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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현 번역 2020-10-1
鄧麗君家的陝西往事:父母在西安結婚(圖)
덩리쥔 집안의 섬서성의 지난 일; 부모가 서안에서 결혼(그림)
周金柱
주금주
2015年04月13日07:34 來源:華商報
原標題:鄧麗君家的陝西往事(圖)
鄧麗君是華語流行樂壇裡程碑式的人物,雖然英年早逝,但她的歌卻傳遍了全世界。
鮮為人知的是,鄧麗君的外婆、大姨在陝西寶雞生活,直到去世﹔現在,鄧麗君的兩位表哥在寶雞居住,一位表哥在西安居住。
在鄧麗君去世二十年之際,華商報推出“尋找西安鄧麗君”活動,並探訪了鄧麗君在寶雞的親人。
원제:등려군 집안의 섬서성 지난 일(사진)
덩리쥔은 중국어 가요계의 이정표적인 인물이다, 그녀가 젊은 시절에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오히려 그녀의 노래는 전 세계에 널리 퍼져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등려군의 외할머니, 큰 이모가 협서성 寶雞에서 삶이다. 내내 그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덩리쥔(鄧麗君)의 두 사촌오빠는 보계(寶雞)에, 사촌오빠는 시안(西安)에 살고 있다.
등려군의 서세 20 주년을 앞둔 무렵, 화상 신문(華商報)이'시안을 찾은 덩리쥔(尋找西安鄧麗君)' 행사와 보계(寶雞)에 있는 덩리쥔의 친척을 찾았다.
傳奇姻緣
鄧麗君父母在西安結婚
로맨틱한 부부의 인연
등려군 부모는 서안에서 결혼하였다.
“鄧麗君的大姨父和她父親,本來在黃埔軍校是師生關系,最后卻成了‘挑擔’(方言,連襟的俗稱)。”寶雞市委統戰部原副部長兼對台辦主任陶振海接受華商報記者採訪時介紹說。陶振海上世紀八十年代初在寶雞市委從事對台工作,因此對在寶雞的鄧麗君外婆家與在台灣的鄧麗君家交往情況非常熟悉。
덩리쥔의 큰이모부와 덩리쥔의 아버지는 황푸(黃浦)군관학교에서 사제지간이었다가, 마침내 오히려 ‘挑擔'[( 같은 짐을 지는 사이) 즉 방언으로 동서(連襟)의 속칭]이 되었다.보계시 통전부(統戰部) 전 부부장(차관) 겸 대만 담당주임(對台辦主任) 도진해(都振海)가 화상보(華商報)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소개했다.도진해는 지난 1980년대 초에 보계시 위원회에서 대만 관련 업무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보계시의 덩리쥔(鄧麗君) 외가(外家)와 대만의 덩리쥔 일가가 서로 왕래한 사정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陶振海說,鄧麗君的外婆張守鑫有三個女兒,大女兒趙素梅、二女兒趙素桂、三女兒趙素婷。趙素梅嫁給了在黃埔軍校第七分校(位於今西安市長安區王曲街辦)任體育教官的許耀東。上世紀四十年代初,張守鑫帶著兩個女兒從日軍佔領的山東省東平縣逃難到了陝西,投靠大女兒生活。
張守鑫委托大女婿為二女兒趙素桂尋覓佳婿。此時,許耀東作為黃埔軍校教官,可以接觸到許多年輕有為的男青年。經過長期觀察,許耀東看中了當時在黃埔軍校第七分校學習的河北小伙鄧樞,認為他人品和學識俱佳。后經許耀東介紹,鄧樞與趙素桂結識,並相愛成婚,他們住在王曲,並在那裡生下大兒子鄧長安。
도진해는, 덩리쥔의 외할머니인 장수흠(張守鑫)에는 딸 셋, 큰딸인 조소매, 둘째인 조소계, 셋째인 조소정이 있다고 밝혔다.趙素梅는 황푸(黃浦)군관학교 7분교(현 시안(市安)의 장안(張安)구 왕취가(王曲街)에 위치)에서 체육교관으로 일하던 쉬야오둥(許耀東)과 결혼했다.장수흠은 40년대 초, 일본군이 점령한 산둥(山東)성 둥핑(東平)현에서 두 딸을 데리고 산시(陝西)로 피난을 와서, 큰딸과 함께 지냈다.
