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 제주 여성 독도 지킴이로 남다[제민일보] 2009-11-03 5639자

강인한 제주 여성 독도 지킴이로 남다 145. 독도 출가 잠녀 2009년 11월 03일 (화) 18:58:24 고 미 기자 popmee@hanmail.net 1950년 초부터 독도 출가 물질...10년 가까이 샛굴에서 배고픔 이기며 작업 양식미역 나오면서 발길 줄어, 1970년대 이후 머구리 작업 위한 독도행 계속 일제 강점기 강제 노역 기록 확인 ‘독토 영토의 실효적 지배에 큰 공헌’ 가치 ▲ 독도 노래 가사 속 독도는 외로운 섬이었다. 하지만 그 곳에 억척스런 의지로 삶을 일군 제주 잠녀들이 있었다. 독도에 뼈를 묻은 잠녀가 없다고 하지만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 실제 독도에 살면서 지킴이 역할을 했던 잠녀들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제주해녀박물관은 그 존재감을 독도 출가 잠녀들의 실효지배적 의의로 접근했다. 제주잠녀들이 1953년부터 독도에 들어가서 물질 작업했던 사실과 실제 살고 있는 주민으로서의 역할은 독도 영토의 실효적 지배를 위한 가장 큰 공헌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살기 위해...’ 섬에 가다 취재를 통해 만난 잠녀들의 기억 속 독도는 50년 넘게 같은 형상이다. 기록에 따르면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혼란한 틈을 타 일본이 독도에 상륙하자 울릉도에 거주하는 민간인들과 울릉도 출신 국방경비대를 주축으로 독도의병대가 조직돼 독도 지킴이(1952~1956)를 자청했다. 제주 잠녀들의 독도 물질도 이 시기를 전후해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미역이 좋았던 울릉도로 출가했던 잠녀들을 통해 독도에서의 작업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됐다는 것이다. 경북일보의 독도 관련 기사 등에 따르면 1953년 최초로 박옥랑·고정순 등 4명과 1954년 김순하·강정랑 등 6명이 독도에서 물질을 했다. 이후 1955년 홍춘화·김정연 등 30여명이 독도 바다에 몸을 던지는 등 독도 물질이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1956년 이후에는 한해에 많게는 30~40명의 잠녀가 독도에 입도해 물질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사실은 지난 6월 초 해녀박물관에서 열린 ‘독도 출가 해녀와 해녀 항일 심포지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독도 출가 잠녀들. 사진 위로 부터 박옥랑, 김순하, 홍순화, 고춘옥, 조봉옥 임화순, 고정순, 김공자 강정란, 고순자 할머니. 19살 꽃 다운 나이에 독도 물질에 나섰던 박옥랑 할머니(76·1953년 독도 입도)는 이날 “작업을 할 때마다 순시선이 계속 접촉해 왔는데 일본은 당시에도 독도에 대한 야욕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고 기억을 되살렸다. 본지 기획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도 “돈을 버는 일이라고 부러움을 사기는 했지만 고단했던 기억밖에 없다”며 “나무열매처럼 드랑드랑 붙어있던 전복을 주면 수비대원이 그렇게 좋아했다”고 회상했다. 1955년께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오가며 13년 넘게 작업을 했다는 홍순화 할머니(89)는 “자칭 타칭 울릉도 공동 삼촌으로 불렸다”며 작업한 미역을 판 돈으로 다시 미역 채취허가를 받았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홍 할머니는 “습관처럼 내년에는 안오쿠다하는 말을 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독도였다”며 “물골에 있는 동자석 모양의 산신에 매년 정성을 들인 덕분에 (잠녀들에게) 큰 사고 한번 없었다”고 말했다. 비슷한 시기 역시 독도에서 물질을 했던 조봉옥 할머니(81)와 임화순 할머니(79)는 젖먹이 어린아이까지 데리고 바다를 건넜다. 