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15일 월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보나벤투라 성인은 이탈리아의 중부 지방 바뇨레지오에서 태어났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가 된 그는 파리에서 공부한 뒤 파리 대학교 교수로 학문 연구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선출된 보나벤투라는 자신의 수도회 설립자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를 완성하였으며, 철학과 신학 분야의 권위 있는 저서도 많이 남겼다. 1274년 무렵 선종한 그를 148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1588년 식스토 5세 교황은 중세의 뛰어난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존경받고 있던 보나벤투라 주교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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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마태 10, 34~11,1)
"Whoever loves father or moth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d whoever loves son or daught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d whoever does not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after me is not worthy of me.
말씀의 초대
이집트의 재상이었던 요셉이 죽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나 이스라엘 백성이 크게 불어났다. 이집트의 새 임금은 이스라엘 백성을 견제하고자 부역 감독들을 세워 강제 노동으로 이스라엘인들을 억압하고, 그들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면 모두 강에 던져 버리라고 명령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을 믿고 따르려면 가족이나 자기 목숨보다도 당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세상의 가르침과 대립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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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새기고자 『성경』에서 칼이 뜻하는 의미를 살펴봅시다. 첫 번째로 아브라함의 칼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명령 때문에 외아들 이사악을 모리야 산에서 칼을 들어 찌르려고 하였습니다. 이때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사랑하는 이를 포기하는 하나의 ‘결단’을 상징합니다. 두 번째로 할례의 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들과 구분하려고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칼로 할례를 합니다. 곧 깨끗하지 못한 것을 잘라 내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겠다는 다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칼도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하느님의 참백성이 되려는 하나의 ‘결단’입니다. 세 번째로 성모님의 칼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실 때 시메온은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게’ 된다고 예언합니다(루카 2,35 참조). 곧 예수님 때문에 겪게 되는 고통을 견뎌 내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칼의 의미를 아우르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칼이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입에서는 날카로운 쌍날칼이 나왔습니다”(묵시 1,16).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17).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 4,12). 요컨대, 『성경』에서 칼이란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하나의 결단이며, 그 결단의 원인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려고 오셨으니, 결단력을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지연이나 학연, 더 나아가 혈연보다도 우선시하라는 뜻입니다.
무주심
-김권일 신부-
며칠 전 쉬고 있던 교우가 30년 만에 미사에 참석했다. 그동안 성당에 나오지 않았던 이유는 시어머니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시어머니와 갈등을 일으키며 성당에 나오는 것을 고수하지는 않았지만, 그토록 긴 세월이 흘렀어도 믿음을 잃지 않고 다시 성당을 찾아온 그 교우가 고맙다. 정말 고맙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복음적 가치들 때문에 세상 것을 등지고 잘라버려야 할 때가 종종 있다. 하느님 현존을 부인하는 상대주의나 세속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또한 복음적 가치들(사랑, 믿음, 희망, 생명, 비움, 나눔, 섬김, 친교, 평화, 일치 등)에 어긋나는 삶의 방식과는 타협하지 않고 그것들을 배격하고 끊어버려야 한다. 때문에 예수께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불교에는 무주심無住心이라는 용어가 있다. 무주심이란 어디에도 얽매이거나 머무름이 없는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하느님께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비록 부모나 소중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당연하고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이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가족들이나 가정사에 얽매여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소홀히 한 적은 없는지 오늘 하루 묵상해 본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찾고 계신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제가 있는 답동 교구청 근처에는 커다란 재래시장이 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시장이니까 무척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시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장을 지나가면 옛날 생각이 참 많이 납니다. 줄을 서서 먹는 닭강정, 다양한 색깔의 찐빵,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만두, 떡볶이, 김밥 등의 먹거리, 그리고 좌판에 물건을 내다놓고 파시는 할머니들의 모습까지 옛날 어렸을 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재래시장들이 점점 줄어든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대형할인마트가 우후죽순 생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대형할인마트를 가면 편하기는 합니다. 없는 물건도 없고, 또 가격도 싸고, 또한 쇼핑하기에 적당한 온도까지 유지하기 때문에 땀 흘리며 재래시장을 갈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재래시장에서만 볼 수 있는 단 돈 100원이라도 깎기 위해 흥정하는 소리, 덤으로 한바가지를 더 퍼주는 아주머니의 따뜻함을 대형할인마트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했던가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더 커다란 것들만을 쫓을까요? 이렇게 큰 것들만을 만들고 찾다 보니 정말로 소중한 것들은 보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외적으로 크고 화려한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아주 자그마한 곳에서도 함께 하시는 분이며, 어쩌면 초라하고 볼품없는 곳에서도 진정한 사랑을 나눠주시는 분입니다.
얼마 전, 어떤 책에서 이러한 내용의 글을 읽었습니다.
‘사랑을 했던 사람이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사랑을 했던 사람이 잘 안 되면 가슴이 아프고,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 머리가 아프다.’
사랑은 어떻게든 아픔을 가져다주는가 봅니다. 그런데 아픔을 주기는 하지만, 이 뒤에는 더 중요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건네줍니다. 이를 통해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은 더욱 더 그러합니다. 작은 곳에서도 계시는 분이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그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에는 큰 아픔을 얻을 것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우리가 진정으로 가고자 하는 행복의 길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보면 아주 의외인 말씀을 하시지요.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칼에 베이는듯한 아픔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선택함으로 인해 가족 간의 분열도 생길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따름으로 인해 진정한 생명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말이지요.
아주 작은 일상 안에서도 당신의 사랑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비록 이를 통해 큰 아픔을 얻을 수는 있지만, 곧 더 큰 선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어떤 폭풍우가 몰아쳐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고정된 이정표다(셰익스피어).
가고 싶지 않은 주님의 길
-이영춘 신부-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빌려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세상의 길과 하느님의 길은 같지 않습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방향은 나를 드러내 놓아야 하는, 누군가를 딛고 올라서야 하는,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우라는 그런 길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길은 비움이요 희생이며 나를 죽이는 그런 길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들은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고 자꾸만 욕망을 부추깁니다. 하지만 그것은 보기에만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울 뿐, 먹고 나면 영혼이 죽어가는 독약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의 길은 누구든지 피하고 싶은 길이지만 생명을 주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육신을 딛고 동시에 하느님을 받아들이며 살기 때문에 이 두 길은 내 안에서 격렬한 전쟁을 일으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라는 말씀처럼 하느님의 진리는 우리 욕망 깊숙이 들어와 거세게 후벼팝니다. 그래서 괴롭습니다. 상처투성이가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에 의한 상처는 쉬이 아물게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갈라놓습니다. 무엇이 세속의 것이고 무엇이 하느님의 것인지를…. 하지만 두려워 맙시다. 하느님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며,
태화산을 오르며
- 신재용 신부-
이른 새벽, 영월 태화산에 혼자서 올랐습니다. 어쩌다가 바쁜 일상을 벗어버리려고 한 번씩 찾기 시작했던 산이 이제는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떤 이는 정상 달성을 목표로 오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체력이 약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남들이 오르는 시간의 두 배는 걸리는 것 같습니다. 아침 일찍 혼자 걷는 산길은 한가해서 여유롭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지나간 날들의 잘못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도하면서, 겸손하지 못한 제 마음 하나씩 비우며 그렇게 올랐는데, 오늘은 머릿속이 무척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성경공부며 교리신학원이며 너무 많은 일을 벌여놓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려고 그랬는지, 긴 한숨을 쉬며 복잡한 마음으로 오르다보니 다른 때보다 더 힘이 듭니다. 잠시 앉아 쉬면서 멀리 아름다운 남한강을 바라보며 긴 묵상에 잠겨봅니다. 내가 세상의 모든 것을 덕지덕지 붙여서 무거워진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을까 ? 에베레스트 산을 넘어가는 두루미들처럼 살과 뼈를 깎아버리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함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몸이 따라주질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버리고 비워내어 참된 목적을 완성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우리 삶의 참된 모범이신 예수님께서 사신 삶을 본받아 내 삶이 곧 그리스도의 삶이 될 수 있도록 복음으로 채워가는 과정,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수행이자 신앙이 성숙해 가는 과정임을 나는 이 늦깎이 나이에 깨닫습니다.
칼을 받다
-김찬선신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역사상 제일 불효한 사람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는 육신의 아버지를 더 이상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모든 재산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옷을 홀라당 벗어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물론 그의 불효는 패륜아의 불효와는 다르지요. 육신의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를 사랑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의 아버지를 온전히 따르는 것을 육신의 아버지가 반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정말 신앙이 깊지 않으면 인간은 언제까지나 자식을 자기 것으로 묶어두고 좀처럼 하느님께 내어드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것이지만 자식도 나에게 묶고 나도 자식에게 묶이는 그런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사랑은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진리를 따르도록 사람을 놓아주는 것이고, 신앙적으로 얘기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놓아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고, 부부 사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며, 내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사랑할수록 자유롭게 놔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선언당할 것이고, 서로 속박하고 얽어매는 관계는 파산선고를 받을 것입니다. 칼을 주러 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이런 관계는 칼을 받는 것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양승국신부-
<천국의 예고편>
점점 연세 들어가시는 분들, 지상생활을 조금씩 마무리 지으셔야 될 분들, 점점 큰 호기심으로 다가오는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며, 또 그곳은 어디 있습니까? 지옥은 또 어떤 곳이며, 또 그곳은 어디 있습니까? 그곳에서의 생활은 또 어떻겠습니까?
