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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모음집 스크랩 틱낫한 스님의 반야심경
10기/적정심/박춘희 추천 0 조회 78 12.11.10 10: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관세음보살이 한없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적에

오온을 비추어보니 그들의 성품이 모두 비어 있음을 보았느니라.

이렇게 통찰한 뒤 그는 모든 고통을 극복하였느니라.

 

사리불이여,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니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니라. . . . 식 또한 이와 같으니라.

사리불이여, 모든 법이 공으로 표시되니

그들은 생겨나거나 파괴되지 않느니라.

불결하거나 성스럽지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안에서는 색도 없고 수. . . 식도 없고,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정신도 없고,

형상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법도 없고,

안식에서 의식에 이르기까지 어떤 세계도 없고,

무명에서 늙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연기가 생기거나 소멸되는 일이 없고,

고통이 없고, 고통의 원인이 없고, 고토의 멸함이 없고,

멸하는 길이 없고, 이해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느니라.

 

보살은 얻을 것이 없으므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에 장애를 없애느니라. 장애가 없으므로 두려움을 극복하여

어리석은 몽상에서 영원히 벗어나 완벽한 열반을 실현하느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이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완벽하고 바르고, 절대적이 깨달음에 이르렀느니라.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위대한 진언이고, 최고의 진언이고,

비할 바 없는 진언이고, 모든 고통을 없애주는 불후의 진리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이제 그 진언을 말하느니 그것은 다음과 같느니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공존(共存)

만일 당신이 시인이라면 이 한 장의 종이 안에서 구름이 흐른다는 것을 분명히 볼 것입니다. 구름이 없다면 비는 내릴 수 없고,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나무는 자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면 종이를 얻을 수 없습니다. 종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구름이 필수입니다. 만일 구름이 이곳에 없다면 종이도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름과 종이는 서로 공존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종이 안을 더욱더 깊이 들여다보면 햇빛을 볼 수 있습니다. 햇빛이 없다면 숲이 성장할 수 없고 아무것도 자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들조차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햇빛 또한 이 한 장의 종이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이와 햇빛은 서로 공존합니다.

우리는 또한 이 한 장의 종이 안에서 나무를 베어 종이가 되도록 운반해간 나무꾼을 봅니다. 나무꾼이 매일 빵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보고, 빵의 재료인 밀가루를 봅니다. 그리고 나무꾼의 아버지 어머니를 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바라볼 때, 이러한 모든 것들 없이는 한 장의 종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종이 안에 있음을 봅니다. 우리가 종이를 바라볼 때 종이는 우리 지각의 일부이므로 이렇게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당신의 마음과 내 마음이 이 안에 있습니다. 참으로 세상의 모든 것이 종이와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 땅과 비와 광물질, 햇빛과 구름, 그리고 강과 열기 등등 이곳에 있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삼라만상이 이 한 장의 종이와 공존합니다. ‘존재하다라는 의미는 결국 공존을 뜻합니다. 당신은 홀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다른 모든 것들이 존재하기에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이 한 장의 종이처럼 우주의 삼라만상과 공존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종이 안에 공존하는 수많은 요소들 가운데 하나를 그 근원으로 돌려보내려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가령, 햇빛을 해에게로 돌려보내려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 뒤에도 이 종이가 존재할까요? 아닙니다. 햇빛이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햇빛뿐만 아니라 나무꾼 등 다른 요소들이 없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이 종이는 종이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이들 종이 아닌 요소들을 그 근원으로 돌려보낸다면 종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얇은 종이 안에 우주의 삼라만상이 공존하는 것입니다그런데 반야심경은 이와는 반대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듯합니다. 관세음보살은 모든 것이 비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합시다.

 

무엇을 비웠습니까?

관세음보살이 한없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적에 오온을 비추어 보니 그들의 성품이 모두 비어 있음을 보았느니라.

보리(bodhi)는 깨어 있음을 의미하고, 살타(sattva)는 살아 있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보살(bodhisattva)은 깨어 있는 존재를 뜻합니다. 우리는 어떤 때는 보살이고, 어떤 때는 보살이 아닙니다. 관세음(Avalokita)은 이 경 안에 있는 보살의 이름으로, 와서 도울 수 있도록 세상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은 관세음보살이 우리에게 주신 아주 경이로운 선물입니다. 동양에서는 많은 불교 신자들이 그에게 기도하며 그의 이름을 부릅니다. 관세음보살은 스스로 두려움을 초월하였기에 우리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합니다. 관세음보살은 때로는 남자이고 때로는 여자이기도 합니다.

완벽한 이해가 반야바라밀다입니다. 이를 보통 지혜로 번역하지만, 지혜라는 단어로는 그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한 이해는 개울에 흐르는 물과도 같은데, 지혜(知慧)와 지식(知識)은 단단하여 이해의 흐름을 막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지식을 완벽한 이해에 대한 장애로 여깁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것을 진리라고 여겨 그 안에 갇혀 버리면 참 진리가 문을 두드려도 대답을 하지 않는 실수를 범합니다. 우리는 사다리를 오르듯이 이전의 지식을 뛰어 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다섯 번째 계단에 서서 매우 높이 섰다고 여긴다면, 여섯 번째 계단으로 올라설 희망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지식을 뛰어 넘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완벽한 이해는 흐르는 물과도 같이 자유롭지만 지식과 지혜는 단단하여 우리가 이해하는 길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말에 따르면, 이 한 장의 종이는 비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분석에 따르면 이 안에는 우주의 삼라만상이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과 그가 관찰하는 것 사이에 갈등이 있는 듯합니다. 관세음보살은 오온이 비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비어 있다는 것일까요? 중요한 단어는 비었다(empty)’는 것입니다. 비었다는 것은 어떤 것을 비워 버린 뒤의 상태를 말합니다.

만일 내가 물 한 컵을 들고 컵이 비어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그 컵은 비지 않고 물로 가득 차 있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물을 따라 버린 뒤에 다시 묻는다면, 당신은 컵이 비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처럼 비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비워 버린 뒤의 상태를 말합니다. 컵이 완전히 무()의 상태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비었다는 것은 자신이 비운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전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컵에는 물이 없지만 공기까지 비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비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비워졌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이 오온이 모두 비었다고 할 때, 그가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도록 관세음보살이시여! 비워 버린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야만 합니다.

