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년대. 모노마흐의 캡
이 모자는 러시아군주들이 대관식을 할 때 쓰던 최초의 왕관으로 4세기 동안 쓰였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왕관으로 가장 오랜된
것 중 하나라고 합니다.라시아에서는 이미 90여 년전에 군주제가 페지되었지만 이 왕관이 지닌 신비로움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 모노마흐 캡은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9세 모노마쿠스가 러시아의 대공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에게 넘긴 것이라고
합니다.그리하여 기독교 세계의 지도자위치를 상징적으로 모노마흐에게 넘긴것이라고 합니다.선세공 장식을 한 황금과 흑담비 모피로 된 대조적인 조합은 지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두개의 거대한 대륙에 양다리를 걸치고 널리 뻗어나가던 러시아라는 나라에 어울리는 상징입니다.
1787년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자
1780년대를 지나는 동안 로즈 베르탱(1747~1813)은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자중에 한사람이 됩니다.가장 중요한 고객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쌓은 친분덕분.그 영향력은 당대의 패션을 마음데로 주무르고, 자신의 사업적 제국을 확장 할 수있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파리를 오뜨 꾸뛰르 의 중심지로 만들고 오늘날까지 이어진 오뜨 꾸뛰르의 틀을 확립했다고 합니다.
베르탱이 혁신적인 모자디자이너는 아니였지만 당대 유행했던 패션을 더욱 정교화 시키고 확대시켰습니다.
18세기 베르사이유궁전에서 여자들의 머리 장식이 끝나고 모자가 시작되는 지점이 어딘인지 정확히 구분은 안되지만
벨벳과 실크를 아낌없이 쓰고 거기에 보석과 희귀한 깃털로 장식한 모자가 한껏 부풀리고 머릿기름을 바른 복잡한 헤어스타일
위에 얹혀 과장되게 치장된 터무니 없을 정도롤 사치스러운 모자는 노동자들의 몇달치 임금이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모자의 최고의 고객으로 프랑스왕비의 사치스러움과 낭비가 프랑스군주제의 종식을 불러왔다고 해도 지난친 말은
아닐것입니다.
1800년대 톱햇(TOP HAT)
19세기 수도가 파리였다면 19세기의 모자는 톱햇이라고 합니다.톱햇의 전성기는 1860년대와 70년대
증권거래소 처럼 남자들만 모이는 장소는 "굴뚝들의 숲"이라고 묘사 할만한 광경이 연출되었습니다.
톱햇은 18세기말에 프랑스와 영국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처음에는 멋쟁이들의 일시적인 유행으로만 생각됬었는데
화려한 색상과 터무니없이 높은 운두,이상야릇한 모양때문에 길거리에 눈에 뛸때마다 소동이 일어났고,그때문에
프랑스에서는 "앵크로야블(믿을수없는)이라는 별명이 생겼다고합니다.1850년대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앨버트공이
애용하면서 전통적인 형태에서 검은색의 차분한 모양으로 완전히 자리잡습니다.
19세기가 끝나는 무렵은 그인기가 사그라들어 지금은 결혼식이나 경마관람 같은 특별한 행사에 정장차림과 함께 이용되고 있습니다.
1826년 페즈FEZ
19세기 초에 오스만제국의 근대화를 추구하던 술탄 마흐무드2세는 남자들의 전통적인 머리장식인 터번을 없애고 그대신
술이 달린 빨간 페즈를 착용하라는 법령을 선포.당시 페즈는 오스만의 뱃사람들이 쓰던 것으로 이 법령은 폭넓은 저항에 부딪힙니다.
코스탄티노플을 찾아온 서구의 방문자들도 이국적인 터번의 정취를 그리워하며 볼품없는 페즈를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러나,19세기를 지나는 동안 터키인들은 서서히 페즈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게 되고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데도 터키군 병사들까지도
페즈를 씁니다.그러다가 1925년에 페즈는 또 한번 갑자스러운 운명의 반전을 만나는데 근대화를 추구하는 또다른 지도자이자 공산주의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쓰리피스정장과 파나마 모자를 쓰면서 페즈를 불법이라고 선언.터키인들이 기도할때 머리를 가릴 적합한 모자를 찾으려고 모색하는동안 온갖종류의 모자가 터키 수도로 몰려듭니다.술이 달린 빨간색 페즈는 르네상스시대의 제단화에 묘사된 비잔틴의 강력한 통치자부터 아편소굴에서 빈둥거리는 퇴페적인 예술가에 이르기 까지 서구인들에게 늘 어렴풋하게 "동양적인'것을 연상케 합니다.그리고 전세계에 퍼져 있는 일반적인 무슬림들에게는 오스만제국이 이슬람세계의 지도자로 존경받던 시대에 채택된 것이므로
자신들의 정체성의 소중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1848년 볼러햇(더비)BOWLER HAT(DERBY)
단순하면서 투박한 실루엣,고루함과 딱딱함을 연상시키는 볼러햇은 빅토리아시대 중기에 나타납니다.
런던의 머자 제작자인 토마스 윌리엄과 윌리엄 볼러가 런던의 유명한 모자 상점"제임스로크 앤드 컴퍼니"를 위해 디자인한 것입니다.
이 버자를 주문한 사람은 에드워드 코크라는 잉글랜드 귀족으로 자신의 사냥터 관리인들이 말을 타고 달릴때 나뭇가지에 머리를 다치지 않게 보호해줄 딱딱한 모자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것인데,19세기 끝날 무렵 볼러햇은 도시에 사는 부자들의 필수 아이템이 됩니다.
그리고 미국 서부에도 "더비"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정착민과 무법자들에게 큰인기를 끌며 1920년대에는 볼리비아로 흘러들어가
볼리비아와 페루의 농촌여성들이 쓰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문화와 동화시켜 그들의 전통의상의 일부분이 됩니다.
