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최후의 삶을 장식한 김재규와 차지철
김재규와 차지철
김재규(1926년 3월 6일~1980년 5월 24일)와 차지철(1934년 11월 6일~1979년 10월 26일)의 관계는 그냥 단순하게 보기가 힘듭니다. 먼저 김재규의 경우 경상북도 구미근방에서 1926년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1946년 육군사관학교 2기생으로 수료하여 소위를 달고 군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 1947년 군ㆍ경 친선 축구대회가 열리게 되는데 이때에 양측이 경기중에 주먹다짐을 벌이는 일이 발생하고 결국 이 문제에 대하여 육군본부에서 징계위원회를 엽니다. 그리하여 그날 당직 장교였던 김재규가 직위해제 되는데요 문제는 김재규가 그날 당직장교였다고는 하나 정말 잘못을 했는냐는 것인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당시 김재규의 군 선임지휘관중에서 좌익경력 소유자가 있어 김재규를 무고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김재규는 대구 대륜중학교와 다른 한곳에서 체육선생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소위로 복직됩니다. 그리고 난 이후 1961년에는 드디어 준장으로 진급합니다.
그리고 차지철의 경우 1934년생으로 아버지가 상당히 바람기가 심하여 사실상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53년 육군사관학교 12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을 하게 되고 포병간부시험에 합격을 하여 군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1958년 지금의 김포에 있는 1공수여단이 처음 창설되었을 때 공수단에 지원하여 공수단 장교가 됩니다. 이때 만나게 되는 사람이 바로 훗날의 대통령 전두환입니다. 그러다가 1961년 5월 초순에 서울에 잠시 휴가차 나갔다가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박종규 소령의 소개로 서울 명동의 샤보이 호텔(1975년 조양은의 호텔습격사건이 벌어진 그 호텔)에서 작정희 소장을 만나게 되고 곧바로 의기투합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연들을 안고 있는 두 사람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발생하였을 때 김재규는 육군6사단장으로 차지철은 공수단 중대장(대위)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박정희장군이 공수단을 차출하여 서울까지 진격하여 들어오도록 했고 이에 당시 공수단장이던 박치옥 대령(육사 5기)이 이에 호응 공수단을 서울로 진격시키려고 하였으나 당시 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의 병력출동 저지 지시를 받은 서종철 대령등이 공수단 사령부에 들이닥치자 공수단 사령부가 주춤하게 됩니다. 이때 차지철 대위가 도끼로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와 틴약을 실고 서울로 들어갑니다. 이때 서울의 중요다리였던 한강 인도교에 총장이 보낸 저지병력이 헌병 50명 정도가 있었는데 이들을 단번에 박살내고 서울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김인식 대위와 이영기 대위등의 동료들과 함께 박정희 장군의 경호대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김재규는 박정희 장군의 부름을 받고 장군 신분으로 호남나주비료공장 사장이 되어 비료공장의 운영을 맡았다가 다시금 군에 복귀하여 보안사령관과 3군단장을 끝으로 1972년 중장으로 전역합니다. 그리고 차지철은 1963년 중령으로 전역한 후 박정희의 도움으로 국회에 진출 4선의원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던 중 1968년 드디어 두 사람이 처음 충돌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3선 개헌(改憲) 문제입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2번까지 가능한 대통령을 3번 할 수 있기 위하여 헌법의 개정을 준비중이었는데 이때 공화당에서 의견통일을 해주어도 시원찮을 당의장 정구영이 반대를 하게 되자 이를 설득하러 갑니다. 그러나 김재규는 정중하게 설득을 시도하나 차지철은 자신의 주례선생님이었음에도 박정희의 뜻을 받들어 윽바지르는 상황이 벌어졌고 결국 열이 받을 때로 받은 김재규가 밖으로 나와서 차지철과 대판 싸웁니다.
"나이드신 어른에게 그게 무슨 말투인가?"
"보안사령관이 그렇게 힘이 없어서야 원. 각하의 뜻이 먼지 몰라서 그러는거요?"