한 형제가 많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크신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막상 천국에 들어가 보니 정말 깜짝 놀랄 일 세 가지가 있더랍니다. 너무나 깜짝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 했다는군요.
첫 번째 놀랄 일은 그간 긴가민가했는데, 그간 이렇게 부당하고 죄 많은 내가 과연 천국이란 곳을 들어갈 수 있을까, 엄청 걱정 많이 했는데, 내가 딱 천국에 와있다는 것, 그것 때문에 먼저 놀란답니다.
두 번째 놀랄 일은, 천국이 좋은 곳이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신부님 수녀님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많이 들어왔는데, 막상 와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수천 배 수만 배 더 아름답고, 더 좋은 곳이어서 놀란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놀랄 일이 있습니다. 내가 천국에 온 것이 너무나 기쁜 나머지 천국 이곳저곳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몇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 얼굴을 찬찬히 보니 절대로 여기(천국)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와 있어서 또 놀란다는군요. 날 그렇게 괴롭히셨던 시어머님도 와계시고,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숱하게도 뺑뺑이를 돌리며 날 사람취급도 안했던 군대생활 직속상관이었던 김 병장도 와계시고,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그 목숨보다 소중한 겟돈 떼먹고 달아난 자매님도 와계시고...
그만큼 천국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풍성하게 내리는지, 진홍빛 같은 우리 죄들이 눈 녹듯이 씻겨 내리는 곳이라는 것이겠지요.
사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은 언젠가 도래하게 될 하느님 나라의 예고편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인간 세상 구석구석에는 천국의 조각들이 숱하게 널려있습니다. 우리 삶의 이곳 저 곳에는 지옥이 예고편이 상영되고 있습니다.
한 형제가 아침 일찍부터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표정 짓고 있다면, 한 형제가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봐, 하는 얼굴이라면 그 형제 자체가 바로 지옥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형제가 출근하는 직장도 지옥입니다. 그 형제를 만나는 다른 직장동료들의 하루도 지옥으로 변합니다.
반대로 한 형제가 꼭두새벽부터 싱글벙글 함박웃음 짓고 있다면, 한 형제가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봐, 라는 얼굴이라면 그 형제 자체가 바로 천국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형제가 출근하는 직장도 천국입니다. 그 형제를 만나는 다른 직장 동료들의 하루도 천국으로 변합니다.
결국 천국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떨어지느냐는 바로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천국에서 생활하는가, 지옥불의 고통을 겪느냐 역시 우리 손에 달려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지옥에서 생활하고 계십니다. 그 지옥을 천국으로 바꿔나가는 것,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기 위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끌어안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우리가 이 땅 위에서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는 참으로 묘해서 떨치려고 기를 쓰면 더 큰 무게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십자가, 참으로 큰 괴로움의 원천입니다만, 그 십자가에 의미를 부여함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의 무게를 버티다 못해 주저앉아버림으로써 극도의 고통만 체험하지만,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잘 끌어안음으로 인해 하느님의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향해 그 누구든 빼놓지 않고 십자가를 보내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발걸음을 하느님 당신께로 돌리라는 신호입니다. 하느님 당신과 1대 1로 대면하자는 외침입니다.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라는 요청입니다.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호의적으로, 관대하고 열린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있어 십자가는 축복의 도구입니다. 생명의 땅으로 건너가는 사다리입니다. 새 삶에로의 초대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매일 매 순간이 천국입니다.
버림과 따름의 미학
-이훈 신부-
예수님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선언하십니다. 전쟁의 역사를 살아온 인류는 칼을 향해서 죽음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선언하시는 칼은 생명의 칼, 진리의 칼, 믿음의 칼, 신앙의 칼입니다. 복음은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가족이 내 신앙의 걸림돌이며, 나 또한 가족들의 믿음에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듯 걸림돌로 작용하면서, 탓을 남에게 전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질문할 때입니다. 원조의 죄를 사랑의 측면에서 보자면, 아담이 지은 죄는 하느님보다도 하와를 더 사랑한 죄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또한 하느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합당하지 않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지상목표였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떠나가고 계십니다. 복음은 무엇인가요. 기쁨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믿는 사람은 기뻐야 하고, 복음을 사는 사람은 애착이나 집착이 아닌 하느님을 향해 열린 자유스러움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기쁨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된 믿음이 될 것입니다.
형제자매로 대접하기
-임원지 수녀-
서로 사랑하라 하시고,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그리고 여기라 하시고서, 사랑하라고 내 지금과 내 여기를 주시며, 가장 가까운 이들부터 미워하라고 하시는 그 말씀은 사랑이 참으로 맹목적일 수 있음을 가르치시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웃 사랑은 쉬운가. 십자가가 따로 없다. 그런 말이 있다. “잘들 지내 시나요?” “네, 잘들 지내지요, 개와 고양이처럼.” 개와 고양이가 만나 함께 살고 있으니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취향이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을 때 견뎌내기만도 고역이다. 평생을 해로하는 부부들은 얼마나 훌륭한가. 주님께 합당하 려면 우선 나를 참아주는 이들의 노력부터 생각하고 감사해야 하리라. 예언자를 예언자로 대접하면 예언자가 받을 상을 주신다 하신다. 지학순 주교님이 북한에도 사람이 살더라 하시던 말씀이 충격적인 시절이 있었다. 월드컵이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나 김연아의 경기 때는 하나가 되다가도 정치나 사상, 이념이 개입되면 이 작은 나라가 4분 5열 되니 부끄럽다. 우리는, 교회는 얼마나 수시로 기도로 정화되어야 하는가. 수하든 장상이든, 노인이든 어린이든, 남이든 북이든, 서로 갈리지 말고 형제로 자매로 대접하면 그 상을 주신단다.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하고 미사 때마다 가슴 치는 일이 그냥 형식에 그치고 있음을 자주 나에게서 남에게서 빤히 드러나 보인다. 내가 하느님과 어떤 관계인지 확인하고 싶으면, 내 이웃을 내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보라시던 어느 신부님 말씀은 사실 무섭다.
칼을 주러 왔다
-전삼용신부-
한국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오늘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성당에 앉아 일주일을 돌아보았습니다.
치료도 하고 쉬기도 하기위해 들어온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병원 다니고 인사 다니는 게 바빠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지내고 있습니다. 속으로는 '이러다가는 병 얻어가겠다.'라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일은 로마에 있을 때보다 기도를 더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워낙 산골 구석에 있어서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비되는 것과 더불어 여러 약속을 쫓아다니다보니 정해놓은 기도도 채우지 못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문제는 아직도 인사를 드려야 하는 분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분들에게 인사를 드리려하는 이유가 들어왔으면서도 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그 분들이 저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지니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들어왔으니 반가운 마음으로 마땅히 그 분들을 찾아뵙는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관례로 생각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인사드려야한다는 부담도 되고 그래서 힘도 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과 관계가 안 좋으면 내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적은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를 이유 없이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더 힘들고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몇 배의 노력을 하였습니다. 나중엔 내가 아무리 잘 해도 모두가 나를 좋아하게 할 수는 없음을 깨닫고 그것에 집착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오늘 돌아보니 이런 미움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쉬지도 못하면서 먼저 인사드려야 할 분들부터 분주하게 찾아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복음을 읽으니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고 서로 갈라지도록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가족끼리 서로 갈라져 원수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만약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것에 저해된다면 가족이라도 가차 없이 칼로 쳐서 원수로 만드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뜻보다 다른 사람의 뜻을 더 따르게 되어 그분과의 사이가 멀어진다면 그분과의 사이를 다시 좁히기 위해 가족이라도 원수를 만들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성소의 길을 택하신 분들은 너무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성소자들 중 가족 내에 단 한명의 반대자도 없이 그 길을 들어가는 경우는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아버지께서 크게 반대하셨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말씀을 듣고는 밤에 잠도 주무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제가 아는 한 신부님은 사대 독자로서 늦게나마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고, 신학교 다니는 내내 아버지는 아들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대를 잇지 못하게 되어 조상을 뵐 면목이 없게 된 것이고 그래서 아들과 원수가 된 것입니다.
또 제가 아는 한 수녀님은 수녀님이 되신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가족들은 아직도 단 한 명도 성당에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믿음이 없고 성당을 안 다니는데 딸이 갑자기 수녀라는 것이 되겠다고 하니 그 반대가 얼마나 거세었을까 상상이 갑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 위에 서려고 하는 무엇이든 칼로 쳐 내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그러나 가족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은 우리 손에 아직도 칼을 쥐어 주시며 당신의 뜻보다 더 사랑하게 될 것들을 쳐 내라고 주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가끔 일이 우선인지 건강이 우선인지 혼돈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성격 때문인지 저는 모든 일을 마치고나서야 시간이 남으면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래서 몸이 안 좋아 진 것이라고 합니다. 순서를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건강이 있어야 일도 할 수 있는 것이니 신앙 다음에 건강을 놓으라고 합니다.