장수흠은 둘째 딸 조소계를 위해 사위감을 찾아달라고 큰사위에게 부탁했다.이때 허요동은 황포군 교관으로서 젊고 유능한 청년들을 접할 수 있었다.오랜 관찰 끝에 허야동은 당시 황푸군교 7분교에서 공부하던 허베이(河北)성 젊은이 덩추(鄧枢)를 보고, 인품과 학식을 잘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이후 허요동의 소개로 등추는 조소계와 사귀고, 서로 사랑하며 결혼했으며, 그들은 왕곡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큰아들 덩창안을 낳았다.
后來,鄧樞隨部隊由北方轉戰到南方,最后帶著家人從江西到台灣。1953年,鄧麗君在台灣出生,此時她已有三個哥哥,后來又有了一個弟弟。而趙家三姑娘趙素婷,結婚后先去了台灣,后又輾轉定居美國。
1969年,趙家大姑娘趙素梅一家和母親從西安遷居寶雞。至此,趙家母女四人身處三地,一別數十年,音信全無。1974年,母親張守鑫在寶雞去世。老人彌留之際拉著大女兒的手說:“素桂、素婷姐妹倆,我這輩子是見不著了,你們要好好尋找她們的下落,姐妹三個團聚,是我最大的心願……”
“二姨離開西安時我還有印象,他們的結婚照我都還記得。我們一家后來都沒有二姨和小姨的音信,不知道她們在哪生活,有幾個孩子。”今年78歲的許靖國是趙家大姑娘趙素梅和許耀東的大兒子,他還有兩個弟弟。
나중에, 덩추는 부대를 따라서 북방에서 남방으로 전전하였고, 마지막으로 가족을 데리고 장시에서 대만으로 갔다.1953년 대만에서 태어난 덩리쥔(鄧麗君)은 세 오빠가 이미 있었고, 남동생이 나중에 또 태어 났다 . 그리고 조씨 셋째 딸 조소정은 결혼 후 대만으로 먼저 건너갔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1969년조씨 집안의 큰딸 조소매씨 일가와 어머니는 시안(西安)에서 보계(寶鸡)로 이사하였다. 이로써 조씨 모녀
4 사람은 세 곳으로 흩어졌다. 한번 헤어지고 수십년간 소식 한장 없었다. 1974년 어머니 장수흠이 보계에서 세상을 떠났어. 할머니가 임종때 큰 딸의 손을 붙잡고는 ,
"소계, 소정 자매 둘,평생 볼 수 없었으니, 너희들이 두 동생의 행방을 잘 찾아내고, 세 자매가 모이는 게 가장 큰 소원이야."......
"둘째 이모님이 서안을 떠나셨을 때를 나는 아직도 기억에 있어요. 그분들의 결혼사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은 나중에 둘째 이모와 막내 이모의 소식이 없어, 어디 사는지 몇 명의 아이들이 있는지 몰랐어요 .올해 78세인 許靖國은 조 씨 집안의 큰딸인 조소매와 許耀東의 큰아들로, 두명의 남동생이 있다
.
鴻雁傳書
기러기가 소식을 전하다
看到照片和磁帶,才知道鄧麗君是表妹
사진과 오디오테이프를 보서야 덩리쥔이 사촌누이 인걸 알게되다
上世紀七十年代,許靖國在學校教書。當時台灣歌星鄧麗君的歌曲被定為“靡靡之音”,不許公開傳唱,但她美妙的歌聲吸引了眾多年輕人,許靖國也不例外。一次偶然機會,他聽到了鄧麗君的一首《美酒加咖啡》,被深深吸引,經常哼唱。
1970년대 허정국은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였다.그때 대만 가수 덩리쥔(鄧麗君)의 노래는 '퇴폐스런 노래'로 규정되어, 공개적으로 불리지 못하게 됐지만, 그의 아름다운 노랫말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어필했고, 許靖國도 예외가 아니었다.우연한 기회에 , 그는 덩리쥔의《美酒加咖啡; 좋은 술에 커피를 타서 》 '를 듣고는 , 몹시 심취하여 늘 흥얼거렸다.
