 보고 나는 환하게 웃었다. 북경이나 상해와는 먹는 습속이 확실히 달랐다. 비록 말은 달랐지만 행색이 영락없는 고구려인들이다. 거기에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흔적, 병자호란의 한 맺힌 상처, 그리고 독립군의 북간도 봉천 길림의 용정 등등.. 우리와는 떼려야 뗄 수없는 너무도 친숙한 만주 땅이고 요동벌이 아니던가.
사실 즐기자고 떠난 통속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나는 마음 한 구석에 기나긴 역사, 과연 국가란 무엇일까 하는 나로서는 다소 부질없는 추상을 떠올리며 알토란같은 글감을 내심 기대하고 있다. 실제 나는 '조선의 꽃 열하일기' 라는 글구멍을 다 채우고 '심양고궁'이란 글 제목 밑에 빈 칸 하나를 남겨 두었었다. 북간도, 봉천, 조선 만주... 심양은 시대 변천사만큼 그 의미를 충분히 갖는 곳이다. “심양으로 가자! 갑시다. ”
이 말은 동네서 친목모임을 할 때마다 내가 술주정하듯 늘 부르짖던 말이다. 그러다보니 정사란 분이 “얘 저러다 병나겠다. 그냥 못 이기는 척 이번에 한 번 따라가 주자.”하여 오게 된 눈물겨운 여행이다. 내 성화에 못이긴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걸려든 척 해준 것인지는 불분명한데 아무튼 나는 그 술주정으로 여행준비를 도맡아 해야했다. 다음 글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이다. 이번 글은 ‘기상새설’ 같은 해프닝으로 여기서 줄여야 할 모양이다. 잘못 짚어 해찰이 너무 심했다.
첫댓글 글 사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