오온(五蘊)이란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를 말합니다. 이들 다섯 요소들은 언제나 우리 개개인 안에 한께 흐르는 다섯 개의 강으로, 몸을 의미하는 색(:형상)의 강, (:느낌)의 강, (:지각)의 강, (:정신구조 또는 의지)의 강, 그리고 식(:의식)의 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이들 다섯 강의 본성을 깊숙이 통찰했을 때 홀연히 이들 모두가 비었음을 보았습니다. 만일 그때 우리가 비워버린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는 그들의 분리된 자아가 비었습니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이는 오온 가운데 어느 것도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이들 다섯 강은 각각 나머지 네 강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서로 공존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몸은 폐, 심장, 신장, 위 등과 같은 장기와 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 가운데 어느 것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고 다른 기관들과 공존할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습니다. 폐는 공기를 공급해 피를 맑게 하고, 피는 폐에게 영양소를 공급합니다. 피 없이는 폐가 살아 있을 수 없으며, 폐 없이는 피가 정화될 수 없습니다. 폐와 피가 공존하는 것입니다. 신장과 피, 신장과 위, 폐와 심장, 피와 심장 등의 관계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관세음보살이 이종이가 비었다고 한 것은 종이의 독립되고 분리된 자아가 비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종이는 홀로 생겨날 수 없고 햇빛과 구름과 나무꾼 등등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공존할 때 비로소 존재가 가능할 수 있기에, 종이라는 분리되고 독립된 자아가 지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분리된 자아가 비었다(無我)는 것은 모든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의 관찰과 우리의 관찰이 서로 상반되지 않은 듯 여겨집니다.

관세음보살은 색, , , , 식의 오온 안을 깊숙이 살펴보았을 때, 그들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요소들과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색이 비었다고 말합니다. 색의 분리된 자아가 비어 있어 우주의 삼라만상이 색 안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 , , 식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해의 길

 

이렇게 통찰한 뒤 그는 모든 고통을 극복하였느니라.

통찰은 그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참되게 이해하기를 바란다면, 단지 서서 바라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들과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느끼는 대로 느끼고 고통도 함께 겪고 기쁨도 함께 즐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파악하고 이해하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 ‘comprehend'는 라틴어 어원인 ’com' 즉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과, 움켜쥐거나 주위 올린다는 의미인 ‘prehendere'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는 의미는 그것을 끄집어내어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것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 이외의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단지 무심한 방관자의 입장에서 한 장의 종이를 바라본다면 참된 이해는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이해는 통찰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구름이 되고, 햇빛이 되고, 나무꾼이 되고, 우리 자신이 그 안으로 들어가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될 때 비로소 종이를 참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다가 얼마만큼 짠가를 알고 싶어 하던 한 알의 소금에 관한 인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된 이해를 원했던 소금은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가 바닷물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 알의 소금은 완전한 이해를 얻었습니다.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 통찰하고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도의 명상입니다.

사념주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무엇인가를 바라볼 때는 통찰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형상()은 형상 안에서, 느낌()은 느낌 안에서, 정신구조(:의지작용)은 정신구조 안에서 명상을 해야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렇듯 반복하신 이유는, 우리가 관찰하고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그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핵 과학자들도 이러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소립자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저 관찰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직접 참가하는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과학자들이 관찰자라는 말보다 참여자라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서로 서로를 이해하려는 우리의 노력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는 남편과 아내는 상대방의 느낌을 알기 위해 상대방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참된 이해를 얻을 수 없습니다. 불교도의 명상이라는 관접에서 이해가 없는 사랑은 불가능 합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 없이는 상대방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사랑한다고 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 이외의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의 명상은 오온에 대한 깊은 통찰이었습니다. 그는 색, , , , 식의 강물 속을 깊숙이 들여다 본 뒤 오온의 본성이 모두 비었음을 발견하고, 홀연히 모든 고통을 극복했습니다. 이러한 해탈에 이르기를 원하는 우리 모두는 비어 있음의 참 본성을 통찰하기 위해 깊숙이 들여다보아야 할 것입니다.

 

  비어 있음()은 영원한 것

 

사리불이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니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니라. , , , 식 또한 이와 같으니라.

색은 물결이고 공은 물입니다. 당신은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도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때때로 서양인들에게 혼돈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서양인들이 그들을 진실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표현 방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서양에서는 동그라미가 무를 나타내는 영(zero)을 의미하지만, 인도에서는 동그라미가 전체, 즉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동그라미는 원만을 상징함) 동그라미는 같으나 그 의미는 정반대입니다. “색은 공이고 공은 색이다.”라는 것은 물결이 물이고 물이 물결인 것과 같습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 또한 색과 다르지 않고, 그것은 수, , , 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오온이 서로를 함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존재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베트남 고전 문학에 12세기의 선승이 지은 게송이 두 구절 있습니다.

만일 무언가가 존재하면 그때 먼지 하나까지도 존재한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전 우주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관념이 우리의 마음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는 또한 우주 전체를 머리카락 끝에 올려놓을 수 있으며, 해와 달을 겨자씨 한 알 안에서 볼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하나가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것은 하나임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현대과학이 물질과 에너지가 하나일 뿐 아니라 물질과 공간 또한 하나라는 진리를 포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비단 물질과 공간이 하나일 뿐아니라, 물질과 공간과 정신이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물질과 공간 속에 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색은 비었으므로 색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색 안에서 우리는 수, , , 식을 볼 수 있습니다. 비었다는 것은 분리된 자아가 비었음으로 의미하고, 결국 그것은 모든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은 두려운 단어가 아니라 훌륭한 단어입니다. ()이 비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한 장의 종이가 비어있지 않았다면, 햇빛과 나무꾼이 그 안에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고 결국 종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수, , , 식의 분리된 자아도 비었으므로 더불어 공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 만물의 근본입니다. 2세기 불교철학자 용수는 공()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존재하므로 공()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은 긍정적인 개념입니다. 만일 내가 비어 있지 않다면 나는 여기에 존재할 수 없을 것이고, 당신이 비어 있지 않다면 당신은 거기에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거기에 있으므로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공()의 의미입니다. 형상()은 분리된 존재가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의 가르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만일 우리가 비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한 덩어리의 물질입니다. 우리는 숨을 쉴 수도 생각을 할 수도 없습니다. ()은 살아 있다는 것, 숨을 내쉬고 들이 마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비어 있지 않다면 살아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은 무상(無上:모든 것이 늘 변해 계속 머무는 것이 없음)하므로 변화 합니다. 무상에 대해서 불평을 해서는 안 됩니다. 무상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영국에서 온 한 불교도가 인생이 너무 허무하고 무상하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는 불교 신자가 된지 5년이 지났으며, 그동안 공과 무상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아이가 아빠, 무상에 대해 불평하지 마셔요. 무상하지 않으면 제가 어떻게 커 갈수 있겠어요?”라고 이야기 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 딸의 말이 옳습니다.