1981年,一封信從美國寄來。許靖國回憶,當時小姨趙素婷為了尋找母親和大姐,就寫信寄到他家原來在西安的地址,經過街坊鄰裡轉寄到了寶雞。信中趙素婷說,她在美國,姐姐趙素桂在台灣。由於當時海峽兩岸還未“三通”,因此通過趙素婷在美國中轉,趙素梅與二妹趙素桂也通上了信。趙素梅向兩個妹妹告知母親去世的消息,以及自己的生活狀況。趙素桂在信中提起了自己的五個孩子,第四個孩子就是鄧麗君。
1981년 미국에서 편지가 왔다.
許靖國은 당시 막내이모 조소정이 어머니와 큰언니를 찾기 위해 그의 집이 본래 있던 시안(西安)의 주소로 편지를 보냈고, 이웃을 거쳐 보계로 전달되었다고 회상한다.편지에서 조소정은 미국에 있고 누나 조소계는 대만에 있다고 했다.당시 중국과 대만은 '삼통(三通)'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에 있는 조소정을 통해 전달되어서, 조소매와 둘째 여동생 조소계도 편지를 주고받았다.조소매는 두명의 여동생에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소식과 자기의 생활 이야기를 알렸다.조소계는 편지에서 다섯 아이들과 넷째 아이가 덩리쥔이라는 것을 알렸다.
“信裡,二姨說麗君從小就喜歡唱歌,現在成了歌手,去日本學習,還經常去東南亞唱歌。”許靖國說,看到隨信寄來的鄧麗君照片和磁帶,他才驚訝地發現,自己哼唱了多年的《美酒加咖啡》竟然就是表妹唱的。自從聯系上,兩家信件、電話頻繁,而鄧麗君也曾多次打電話向大姨、姨父問好。“其實二姨和麗君都想到寶雞來看望我媽,但因為通行証不便辦理,就拖了下來。”許靖國說,無奈之下,1982年鄧麗君先委托香港歌迷會兩個會員到寶雞看望兩位老人,還捎來一台錄音機、好多鄧麗君的演唱磁帶和她全家向許家問好的錄音帶及兩條鴨絨被等。
"편지에는, 둘째 이모가 , 리쥔이 어릴 적부터 노래 부르길 좋아하였고 현재는 가수가 되어서, 일본으로 공부하러 갔으며 또한 늘 동남아시아에 가서 노래를 한다고 하였다. 허정국은 , 보내온 편지의 덩리쥔 사진과 녹음 테이프를 보고서는 비로소 놀라면서 자기가 수년 간 흥얼 거렸던 《美酒加咖啡》가 뜻밖에 사촌누이가 불렀던 것을 발견하였다 고 했다.연락이 이루어진 뒤로, 두 집 사이에 편지와 전화가 잦았고, 덩리쥔은 이모와 이모부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 사실 둘째 이모와 리쥔 모두 우리 엄마를 보기 위해 보계를 찾으려 했으나, 통행증 발급이 불편해 연기됐다."허씨는, 할수 없어서, 1982년 덩리쥔이 먼저
홍콩 팬클럽 회원 2명에게 부탁해 보계를 찾아 두 노인 만나게 하여서, 녹음기 1대와 함께 덩리쥔의 노래 테이프 여러 개와 , 그의 가족이 허씨 집안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는녹음 테이프 2개와 오리털 이불 2개 등을 보내왔다고 했다.
香港會面
鄧麗君陪大姨游玩,贈送彩電、錄音機
홍콩에서 만나
덩리쥔은 큰 이모를 모시고 관광을 하였고, 칼라텔레비젼, 녹음기를 선사하였다
上世紀八十年代,改革開放的春風吹遍全國,工廠喇叭、廣播、電視上都在播放鄧麗君的歌。得知許家的外甥女就是歌星鄧麗君,鄰居親友都羨慕不已。
而通信久了,趙素梅和趙素桂都提出了見面的想法。當時台灣民眾與大陸親人相見實屬不易,許耀東便找到了寶雞市對台辦,當時在對台辦工作的陶振海核實了他們的親屬關系后,批准許耀東夫妻倆前往香港與親人見面。
1983年,趙素梅、許耀東兩人帶著寶雞特產前往香港。而趙素桂和女兒鄧麗君、小兒子鄧長禧在訂好的酒店迎候親人。分別35年的姐妹倆,一見面就抱頭痛哭。情緒平復后,鄧麗君親切地喊著“大姨、大姨父好”。隨后一個月時間,趙素梅、許耀東在趙素桂與鄧麗君的陪同下,在香港景點游玩。臨走時,鄧麗君給他們買了一台“三洋牌”錄音機和一台彩電,還送給他們一捆自己的磁帶和唱片。
1980년대에는 개혁개방의 봄바람이 전국을 휩쓸었고, 공장 스피커, 방송, tv에서는 덩리쥔의 노래가 흘러나왔다.허 씨 집의 조카가 가수 등려군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웃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연락이 오래되자 조소매와 조소계는 만남을 제안했다.당시 대만 민중이 대륙의 친족과 만나는 것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허요동은 대만 대상 업무를 하는 곳을 찾았고 그때 대만 업무를 하던 도진해는 그들의 친족관계를 확인한 뒤에, 허요동 부부 두 사람이 홍콩으로 가서 친척 면담을 비준하였다.