그분들 생각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서는 순서가 너무나 명확합니다. 주님과의 일치의 시간을 줄어들게 한다면 사람 만나는 일은 조금 뒤로 미루어야 될 것 같습니다. 내가 정한 기도 시간도 빼앗겨가면서 인사를 다녀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마음이 상한다면 그것은 제가 감수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먼저 하기 위해 그 정도는 겪어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손에 들려있는 원수를 만들게도 할 수 있는 그 칼, 결코 주님이 두 번째가 되시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칼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거짓 평화
-김찬선신부-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유혹을 자주 받습니다. 누가 저에게 그런 말을 해서 유혹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저 스스로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싫어하는 말을 굳이 내가 할 필요가 있을까? 싫어하는 것을 하여 괜히 긴장과 갈등을 살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좋게 넘어가려 하면 이제는 마음 다른 편에서 저항이 올라와 마음 편치 않습니다. 그것은 비겁한 것이고, 그것은 거짓 평화이며, 그것은 사랑의 유기라고 계속 쑤석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피하자니 내 안에서의 갈등이 괴롭고 마음의 갈등을 피하자니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피할 수 없어 한 동안 괴로워하다가 결국에는 싫어하는 말을 하되 겸손과 사랑으로 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서야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평화 관계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갈등이 좋고 평화가 나쁜 것이기에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평화 관계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이지요. 하느님을 따르려는데 반대와 방해를 받는다면 그것이 부모라면 부모를, 그것이 자식이라면 자식을, 그것이 재물이라면 재물을, 그것이 자신이라면 자신을 과감히 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가끔 조금 다른 충고를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신앙을 갖지 않은 집안에 누가 시집을 갈 경우 저는 전술적으로 물러서라고 말해 주기도 합니다. 시집 식구들에게는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불화를 무릅쓰고 신앙을 고집하지 말고 나는 신앙을 버릴 수 없지만 가족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당분간 성당에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언젠가는 자신이 성당에 나가는 것을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서 가족들이 같이 성당에 나가기를 바란다고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고는 신앙인답게 사랑의 삶을 살라고 충고합니다.
이렇게 충고를 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하느님과 신앙을 빙자하여 Power Game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하느님을 위해서 자기를 죽이는 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위하는 것이고 자기와 가족 모두를 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정말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가족을 사랑하기에 자기를 죽일 때 사랑을 기초한 이 신앙이 참된 신앙임을 가족들이 모두 깨닫고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에게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상지종신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누군가 나의 손을 잡아주며 일으켜 줄 때,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 나의 어깨 두드리며 '힘 내'라고 말 건넬 때,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 나의 슬픔에 함께 눈물을 흘릴 때,
주님의 위로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 나의 외로움을 환한 웃음으로 달랠 때,
주님의 넉넉함에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이 안에서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주님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이가 곧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것 모두가 곧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양승국신부-
<사제복>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사제복"과 관련한 기억이 생생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주임 신부님이 피정을 떠나셔서 한 본당 주일미사를 대신 집전하게 되었습니다.
새벽미사가 끝나고 본당 원장 수녀님과 상의할 일이 좀 있어서 찾았더니 주임 신부님을 대신해서 돌아가는 신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수녀님이 얼마나 친절하고 자상하신지!!! 제가 옆에서 한참동안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르셨습니다. 모든 신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는 한편, 근황을 묻기도 하고 바쁘셨습니다.
이제나저제나 하며 저는 어정쩡한 자세로 수녀님 바로 옆에 서있었습니다. 물론 그때 제가 사제복을 입지 않고 우중충한 잠바를 입고 있었던 것이 큰 잘못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제 어깨를 툭 쳤습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한 5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 아래에서 위까지 쫙 때깔나게 차려입은 신사 한 분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아! 자네구먼, 수녀님이 소개하겠다는 사람이. 고생이 되더라도 힘내야지! 내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테니 열심히 한번 해보라구."
순간판단력이 부족한 저였기에 그 당시 저는 그분 말씀이 제대로 접수가 안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 아∼예! 그러죠. 뭐"라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신사는 본당 사목회 간부였는데, 수녀님께서 실직한 교우 한 명의 일자리를 부탁해서 그날 성당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그 형제님이 미사 시간 내내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혼났습니다.
저 역시 가끔 실직자들을 만납니다. 한번은 힘없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찾아온 한 실직자 형제를 만났습니다. 물론 그분의 가슴아픈 사연들을 최대한 조용히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다 확실한 도움, 보다 구체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에 너무도 속이 상했습니다. 실직자 형제들이 힘없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만일 제가 실직으로 인해 당장 끼니걱정을 해야하는 사람들에게 "형제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고해(苦海)입니다. 비록 오늘 고통스러우시겠지만 희망을 가지십시오. 고통 가운데서도 활짝 웃는 그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말을 했다면 그분들은 "공자님 말씀하고 있네. 날씨가 더워지니 맛이 갔구먼"하고 빈정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보다 구체성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친교는 말이나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뭔가 해야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친교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친교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①이웃들 안에 현존하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관상합니다. ②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형제를 내 일부로 생각하기에 그들과 구체적으로 기쁨과 슬픔, 고통을 나누며 우정을 맺습니다. ③이웃들을 내 형제로 받아들이기에 어떤 모습으로든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받아들임
-남상근 신부-
어릴 적 그리도 좋던 친구들, 그냥 같이만 있어도 좋던 친구들이었는데 이젠 친구들을 믿지 못하는 내가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나한테 한 그 친구의 날카로운 말 한마디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에도 친구이기 때문에 웃어주곤 했는데, 이제는 아무리 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도 ‘별 싱거운 녀석 같으니’ 하면서 면박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언제라도 불러서 시간을 지낼 수 있는 소중한 친구를 잃어버렸습니다. 사람을 그냥 그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 쉬운 듯 어렵습니다. 친구임에도 친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런 저런 온갖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친구 사이에 끼어든 그 많은 ‘친구’답지 못한 것들이 우리들 사이를 어렵게 만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이에게 상을 주시겠답니다.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상대에게 주십시오. 나도 받아들여집니다. 내게도 주어집니다. 할 수 있었음에도 손해나는 일이기에 마다한 일이 혹시 있지 않은지요? 억울해하며 억지로 하지 않았는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물 한 잔에도 댓가가 있을 것이며, 환한 미소 한 모금에도 반드시 상이 따를 것이라 하십니다. 하여 그 어떤 것도 손해가 아닙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갚아주신다니 모든 착한 일은 그냥 흩어지지 않습니다.
채우기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
-노성호 신부-
텔레비전 드라마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간혹 채널을 돌리다 보면 시선이 고정되는 드라마를 만나게 된다. ‘주몽’이 그 중 하나였다. 여러 명장면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주몽과 비류의 군장 송양이 만나는 부분이다.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도모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주몽이 송양을 찾아갔다. 송양은 주몽에게 독배와 술잔을 내놓으며, 이 둘을 가려내야만 졸본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하늘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겠다고 했다. 주몽은 자신의 안위나 목숨은 생각하지 않고 과감하게 두 잔 술을 모두 마셔버린다. 만일 주몽이 그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든지 다른 이유를 대면서 주저했더라면 결코 송양의 마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고, 졸본의 통합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천하대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면 반드시 수고나 노력, 희생이 수반되어야 한다. 가만히 있어도 얻게 되는 것은 그만큼 의미도 없을 것이고, 얻으려는 것에 대한 소중함도 모르게 될 것이다. 결국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역설적인 등식이 성립하는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이 진리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아집·집착·욕심·시기·질투·탐욕으로 얼룩져 있는 자신을 버리면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분의 삶에 동참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나야 한다. ‘과거의 나’가 가지고 있던 목숨을 버리면 ‘새로운 나’는 새 생명을 간직하고 주님과 하나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몽의 무모해 보이면서도 과감했던 행동은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작은 버림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고,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자기 희생이 세상 사람한테는 의미 없는 죽음처럼 여겨지지만 우리한테는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 된다. 얻기 위해서는 버릴 줄 알아야 하고, 더 많은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하며, 도약하기 위해서는 잠시 몸의 힘을 빼고 긴장을 풀면서 쉬어야 한다.
생명있는 언어, 생명있는 진리가 존재한다면
-남을우-
요사이 세상살이를 보고 있노라면 참 요지경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비위에 맞으면 좋은 사람이고, 내 비위에 맞지 않으면 옳지 않다고 떠들어 댑니다. 그러다 보면 목청 큰 사람이 겉으로는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편이 옳고 그른가는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니 어느 편이 진리인지,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집니다. 더구나 인터넷에 뜨고 지는 네티즌들의 언어가 점점 메마르고 공격적으로 되어가고, 자신의 진리만을 고집하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오만함까지 보입니다.