당신에게 옥수수 하나가 있다면, 당신은 그 씨를 땅에 맡기고 옥수수로 자라기를 바랄 것입니다. 만일 무상하지 않다면 그것은 영원히 씨앗으로 남을 것이고, 결국 옥수수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무상은 모든 생명에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무상에 대해 불평하는 대신 무상이여 영원하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무상함으로써 모든 생명이 존재할 수 있으니 무상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중요하고, ()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가능하지 않으므로 ()이여, 영원하라!”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공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도 가능합니다. 모든 오온이 이와 같은 원리를 따릅니다.

 

 

행복의 지속

사리불이여, 모든 법이 공()으로 표시되니 그들은 생겨나거나 파괴되지 않느니라.

법은 사물을 의미합니다. 한 사람이 법이고, 한 그루의 나무가 법입니다. 한조각의 구름이 법이고 햇빛 또한 법이니,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물이 곧 법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공()으로 표시되었다.”라는 말은 모든 사물은 공()을 그 자체의 본성으로 지니고 그러한 까닭으로 만물이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즉 어느 것도 생겨나지 않으며, 어느 것도 죽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관세음보살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매일 탄생과 죽음을 봅니다. 한 생명이 태어날 때는 출생 신고가 이루어지고, 한 생명이 죽은 뒤에는 사망 신고가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증명서들이 탄생과 죽음의 존재를 확인해 줍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은 탄생과 죽음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이 진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깊숙이 들여다보아야 합니다당신이 태어난 날짜, 즉 당신의 생일은 언제인가요? 그 날짜 전에 당신은 이미 존재했던가요? 태어난다는 것은, 당신이 무()에서 무엇인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당신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존재했나요?

알을 낳으려고 하는 암탉을 생각해 봅시다. 그 암탉이 알을 낳기 전에도 알은 이미 존재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것은 암탉의 뱃속에 있었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로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에 이미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습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태어난다는 것은 당신이 무()에서 무엇인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것이 이미 존재했다면 그것은 태어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른바 당신의 생일이라고 불리는 날은 당신의 지속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생일을 축하할 때 행복한 지속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태어나는 날부터 만 1년이 지나야 한 살이 되지만, 동양에서는 태어나는 날 이미 한 살을 먹습니다. 그것은 이미 9개월 전에 어머니의 뱃속에서 생명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문제와 마주칩니다. 9개월을 거슬러 올라간 그전에도 우리가 존재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올바른 이해의 첫걸음을 내딛은 것입니다. 우리는 잉태되기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습니다. 반은 아버지 안에서, 반은 어머니 안에서 존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에서 결코 어떤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어떤 것도 무에서는 결코 어떤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어떤 것도 무에서 나온 것은 없습니다. 구름을 말하면, 그것은 구름이 되기 전에 물이었습니다. 어쩌면 강물로 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무에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만물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지속할 뿐입니다. 좀더 먼 과거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안에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명상을 하며 전생에 내가 구름이었음을 봅니다. 내가 전생에 구름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도 내가 구름이기 때문입니다.

구름 없이는 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순간, 나는 구름이고 강물이고 공기입니다. 그러므로 전생에 나는 구름이고 강물이고 공기였습니다. 나는 바위였으며, 물속의 광물질이었습니다.

이것은 윤회에 대한 믿음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대지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기체였고 햇빛이었고, 물이었고, 버섯이었고, 식물이었습니다. 우리는 단세포 동물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전생에 한 그루의 나무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물고기였고, 한 마리의 사슴이었으며, 새였고 물고기였습니다. 이것은 미신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전에 구름이었고 사슴이었으며, 새였고 물고기였습니다. 우리는 전생에서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 그들이 됩니다.

이러한 이해는 비단 탄생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것도 태어날 수 없으므로 어느 것도 죽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세음보살을 가르침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유에서 무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인가를 완전한 무의 상태로 돌릴 수 있을지 한 장의 종이로 되돌아가 생각해 봅시다. 자칫 우리는 종이에 불을 지펴 태워 버리면 그것을 무로 만들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종이를 태울 때 피어나는 연기는 대기 속으로 퍼져 나가 그대로 존재합니다. 그때 생기는 열은 우주 안으로 들어가 다른 것 안으로 침투하니, 그 열이 종이의 다음 생이 됩니다. 남아 있는 재는 종이의 내생에 흙이 되거나, 구름이나 장미꽃이 될지도 모릅니다.

한 장의 종이가 결코 태어나지도 않으며, 죽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매우 조심스럽게 주의 기울여야합니다.