1983년 조소매,허요동 두 사람은 보계 특산품을 들고 홍콩으로 떠났다. 그리하여 조소계와 딸 덩리쥔, 막내아들 덩창시와 함께 미리 정해 놓은 호텔에서 가족들을 맞았다. 헤어진지 35년 된 두 자매는 만나자마자 통공했다. 감정이 좀 가라앉자 덩리쥔은"큰이모, 큰이모부, 안녕하세요" 라고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이후 한 달 동안 조소매, 허요동은 조소계와 덩리쥔을 대동하고 홍콩 명소를 누볐다.떠날 때, 등려군은 그들에게 산요 브랜드 녹음기와 컬러텔레비전 한 대를 사드리고,또 그들에게 자기의 녹음테이프와 음반을 사 보냈다.
1984年4月底至8月中旬,趙素梅、許耀東應邀第二次到香港。那時,趙素梅患有青光眼,鄧麗君母女倆一再動員和勸說她在香港治療。為此,他們在香港住了近四個月。臨別時,鄧麗君又贈送了很多磁帶和照片。
而第三次在香港會面是1985年10月。趙素梅、許耀東在小兒子許衛國的陪同下前往。就在今年2月,許衛國因哮喘在寶雞病逝。他曾對家人講起,在香港機場與准備前往新加坡的鄧麗君匆匆見了一面。那時鄧麗君一頭烏黑的齊肩發,穿著薄風衣,語氣輕柔地對許衛國說:“我把你叫三哥呢……”鄧麗君還特別叮囑許衛國,在香港好好為大姨治眼疾。見面短短幾十分鐘,鄧麗君給許衛國留下了親和、溫柔的印象。
1984년 4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 조소매, 허요동이 두 번째로 홍콩에 초청됐다.당시 조소매 씨는 녹내장을 앓고 있어, 덩리쥔 씨 모녀는 홍콩에서 치료를 받으라고 설득과 권유를 거듭했다.이 때문에 이들은 홍콩에서 4개월 가까이 살았다.이별을 앞두고 덩리쥔은 또 많은 테이프와 사진을 증정했다.
세 번째 홍콩 만남은 1985년 10월이었다.조소매, 허요동은 막내아들인 許衛國이 함께 떠났다.올 2월에 천식으로 허위국이 보계에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가족들에게 ,
홍콩 공항에서 싱가포르로 떠나려던 덩리쥔을 급히 만났다.그때 까만 머리카락이 어깨에 드리워지고 얇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덩리쥔은 다정하게 : "저는 셋째 오빠라 부를게요....." 덩리쥔은 또 특별히 허위국에게
홍콩에서 이모의 눈병을 잘 치료해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라고 하였다.
만난 지 불과 몇 십 분 만에 덩리쥔은 허위국에게 다정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남겼다.