여기서 잠깐 상념에 젖어봅니다. 생명있는 언어, 생명있는 진리가 존재한다면 이러한 몰이해적인 반응은 일어나지도 존재하지도 않을 텐데.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고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칼은 옳고 그름의 바른 잣대를 상징하지요. 정의가 바로 설 때 진리가 살고 평화가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의 기준이 무엇이냐가 문제겠지요.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태초적인 가르침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언어, 생명이 담긴 진리, 이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한 재산이며, 현실에서 펼쳐야 할 우리의 소중한 몫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참된 제자 되는 길
- 김만수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부모를 나보다 더 사랑하거나 자기 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적 상식으로는 얼른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같이 생각됩니다만,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고 사랑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르려면 가족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마저, 즉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도 바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103위 성인 가운데 겨우 열네 살의 어린 나이로 순교한 유대철(베드로) 성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유 베드로 성인은 배교를 강권하는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즉 저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복종하겠으나 하늘의 임금이시고 만물의 주인이신 천주님의 계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라고 상냥하게 어머니에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포청에서 유대철(베드로)을 배교시키기 위해 14세의 어린나이로서는 견디기 힘든 혹형과 고문을 가하였으나, 그는 한결같은 신앙으로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마침내 1839년 기해년 박해 때 순교하였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순교한 이 어린 성인은 과연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잃었으며 또 무엇을 얻었습니까? 그는 주님을 위해 부모가 주신 육신 생명은 잃었으나 대신 주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찮은 물건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마음이 편치 못한 우리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세상의 그 어느 것하고도 바꿀 수 없는 부모와 아내나 남편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 자신의 목숨마저 주님을 위해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생각은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위해 그 모든 것을 잃어야만 다시 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삼주전 우리 중앙 본당 800여명의 교우님들이 배론 성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성지이지만, 그곳은 1801년 황사영과 그 동료들이 신유박해를 피해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첩첩 산중에 자리 잡은 교우 촌이었습니다.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791년 신해박해 이후로 신자들이 주로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해 오던 곳이었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고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순교하자 천주교 지도자로 활동하던 황사영이 그 해 2월에 서울을 떠나 이곳 배론으로 숨어들게 되었습니다. 이어 교회의 밀사로 활약하던 황심도 이곳으로 와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는데, 이 때 이곳에서 옹기점을 운영하던 김귀동이 이들에게 토굴을 파고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황사영은 토굴에 은거하면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순교 사적과 김한빈, 황심등이 전해주는 박해 사실을 토대로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작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해 9월 29일에 황사영과 김한빈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됨으로써 결국 배론 교우촌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황사영이 쓴 <백서>의 몇 줄만 읽어봐도 그 당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황사영은 말하기를: “이제 교회가 무너져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데....저희들은 마치 양떼가 달아나 흩어진 것처럼 혹은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고, 혹은 몸 둘 곳이 없어 길바닥에서 헤매면서 눈물을 머금고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며 흐느낍니다” 황사영이 쓴 이 <백서>는 차마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당시 천주교회의 참혹한 박해의 모습을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데로 자신들의 부모보다 주님을 더 사랑했고, 사랑하는 가족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였으며 심지어 주님을 위해 단 하나뿐인 목숨마저도 기꺼이 바쳤습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자기를 낳아 길러준 부모나 사랑스런 아내와 자녀를 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겠으며 자기 목숨 아까운줄 몰랐겠습니까? 하지만 가장 소중한 하느님을 배신할 수 없었고 또한 참 진리를 부인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초개같이 버렸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제자라고 자처한다면 모름지기 주님의 뜻을 따라 부모와 자녀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잃을 각오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자신의 어떠한 욕망도 끊어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생활의 첫째가 되고 중심이 되도록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자기 자신을 부정하거나 학대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기 위하여 이기적인 자아를 끊어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끊고 비우고 버리는 아픔이 뒤따르기 마련이며, 그러한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짊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새벽을 열며
저는 가끔 이러한 소리를 사람들에게 듣습니다.
“신부님, 정말로 미남이세요. 신부님, 목소리가 성우 같아요. 신부님, 너무나 멋져요.”
그렇다면 제가 이 말을 듣고서는 기분이 좋을까요? 나쁠까요? 물론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신부님은 눈이 이상하게 아래로 쳐졌어요. 신부님은 말이 너무 빨라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저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말이란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진리라 할지라도 듣기 싫은 말 그리고 상처가 되는 말이 되는 말이 있는 반면에, 거짓이라 할지라도 듣기 좋은 말 그리고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진실을 이야기한다면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이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그 사람에게 직접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서 결국은 당사자의 귀로도 들어오게 됩니다. 바로 이 상태에서 처음에 이야기했던 사람과 당사자의 관계가 좋을 수가 있을까요? 절대로 좋은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싹트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정반대인 ‘미움’입니다.
아무리 진실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에 대한 판단이 들어가는 부정적인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도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임을 분명히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들은 끊임없이 남을 판단하고 있을까요? 바로 세상의 원칙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깜짝 놀랄만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게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게 아닌데…….’ 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가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분께서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온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원칙대로 사는 것을 부정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야.’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서 대충 대충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원칙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가족, 여기서 더 나아가 자기 자신까지도 주님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버리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이지요.
세상의 원칙보다도 하늘의 원칙을 따라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이렇게 세상의 원칙을 내세워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을까요? 그것도 진실이라는 단어를 포장하면서 말입니다.
이제는 함부로 진실이라는 단어로 포장해서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희망과 기쁨을 주는 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원칙이 이 세상에 뿌리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니까요.
오늘은 ‘예뻐요. 멋져요. 사랑해요.’ 등등의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하세요.
빠다킹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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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장 입구에서 쪼그려 앉아서 채소를 파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상점도 없이 초라하게 앉아서는 오이 몇 개만을 놓고서 장사를 하는 할머니는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지요. 이 모습을 본 어떤 한 손님이 “할머니, 이 오이 하나에 얼마에요?”라고 묻습니다. 할머니는 “오백 원입니다.”라고 답을 했지요. 손님은 가격이 싸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묻습니다.
“그러면 두 개에는 얼마에요?”
“천 원입니다.”
“그러면 세 개 사면요?”
“천오백 원이지. 그것도 계산이 안 돼?”
“에이, 많이 사면 싸게 해 주는 줄 알았죠. 할머니, 그럼 여기 있는 오이를 다 사면 좀 싸게 해주시겠죠?”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아주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게 전부는 절대로 팔지 않아.”
이렇게 말씀하시는 할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상점 없이 하루 종일 쪼그려 있다가도 다 팔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따라서 기회가 될 때 다 파는 것은 할머니 스스로를 위해서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이렇게 계속 말씀을 잇습니다.
“돈도 좋지만, 나는 여기에 이렇게 앉아서 일하는 것이 좋아. 열심히 살아가는 시장 사람들을 봐서 좋고, 또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나에게 반갑게 인사해주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좋고, 또한 오후에 따스하게 시장 바닥을 내려 쬐는 햇볕을 너무나도 사랑하지. 그런데 이 오이를 다 사겠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나의 일과 사람들과 나의 하루를 당신이 몽땅 빼앗아 가는 것이잖아. 그래서 결코 전부를 팔 수 없다고 말하는 거야.”