그것은 다른 현상을 취할지언정, 결코 무()로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당신과 나를 포함한 사람과 만상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사의 영향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 부모가 태어나기 전의 우리 얼굴은 무엇이었을지 명상해 봅시다. 이러한 명상은 스스로를 알기 위해 떠나는 여행일 수도 있는데, 잘만 해낸다면 전생뿐만 아니라 내생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철학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실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뿐입니다. 이제 당신 손을 보면서 언제부터 이 손이 존재해 왔는가?”라는 물음을 던져 보십시오. 깊은 명상을 통해 손을 바라본다면, 그것이 30만년보다도 훨씬 더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조상 대대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 이 순간에도 당신의 손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볼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지속할 뿐입니다.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습니다. 만일 단 한번이라도 죽었더라면, 우리의 손은 이곳에 없었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과학자인 라부아지에는 어떤 것도 창조되거나 파괴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반야심경의 가르침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최고의 과학자라 할지라도 먼지 하나, 원자 하나를 무()로 환원 시킬 수는 없습니다. 에너지의 한 형태는 오직 에너지의 다른 형태가 될 뿐입니다. 만물은 결코 무()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비록 먼지 한 톨일지라도 말입니다. 흔히 인간은 먼지에서 나와 먼지로 돌아간다고 말하는데, 이 말이 그리 유쾌하게만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먼지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은 매우 귀하고 먼지는 전혀 가치가 없다는 편견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조차도 먼지 한 톨이 무엇인지를 단언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아직도 미스터리일 뿐입니다. 먼지 한 톨 속의 원자가 그들의 전자와 더불어 핵을 1초에 18만 마일이나 도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활기찬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먼지 하나로의 희귀가 아주 신나는 모험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먼지 한 톨은 무엇인가?”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닙니다. 뿐만 아니라 먼지로 되돌아간다는 인간까지도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우리는 20년 또는 그 이상 오랫동안 함께 지내 온 사람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고도 남는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바로 옆에 앉히고 운전을 하면서도 다른 생각을 합니다. 옆에 있는 그 사람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습니다. 참으로 오만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곁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은 너무나 신비롭습니다. 함께 지내 온 세월의 두께가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는 착각을 강요하기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관세음보살의 눈으로 그를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머리카락 하나는 우주일 것이며, 궁극적인 실체 안으로 들어가는 문일 것입니다. 먼지 한 톨이 바로 부처님의 왕국이고 정토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만일 스스로가 바로 먼지 한 톨이며 모든 생명의 공존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이러한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겸허해야 합니다. “당신이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아는 것의 시작이다.”라는 중국의 격언처럼 말입니다.

어느 가을날 공원에서 나는 아주 작지만 아름다운 하트 모양의 나뭇잎에 대한 깊은 명상을 했습니다. 가지 끝에 겨우 매달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은 붉은 잎사귀와 오랜 시간을 보내며 수많은 물음을 던졌습니다. 마침내 나는 그 나뭇잎이 나무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보통 나무가 어머니이고 잎사귀가 자손이라고 여기지만, 나뭇잎을 바라보는 동안 잎사귀 또한 나무의 어머니일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뿌리가 빨아들이는 액은 물과 광물질로서 나무의 영양 공급에 충분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그 액을 나뭇잎에 분배하고, 그것을 받은 나뭇잎은 햇빛과 증기의 도움을 얻어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한 뒤 다시 나무로 돌려보내 충분한 자양분을 얻게 합니다. 그러므로 잎이 나무의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줄기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쉽게 교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뱃속에 있을 때 어머니와 연결된 탯줄이라는 매우 긴 줄기를 가졌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줄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산소와 영양분을 전해주던 그 줄기는 불행하게도 우리가 생일이라고 부르는 그 날 끊어졌고, 대신 독립이라는 환상을 주었습니다.

이는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랜 세월 우리는 어머니에게 의지해 왔으며, 낳아주신 어머니 외에도 수많은 어머니들이 우리를 보살펴 왔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리가 밟고 있는 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어머니인 대지와 연결된 수많은 줄기가 있습니다. 우리에겐 구름과 연결된 줄기도 있습니다. 만일 구름이 없다면 마실 물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70퍼센트가 물로 이루어진 우리 몸에는 분명 구름과 연결된 줄기가 있습니다. 강이나 숲이나 나무꾼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우주의 삼라만상과 연결된 수많은 줄기가 있고, 그로 말미암아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도 줄기가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곳에 없다면 나도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확연한 사실입니다. 만알 당신이 아직도 그러한 줄기들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더욱더 주의 깊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분명히 줄기를 발견할 것입니다. 이는 결코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므로 당신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나는 그 나뭇잎에게 가을이 되어 다른 잎들이 다 떨어지니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나뭇잎은 아닙니다. 봄과 여름 동안 열심히 일해서 나무에게 양양을 공급했으니, 저의 대부분은 나무 안에 있습니다. 제 모습이 오직 이것뿐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잎사귀가 된 것은 아주 작은 일부이고, 저의 전부는 나무입니다. 저는 제가 나무 안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다시 흙으로 되돌아가도 계속해서 나무에게 양분을 제공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가지른 떠나 땅으로 떨어질 때, 나무에게 손을 흔들며 금방 다시 만납시다.’라고 말할 것입니다.”라는 대답을 들려주었습니다.

문득 나는 나뭇잎을 통해 반야심경에 담긴 지혜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나뭇잎에 대해 말할 때는 나뭇잎이 삶이라고 말하는 대신, 나뭇잎 안에서의 삶, 그리고 나무 안에서의 삶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오직 지속하는 삶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것을 내 안에서나 나무 안에서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잠시 후 바람이 불어 나뭇잎은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떨어지는 동안 그는 즐거운 몸짓으로 춤을 추며 기꺼이 나무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자신이 이미 나무 안에 있음을 알았기에 그의 모습은 너무도 행복해 보였습니다. 나는 고개 숙여 합장을 올렸습니다. 어느 것도 태어나거나 죽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나뭇잎을 통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구름도 나뭇잎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을 유유히 거닐던 구름은 마침내 비가 되어, 떨어져 내리면서 노해하고, 미시시피 강의 일부가 되거나 아마존 강의 일부가 되며, 채소 위로 내리거나 우리 몸의 일부가 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모험이 그에게는 매우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또한 구름은 자신이 비가 되어 대지위로 떨어져 내리면, 바닷물의 일부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두려워할 뿐입니다.

바다 위의 파도에는 시작과 끝, 즉 생과 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파도가 비었다고 말했습니다. 파도는 물로 가득하지만 그의 분리된 자아는 비어 있습니다. 파도는 바람과 물의 도움을 얻어 생겨난 형상입니다. 만일 파도가 밀려 왔다 사라지는 자신의 형상에만 집착한다면, 그는 삶과 죽음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지만 파도가 그 자신을 물의 일부라 여기고 물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면, 그는 생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파도는 밀려 왔다 사라지지만 물은 생사를 초월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나는 만화경을 가지고 놀곤 했습니다. 하나의 원통에 흐린 유리를 몇 개 끼워 조금씩 돌리면 수많은 경이로운 광경들이 나타났습니다.