陝西探親
母親回大陸,鄧麗君身在法國未同行
산서성 친척을 찾아
어머니는 대륙으로 갔으나 덩리쥔은 프랑스에 있어서 동행하지 않았다
那次機場會面,許衛國向鄧麗君發出邀請,希望她來大陸演唱,並說大陸很多年輕人都喜歡聽她的歌。鄧麗君說:“這是好事,好事,我有這個打算,有機會一定來大陸演唱。”
寶雞市委統戰部原副部長兼對台辦主任陶振海說,其實自許衛國1985年10月發出邀請后,鄧麗君就籌劃著大陸之行,並與新華社香港分社取得了聯系。
1986年,陶振海在福建學習時曾提起過鄧麗君是寶雞人的外甥女。1988年,第四屆海峽之聲音樂會籌辦過程中,中央電視台、中國音協等曾聯合發出邀請,以書面邀請函的形式,誠邀鄧麗君赴北京參加音樂會。福建某電台一名記者找到了陶振海,拿出了這份邀請函,希望鄧麗君在寶雞的親友代為傳話。許耀東通過書信形式把這封邀請函寄到了鄧麗君手上。鄧麗君回信說,她也很想到大陸來開演唱會,只是時機還未成熟,請寶雞親人和各地的歌迷朋友略作等候。而鄧麗君也曾多次表示:她想為大陸慈善事業捐款,並想在大陸辦一所婦女學校,免費提高貧困女性的文化。
그 공항에서 만난 허위국은 덩리쥔에게 "대륙에 와서 공연하기를 바란다고 초청했고, 많은 젊은이가 그녀의 노래를 즐겨 들고 있다고 했다.
덩리쥔은 "좋은 일입니다. 좋은 일. 나도 계획이 있어요, 기회가 있으면 꼭 대륙에 가서 노래할게요"
보계시위원회 통전부 부부장 겸 대만 업무주임인 陶振海가 말하기를,
사실 허위국이 1985년 10월에 초청을 제의한 뒤로, 덩리쥔은 대륙 공연을 준비하였고, 아울러 신화사 홍콩 지점과 연락을 하게되었다고 하였다.
도진해는 1986년 푸젠(福建)에서 공부할 때,등려군이 보계인의 조카라고 언급했다.1988년 제4차 해협 소리 음악회 준비 과정에서 중앙방송국, 중국음협 등이 공동으로 초청장을 보냈다.서면 초청하는 형식으로, 성심껏덩리쥔을 베이징 음악회 참가를 초청하였다. .푸젠(福建)의 한 방송국 기자가 도진해를 찾아가 이 초청장을 내밀었다.
허요동은 서신 형식으로 이 편지를 초청하였다.청첩장은 등려군에게 보내졌다.덩리쥔은 "중국에서도 콘서트 할 생각이었는데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며 "보계 가족과 각지의 팬팔을 기다려 달라"고 답장을 보냈다.
등려군이 보계에 있는 친우들에게 말을 대신 전해 주기를 바란다.허요동은 이 초청장을 서신 형식으로 덩리쥔의 손으로 보냈다.덩리쥔은 "그녀도 중국대륙에서 콘서트 할 생각도 있는데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며 "보계 가족과 각지의 팬들에게 좀 기다려 주세요"라고 답장을 보냈다.덩리쥔은 여러 차례 말을 하였는데 : 대륙의 자선사업을 위하여 기부를 하고, 대륙에 여성학교를 세워서, 빈약한 여성의 문화를 무상으로 향상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上世紀八十年代末,隨著政策逐漸放開,許多台灣同胞赴大陸探親。1993年10月,鄧麗君的母親趙素桂在兒子鄧長安、鄧長順和鄧長禧陪同下,由台灣經香港到陝西寶雞探親,與許耀東、趙素梅及外甥們團聚10多天,並去母親張守鑫墓地祭奠,寄托哀思。
當時,陶振海以寶雞市委統戰部副部長兼對台辦主任身份,曾陪同領導去許家看望趙素桂母子四人,並歡迎他們常到寶雞來做客,也希望鄧麗君能到寶雞來游玩,到陝西開演唱會。當時鄧麗君長住法國巴黎,未能同行來陝,但曾多次從法國打電話向寶雞親友問安。十幾天的相聚匆匆而過,離開寶雞時,趙素桂答應回台灣后動員女兒鄧麗君到大陸來唱歌,尤其是陝西。
80년대 말, 점진적 개방 정책에 따라서 수많은 대만 동포들이 친척을 찾아 대륙에 왔다.1993년 10월 덩리쥔의 어머니 조소계는 아들 덩창안(鄧長安)과 덩창순(鄧長順), 덩창시(鄧長熙)가 동반한 가운데 대만에서 홍콩을 거쳐 산시(陝西)성 보계(寶溪)로 친척을 찾아, 허요동(許耀東), 조소매(趙蘇梅)와 조카들을 10여 일 동안 만나고, 어머니 장수흠(張壽鑫)의 묘를 찾아 제사를 드리고, 애도의 마음을 전하였다.
