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군 칠원·칠서·칠북면에 걸쳐있는 1~200m 높이의 6야산을 찾았다.
등정 순서대로 나열하면 고동산(155.7), 노루등태산(169.9), 비석등산(195.9), 석동산(164.8), 멋질산(181.3), 그리고 차량이동하여 용두산(108.2)이다.
소외된 이 키작은 산들은 위치정보를 제외하면 어떠한 자료도 보이지 않는다.
주위에 내로라하는 유적들이 산재하지만 용두산(龍頭山)의 이름값도, '고동산성' 성돌의 의미도 알 수가 없다.
이들은 예전부터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왔지만 무릉도원(武陵桃源)을 꿈꾸는 미래의 낙원을 예감하고 있었나보다.
이름부터가 미래형인 '멋질산'은 그래서 온갖 상상을 가능케 한다.
고동산은 성(城)이 있어 성산(城山)이라고도 불리고 있을 뿐(함안조씨역사연구회) 어떤 자(字)를 쓰는지 알 길은 없다.
전국의 동명이산(同名異山)을 참고로 '高東·古同·固同·鼓動'하고, '石洞,登太,碑石登·嶝,하다 어설픈 가짜정보를 제공할 수 없어 모두 한글이름을 썼다.
선답자들은 모두 이름난 산꾼들이다.
지금은 세상이 좋아 '앱'과 나침반만 있으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론 대체로 원만한 산길이지만 일부구간(비석등산 직전)에선 심한 가시잡목이 길을 막고있어 어려움이 있다.
원점회귀를 이루는 무산사(武山祠)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유학자 주세붕(1495~1544) 선생의 영정과 유품을 모신 곳으로 경남 시도유형문화재 제143호이다.
'칠원향교(漆原鄕校 경남 문화재자료 제181호)'는 조선시대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교육·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1623년(인조 1) 교동(校洞)에 중건되었다가 1760년(영조 36) 현감 임우춘(林遇春)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함안 용산리 함안층 새발자국화석 산지'는 천연기념물 제222호.1969년 허찬구(許贊九) 교사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약 1억 년 전의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세계적 희귀성을 인정받았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코스: 1)무산사-고동산-노루등태산-편백숲-울타리-(잡목가시숲)-비석등산-석동산(U턴)-멋질산-서쪽능선-가족묘-삼주산업-쌍절각-무산사
2)차량이동: 칠원향교, 용두산, 함안층새발자국화석
궤적. 용두산은 차량이동 후 따로 작성하였다.
큰지도.
<산길샘>
석동산 찾아가며 잠깐 알바. 또 후반부 하산길 찾느라 두리번거렸으니 9km에 4시간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을 것.
100m에서 200m 사이의 야산을 헤집고 다녔다.
용두산과 '칠원향교', 그리고 '함안층새발자국화석'.
차를 이용하여 용두산으로 접근하다 1)칠원향교를 들렀고, 2)다시 차를 타고 용두산 입구 회차지점까지 올라 용두산을 올랐다.
3)용두산 답사후 다시 차를 타고 '칠원공설운동장 주차장'에서 '함안층화석발자국화석지'를 돌아 보았다.
미리 준비한 표지기. "福 받으시라."
네비엔 '무산사', 또는 '무릉마을회관'을 입력하여 무산사 앞 주차장에 차를 댔다.
무산사 앞 자연석비엔 '무릉동천(武陵洞天)', '문화지향(文華之鄕)'이라 새겨져 있다.
무산사는 문이 잠겨있어 담장 외삼문 밖에서 카메라만 고개를 들었다.
서당을 중심으로 뒷쪽에 광풍각(光風閣)·무릉사(武陵祠)·장판각(藏板閣)이 일렬로 서 있어 서원의 전형적인 배치와 차이가 있다.
주세붕의 영정은 광풍각에 봉안되어 있고, 장판각엔 '무릉잡고(武陵雜稿)·수구집(守口集)·구봉집책판' 등이 소장되어 있다.
선생은 1543년(중종 38)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세웠다.
주세붕을 추모하는 서원은 1591년(선조 24) 동림서원(桐林書院)으로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660년(현종 1)에 본향 남고(南皐)에 중건되었다가 1676년(숙종 2)에 덕연서원(德淵書院)이란 사액을 받았다.
1868년(고종 5) 훼철되었다가 1919년 사림의 공론에 따라 무산서원(武山書堂)을 세웠으나 한국전쟁 때 불탔고, 현재의 무산서당은 그뒤 건립된 것이다.<자료>
문민공 주선생 송덕비문.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인삼의 종주국으로 한국이면 곧 인삼을 연상케 하나 인삼에만 의존하여 우리가 조선 중종때에 문민공 신재 주세붕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중(서기 1541∼5)에 당시 국민의 징삼(徵蔘) 의무를 덜어주기 위하여 삼재배법을 개발 보급한 것이며, 그 기원으로서 현재는 국내 수요 외에도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어 농작물 중에서 적은 면적으로 가장 많은 외화획득을 하고 있는 천혜의 자원으로 생약제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보재(寶材)로 인류보건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중략)」
카메라를 담넘어 밀어넣어 내삼문으로 들어가 본다. 내삼문을 들어서야만 무산서당이 나온다.