많은 사람들이 돈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요. 그러다보니 중요한 사랑의 가치는 뒤로 밀린 채,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아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가치는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실천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시지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부활 하신 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평화를 빌어주셨으면서, 평화가 아닌 폭력을 상징하는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사랑을 뒷자리에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시지요.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과감하게 잘라 버려야 할 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지금 나는 과연 예수님께 이 칼을 받아서 사용하고 있는지 반성해보았으면 합니다. 이제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심들을 모두 끊어버리고 주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출 때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보다 사랑의 실천이 더 중요함을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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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살리라
-조성숙 수녀-
“칼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표현 앞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예수님 제자의 길은 분명 그리 호락호락한 길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보다, 자기 가족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 길은 순교까지 각오해야 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수녀원에 입회할 때, 가족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수도자의 길을 가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기뻐하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원수처럼 여기는 가족도 있었습니다. 조건은 달랐지만 모두들 하나같이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겠다고, 사랑하는 부모 형제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수녀원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하늘을 찌를 듯한 열정은 막상 수도 공동체에 살기 시작하면 곧 시들해져버립니다. 사랑은 이상적인 생각의 차원이 아니라 나의 몸과 마음에 고통이 따라오는 의지의 차원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구체적인 일상생활 가운데 자기를 버리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관심사가 ‘자기 성취’인 이 시대에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죽음입니다. 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죽기 싫어서 예수님과 힘겨루기를 합니다. “예수님 정말 제가 죽으면 살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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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자리
- 기정희 수녀-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바로 꽃자리니라./반갑고 고맙고 기쁘다.’(구상, <꽃자리>) 구상 시인이 돌아가시기 전 당신을 찾은 이들에게 건네신 이 시는 가끔씩 허덕이며 살아가는 일상에서 나를 멈추게 한다. 삶의 무게가 버거워질 때 나는 ‘네 자리가 꽃자리니라.’는 시인의 말씀을 떠올린다. 사람이 죽음을 맞으면서 오랜 세월의 경륜을 실어 가슴으로 말하는 언어는 얼마나 절절한 울림으로 들리는가! 젊은 시절, 열정과 사랑으로 첫발을 내디딘 수도 생활 초기에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아무런 이의 없이 용감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복병처럼 숨어 있는 십자가를 대할 때 예수님의 말씀을 머리로는 수긍하면서도 가슴으로는 비켜 가길 바라며 마주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 무게가 전부인 양 허덕이며 숨차했다. 아직 인생의 마지막에는 다다르지 않았지만 훌쩍 세월을 뛰어넘어 나이가 들면서 십자가의 의미와 무게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지 더 깊이 알게 된다. 그러나 세월이 그 의미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 십자가는 스스로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세상에 단 하나의 의미로 나를 내셨다. 그 의미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다. 그러기에 모두가 비슷해 보여도 내 십자가는 다른 이와 비교할 수 없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제 것이 아닌 십자가를 부러워한다면 진정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리라. 누구의 십자가도 아닌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목표를 명확히 방향 짓고 그 목표를 향해 가는 방법도 제시하셨다.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목표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목표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목표조차도 하느님의 선물이 아니겠는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상의 은총.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데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말씀하신다. 그 무엇도 주님보다 우선일 수 없음을, 자기 자신마저 부정하는 삶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임을 알려주신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믿어주신다. 십자가가 버겁다고 투정을 부려도,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어도 우리가 다시 일어나 걸어갈 것이라고 믿어주신다. 나무는 그 키만한 뿌리를 가졌다고 한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의 깊이는 우리 삶으로 드러난다. 그분을 따르는 데 피할 수 없는 모든 십자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며 앉은 그 자리가 내가 앉아 있어야 할 꽃자리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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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간 월요일
- 이성균 신부 -
성경에 담긴 말씀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인생의 진리를 알게 해주고 삶의 방향을 일러 주는 보고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다보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당혹스러움을 안겨 주는 것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이 작성되던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담겨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환경이 과거와 같지 않고 예전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는 우리의 개별적인 고민을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답을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통과 문화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를 빚어냅니다.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여전히 존속하는 가치들도 있지만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가치 또한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긴 해도 오늘의 복음은 가치를 달리하고 싶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는 듯해서 당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인용하신 적이 있듯이 “부모를 떠나 남자와 여자가 한몸”이 되어 이루는 가정과 그 구성원인 가족 사이에 유지되어야 할 바람직한 덕목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화목한 가정’이라는 말로 간단히 표현합니다. 가족들 간에 서로를 돌보며 이해와 사랑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그 목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 가족을 이루고 사는 우리도 변함없이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엇나가는 말씀을 하시는 듯 보입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마 우리 주변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정파괴범이라고 부를 겁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누군가 이렇게 요구한다면 그 사람은 인간관계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만 사랑해야 한다는 미성숙한 사랑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생명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사람이 임의적으로, 또 쉽사리 좌우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요? 오늘의 말씀은 가족들 간에 사이가 좋지 않을 때나 종교로 인해 갈등이 있을 때, 또는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 내세울 수 있는 변명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은 초창기에 복음 선포의 길에 나선 제자들의 경험담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가족들의 몰이해가 안겨준 상처를 보듬고 복음을 전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더 알뜰히 보살펴야할 가족들을 뒤로 하고 못내 길을 나서야 했을 이들이 있었습니다. 목숨을 요구하는 이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적인 삶을 유지해 낸 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 덕에 오늘 복음을 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정을 떠나고 가족과 갈라서며 삶을 포기해야만 얻어지는 것이 복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함을 넘어서 경계해야할 위험한 주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처럼 구체적인 고난의 길을 따라간 이들의 희생적인 삶을 주님과 함께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온 생애를 바쳐 증언하고 전해준 복음적 기쁨을 가족들 사이에 펼치는 일입니다. 사랑하라는 주님의 법을 가르치고 배우며 가족애를 넘어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품고 퍼낼 줄 아는 인간이 되는 일입니다. 가정 안에서 각별한 마음으로 서로를 돌보십시오. 그리하여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새로운 모범이 되십시오. 가족을 넘어서는 사랑을 키우십시오. 그것이 오늘날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새로운 복음 선포의 길입니다. 길거리에서 외치는 것보다 그 사랑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더 힘찬 선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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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의 불을 질러라 -김찬선신부-
平和, 그것은 우리가 제대로 누리지 못하지만 참으로 염원하는 것입니다. 不和, 이것은 우리가 잘 해결하지 못하지만 참으로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염원하지만 잘 살지 못하는,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필요한데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불화를 주러 오셨다 하십니다. 이 무슨 어깃장인가?
그리고 다른 데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14,27)하셨는데 그렇다면 주님의 이런 평화를 어찌 이해해야 하나?
갈라짐, 다툼, 갈등, 이런 것이 없는 것이 평화라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자기 잇속을 차리기보다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을 잃으며 남을 받아들이는 주님의 사랑은 평화의 왕도입니다. 自己中心性의 탈피, 이것으로 우리는 평화를 이룩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따름에 있어서는 불화를 각오해야 합니다. 인간 서로 간에는 좋은 것이 좋을 수 있지만 하느님을 따름에 있어서는 인간끼리 좋은 것이 좋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끼리 짬짜미가 맞아 하느님을 따돌리고 하느님의 뜻을 헌 신발짝 버리듯 버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 추종을 방해하는 그를 버려야 하고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그와 갈라설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버리고 가면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해도 주님 추종은 버리고 따르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을 버려야 하고 사랑하는 애인과 갈라서야 합니다.
수도원 입회를 결정할 때가 되면 부모의 반대가 너무도 극렬한 성소자가 꼭 있습니다. 작년 같은 경우에는 그 아버지가 성소 담당 신부에게 하소연도하고 폭언도 퍼붓고 심지어 수도원을 폭파해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하였습니다. 어찌하면 좋을지 물었을 때 성소자 본인 뜻만 확고하다면 그대로 받으라고 조언하였습니다. 자식 사랑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기에 자식이 이 생활로 진정 행복하기만 하면 언젠가 마음이 바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충고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반대와 불화를 무릅쓰고 주님을 선택해야지만 주님 따름의 의지가 확고해지고 주님 따름의 열망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따라가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이 작으면 작은 반대와 만류에 그 의지와 열망이 꺾이지만 그 의지와 열망이 크면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잡아당기는 힘이 크면 클수록 더 강하게 뿌리치고 더 힘차게 나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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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요구에 기쁘게 응답하는 삶 -이기정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제자로서의 참된 삶의 자세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유혹을 거슬러 복음의 요구에 기꺼이 응답하려는 신앙적인 결단과 선택 속에, 모든 것에 앞서 항상 주님을 삶의 첫 자리에 놓고 사랑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의 삶을 살기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신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유혹에 맞서 싸우겠다는 세상에 대한 선전포고로서,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가치를 거슬러 복음적 가치와 신앙의 진리를 끝까지 지켜내려는 결연한 의지가 요구됩니다.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할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과 같은 가족과 혈육까지도 주님 때문에 포기하고 뒤로 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들 때문에 주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질 때, 세상 것들이 아무리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더라도 세상 것들 때문에 주님을 멀리하는 어리석음을 살아서는 안 되며, 어떤 것도 주님보다 낫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라고 말씀하시는데, 칼은 무엇을 자르는 도구로서, 잘라서 서로 갈라놓으면 갈라진 둘이 서로 분명히 구분이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칼’이라는 이 말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결단과 선택에 대한 단호함과 결연한 의지의 상징적인 표현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보통으로 결단력이 있고, 되는 것은 되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맺고 끊는 선이 분명한 사람을 보고, ‘칼’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일과 나 자신의 유익을 챙기고, 자신의 감정의 요구에 따르는 일에는 조그마한 손해와 양보도 허락하지 않는 칼같이 분명한 태도와 입장을 취하면서도, 복음의 요구를 따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에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믿음 없는 우리 삶의 자세와 태도를 자주 보게 됩니다.
참으로 반대로 거꾸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일에는 바보처럼 너그럽고 착하게 살고 주님의 일을 행하고 복음의 가치를 지키는 일에는 칼처럼 단호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어떤 날카로운 칼로도 끊을 수 없고 자를 수 없는 혈육의 정과 유대조차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바로 주님이 우리의 전부이고 모든 것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소중한 세상의 모든 것을 바쳐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세상의 모든 유혹들을 신앙으로 꿋꿋하게 이겨내며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승리함으로써, 주님의 크심과 좋으심을 더욱 깊이 깨닫고 체험하는 은총 속에서의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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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조욱현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그것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통스러운 것을 말씀하시면서,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다"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일상적으로 알고 행하던 일 중의 하나를 예로 들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이 누구의 심부름으로 자기에게 왔을 때, 그 심부름꾼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보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즉 친구가 보낸 사람을 사랑으로 영접하는 것은 보낸 그 친구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것이며, 웃어른이 보낸 사람을 존경으로 영접하는 것은 바로 그 어른께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과 생활 방식은 하느님의 진리를 전달하고 선포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유대 스승들은 가르치기를 "현자를 대접하는 자는 자기의 수확에서 난 첫 열매를 하느님께 바치는 것과 같다!"고 했으며, "박식한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은 하느님께 인사하는 것과 같다!"고 가르쳐 왔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의 복음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비단 예언자, 의인, 성직자, 수도자가 되는 것도 좋겠지만, 우리 모두가 예언자이며, 의를 행하는 자들이고, 성직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대접할 때, 그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되리라고 약속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는 탁월한 하느님의 일꾼들을 필요로 하고 목숨 바쳐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는 의인을 필요로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일할 수 있도록 그들을 뒷받침해 주는 평범한 봉사에 대해서 그들의 업적과 똑같은 상급으로 갚아주시겠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마찬 가지이지만,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한정되어 있다. 인간 사회는 다양한 직책을 가지고 생활하게 되며, 이러한 다양한 모습 속에서 하나의 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이 하며, 나의 부족한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보충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이웃을 통하여 이웃과 똑같은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통해서 그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웃이 보잘 것 없는 사람 같이 보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얼마나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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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근 신부-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분과 통화를 했다. 함께 식사하기로 했는데 대접을 해야 할 처지여서 음식점을 내가 정했다. 뭘 드시겠느냐는 나의 물음에 신부님 좋아하시는 걸로 아무거나 정하면 된다고 한다. 그동안 나는 그분에게 음식 신세를 많이 졌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맛있게 만든다는 집을 잘도 찾아내어 내 입맛 수준을 높여놓았다. 그래서 시원한 대구탕을 비롯하여 산나물 비빔밥·아구찜·옛날식 비지찌개 등을 먹으러 식사자리를 여러 번 함께했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분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둘이 모두 보신탕을 먹지 못한다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10년 이상 알고 지냈고, 우스갯소리, 섭섭한 소리도 주고받을 만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인데도 말이다. 대접받기에만 익숙한 나의 모습을 다시 보는 순간이었다.
