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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우리와 함께
시편 119:105-112
주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성령강림 후 제6주일이다. 성령의 특징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내 안에 영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세상 어디에든 충만하시다.
성령처럼 함께 하시는 경우가 또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래서 성경은 진리이다. 오죽하면 2019년 현재 694개 언어로 성경전서를 번역하고, 1,542개 언어로 신약성경을, 1,159개의 언어로 단편성경을 번역했을까?
나는 신학교 시절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말씀이 우리와 함께>라는 책을 구입했는데,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부제가 ‘솔렌티메나 농어민의 복음대화’이다. 이 책을 통해 성경을 읽는 새로운 눈을 떴다. 첫 장은 요한복음 서문인데 참여한 사람들은 한 절씩 읽으며 자기의 묵상과 생각을 말하였다.
먼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 1:1)를 읽었다. 한 동안 침묵이 흐른 후, 펠리뻬라는 청년이 입을 열었다.
“그리스도께선 사람들한테 정말 중대한 소식을 하나님께 받아 가지고 오신 거예요. 그 소식은 당신이 ‘말씀’이셨다는 내용이죠... 그리고 이 참 말씀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겁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씀을 담은 이 책은 1981년에 출판되었는데 바로 5공 군사정권에 의해 금서가 되었다. 성경을 교회의 언어로 목사나 신부가 말하지 않고 농민, 어민 혹은 청년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말하는 것은 금기였다. 정통적인 교회의 해석은 위험하지 않은데, 낮은 자리와 현장에서 복음서를 이해하는 것은 불순했던 모양이다.
성경(聖經)은 하늘이 주신 말씀이다. 성경을 읽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권리이다. 성경은 생명의 양식이요, 영혼의 양식이다. 위험한 것은 성경 그 자체가 아니다. 예수님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위험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마음을 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약속으로, 심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이라는 신령한 양식을 먹으며 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1)
오늘 본문은 시편 119편이다. 우리가 6월 25일 자 ‘가족 톨레레게’에서 읽었다. 그 날은 단 한 장만 읽었는데, 한 장이라도 176절이나 되는 많은 분량이었다. 그런데 참가한 39명 중 열 명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를 선택하였다. 176분의 1이니 대단한 경쟁률이었다. 그만큼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구약시대의 등(燈)은 멀리까지 비추는 랜턴이 아니다. 납작한 접시에 심지가 하나있는 모양이다. 그 심지는 바람이 약하게 불어도 한들거릴 만큼 보잘 것 없다. 그 심지에서 피어 오른 불은 겨우 내 발 앞만 비칠 정도이다. 어둠 속에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디면 그 빛도 딱 한 걸음 거리만큼만 앞으로 이동하였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인생은 캄캄한 어둠 속을 납작한 등잔 하나 손에 들고 조심조심 비추며 나아가는 것과 같으며, 그 빛은 딱 한 걸음 앞까지만 볼 수 있다. 실은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니, 주의 말씀으로 내 길을 비추게 해달라는 간구를 담은 것이다.
성경에서 ‘등과 빛’이란 상징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모든 빛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내 발 앞에 빛이 머무는 그 자리,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나와 함께 하신다. 그 말씀의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그 말씀을 믿고 약속에 따라 살아가자는 권면이다.
시편 119편은 무려 하나님의 말씀의 유익을 176가지로 설명한다. 그만큼 176개의 들을 귀를 통해 들을 수 있다. 얼마나 복된 말씀인지 C.S. 루이스는 시편 119편을 가리켜 ‘최고 실력을 지닌 공예인들이 백성들의 사랑을 얻기 위해 한 솔기 한 솔기 최선을 다해 공들여 수놓은 한 폭의 수예작품과 같다’고 극찬하였다.
구구절절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 계명, 법, 말씀, 증거, 법도, 율례, 판단, 규례, 도’와 같은 단어를 반복함으로써 말씀에 따라 살라고 촉구하고 있다.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111-112).
2)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늘 동행할 수 있을까? 누구나 성경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이며, 가장 소중한 계명인줄 알고 있다. 그런데 대체로 너무 소중한 것이어서 지나치게 아껴서 일까? 잘 읽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의 다음 절은 이렇게 연결된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106-107).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내가 지키려고 맹세하고 굳게 정했다고 고백한다. 무엇보다 고난이 깊을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함으로써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
히브리인들은 율법을 내 것으로 삼으려는 노력을 엄청나게 하였다. 왜 하나님 말씀을 내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가? 성경에서 찾으려는 것은 영적인 선물인 부요함이다. 그 부요함은 세상에서 주지 않는다.
지난 주간에 부산 은천교회를 방문하였다. 작년 5월에 약속하고 1년 2개월 만에 약속을 지켰다. 전화를 받고 건성으로 약속을 했는데, 정말 약속을 지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담임 목사님은 우리교회 자랑은 교회 밥뿐이라고 하기에 아침과 점심 두 끼를 대접받았다.
그 사이에 수요기도회가 열렸는데, 아주 적은 인원이 참석하였다.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찬송 한 장을 부른 후 예정된 본문인 사무엘상 2장 중 엘리 제사장 두 아들의 패역과 심판에 대한 말씀을 교독하였다.