손가락으로 조금씩 움직이면 그때마다 한 무늬가 사라지고 새로운 무늬가 나타나곤 했는데, 먼저 본 무늬가 사라지더라도 나는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고, 곧 또 다른 광경이 나타날 것을 알았기에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파도며 물과 하나가 되어 물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높이 치솟았다 사라지고 밀려 왔다 밀려가는 형상 따위는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그러한 장면에 대한 추축이나 내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가 체험하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명상을 통해 그렇게 할 수 있는데, 단지 선방(禪房) 안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요리를 하고 집안을 청소하거나 산책을 하는 동안 공()의 본성 안에서 사물을 바라보도록 노력하기 바랍니다. ()은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이지 결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가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은 한없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공()의 본성을 본 뒤, 홀연히 모든 두려움과 괴로움을 극복했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평화롭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죽어갈 수 있었던 것은 삶과 죽음이 바다 위의 파도나 만화경 속의 무늬와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구름과 물과 파도와 나뭇잎과 만화경, 더 나아가 우주의 삼라만상에서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사물을 주의 깊고 세심하게 들여다본다면 공존의 신비를 이해하여, 더 이상 삶과 죽음의 공포에 얽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생사는 단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관념에 불과 하므로 진리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상하(上下)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손이 위로 향하면 상방(上方)이고 그 반대면 하방(下方)임을 확신합니다. 천당은 위고 지옥은 아래입니다. 그러나 같은 순간 지구 반대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반대이므로 모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상하(上下)의 관념이나 생사의 관념은 우주에는 적용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계속 과거에 대한 명상을 해 나간다면, 당신이 언제나 이 자리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나뭇잎 안으로 들어가, 나뭇잎과 하나가 되고 파도가 되어, 당신의 본성이 밀려 왔다 사라지는 형상이 아니라 물임을 깨닫는다면,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깊은 명상을 통하면 생사에서 해탈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일도 여전히 존재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매우 세심한 주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내가 꽃이나 나뭇잎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상 속에서라도 나는 당신께 정겹게 인사를 건넬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나를 알아보고 환한 미소를 보내 준다면 그때 나는 매우 행복할 것입니다.

 

장미와 쓰레기

불결하거나 성스럽지 않으며

불결하거나 성스럽다. 더럽거나 깨끗하다. 이들은 우리가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 관념들입니다.

방금 꺾어서 꽃병에 꽃아 놓은 장미는 성스럽습니다. 냄새는 향기롭고 깨끗하고 신선합니다. 그 반대가 쓰레기통입니다. 냄새가 고약하며 썩은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이 오로지 그 표면만을 보았을 때입니다. 조금만 더 깊이 살펴본다면 겨우 5~6일 후에는 장기가 쓰레기의 일부가 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닷새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장미에 대한 깊은 명상이 이루어진다면 당장에라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쓰레기통에 대해 깊은 명상을 하고 나면 몇 달 뒤에는 그것이 아름다운 장미로 피어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보살의 눈을 가진 훌륭한 정원사라면 장미를 보면서 쓰레기를 볼 수 있고, 쓰레기를 보면서 장미를 볼 수 있습니다. 장미와 쓰레기는 공존합니다. 장미 없이는 쓰레기가 없고 쓰레기 없이는 장미가 없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간절히 필요로 합니다. 장미와 쓰레기는 동등합니다. 쓰레기도 장미만큼 소중합니다. 불결함과 성스러움이라는 개념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결국 공존의 개념으로 되돌아옵니다.

중아함경에는 어떻게 세상이 생겨났는가에 관한 짧은 구절이 있습니다.

매우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우나 그 뜻은 아주 깊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느니라.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느니라. 저것이 저러하므로 이것이 이러하느니라.” 이것이 만물의 기원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마닐라에는 나이 어린 매춘부들이 많은데, 그들 중에는 채 열 다섯 살도 안 된 소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불행한 소녀들입니다. 그들은 창녀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모가 가난하기 때문에 돈을 벌어 집으로 보내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나왔습니다. 물론 이는 단지 마닐라에서뿐만 아니라, 베트남 호차민이나 뉴욕, 파리에서도 마찬가질 것입니다.

도시가 시골보다 돈 벌기 수월한 것이 사실이므로, 그 소녀들이 어떻게 도시로 나왔는지는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간악한 자의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는 꾐에 빠졌을 것입니다. 소녀들은 나이가 어려서 세상 물정에 어두우므로 쉽게 동의했을 테고, 그렇게 해서 매춘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소녀들은 자신이 더럽고 불결하다는 생각을 가져 커다란 고통에 빠집니다.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예쁜 옷을 입고 있는 같은 또래의 소녀들을 보면 그러한 감정은 더욱더 깊어져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나락에 빠지고 맙니다.

만일 관세음보살이 그 어린 소녀들을 만난다면, 스스로가 처한 상황과 자신을 깊이 돌아보라고 한 뒤 다른 사람들이 저러하므로 소녀들이 이렇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저것이 저러하므로 이것이 이러하느니라.”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옷을 입었다고 자랑스러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들의 생활이 그러하므로 소녀들의 생활이 이러한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깨끗한 손을 지닌 사람은 없습니다. 그 소녀들이 우리 책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삶이 이러하므로 마닐라 소녀들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어린 매춘부의 삶 속에는 매춘부가 아닌 사람들의 삶이 있고, 매춘부가 아닌 사람들과 우리들의 삶 속에는 매춘부의 삶이 있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는 것입니다.

부와 가난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부유한 사회와 결핍된 사회가 공존합니다. 한 사회의 부()는 다른 사회의 가난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종이 한 장의 경우와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우 조심스럽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모든 사물은 그 자신 이외의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공존할 수밖에 없고, 주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책임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그 소녀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내 딸아, 네 자신을 바라 보거라. 그러면 모든 것을 볼 것이니라. 다른 이들이 저러하므로 네가 이러하느니라. 네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니 고통스러워하지 마라.”

오로지 공존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이 그 소녀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 어떤 것도 소녀들을 자유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분리해 놓은 선악(善惡)의 관념 안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선하기만을 원하고 악은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는 선이 선 아닌 요소들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탓입니다. 당신이 사랑스러운 나뭇가지를 하나 쥐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것을 구별하지 않는 마음으로 바라볼 때는 아름다운 가지로 보이겠지만, 그것을 구분하여 이쪽은 왼쪽이고 저쪽은 오른쪽이라고 하는 순간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만일 당신이 왼쪽만을 원하고 오른쪽은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 즉시 곤경에 처합니다. 왼쪽 없이는 오른쪽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만일가지의 왼쪽만을 원하여 나머지 반을 끊어 버린다면, 그 즉시 남아 있는 끝이 새로운 오른쪽이 될 것입니다. 왼쪽이 있으면 반드시 오른쪽이 존재합니다. 낭패스러운 마음에 같은 행동을 수없이 되풀이해 보아도, 그곳에는 언제나 오른쪽이 남게 됩니다.