사랑에는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해주고자 하는 속성이 반드시 있을진대, 그러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누구이며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니, 나는 입만 벌리면 그렇게 떠들어대던 ‘사랑’ 한번 여태껏 해보지 못했단 말인가! 아, 나는 바리사이 같은 신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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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최승일 신부-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이상하게 들리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부활하신 당신의 평화를 주셨는데,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계시니 이를 도대체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
우선 이 말씀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평화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평화인 것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적당히 고요하고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얻게 되는 거짓 평화가 아니라, 예수님 당신 때문에 그리고 복음 말씀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아들과 아버지가 맞서고, 또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되는 “칼”을 주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칼은 전쟁이나 분열을 상징합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전쟁이나 분열이 없는 상태의 평화가 아니라, 불의와 거짓 즉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악의 세력과 싸워 투쟁해서 얻게 되는 그런 평화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평화를 간절히 원하며 살아가고는 있습니다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은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평화를 원하면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는(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평화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먼저,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화를 빌어주는 너희에게 되돌아 갈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란, 하느님의 평화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복음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한 사람, 주님의 메시지를 듣고 기뻐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평화의 큰 적은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죄가 많기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는 삶을 살려 하기 보다는 우선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을 내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불안하고 평화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은 순전히 인간적인 도움이나 잔재주에만 미련스럽게 매달리는 옹고집 때문에 우리에게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해야만 합니다. 신앙이란 사랑으로 마음을 확 풀고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하느님의 품안에 내어 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어머니의 품안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안겨있는 아기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평화롭습니까? 그리고 무수한 독신 남녀들(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예수님께 대한 사랑 외에 어떠한 사랑도 맛보려 하지 않고 살고 있으며,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순교자들이 그 분을 사랑한 나머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남녀가 모든 것을 버리고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 40)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생명과 재산을 내던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아닌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가까이는 가족들과도 불화를 맛보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놀림감이 되는 “칼”을 맞게도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그로인해서 맛보게 되는 주님의 평화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진정으로 평화로우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오십시오. 평화의 주님에게로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빨리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원하는 평화를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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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호신부-
얼마 전에 불량만두 사건으로 온 나라가 소란한 적이 있었습니다. 불량만두냐? 우량만두냐? 하는 판단근거는 만두 속입니다. 속재료가 우량하면 그 만두는 우량만두이고, 속재료가 불량하면 그 만두는 불량 만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비록 겉모양이 화려하고 그럴듯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만두는 소비자들로부터 버림받고, 마침내 법적인 처벌과 제재까지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 인격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량인격자냐? 불량인격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속에 따라 결정됩니다. 속이 바르고 참되면 우량인격자가 되는 것이고, 속이 거짓과 위선이면 불량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외모나 외적 조건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화려하다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량인격자가 되려면, 우량한 속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과 정신을 우량하게 가져야 합니다. 내면세계를 바르고 참되게 가져야합니다. 마음과 정신이 불량하면 그 행위는 거짓이 되고 위선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허위가 되고 맙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도 듣지도 아니하리라.” 따라서 우리가 일체의 인간행위를 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바로 해야 합니다. 내면세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정신이 없는 제물은 형식에 불과하고, 더 이상 의미가 없는 헛된 제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너나없이 외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모든 것의 판단 근거가 되고 있는 세상입니다. 신앙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다릅니다. 신앙생활도 달라야 합니다. “ 나는 칼을 주러 왔다 ”
하느님처럼 살고 싶으면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예언자처럼 살고 싶으면 예언자적 정신을 지녀야 합니다. 선인처럼 살고 싶으면 선한 생각을 지녀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동도 바뀌고 삶도 바뀝니다.
불량만두 후유증이 오래갑니다. 이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속”입니다. “소~~~ 옥!!” 속이 튼튼하면 몸은 저절로 튼튼해집니다.
“옳은 길을 걷는 이에게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주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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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누군가 상처받았을 때
-양승국 신부-
‘교회에서 누군가 상처받았을 때’(로렌 헨리 뒤킨 저)란 글을 읽었습니다. 교회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따뜻한 하느님의 손길을 느껴야 정상인데, 공동체 구성원들과의 친교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봐야 정상인데, 와 닿는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오히려 어떤 분들은 교회로부터 크나큰 상처가 입습니다. 그 상처를 치유할 방법을 몰라 고민하다가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필요한 말씀이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로부터 받은 상처의 원인 발생은 교회가 부족함을 지닌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서 비롯한다. 우리가 교회에 대해 갖는 이상은 매우 높지만 현실은 교회가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오해하고 부인하며 배반하는 제자들, 당신께서 기도할 것을 요청했을 때 잠을 자고, 붙잡혀 가실 때 도망가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
사실 교회 공동체의 근본적인 속성 가운데 두드러진 속성 하나는 ‘죄인들의 모임’이란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면면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너나할 것 없이 다 부족합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나약하고, 오늘 비록 우리가 상처투성이이고, 오늘 비록 우리가 이토록 형편없지만, 하느님 사랑에 힘입어 천천히 성화와 완성의 길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공동체의 미성숙 앞에, 때로 생기는 스캔들 앞에, 이기심 앞에, 세속의 때 앞에 너무 당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문제성 많은 우리를 늘 기다려주셨듯이 우리 역시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교회 공동체를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느님을 보다 가까이 따르면 따를수록, 복음 정신을 보다 철저히 실천하면 할수록 ‘희한한’ 일이 한 가지 생깁니다. 그것은 바로 그런 노력이 더해짐에 따라 십자가의 무게가 더 무거워진다는 것입니다. 상처받는 일도 많아집니다. 고통도 커져갑니다. 때로 다 벗어놓고 떠나버리고 싶습니다.
그럴수록 복음서를 펼치십시오. 복음서를 읽고 또 읽으십시오. 복음서는 갖가지 고통과 상처, 십자가에 적절한 진단과 처방전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다양한 치료제, 다양한 노하우를 우리에게 전수해줍니다. 새로운 감성으로 다시 읽은 복음서는 갖은 의혹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집착에서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희망의 길을 열어줍니다. 그러나 결국 최종적인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입니다. 십자가의 신비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입니다. 다름 아닌 십자가를 꼭 껴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용, 자아 포기가 신앙인들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잘 설명하고 계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십자가를 저주합니다. 십자가만 다가오면 기겁을 하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은총은 바로 십자가 신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인생은 고해(苦海)’란 말을 자주 씁니다. 돌아보니 맞는 말입니다. 수많은 고통이 끊이지 않습니다. 어찌 그리도 집요하게 우리 뒤를 따라다니는지요.
고통이 크면 클수록, 십자가를 감당하기가 점점 힘겨워질수록 우리는 그 누구도 아닌 십자가 위에서 계신 예수님, 창에 찔리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거기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에 따르면 십자가를 원수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삶의 끝은 멸망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징표로 보내주시는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순간, 나약하고 비천한 우리의 몸은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의 인생은 언젠가 반드시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고통이 커질수록, 십자가가 무거워질수록 주님께서 나와 함께, 나와 나란히 서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감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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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칼
-장재봉 신부-
오늘 독서 말씀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께서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제물을 받지도 않고 분향도 거절하시며 그들의 팔 벌린 기도를 듣지 않겠노라 다짐을 하시니까요. 하느님께 혼쭐나게 야단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비해서 우리에게 이르신 당부는 얼마나 훈훈하고 따뜻하신지요?
많은 말씀 중에 특별히 “시원한 물 한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까지도 상을 주실 것이라 하신 걸보면서, 정말 하늘나라의 상을 받는 일은 쉽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하신 말씀이 좀 걸립니다.
묵상
주님께서 주신 칼을 갖고 살아가십니까? 주님께서 주신 칼을 사용하고 계십니까? 어디에? 무엇에? 쓰고 계신지요?
주님의 말씀은 우리 삶에 예리한 칼입니다. 그 말씀의 칼은 자신의 혈연에만 연연한 마음을 잘라내게 합니다. 자기 가족만 위해서 자기 자식만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마음을 잘라내는 일에 사용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것이 아닌 모든 것들 이기심, 자존심, 불평과 불만, 시기와 질투심을 잘라내는 일에도 사용합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곧잘 그 칼의 용도를 변경하는 일에 있습니다.