그리고 잠시 묵상 후에 9명이 돌아가면서 한 구절씩 선택해 느낌을 이야기하였다. 정답과 같은 말씀들이었다. 인도자는 ‘집사님은? 권사님은?’ 차례로 물었다. 그러더니 내 옆에 앉은 여성에게 “자기는?”하였다. 나는 그 때까지 사모님이 누군 줄 몰랐다. 자기 아내를 손님에게 소개하지 않는 부산 남자도 있더라.
그런데 “자기는?”이라고 지적받은 그 여성은 제사장의 두 아들이 범죄 한 내용을 마치 자기 집 세 딸의 비행으로 여겨 매우 실감나게 자기 생각을 말하였다. 그렇다. 성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일이다.
독일의 영적 스승으로 평가받는 안셀름 그린은 “성경은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라는 한 사람을 위해 쓰인 말씀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성경이란 가장 소중한 것을 간직하고 있음에도, 그 소중함에 대해 자주 무감각하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인 내가 무엇을 잃고, 흘리고 다니는 지도 모를 정도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요구하는 일을 철저히,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 우리는 나 자신을 투자하여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해야한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새로운 삶을 결심하였다.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지닌 이후로 이제부터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심하면서 버스를 탈 때에 토큰을 두 개씩 넣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몫으로도 지불한 것이다. 잠자리에도 베개를 또 하나 두었다. 인생이 2인분이 되었는데, 그런 믿음 때문에 복되고 풍성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우리는 말씀에 민감해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둔감하고, 무시하고, 외면하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인생에도 위기가 닥치는 것이다.
죄인은 낙엽의 부스럭 소리에도 민감하고, 연주자는 음감에 민감하다. 개는 밤손님의 소리에 민감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내면의 음성에 민감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에 민감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여름밤의 모기 소리처럼, 겨울밤에 울리는 문풍지 소리처럼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3)
언젠가 한 언론인이 투옥되어 독방에 갇히게 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그에게 읽을 성경이 한 권 주어졌다. 그는 전에는 성경을 펴본 적이 결코 없었으나 세 차례나 그것을 통독하였다. 그가 석방되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 성경에서 무엇을 얻었느냐고 물어 보았다. 기대와 달리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라고 대답하였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을 읽되 진실한 방법과 태도가 요구된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는 말씀에 울림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되, 제대로 읽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 성경은 모든 인간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특히 내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성경은 읽기 위한 책이 아니라, 행하기 위한 책이다. 좋은 설교자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고, 그 뜻대로 살기를 기도하는 맘으로 읽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무엇일까? 그 구절을 받아들이면 내 안에 무엇이 일어날까? 나에게 불편한 성경 구절은 무엇일까? 불편한 마음이 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구절이 내 안에서 변화시키고자하는 것은 무엇일까?
성경은 내 삶의 자리에서 읽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드라마’ 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읽혀져야 한다. 말씀은 역사적 상황과 맞물려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체험과 고백을 동반한다.
이번에 내가 부산 은천교회를 방문한 목적이 있었다. 나는 담임 목사를 알지 못했지만 그가 은천교회의 어려운 형편을 들어주고, 소문내 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소개하였고, 마음 약한 내가 걸려들었다. 어쨌든 앞으로 그 교회 형편을 두루두루 소문을 낼 작정이다.
은천교회는 부산의 대표적인 달동네인 아미동에 있다. 아미동은 감천동에 이웃한 산비탈로 지금도 비석마을로 유명하다. 당시 피난민들은 화장터 근처에 있는 일본인 공동묘지의 봉분을 깎아내고 비석을 건축 재료로 삼아 그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
놀라운 것은 내 집을 짓고 살기도 어려운 그런 난감한 시절인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간을 마련해야겠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피란지인 부산까지 떠밀려 왔지만, 역시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1952년에 감리교회 불모지인 부산에 감리교회를 시작하였고, 1955년에는 돌로 예배당을 건축하여 봉헌하였다.
그런데 최근 아미동을 개발하면서 교회 대지 180평 중 절반이 도로로 수용되었고, 돌로 지은 예배당은 잘려나갈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담임 목사는 근대문화유산으로서 예배당 건물의 가치를 동네방네 호소하고 있으나, 아직은 달가운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 최후의 방법으로 남은 대지 위에 돌 예배당을 고스란히 이전시킬 의지를 품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더 좋은 조건으로 이주를 권하지만, 박현규 목사는 현재의 자리를 고집하면서 예배당을 지키려고 한다. 사실 그가 지키려는 것은 교회 부동산이 아니다. 바로 믿음의 유산이고, 고백의 자리이다. 전쟁의 와중에도 가난과 비참이란 삶의 자리 위에 고백한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란 바로 그 믿음인 것이다.
무엇이 개혁인가? 말씀을 회복하는 일이다. 마틴 루터는 교회 중심의 신앙에서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그 신앙의 축을 옮겼다. 말씀 중심의 신앙은 제도적 신앙에서 일상의 신앙으로 그 자리를 옮겼다는 의미다. 내 삶의 자리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다.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일이다.
존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이라는 설교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은 성경을 찾으면서 기다려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하루에 두 번씩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 훈련을 하도록 요청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할 때 당신과 대화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신다. 그 통로는 하나님의 은총이 전달될 수 있는 통로이다.”
나는 10주년을 맞은 색동교회가 무엇보다 말씀을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으로 삼기를 소망한다. 우리 교회의 목표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길 바란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하시길 빈다. 그런 은총을 갈망하는 생활을 통해 내 인생을 최선의 삶, 최고의 삶으로 바꾸어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첫댓글 무엇이 개혁인가? 말씀을 회복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