"머야 대위주제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이렇게 한판을 싸우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향한 적당한 충성경쟁이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넘어갑니다만은 1974년 8월15일 국립극장의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 벌어지게 되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당시 경호실장 박종규가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자리에 과격파 국회의원 차지철이 김종필 국무총리와 김정렴 비서실장의 추천으로 경호실장에 임명이 됩니다. 그리고 코리아게이트 사건의 휴유증을 극복하고자 신직수 부장을 해임하고 김재규를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합니다. 사실상 두 사람은 유신권력의 정점에 오른 셈이지요. 사실 여기까지 온 것은 박정희대통령이 중용했다는 것으로 사실 박정희 대통령은 과거에 죄익경력 문제로 사형직전까지 갔던 적이 있어 어려웠던 시절을 겪었던 두 사람을 각각 총애하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초반에는 별 문제없이 일처리가 잘됩니다. 그러던 중에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를 하게 되자 두 사람은 힘을 모아 김정렴 비서실장을 몰아내고 본격적으로 충성경쟁을 벌이게 되지요.
그리하여 서로가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번번히 김재규 부장이 패하고 마는 것이 차지철이 경호실장의 직을 이용하여 매일 아침 먼저 들어가서 정보보고를 하면서 김재규의 보고순서를 가로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각종 정치문제에 간여를 하게 되는데 어떤 면에서는 두 사람이 싸울 때 싸우더라도 자신에게는 목숨 걸고 충성을 다하도록 하는 박정희식 박치기 충성을 강요한 박대통령이 어느 시점에선가 차지철을 좀 더 총애하게 됩니다.
당시 그런 사정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청와대 내에서의 대화
"각하 차지철 실장이 분에 넘치게 정치문제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정되어야 합니다.(김계원 비서실장)"
"괜찮아 차실장은 4선의 국회의원 출신이야 걱정말어. 정치를 잘 아니깐.(박정희 대통령)"
중앙정보부 국장회의때
"요즘 차실장이 남산 3국장(국내정치담당국) 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김정섭 중정 정치담당 차관보)"
"차실장이 그토록 열심히니 우리 중정은 늘 핫바지 저고리지요(중정 고위간부)"
늘 이렇듯 차지철은 월권행위(越權行爲)를 하게 되는데 여기에 늘 위기의식을 느끼던 김재규는 나름대로 열심히 직무수행을 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대결하게 되는 것이 바로 신민당 전당대회입니다. 1979년 5월에 있었던 신민당 전당대회에서는 차지철이 이철승의원을 지원하나 김재규는 김영삼을 지원하면서 당시 연금중이던 김대중의 연금도 풀어줄 정도였습니다. 결국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로 당선되자 두 사람은 관계가 폭팔 직전까지 가게 되는데요. 그러던 중 신민당에서 내분이 일어나 김영삼 총재가 직무정지가 되면서 상황이 다시 꼬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국회에서 김영삼 총재의 제명동의안이 올라오자 김재규는 어떻게 해서든지 야당 총재의 제명만은 막으려고 했었지만 차지철이 공화당을 조종하여 이를 통과시켜버리고 말지요. 결국 이렇게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던 중 김재규가 사표를 내려고 했습니다만 박정희 대통령은 하는 말이 "가만있어 임자만 잘못한 것이 아니자나 괘안아 계속 일해"
그러나 당시 분위기는 정보부장으로 무능하다는 평과 함께 다른 사람들이 하마평에 오르게 되자 결국 김재규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고 1979년 10월26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날 박정희 대통령의 지방행차에 김재규도 동행하려고 했으나 차지철이 이를 거부하고 서울에 남아서 서울을 지키라고 하는 바람에 김재규는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분이 풀리지 않은 김재규는 차지철을 완전히 손봐야 되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러던 중 올라오는 비행기 안에서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감을 감지한 김계원 비서실장이 두 사람의 화해 술자리를 주선하였으나 이미 마음이 서버린 김재규는 차저철을 쏘아버리고 우리 옛 속담에 머가 미우면 머도 밉다고 박정희 대통령까지 쏘아버린 것입니다. 사실상 우발적인 총격인데요. 10.26에 대하여서는 당시 백동림 수사과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10.26 사건은 계획적이라고 보기에는 우발적이었고 준비가 엉성했다고 보기에는 치밀한 면이 있었다" 라고 하여 단순하면서도 복잡성이 있는 사건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과 같이 두 사람의 숙명적인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차지철의 월권도 월권이지만 결국에는 박정희대통령의 박치기식의 과잉충성경쟁이 두 사람 사이는 물론이요 유신시대의 황혼을 재촉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