사랑을 빙자하여 상대를 힘들게 하는 일 말씀을 들먹이며 판단하는 일 남의 티를 잘라주는 일, 남의 잘못을 후벼주는 일, 날카로운 칼 날 같은 말로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뽀족하게 날 선 눈길로 상대의 가슴에 피멍을 들이곤 하니까요.
‘무엇하러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는 질책을 들을 일이 아니겠는지요? ‘분향 연기도 역겹다’고 역정을 들을 일이 아닌지요?
오늘 우리 모두가 말씀의 칼날을 자신 안에 자신의 행위에만 들이대는 축복을 얻기 바랍니다. 말씀의 칼로 내 잘못된 심사와 생각과 행위를 잘라내는 고통의 하루이기를 원합니다. 해서 우리가 모두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고, 올바른 길을 걷는 이가 되어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영광의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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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산간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어떤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는 산간지방에만 살았기 때문에, 바다에 대해서는 상당히 낯설었지요. 어느 날, 이 임금은 바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아주 멋진 새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바다 위를 유유히 날고 있는 그 모습은 너무나 우아해 보였고 심지어 고귀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 새는 흔한 바다갈매기였지만 산간지방에서만 살았던 그에게는 처음 보는 새였던 것이지요. 이 임금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저 새는 진귀한 새가 분명하다. 저 새를 우리의 조상신으로 모셔야겠다.”
그는 그 새를 잡아서 자기 조상의 사당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소와 양, 돼지를 잡아서 성대한 잔치를 벌였지요. 잔치에는 그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악사들도 초대되어 축하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하지만 그 새는 음식에 전혀 입을 대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슬프고 씁쓸한 표정만 짓고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다에 살던 새가 육지에 사는 인간의 음식과 음악에 관심을 가질 리가 만무하겠지요. 하지만 임금은 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제멋대로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역시 진귀한 새의 근엄함은 그 깊이를 알 수 없구나.’
이틀이 지나고 사흘……. 그리고 열흘이 지나도록 새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임금은 더욱 좋은 음식과 술을 새에게 바쳤지요. 그러나 열하루 째가 되던 날, 새는 결국 굶어죽고 말았습니다. 임금은 한탄하며 말했지요.
“고귀한 새여, 제가 그토록 정성을 들여 모셨건만 왜 저를 거부하셨습니까?”
바로 그때 그 옆을 지나가던 현자가 혀를 차며 말합니다.
“쯧쯧, 왕이 아닌 새로 대접했다면 그 새가 굶어죽었겠소? 그 배고픈 새에게 쇠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그리고 술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더구나 인간들이나 듣는 궁중 음악까지…….”
그렇지요. 만약 그 임금이 그 새를 새 자체로 받아들였다면, 그래서 새가 좋아하는 것들을 주었다면 결코 굶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상신이라는 엉뚱한 모습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새를 죽이는 것은 물론 자신 역시 커다란 실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지금 우리가 주님을 대하는 모습도 혹시 이렇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 큰 사랑을 보여주시고, 그 사랑을 우리들도 실천하라고 십자가를 직접 지셨습니다. 즉, 우리 역시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데, 단순히 보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보기만 하기 때문에 주님께 커다란 실망을 간직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보기만 하는 십자가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우리들은 나에게 주어지는 그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혹시 하나의 액세서리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십자가는 짊어졌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빠다킹 신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백남국 신부-
◆같은 교구에서 사목생활을 하고 있는 동생 신부가 있는데 사회 갈등 현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동료 사제들과도 맞서게 되고 신자들과도 맞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냥 저같이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살면 좋겠는데 그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동안은 제가 군종으로, 교포사목으로 교구 밖에 있어서 함께 지낼 일이 없어 괜찮았는데 이제 가까운 데서 함께 지내다 보니 그것이 조금 신경이 쓰이기 시작합니다. 동생 말을 듣고 있노라면 나름대로 확신도 있고 또 수긍이 가는 부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씩은 자기 주장이 강해 곤욕을 치르는 것을 보면서 ‘참 피곤할 텐데 그냥 조용히 살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피하고 주장하지 않으면 그만큼 편안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복음은 우리에게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며 편안한 삶이 아니라 세상과 부딪치며 살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 면에서 늘 맞서기를 포기하고 편한 길만을 찾는 저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부딪치고 맞설 수 있는 자가 살아 있는 것이고 활기를 지닌 삶이겠죠.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기보다는 주님의 제자답게 맞설 수 있는 열정을 지닌 동생의 삶이 훨씬 더 주님의 제자다운 것 같습니다. 단지 주님께서 왜 우리를 맞서게 하였는지 그 이유를 잊지 말고,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과 맞설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이기양 신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듣기에도 거북할 정도로 우리의 바람과는 반대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㰡’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㰡“(마태10,34-36)
처음으로 성당에 나온 사람이 이 말씀을 들으면 놀라서 금방 돌아서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듣기에 그리 마음 편한 말씀이 아니지요. 오랜 신앙 생활을 해 왔던 우리 역시 오늘 말씀을 대하면 어떤 의도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시는지 의아해집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바라는 것은 㰡평화㰡‘이고 집안 식구들과의 㰡화목㰡‘인데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으며 집안 식구들이 원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요.
오늘 복음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미카 예언자의 예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남북으로 갈린 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 북 이스라엘이 망하고, 풍전등화의 신세였던 남 유다 역시 기원전 587년에 바빌로니아에 망하게 되는데 이때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미카 예언자는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㰡’친구를 믿지 말고 벗을 신뢰하지 마라. 네 품에 안겨 잠드는 여자에게도 네 입을 조심하여라.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든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㰡“(미카7,5-6)
모든 관계에 정의와 질서가 다 무너지고 하느님의 뜻이 보이지 않는 이런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부부 간에, 또 부모 자식 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불신과 분열, 악이 끼어드는 이러한 세상은 망할 수밖에 없고 하느님의 진노가 내릴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지요. 빨리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미카 예언자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악은 끝까지 승리하지 않으며 메시아가 다시 오셔서 바로잡아 주실 것이라는 메시아의 승리를 미카 예언서는 예고하고 있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도 악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가 올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무나도 가까워서 악이 감히 끼어들 것 같지 않은 인간 관계에도 악이 끼어드는 그런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예언이시지요. 그러나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워 온다는 말이 있듯이 악이 승리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 승리하는 것은 선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듯이 거기에서도 선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 안에 부활의 희망과 승리의 시점이 내재해 있다는 말씀이지요. 미카 예언자는 말합니다.
㰡’내 원수야, 나를 두고 기뻐하지 마라. 나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어둠 속에 앉아 있어도 주님께서 나의 빛이 되어 주신다.㰡“(미카7,8)
오늘 복음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비록 부부 간이나 형제지간일지라도 그냥 넘어가지 말고 싸워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남편의 직업이 도둑인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도둑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생활을 꾸려가야 한다는 이유로 쉬쉬하며 방관하고 지냈지요. 그런데 아내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상황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과 싸워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칼을 주러 왔다는 것은 그러한 불의한 것에 대항하여 싸워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 평화를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싸워서라도 도둑질을 못하게 하고 바로 잡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오늘 㰡칼을 주러㰡‘왔으며 㰡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㰡‘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어서 도저히 악이 끼어 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미카 예언자 시대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우리 시대의 말씀같이 들려서 가슴이 아프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지요. 바로 잡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셨듯이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부활의 영광이라는 승리가 반드시 찾아 올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작은 이익 때문에 연연해 하거나 불의와 거짓을 알면서도 작은 유혹 앞에 묵인하고 덮어버리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타협하지 말고, 문제는 지혜롭게 밝혀서 정의롭게 해결하는 용기를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복음적인 것과 비복음적인 것, 또 해야될 일과 해서 안 되는 일을 놓고 갈등하게 될 것입니다. 㰡세상이 다 그런 거지 뭐.㰡‘하며 덮어둔 채로 슬금슬금 살아가지 말고 힘들더라도 싸워서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그 때에야 참 평화가 올 수 있지요. 정의와 하느님의 일이 승리한다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보증해 주었습니다.
오늘도 어려워도 타협하지 말고 꿋꿋이 하느님의 말씀을 심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석희 신부-
계속되는 많은 비와 높은 습도로 우리의 생활을 불편하게 만드는 장마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가뭄 때문에 모두가 하늘을 쳐다보며 비를 청한 간절함을 기억한다면 감수 할 수 있는 시간이며, 자연의 질서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순응하는 지혜로움을 갖게 만들기도합니다.