한편,볼러햇의 고향에서는 다소 거만한 이미지때문에 필연적으로 조롱과 전복의 대상이 되지만 동시에 애정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찰리 채플린이 희비극적인 표현을 했고 르네 마그리트의 볼러햇은 초현실주의를 뮤지컬(카바레)에선느 양성적인 매력을,어벤져스 TV 시리즈등에서 이용할정도로 문화적인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1860년 빅토리아 시대 보넷(VICTORIAN BONNET)
19세기 여자들의 전형적인 모자인 보넷은 남성적인 톱햇과는 다르게 수줍고 여성적인 형태입니다.아메리카 대초원의 여자 개척자부터
고상한척하는 부인네에 이르기까지,보넷의 용도는 무슬림의 히잡과 맞먹는 정도로 정숙함과 사적인 영역을 보호를 보장하면서 동시에
얼굴에 고풍스러운 "틀"을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원래는 18세기에 머리를 단정하게 간수하기 위한 용도로 착용하던것이 곧 무대를 넓혀
나폴레옹시대에 유행하던 소박하고 간소화된 패션의 일부분이 됩니다.교회나 상점같은 공공장소에서 보넷을 쓰는것은 필수이고
혼기가 꽉찬 아가씨에겐 순결의 상징이었으며 과부와 독신녀에게는 자기은페의 상징이었습니다.19세기초의 보넷 스타일은 공공장소에서 여자들을 격리시킨 것과다름없었고,머리를 돌리기전에는 왼쪽도 오른쪽도 쳐다볼 수없었습니다보넷이 정숙함의 상징이긴 했지만
화사한 색깔의 리본들과 정교한 주름장식이 여자들이 갖고 싶어하는 패션아이템이기도 했습니다.제인 오스틴"오만과 편견"
을 읽은 사람이나 영화를 보면 파리에서 들어온 최신 스타일의 보넷을 갖고 싶어 난리 부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19세기 여자들의 머스트해브 아이템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1890년 세프의 토크 TOQUE
프랑스의 세프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는 1890년에 스트랜드에거리에 생긴 호화로운 호텔의 주방장으로 일하기 위해 런던으로 건너갑니다.
그호텔은 바로 사보이 호텔.당시 군데에서 조리장으로 있었던 에스코피에는 영국 레스토랑의 주방에 전통적인 프랑스 요리에 대한 자신의
간소화한 해석과 함께 군대식 규율을 도입.이런 전문화는 티없이 깨끗한 재복에 대한 에스코피에의 고집이었고,그 제복의 중심이 세프의 모자였습니다.이 특별한 모자의 기원에 대한 이견이 많지만 프랑스에서 이모자를 널리 사용하게 된 것은 에스코피에의 위대한 조상
앙투안 카렘 때문이라고 합니다.세프의 모자의 높이는 주방 직원들중에 세프가 차지하는 중요성에 따라 결정되고 주름의 수는 세프가 가진 기술의 수준을 나타내는 계란을 요리 할 수있는 방법의 수로 표시합니다.세프이 토크는 규율뿐만아니라 눈처럼 하얀 색깔을 통해
위생을 나타내기도 합니다.그리고 가장 큰 전시효과.거창한 프랑스요리의 전통을 따르는 세프는 격식의 대가이면서 화려한 최고급요리를
만드는 마술사이기도 하니까요.
1895년 트릴비(TEILBY)
푹 거진 크라운과 물결모양의 휘어지는 탄력있는 챙이 부드러운 펠트 트릴비는 20세기에 가장 사랑받은 모자입니다.
페도라(챙이 조금더 넓음) 가까운 트릴비는 양복에 맞춰쓰기 충분할 만큼 말쑥하면서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느낌으로 189년 연극(트릴비0에 소품으로 쓰이면서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트릴비라는 이름도 여주인공의 이름에서 따온것으로
트릴비모자와 연극 모두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에드워드시대를 지나면서 보헤미안적인 매력을 유지하였으며
예술가와 작가들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고 합니다.1920년대에는 경마클럽 회원들이 가장 좋아하는 모자.1930년대에는 어디서나
볼 수있는 대중적인 모자로 이어나가면서 지금까지도 셀럽들이나 페피들이 멋스럽게 이용하는 모자입니다.
1905년 에드워디안 햇
20세기 초 미국과 유럽의 엘리트 계층에서는 과시적인 소비의 시기였습니다.특히 여성 패션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디자이너들의사치스러운 모자를 모방한 풍성하고 높이 솟은 모자는 당시 유행하는 아르누보 드레스와 잘 어울리는 짝.
모자 제조업의 중심지는 파리였고 ,파리에서는 워스라는 패션하우스가 매 시즌의 유행을 결정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런던과 뉴욕에도
가가 루실과 애너 벤유수프 라는 이들이 파리의 경쟁자가 되고 있었습니다.이시기의 모자패션은 꽤 다양했지만 ,에드워드 시대의 전형적인 모자는 실제 머리카락과 가채를 물결처럼 얽어서 치장한 퐁파두르 헤어스타일위에 튤과 리본,꽃과 깃털을 일정한 형태도 없이 매혹적으로 모아 얹어 두는것이었습니다.이 모든 조합에 커다란 베일을 더하면 폭삭폭삭한 느낌이 더해져 로맨틱하면서 화려해보입니다.
영화(전망좋은 방)시대 여성들의 패션을 보면 상류층의 허세와 거추장스러움을 확연히 느낄 수있지만 동시에 그시대가 주는 로맨틱한 분위기도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출처- 세상을 바꾼 50가지 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