선과 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선만이 존재할 수도 없고, 악이 없어질 수도 없습니다. 악이 있으므로 선이 존재하고, 선이 있으므로 악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영웅에 관한 연극에서, 영웅이 빛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악역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부처님이 되기 위해서는 악역을 하는 마라(mara)가 필요합니다. 부처님은 한 장의 종이처럼 비었고, 부처님이 아닌 요소로 이루어지셨습니다.

부처님이 아닌 우리들과 같은 존재가 여기에 없다면, 부처님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른쪽이 없다면 왼쪽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항상 부처님께 합장하고 경배하며 다음과 같은 게송을 암송합니다.

절과 경배를 받드는 이나

절과 경배를 받는 이

모두가 비어 있기에

우리의 친교는 완전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오만은 아닙니다. 만일 내가 비어 있지 않다면 부처님께 경배할 수 없고, 부처님 또한 비어 있지 않다면 나의 절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부처님과 나는 공존합니다. 부처님은 나와 같은 부처님 아니 요소로 이루어지셨고, 나는 부처님 같은 나 아닌 요소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경배를 받드는 이와 받은 이는 모두 비어 있습니다.

서양인들은 오랜 세월을 악에 대한 문제로 고민해 왔습니다. “어떻게 악의 존재가 가능한가?”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이러한 문제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비이원론(非二元論)적인 각도에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에 대한 관념이 존재하면, 반듯이 악에 대한 관념도 존재합니다. 부처님이 부처님이시기 위해 마라가 필요했으며, 마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신이 이런 식으로 실체를 감지하면, 장미보다 쓰레기를 천시하지 않고 그들 모두를 소중히 여길 수 있습니다.

하나의 나뭇가지가 있으려면 왼쪽과 오른쪽이 모두 필요합니다. 어느 한쪽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만일 당신이 어느 한쪽만을 원하면 나머지 반을 없애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랜 냉전 기간 동안 미국은 소련을 악의 편으로 여겨 왔습니다. 심지어 어떤 미국인들은 그들 홀로 존재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왼쪽 없이도 오른쪽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소련인 들도 그와 똑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악의 편이므로 세계의 평화를 위해 그들을 없애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사물을 오직 이원론적인 시각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미국을 깊이 들여다보면 소련을 볼 수 있고, 소련을 깊이 들여다보면 미국을 볼 수 있습니다. 장미에서 쓰레기를 볼 수 있고, 쓰레기에서 장미를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냉전 기간 동안 그들은 자신을 장미라고 여기고 상대방을 쓰레기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습니다.”라는 가르침이 분명해집니다.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생존을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이는 참으로 간단한 이치입니다. 생존이란 일부가 아닌, 인류 전체의 생존을 의미합니다. 비단 미국과 소련만이 아니라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쪽이 살아남지 못하면 다른 쪽도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나라가 부채를 갚지 못한다면 부유한 나라가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만일 가난한 나라를 돌보지 않는다면 부유한 나라의 안녕이 지속 될 수 없고, 그들의 생활수준을 계속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악을 제거하려는 바람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은 선의 편에 서 있고, 상대방은 악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기는 무척 쉽습니다. 하지만 부는 가난으로 이루어졌고, 가난은 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실체에 대한 명백한 견해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고 멀리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소련 인이나 미국인이나 그저 같은 인간일 뿐입니다. 통계학적으로 인간을 연구하거나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일은 오직 정부나 정치인들에게만 맡길 수도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시작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가난한 자의 두려움과 희망을 이해한다면, 우리 자신의 희망과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체에 대한 통찰만이 우리를 구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헤어질 수 없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장미가 쓰레기이고, 매춘부 아닌 사람이 매춘부입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이고 불교인이 비불교인입니다. 비불교인은 불교인일 수밖에 없으니 이는 우리가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매춘부 소녀들의 해탈은 그들이 공존의 본성을 볼 때 찾아올 것입니다. 그 소녀들은 자신이 온 세계의 열매를 지니고 있음을 알 것이고,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소녀들을 보며, 우리가 그들의 고통과 온 세계의 고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항상 달()인 달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우리는 죽은 뒤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걱정을 합니다. 우리는 먼지로 돌아갈 것이라고, 다시 말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먼지 하나에는 우주 전체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태양처럼 거대하다면, 인간이 먼지를 바라보는 시각처럼 그저 무의미한 눈동자로 대지를 바라볼지도 모릅니다.

크거나 작다는 생각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관념에 불과합니다. 모든 사물은 그 자신외의 모든 사물을 포함합니다. 이것이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원리입니다. 한 장의 종이 안에는 햇빛과 나무꾼과 숲을 비롯한 모든 것이 존재하니, 한 장의 종이가 작다거나 무의미하다는 생각은 그저 관념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한 장의 종이조차도 파괴할 수 없습니다. 간디나마틴 루티킹 목사를 암살한 자들은 그 두 사람을 무()로 환원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계속 우리와 함께 있으며 오히려 전보다 더 가까이 있으니, 그들이 다른 형상으로 끊임없이 지속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존재를 지속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거나 줄어드는 것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달과 같습니다. 달은 찼다거나 줄어들더라도 항상 달일 뿐입니다.

부처님은 부처님이 아닌 요소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공()안에는 색도 없고 수, , , 식도 없고,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정신도 없고, 형상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법도 없고, 안식(眼識)에서 의식(意識)에 이르기까지 연기가 생기거나 소멸되는 일이 없고, 고통이 없고, 고통의 원인이 없고, 고통의 멸함이 없고, 멸하는 길이 없고, 이해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느니라.

이 구절은 오온이 모두 비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각자 서로 다른 온()들과 공존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십팔계(十八界)가 열거 됩니다. 먼저 여섯 개의 감각기관인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정신이 있습니다. 다음은 여섯 개의 대상인 형상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법이 있습니다. 형상은 눈, 소리는 귀, 냄새는 코, 맛은 혀, 감촉은 몸, 법은 정신의 대상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들 열두 개 사이의 접촉인 여섯 개의 의식이 있습니다. 눈이 첫 번째이고 의식이 열여덟 번째로, 반야심경에서는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니 각자 다른 계()와 더불어 공존해야 함을 말합니다.