오늘의 복음에따라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함께 묵상해봅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얻고자 성당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예전에 비해 많이 감소 되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전교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음을 체험한 분들이 많이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행복이 높이 평가되어지는 현실 속에 신앙이 자리잡을 공간이 좁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한 신앙을 갖고자 찾아온 그들이 기대하고 바라던 희망사항을 신앙이 온전히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단정지어 버렸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신앙을 통해서 삶의 무게로 복잡해진 마음에 잔잔한 평화와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이 모든이의 바램이며 희망사항입니다. 평화와 기쁨은 삶의 원동력일 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바램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 하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을 체험합니다. 여기에 신앙적 갈등과 거듭된 선택과 도전이 필요하게 됨을 오늘 복음은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평화의 사도로 오신 예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고, 아버지와 아들,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맞서게 만드시며, 심지어는 자기자신과의 분열까지도 요구하고 계십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이야기 한것처럼 아무리 신앙이 인간의 논리로 담을 수 없는 역설이라고 하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 주위에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반대로 신앙을 포기해야하는 경우가 있으며, 서로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심적 갈등을 겪는 이웃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이후로 예수의 가르침과 자신의 처해있는 현실과의 대립으로 갈등을 겪어야 하는 경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칼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는 것이 오늘 복음 말씀을 알아듣는 중요한 열쇠이며, 우리의 삶을 평화와 기쁨으로 만드는 힘이 됩니다.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칼은 바로 평화가 전해주는 기쁨을 가로막는 기형적인 마음의 한부분을 잘라내는 것이요, 무관심과 이기심, 지나친 욕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은혜인 것입니다. 때로는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기준이며, 불의와 썪음을 도려내는 정의이며, 자신 을 바로 세우고 제대로 볼 수 있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진정한 평화를 얻기에 방해되는 것을 잘라내는 아픔을 감수 할 수 있고, 용기가 있는 이들에게는 칼이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니라 삶의 기쁨을 위한 디딤돌이 됩니다.
우리는 이제 묻습니다. 신앙이 과연 나의 삶을 평화롭게 다듬어 줄 수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겸손되이 고백합니다. 평화는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칼을 제대로 사용할 때 가능 하다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려분에게 내리시길 기원합니다.
칼을 주러 오신 예수 -강영구신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
그대에게
우리들의 일상(日常)은 결단(決斷)과 선택(選擇)의 연속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결정하고 선택하느냐에 따라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복(福)과 화(禍), 축복(祝福)과 저주(詛呪)가 결정됩니다. 하느님 앞에 중립지대(中立地帶)나 회색지대(灰色地帶)는 없습니다. “보아라, 오늘 내가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내리는 하느님 야훼의 명령에 복종하여 복을 받겠느냐? 아니면 하느님 야훼의 명령에 불복하여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에서 벗어나 알지도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가 저주를 받겠느냐?”(신명11,26-28)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어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6,24) 우리 삶은 언제나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정쩡한 양다리 걸침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너는 이렇게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3,15) 하느님과 악마, 성령과 악령, 선과 악, 사랑과 증오, 하늘의 소리(天命)와 욕망의 소리 등 우리는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결단과 선택에 따라서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축복(祝福)과 저주(詛呪)가 결정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시퍼렇게 날 선 예리한 칼(劍)을 주십니다. 결단과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예수께서 주신 칼로 일도양단(一刀兩斷)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예수님 편에 서야 합니다.
당신은 오늘도 끊임없이 결단과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 마다 예수님께서 주신 칼(劍)을 사용하십시오. 행복한 하루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 평화대신 칼 : 무엇에 쓰시려는가?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 10장, 파견설교의 마지막 부분이다. 지금까지 예수께서 말씀하신 파견설교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었겠으나,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말씀이 오늘 복음을 통하여 선포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평화보다는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시며, 집안의 식구들이 각자에게 원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칼을 내리쳐 온 가족을 풍비박산(風飛雹散) 내실 작정을 하신 모양인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의도가 과연 이런 것인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4,17)고 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도래하는 하늘나라를 이런 내용과 묶으시려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늘나라를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진복선언을 포함한 산상설교(5-7장)의 가르침과 수많은 구마기적과 병자치유기적(8-9장)의 행적 등을 통하여 예수님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신 분”(8,17)이심을 확인하였고, 그분에게 이 땅의 죄까지 사하는 권한(9,8)이 있음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선 칼의 의미를 살펴보자. 칼은 베고, 잘라 분리시키는 일을 한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온 가족에게 칼을 내리쳐 아들과 아버지를, 딸과 어머니를,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맞서게 갈라 세우시려는 의도를 살펴야 한다. 물론 칼로 내리쳐 어느 한 편을 죽이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칼로 갈라진 아들과 아버지를 보자. 그 관계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 없이 있을 수 없고, 아버지 역시 아들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며, 세상의 어느 존재도 다 같은 원리에 속한다. 누구든 자신이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관계의 원칙이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곧 우리들의 인간관계를 재삼 숙고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에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지 아니하고 아버지와 분리된 상태에서 아들이라고 우긴다면, 그럴 수도 없겠거니와 그는 아버지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34-36절)
내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면 제자로서의 나의 존재는 무엇과 더 관련이 있겠는가? 아버지와 어머니인가? 아니면 예수님인가? 물론 예수님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식구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세상보다는 하느님나라를 더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결국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쳤으니, 제자들도 그분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며, 그 위에 자신을 매달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그 외에 다른 방법을 통하여 자기 목숨을 얻으려 한다면 오히려 잃을 것이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자기 목숨을 맡겨 그 목숨을 잃는다면 오히려 얻게 되는 것이다.(37-39절)
예수님의 부활로 힘을 얻은 제자들이 강림한 성령과 더불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내리신 파견설교의 내용이 빈말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다. 수많은 이들이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바쳤다. 이렇게 성장한 교회 안에는 어느덧 여러 가지 직무가 생기고 이 직무를 맡은 교역자가 생기게 된다.
사도들로부터 시작하여 주교, 사제, 부제, 신자들에 이르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전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이 비록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고 하더라도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예수님의 대리자요 하느님의 교역자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서로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건네며 복음선포의 하루를 시작하자.(40-42절)...........◆
† 하느님 말씀의 칼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복음이라고 하면 평화와 사랑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당연히 평화와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가정이 평안해지고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이 있습니다. 복음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와 사랑만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음을 통한 평화의 복이란 복음의 전개되는 과정에서의 갈등과 아픔은 무시하고 복음의 결과만을 두고 한 말인 것입니다. 이는 농부가 봄에 땀과 눈물을 흘리며 열심히 씨를 뿌렸던 과정은 무시하고 오직 추수 때 알곡의 기쁨만을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
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 생각지 말라
사람들의 세상에사에는 평화와 분쟁이라는 두 가지 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분쟁보다는 평화를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오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과연 평화가 아닌 분쟁이란 말입니까? 이 말씀에 앞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바로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하느님을 배반하고 적대하게 만든 사탄의 권세를 무찌르고 인간들에게 참 평화를 주시러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둠의 세력과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시고는 우리 인간에게 참 평화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참 평화는 전쟁에서 이겨야만 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보다도 먼저 전쟁을 하러 오신 것입니다.
지난날 정부에서 조폭과의 전쟁을 선포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에 그 조폭집단과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만을 제안한다면 과연 이 땅에 폭력이 없는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물론 세상의 대화와 타협으로서 평화를 이루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그렇지 않는 악질적 속성을 지닌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평화를 위해 전쟁을 불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될 그런 불가피한 상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내가 세상에 칼을 주러 왔다.
오늘복음에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땅에 우리가 치러야 할 전쟁의 내용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칼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23장 29절에 말씀합니다. "내 말은 정녕 불같이 타오른다. 망치처럼 바위라도 부순다. 똑똑히 들어라." 또한 히브리서 4,12에도 말씀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쪼개고 잘라내는 수술하는 살아있는 수술 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 앞에 우리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들이 의롭게 소생하는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즉 미사나 기도시간에 우리의 심령은 살아있는 말씀을 통해 새로운 조성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미사참례에 나와서 좋은 말씀 한 구절을 듣고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거나, 일단 교회 문밖을 나가고 가면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의 칼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3. 재창조의 원리
제철공장에 가면 용광로에서 불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이 불물 위에 다시 찬물을 끼얹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과정을 반복하는 사이 그 불물은 엄청난 강도를 지닌 강철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죄에 찌들고 병든 인간의 이기심과 야욕을 녹여서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하느님의 피조물로 재창조해 내는 불구덩이(용광로)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비유하면, 하느님은 마치 숙련된 조각가가 크고 단단한 바위덩어리를 수십만번 쪼개고 다듬어 자기가 원하는 조작작품으로 만들어 내듯이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려 쪼개고 다듬어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재창조하시는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마음을 쪼개고 다듬는 책무에 소홀합니다. 특히 신앙에 관련한 믿음, 마음에 대해서는 매우 소홀히 하고 쉽고 편하게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믿습니다"라고만 하면 당장에 하늘이 갈라지고 복이 쏟아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얻어맞을 때는 얻어맞고 회개할 때는 회개하는 것이 복 받을 자가 되면 복을 받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형상이 되기까지는 수천, 수만 번을 끊임없이 말씀의 칼으로 얻어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루가복음 2장 34-35절에는 시므온이 갓난 예수를 품에 안고 예언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 때문에 넘어질 자들이 누구이고, 일으킬 자들은 누구란 말입니까? 즉 여기에서 넘어질 자, 즉 패할 자들은 자기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는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으킬 자, 즉 흥하는 자들이란 비록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 죄의 드러남을 받고 회개한 겸손한 마음들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질 권리이고 다른 하나는 버릴 권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받으려고 하지 좀처럼 버릴 줄을 모릅니다. 내 뜻과 고집만 주장하지 하느님의 큰 뜻을 받을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이 말씀을 깨닫는 자마다 예수님의 말씀의 칼 앞에 겸손히 엎드려 과연 내 마음가운데 하느님의 큰 뜻을 반역하고 거스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서 그것을 끄집어 내어 회개하는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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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무더위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