당겨본 내삼문 현판은 심원문(尋源門). '심원(尋源)'이란 '나의 근원을 묻는다'는 뜻.
그 뒤로 살짝 드러난 제월문(霽月門), 더 뒤는 광풍각(光風閣)에 이를 것이다.
좌측 너른 마당의 중앙엔 커다란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그 건너 담을 경계로 팔작지붕의 건물(청덕각)이 보인다.
좌측 커다란 건물은 교육관인 '복례지원(復禮之院)'.
청덕각(淸德閣) 현판을 당겨 보았다.청덕각(淸德閣)은 선생의 영정을 비롯한 모든 유품을 전시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 선생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대학자로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중종 17년(1522)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중종 36년(1541)에 풍기 군수가 되었고, 중종 38년(1543)에는 풍기 지방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뒤의 소수서원)을 세웠다.
명종 6년(1551)에는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해주에 수양서원을 창설하여 최충을 모시기도 하였다.
'예절교육관'이란 작은 글귀가 붙은 외삼문을 뒤로하고...
무산사 앞 '무릉마을회관' 좌측으로 들어간다. 원각사를 거쳐 고동산과 누루등태산 사이의 안부가 계획된 진로다.
좌측 노루등태산과 그 우측 잘록한 안부가 내가 올라설 고개로 우측 고동산을 찍고와서 다시 고개를 거쳐 좌측 노루등태산을 향할 것이다.
원각사 돌담을 끼고돌아...
뒤돌아보는 원각사.
길가에 까지 과수가 심어진 과수원을 지나면...
포장 농로는 끝이나고 지척에 잘록한 안부가 고개를 낮춘다.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안내판을 지나...
올라서는 안부. 우측 고동산을 다녀와서 좌측 노루등태산으로 갈 것이다.
불과 5분여만에 고동산에 닿고, 예상치 못한 현장을 만나...
살펴보니 무언가를 발굴하는 곳으로...
허물어진 산성의 모습이다.
정상부에 있는 천막에 '함안 무릉산성' 발굴조사 알림판이 붙어있어 살펴보았다.
2021년 8월부터 '칠서면 무릉리 산 198번지' 일원에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지금부터 5개월 전쯤이다.
내가 오른 반대쪽으로 아주 반듯한 길이 나있고...
정상부엔 벤치가 마련되어 있다.
떨어져 나뒹구는 선답자의 표지기를 옆에다 매단 뒤 U턴하여 고동산을 내려간다.
내가 올라온 안부 가까이엔 부부묘가 있고...
길은 편하다.
노루등태산에 오르니 선답자들의 표지기가 먼저 반긴다.
너른 터를 마련한 묘지를 지나...
164.5m봉 등로에서 살짝 벗어난 발길 뜸한 우측으로 방향을 틀며 표지기를 걸었다. 주요 갈림길인 셈.
그곳에선 잠시 잡목이 등로를 가려 진로를 막는다. 이는 아마도 예전에 산불이 나 식생을 변화시켰기 때문인 듯.
편백이 심어진 지역을 지나...
비석등산을 가기 위해 좌측으로 크게 꺾어도는 지점에 사유지인 듯 울타리가 쳐져 있다.
울타리 안엔 짐을 실어나르기 위한 모노레일이 놓여져 있다.
울타리엔 접근금지 안내판.
이제 오늘의 최고봉인 비석등산을 오르는데, 온통 가시잡목이 앞을 가로 막는다. 이런 걸 두고 시쳇말로 대략난감이라카나?
길 흔적은 어렴풋 짐작되었으나 뚫고 나가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가시잡목 구간을 잠깐 벗어나 뒤돌아보며 애써 여유를 찾는다. 작대산, 무릉산인가?
마의 가시잡목 구간을 통과하여 대구 열혈산꾼들이 다녀간...
비석등산에 올랐다.
석동산을 다녀오는 데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안부에 살짝 내려서면 암자인 듯한 기와집을 우측 겨드랑이에 끼고 가야만 석동산에 닿게되고, 다시 석동산에선 좌측 겨드랑이에 암자를 끼고 되돌아올라야 한다.
나는 바로 지나가는 바람에 그만 석동산을 되돌아 갔다왔다.
암자를 우측 겨드랑이에 끼고 걷는 길은 부드러운 길.
그런 뒤 살짝 올랐더니 석동산. 석동산에선 다시 되돌아가 멋질산으로 간다.
멋질산은 무덤 위에...
삼각점으로 자리하고 있다.
'멋진산'이 아니고, 미래형의 '멋질산'이니 그 어원이 무척 궁금하지만 알길은 없다.