당시, 도진해(陶振海)는 보계시 통전부 부부장 겸 대만 관련 주임으로, 조소계 모자 4명을 만나러, 지도부를 대동하고 아울러 그들이 자주 보계시를 방문한 것을 환영하였고, 또한 덩리쥔이 보계시에 놀러와서, 섬서성에서 공연을 열기를 바랬다.당시 덩리쥔은 프랑스 파리에 오래 머물고 있어서, 함께 협서성에 올 수 없었지만, 프랑스에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보계시의 친구에게 안부를 물었다.열흘이 넘는 만남이 빨리도 지나가서, 보계를 떠날 때, 조소계가 대만으로 돌아가, 딸 덩리쥔(鄧麗君)을 설득하여, 대륙에서 공연을 특히 섬서성에서 하도록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留下遺憾
한이 맺히게
曾計劃在西安開演唱會,始終未能成行
일찍이 섬서성에서 공연을 개최할 계획이 끝내 이루지 못했다.
早在趙素梅最初在香港與鄧麗君團聚時,就多次問她為什麼不來大陸演唱。鄧麗君說,台灣當局曾限制和約束演藝人士不能到大陸演出,否則就吊銷護照、限制出境和株連親友。鄧麗君還對大姨說過,她的三哥鄧長富當時在台灣“國防部”任上校,她怕自己稍有不慎會影響三哥的前程。
不過幾年后,鄧麗君的哥哥來信說,鄧麗君已經做好了到大陸開演唱會的計劃。演唱會分四場,地點分別為北京、上海、廣州和西安,西安這場演唱會便是為了方便寶雞親友來看而設置的。鄧麗君對這條演出路線感到高興,並表示要做些准備工作。但1995年,鄧麗君在泰國清邁猝逝,沒有實現來大陸開演唱會的願望。“其實她也很遺憾,還是沒能來成大陸。”許靖國說。而鄧麗君的大姨趙素梅、姨父許耀東先后於1994年、1998年在寶雞去世。
昨日,華商報記者在鄧麗君表哥許衛國家看到,衣櫃上擺放著那部鄧麗君在香港買來送給大姨的“三洋”牌錄音機。當時鄧麗君贈送的磁帶雖然已經老舊,但放到錄音機裡卻仍能放出聲音。鄧麗君表嫂周麗拿出了幾本珍貴的相冊,其中有鄧麗君在各國演出時的照片,還有她與大姨在香港相聚時的留影,每一張泛黃的照片中,鄧麗君都在微笑。華商報記者周金柱
조소매는 홍콩에서 덩리쥔과 처음 만났을 때, 왜 대륙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느냐고 여러 차례 물었다.덩리쥔(鄧麗君)은, "대만 당국이 일찍이 연예인의 중국 공연을 제한 했다"며 "그렇지 않으면 여권 취소와 출국 제한, 그리고 친지와 연좌죄를 묻는다"고 말했다.덩리쥔은 이모에게 "셋째 오빠 덩창푸(鄧長富)는 당시 대만 '국방부'에서 대령(大校)으로 근무한다"고 하며 " 자칫 잘못 하면 셋째 오빠의 진로에 차질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몇 년 뒤, 덩리쥔의 오빠에게서, 덩리쥔은 대륙에서의 콘서트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다는 편지가 왔다.공연은 4차례로 나누고, 장소는 북경을 선두로, 상해, 광주 그리고 서안으로 하며, 서안 공연은 보계시의 친구들이 오기가 편하도록 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덩리쥔은 이 공연 코스를 기뻐하며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1995년, 등려군이 태국 치앙마이에서 급사했다.대륙에 와서 콘서트를 열겠다는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그녀도 , 대륙에 못 온 게 아쉬웠 했어."허정국이 말했다. 그리고 덩리쥔의 큰 이모 조소매, 이모부 허요동은, 이어서, 1994년, 1998년 보계(寶鸡)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제 화상보(華商報) 기자가 덩리쥔의 사촌 오빠 쉬웨이궈(許衛國)의 집에서, 옷장에 놓여진 덩리쥔이 이모에게 줄려고 홍콩에서 산 '三洋(산요)'브랜드 녹음기를 보았.당시 덩리쥔이 선물한 테이프는 비록 낡았지만 녹음기에 넣으면 소리가 난다.덩리쥔의 사촌오빠 부인인 저우레이(周麗)가 진귀한 사진첩을 꺼냈는데 , 그중에는 덩리쥔이 여러나라에서 공연할 때의 사진 그리고 또한 그녀가 홍콩에서 큰이모와 함께 만났을 때 찍은 희귀 사진이 있는데, 누렇게 변한 사진 마다, 덩리쥔은 늘 미소를 짓고 있다. 화상보 기자 저우진주(華商報記者周金柱)