조 할머니는 “배가 너무 고파서 인근을 지나던 일본 경비선에서 건장을 얻어먹기도 했고, 팔 수 없었던 소라를 찐 감자처럼 삶아 먹었다”며 “너무 힘들어 바다를 보며 운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라고 털어놨다. 고춘옥 할머니(71)의 기억 속에서도 일본 순시선이 나온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잘 갖춰진 보급품을 부러워했던 일이며 미역시세가 좋아 독도 순경을 하기 위해 뒷돈을 썼다는 얘기도 기억해 냈다. 고 할머니는 “독도 바당은 물이 깊지 않고 여가 많아 작업하기에는 좋았다”며 “아무리 그래도 지금 다시 가라면 못갈 것 같다”고 말했다. # 영원한 독도 잠녀로 남다 1959년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독도행을 택했던 김공자 할머니(70)의 기억에 까지 독도에서의 생활은 고단함 그 자체였다. 물이 귀해 물골까지 산을 넘어 오가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파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샛굴에 가마니를 깔고 보리며 차좁쌀밥 등으로 끼니를 이었던 상황이 계속됐다. 독도로 들어가기 위해 7~10시간 발동선을 타는 일도 여전했다. 그때도 해마다 미역철인 3월에 독도에 들어가 5월까지 석달 정도 생활하고 겨울에도 해삼과 천초를 얻기 위해 한 두달 사는 일이 다반사였다. 강정란 할머니(78)는 “힘들다고는 해도 독도 물질을 하기 위해 오메기떡이며 뇌물을 바치기 까지 했다”며 “처음에는 몇 안되던 잠녀의 수가 많아지면서 조를 짜서 물질을 하는 등 규칙도 정해졌고 출신 지역별 다툼도 잦았다”고 회상했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물통이 있어 빨래며 목욕까지 해도 물이 모자라지 않을 만큼 사정이 나아졌다. 독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항아리로 단순하게 만들었지만 간이화장실이며 창고같은 것도 생겨났다. 1970년대 양식 미역이 나오면서 울릉도·독도로의 출가 물질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그 이후 독도를 오갔던 제주 잠녀의 생활은 고순자 할머니(74)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73년부터 1991년까지 18년동안 독도 바다를 헤집었던 고 할머니는 미역이 아닌 머구리 작업을 했다. 제주 잠녀의 능력을 인정한 고 최종덕씨가 제주까지 와 머구리 작업을 할 잠녀를 섭외했고, 그렇게 나이 마흔에 독도 생활을 시작했다. 고 할머니의 기억은 앞서 독도 출가물질을 했던 할머니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물이 귀했던 상황이나 갈매기알을 삶아먹고 독도 수비 활동을 하던 전경대원들과 친하게 지냈던 일은 비슷하다. 하지만 직접 모래를 이고 날라 계단이며 헬리콥터 계류장을 만든 일은 차이가 많다. 모든 잠녀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다. 작업하던 제주 잠녀들 중에는 울릉도에 정착해서 그 쪽 지역민이 된 경우도 적잖다. ‘보제기’소리를 들으며 물에 들었고, 미역이며 해산물을 채취하고 손질해 돈으로 바꾸고, 자식을 키우고....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며 서글퍼 흘렸던 눈물은 바다만큼 푸르다. 제주 잠녀의 독도 출가에 대한 기록은 사실 훨씬 더 오래됐다. 지난 2007년 부산외국어대 김문길 교수가 일본 시네마현의 ‘다케시마 관계철’에서 1941년 제주도에서 잠녀 16명을 독도로 데려가 일을 시켰고 해산물을 채취하게 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제주잠녀가 독도까지 갔다’는 말을 확인할 수 있는 오래된 서류상 기록은 다름아닌 ‘강제 노역’이었다. 묵은 상처를 들춰내는 것이 쉬운 작업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들이 아직 기억할 힘이 남아있을 때,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지금 우리의 사명인 이유다. ▲ 작업중인 잠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