다음에는 12연기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무명(無明)에서 시작하여 늙음과 죽음으로 끝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이들 12연기 중 어느 것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하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의 존재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는 비었습니다. 비었기 때문에 참으로 존재합니다.

그와 같은 원리가 네 가지 진리 (四聖)제에도 적용됩니다.

고통이 없고, 고통의 원인이 없고, 고통의 멸함이 없고, 멸하는 길이 없느니라.”

마지막 구절은 이해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느니라.”입니다. 이해(지혜)란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를 말합니다. 이해가 없다는 것은 이해에는 분리된 존재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부처님이 부차님 아닌 요소로 이루어지셨듯이 이해는 이해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 졌습니다.

부처님과 마라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동굴에 머무실 때, 제자인 아난다는 동굴 입구에 서 있다가 마라가 오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마라가 찾아오는 것이 달갑지 않았던 그는, 마라가 얼른 사라지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마라는 아난다 쪽으로 걸어와 부처님께 자신이 온 것을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난다는 호통을 치듯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여기에 나타났느냐? 오래 전에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님께 항복 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더냐? 꺼져라! 부처님은 너를 만나지 않으실 것이다. 너는 악마이고 그 분의 적 이니라?”

마라는 그 소리를 듣자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습니다.

네 스승이 너에게 적이 있다고 애기 하셨느냐?”

마라의 질문에 아난다는 당황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적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문이 막혀 버린 아난다는 할 수 없이 내키지 않은 발걸음으로 동굴로 향했습니다. 부처님께 마라가 방문했다는 것을 알리는 동안에도 그는 내내 마라를 물리쳐버리라는 말씀이 나오기만을 가다렸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마라를 내치시기는커녕 그가 왔다는 애기를 듣자, 옛 친구가 찾아온 것처럼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정말인가? 그가 정녕 이리로 찾아 왔단 말인가?“

부처님은 마라를 환영하러 손수 굴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아난다는 당혹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부처님은 마라에게 절을 하시고는 그의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하지만 마라는 무슨 영문에선지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를 굴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자리를 만들어 앉힌 뒤에, 아난다에게 차를 끓여 오도록 하셨습니다.

내 스승을 위해서라면 하루에 백 번이라도 차를 끓일 수 있겠으나 마라를 위해 차를 끓이는 것은 기쁘지 않다.’ 아난다는 이렇게 생각하며 마지못해 차를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처님과 마라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습니다부처님은 거듭 마라에게 안부를 묻고 계셨습니다.

그간 잘 지냈는가? 사는 건 어떠한가?” 마침내 마라가 입을 열었습니다.

모든 일들이 잘 안 됩니다. 더 이상 마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마라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습니다. 마라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수수께끼처럼 해야 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요령을 부리고 악하게 보여야 하는데, 이제 그런 것들이 싫증납니다.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건 내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이젠 사회 정의니 평화니 평등이니 해방이니 비폭력이니 하는 것까지 떠들어대는데, 정말 지겨워 미치겠습니다. 그들은 모두 당신에게 인계하면 훨씬 나을 것 같습니다. 나는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습니다.“

아나다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그 역할을 맡으실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마라가 부처님이 되고 부처님이 마라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를 슬프게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주의 깊게 듣고 난 뒤에 자비심이 담긴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 노릇하기가 즐거운 일처럼 보이는가? 자네는 내 제자들이 나를 위한답시고 한 짓들을 알지 못할 걸세. 그들은 내가 한 적도 없는 말을 내말로 만들고, 괴상한 절을 짓고 다닌다네. 제단 위에 내 형상을 올려놓고 곡식과 재물을 모으고, 나의 가르침을 포장해서 상품으로 만든다네.

여보게 마라! 만일 자네가 부처가 되는 일이 진정 어떠한 일인가를 안다면, 자네는 부처가 되고 싶지 않을 걸세.“

자유

보살은 얻을 것이 없으므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에 장애를 없애느니라. 장애가 없으므로 두려움을 극복하여 어리석은 몽상에서 영원히 벗어나 완벽한 열반을 실현하느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이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완벽하고 바르고, 절대적인 깨달음에 이르렀느니라.

여기서 장애물은 탄생과 죽음, 불결함과 성스러움, 늘어남과 줄어듦, 위와 아래, 안과 밖, 부처님과 마라 등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입니다. 공존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러한 장애들이 마음에서 없어져 두려움을 극복하고, 스스로 어리석은 몽상에서 영원히 벗어나 완벽한 열반을 실현하게 됩니다. 파도가 자신이 물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 자신은 오로지 물외에는 어떤 것도 아니므로 생사의 영향에서 벗어납니다. 모든 불안을 초월했으니 완벽한 열반이란 불안이 없는 상태입니다. 당신은 자유로워져 더 이상 탄생이나 죽음, 더러움이나 성스러움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당신은 비로소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사바하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위대한 진언이고, 최고의 진언이고, 비할 바 없는 진언이고, 모든 고통을 없애 주는 불후의 진리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이제 그 진언을 말하느니 그것은 다음과 같으니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진언이란 당신의 몸과 마음과 호흡이 깊은 명상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터져 나오는 소리를 말합니다. 깊은 명상 속에서는 마치 손바닥 위에 있는 오렌지를 보는 것처럼 명백하게 사물을 볼 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오온을 깊숙이 비추어 본 뒤 공존의 본성을 이해하고 모든 고통을 극복했습니다. 완벽한 해탈에 이른 그는 깊은 명상과 즐거움과 자유 속에서 어떤 중요한 감탄의 소리를 했는데, 그 탄성이 바로 진언입니다.

서로 사랑하지만 아직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두 남녀가 있다면, 그들은 상대방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의 성격이 매우 신중하다면, 자신의 감정에 확신이 생길 때까지는 그 말을 꺼낼 수 없으므로 오랜 시간을 애태우며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공원 벤치에 앉아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을 것입니다. 그 순간 두 남녀는 너무도 중요한 고백에 한없이 떨릴 것입니다. 당신이 이처럼 오직 입이나 머리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전부가 되어 무언가을 말하면 그것은 세계를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한 변형 능력을 지니는 말을 진언이라고 합니다.