尋找西安鄧麗君
서안의 덩리쥔을 찾아서
唱鄧麗君金曲 掃二維碼報名
덩리쥔의 히트곡을 부르고 QR코드를 긁어서 등록하고
紀念鄧麗君,可以用歌喉,唱出最難忘的經典金曲﹔
紀念鄧麗君,可以用模仿,扮出你心目中她的模樣﹔
紀念鄧麗君,可以用文字,寫出你與她的難忘往事。
得知華商報舉辦“尋找西安鄧麗君”紀念活動時,鄧麗君的表哥許靖國非常支持,
並表示,鄧麗君的歌能被傳唱不衰,不僅僅家人覺得驕傲,這也是華人之光。
希望現在的年輕人能夠了解一個時代的文化,並傳承精華、攀登新的文藝高峰。
덩리쥔을 기념하려면, 목소리를 이용하여 ,가장 잊을 수 없는 히트 곡을 노래할 수 있다.
등려군을 기념히려면, 모습을 흉내서, 네 마음속의 모습을 표출할 수 있다.
등려군을 기념하려면, 글로서, 그대와 그녀의 잊을 수 없는 지난 일을 쓸 수 있다.
화상보 (華商報)가 개최한 " 서안의 덩리쥔을 찾아서" 기념 행사을 알았을 때,
등려군의 사촌오빠 허정국은 매우 지지하였다.
또 덩리쥔의 노래가 불려지어서, 사라지지 않는 것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중화인의 빛이라고 말하였다.
요즘 젊은이들이 한 시대의 문화를 잘 이해하고, 또한 그 정수를 계승하여 문예의 최고봉에 오르기를 희망하였다.
1.參與“尋找西安鄧麗君”:掃描二維碼關注“華商網”微信,拍攝視頻、照片上傳,並注明“尋找西安鄧麗君”+你的姓名+電話
2.參與“我與鄧麗君的故事”:掃描二維碼關注“華商網”微信,發送你想說的文字,並注明“我與鄧麗君的故事”+你的姓名+電話
3.“華商頭條”新聞客戶端作為華商報唯一官方新聞客戶端將全程展示本次活動,請掃描二維碼下載“華商頭條”APP,將最新最快的活動信息分享給你的親朋好友。김강현 번역 2020-10-1
1. '시안의 덩리쥔을 찾아서' 참여 :“華商網”微信 QR코드 설명서를 스캔하고, 비디오를 촬영하고 사진을 찍어서 UPLOAD 하고, '시안의 덩리쥔을 찾아서' + 당신의 이름+ 전화를 기록한다.
2. '나와 덩리쥔의 옛이야기"참여:“華商網”微信 QR코드 설명서를 스캔하고, 당신이 말하고 싶은 글을 발송하고, '시안의 덩리쥔을 찾아서' + 당신의 이름+ 전화를 기록한다.
3. "화상 톱기사" 뉴스 클라이언트는 화상보(華商報)유일의 공식 뉴스 클라이언트로서 이번 행사를 모두 전시하여,
화상 톱기사 앱"은 QR코드를 스캔하여download하십시오. 최신의 소식을 가장빨리 행사소식을 당신의 친구들에게 나눠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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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번역을 80% 정도 하였습니다
처음 보는 내용이 있네요
추석에 알맞는 내용이라 생각되니 한번 읽어 보세요
때 까만 머리카락이 어깨에 드리워지고 얇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덩리쥔은 다정하게 : "저는 셋째 오빠라 부를게요....." 덩리쥔은 또 특별히 허위국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