완만하고 부드러운 능선길에서 원점회귀를 위하여 좌측으로 길눈을 크게 떠보며 두리번거렸으나 잘 보이지 않는다.
쌍분묘는...
분성 배씨 부부.
작은 능선 부드러운 길이 곧게 뻗어있어 참 편하다.
그러다가 만난 이 지점은 좌측으로 지능이 뻗어내린 곳으로 길 옆에 작은 구덩이의 흔적이 있고, 좌측 나뭇가지에 빈 팻트병이 꽂혀있는 곳이다.
'부산한마음산악회' 표지기를 걸어 두었다.
금방 도로가 보이는 지점에서 가족묘지를 만나면...
도로변 공장인 듯한 곳으로 내려서서...
뒤돌아 본다.
공장은 '삼주산업'으로 길가에 있다.
큰 도로를 걸으며 뒤돌아 보니 내가 내려온 지점은 좌측 건물 뒤이고, 우측으로 들어가면 아까 석동산을 가며 내려다본 암자가 있던 곳.
길가에서 작은 비각을 들여다 본다.
쌍절각(雙節閣)이다.
잠긴 문틈 안으로 카메라를 밀어 넣어 겨우 셔터를 눌렀다.
옆엔 '효자상주주공사적비'가 세워져 있고...
쌍절각 중수비엔 재령 이씨와 의성 김씨 양절부(兩節婦)의 정려. 두 절부는 문민공 신재(愼齋)선생의 손부(孫婦).
무산사로 되돌아 왔다.
그리곤 차를 회수하여 용두산으로 올라가다 '칠원향교'에 차를 멈췄다.
칠원향교는 1910년 함안향교에 병합되었다가, 1957년 이 지역 유림에 의하여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내삼문(內三門)·명륜당·풍화루(風化樓)·직사(雇直舍) 등이 있다.
건축형태는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 그리고 풍화루 등이 있고, 좌우에 동무, 서무가 없는 대성전 단독 구조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이다.
문이 잠겼으니 2층 누각인 풍화루 계단으로 올라...
담넘어 카메라를 올려 들여다 보았더니 향교안엔 적막한 분위기만 감돈다.
강당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측 동재와 서재가 배열되어 있고...
비석엔 '현감임공이교불망비'.
1623년(인조 1) 교동(校洞)에 중건되었다가 1760년(영조 36) 현감 임우춘(林遇春)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는 불망비.
향교 우측으로 돌아 담넘어 안을 들여다 본다.
광화루와 맞배지붕의 동재와 서재, 그리고 팔작지붕의 명륜당.
이제 용두산으로 가기 위해 차량이동을 한다.
진입로는 칠원향교 홍살문 위로 올라 향교 좌측으로 난 좁은 포장길.
차량이 오를 수 있고, 또 회차할 수 있는 지점에 차를 댔다. <함안군 칠원읍 용산리 340-2>
높은 철책 옆으로 올라...
무덤이 많은 두루뭉술한 봉우리가 용두산.
대구 열혈산꾼들이 다녀갔다.
뒤로 넘어가...
임도로 돌아 나왔더니...
좌측으로 아까 내가 진입한 고동산과 누루등태산이 보인다.
다시 차를 회수한 뒤...
칠원향교 담벼락을 좌측 겨드랑이에 끼고 내려오니 칠원면에 나즈막한 덕산(109.9)이 있고, 그 뒤에 우뚝 무릉산이 솟았다.
그 우측엔 작대산인 듯하고 그 사이에 백월산(?).
'칠원공설운동장 주차장'에 차를 댔다.
칠원천 건너에 지그재그 데크계단이 있는 곳에 '함안새발자국화석산지'가 보인다.
이정표는 칠원천을 건너는 징검다리를 가리킨다.
칠원공설운동장.
징검다리가 놓여진 곳에 '함안층 새발자국화석'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새발자국화석 데크로드를 따라...
지그재그로 오르는 데크계단.
안내판의 정식 명칭은 좀 길다. '함안 용산리 함안층 새발자국 화석산지'
안내판의 설명.
이곳에서 발견된 화석의 새발자국 이름은 '함안한국새'라고 명명되었다.
백악기엔 공룡발자국이 많이 발견되지만 새발자국은 매우 희귀한 편이어서 가치가 높다고 한다.
'함안층 새발자국 화석산지'를 보존하기 위한 시설물.
안내판.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문외한의 눈에는 새발자국으로 특정할 만한 자국의 화석이 보이지 않는다.
처음 발견한 사람은 이 높은 곳에 올라 어떻게 새발자국 화석을 발견하였을까?
'칠원공설운동장'의 주차장.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이즈음이다.
설날을 맞아 성묘를 하고,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비대면 면회하고, 먼 데서 자식들이 다녀갔지만 휑한 마음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식어가는 혈류를 뜨겁게 데우는 그날은 언제다시 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