관세음보살의 진언은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입니다. ‘아제는 가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괴로움에서 그 괴로움의 해탈로 가버린 것이고, 망각에서 명상으로 가버린 것이며, 이원론에서 비이원론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아제아제는 가버리고 또 가버린 것입니다.

바라아제는 강의 건너편 기슭까지 가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가버리고 가버리고 끝가지 가버린 것입니다. ‘바라승아제에서 은 모두, 즉 승가로 존재한 모든 공동체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강 건너로 가버린 것입니다. ‘모지는 내면의 빛, 즉 깨달음 또는 해탈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볼 때 실체에 대한 시야가 당신을 자유롭게 해 줍니다.

사바하는 할렐루야와 같은 기쁨과 흥분의 외침입니다. 그러므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가버리네, 가버리네, 끝까지 가버리네, 모두가 강 건너편으로 가버리니 거기 해탈이 있네. 사바하!”를 의미합니다.

이 진언을 들을 때는 자신이 마음을 집중하여 관세음보살이 발산하는 힘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반야심경은 단지 머리로 암송하거나 노래로 부르듯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 바탕으로 명상하고, 온 마음과 몸과 정신을 다해 공존의 본성을 통찰하면 집중의 경지를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그 순간 당신이 자신의 전부가 되어 이 진언을 하면 그 진언이 능력을 지니고, 관세음보살과 진정한 교감과 친교를 나눌 수 있어 해탈과 깨달음으로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그저 읊거나 제단 위에 놓고 경배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해탈과 삼라만상의 해탈을 위한 도구로 주어진 것입니다. 농부가 농기구를 가지고 땅을 경작하듯이, 우리가 자신을 경작하도록 주어진 관세음보살의 선물입니다. 선물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물질적인 선물입니다. 두 번째는 기술과 경험의 선물인 법()의 선물입니다. 세 번째는 최상의 선물로 비()불안의 선물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우리가 불안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반야바라밀다의 정수입니다.

반야바라밀다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원론이나 생사에 대한 불안을 초월하므로 스스로를 평화롭게 하는 튼튼한 바탕이 되어 줍니다. ()의 빛줄기 아래에서 만물은 그 자신 이외의 모든 존재입니다. 우리는 공존하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당신이 내면의 평화와 행복을 이루면 전 세계의 평화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와 호흡명상이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내딛는 첫걸음입니다. 당신을 위해서만 미소 짓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미소로 말미암아 세계가 변할 것입니다. 명상을 하는 동안 단 일 분만이라도 그 순간을 즐길 수 있다면 내면의 평화와 평정이 이루어지고, 세계평화를 위한 굳건한 바탕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평화롭지 못하다면 다른 사람과 그것을 나눌 수 없고, 스스로가 평화로울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느 곳에서도 평화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명상하고 미소 지으며 사물의 본질을 바라보는 것이 평화를 실현하는 기초입니다.

몇 해 전 사원에서 탠저린 파티가 있었습니다. 모두에게 탠저린을 하나씩 주었습니다. 나는 탠저린을 손바닥 위에 놓고 바라보면서 그것이 실체가 되도록 호흡명상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탠저린을 먹을 때 그것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일에 대해 생각합니다. 탠저린을 바라본다는 것은 꽃이 과일로 익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고 햇빛과 비를 보는 것입니다. 손바닥위에 놓인 태저린은 생명의 경이로운 현존입니다. 그러므로 탠저린의 본질을 보고, 그 꽃잎의 향기를 맡고, 따뜻하고 촉촉한 흙의 냄새를 맏을 수 있어야 합니다. 탠저린이 실체가 될 때 우리도 실체가 되고, 그 순간의 삶도 실재합니다.

나는 주의를 기울려 텐저린의 껍질을 벗기고 향기를 맡았습니다. 조심스럽게 한쪽씩 떼어 혀 위에 올려놓으며 그것이 실제로 태저린이란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완전한 명상 속에서 탠저린 하나를 다 먹었습니다. 탠저린과 먹는 사람이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또한 평화를 실현하는 기초입니다.

불교도는 명상을 하면서 지금부터 5년이나 10년 후에 있을 삶에 대한 해탈을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우리의 삶이 실재하는 삶이 되도록 수행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좌선을 하기 위해 앉을 때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순간 명상하기 위해서 앉습니다. 우리가 20분을 앉아 있다면 그 20분은 우리에게 기쁨과 삶을 가져다주어야 합니다. 걷기 명상을 할 때도 목적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걷기 위해 걸을 뿐입니다. 하나하나의 발걸음과 더불어 살아 있으면, 그 순간 우리의 삶은 실재합니다.

우리가 아이를 안거나 아침을 먹을 때도 같은 방법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품에 아이를 안거나 부모나 배우자나 친구를 안을 때, 세 번씩 숨을 들이마시고 내 쉬면 당신의 행복은 적어도 열 배 이상 자라날 것입니다. 누군가를 바라볼 때는 명상 속에서 의식적인 호흡을 하며 바라보십시오.

식사를 시작할 때마다 앞에 놓인 빈 접시를 바라보며 이 접시는 비었지만 잠시 후면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 찰 것이다.”라고 조용히 읊어 보십시오. 음식을 기다리며 세 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 뒤에 더욱 신중히 접시를 바라보며, “지금 이 순간 세상의 많은 사람들도 나처럼 접시를 들고 있으나 그들의 접시는 음식이 없으니 오랫동안 비어 있을 것이다.”라고 읊어 보세요. 날마다 수만 명의 아이들이 굶주림 때문에 죽어갑니다. 훌륭한 음식이 눈앞에 있으니 기쁘기도 하지만, 굶주림에 허덕여 죽어 가는 아이들이 음식을 통해 보이니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우리 내면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를 위해 취해야 할 길이 분명해져 스스로 깨어납니다. 우리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보고 경이로움과 깊은 고통을 보며, 우리가 세계와 더불어 평화로워질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이해(지혜)는 명상의 열매이고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과 우리가 걷는 걸음과 우리가 짓는 미소가 평화를 위한 공헌이고 세상의 평화를 향해 내딛는 발걸음입니다. 공존의 시각에서는 일상의 평화와 행복이 곧 온 세상의 평화와 행복을 의미합니다.

 

♥♬주의를 기울여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의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그곳에 있음으로써 반야심경의 뜻이 쉬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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