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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기념해야 할 일
출 12: 1-10
지난 1999년, 한 해가 저물어가는 연말에 저는 새 천년을 앞에 두고 한 주간 동안 입산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나간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21세기를 기도로 맞이하고 싶은 생각에 비록 힘이 들었지만 입산기도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산에 올라가 주의 종으로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또한 한국 교회가 민족을 구원하고 이 시대를 바르게 인도할 수 있게 되기를 힘써서 기도했으며 제가 그 일에 쓰임 받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던 중에 저는 잠깐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에 하얀 옷을 입은 어떤 분이 나타나 저에게 기념접시를 하나 건네주었습니다. 그 접시에는 무엇인가가 써있었는데 저는 그것을 제대로 해독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후 다시 그 하얀 옷을 입은 분이 내게 다가와 친절하게 접시에 새겨진 글씨를 해독해 주었습니다. 그 글씨의 내용은 "그가 너를 즐거워하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비록 꿈이었지만 너무 감격했습니다. 주님이 나처럼 부족한 사람을 인해 즐거워하신다고 하니 이보다 감격스러운 일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잠시 후 꿈에서 깬 저에게는 기쁨보다 오히려 두려움이 앞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내가 꾼 꿈을 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의 꿈처럼 완전한 수준의 계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생시처럼 너무나도 생생한 꿈을 꾼 후에 정말 하나님이 나로 인해 즐거워하실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겠다는 큰 책임과 의무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꿈 이후로 이제까지 저는 꿈처럼 하나님이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꿈은 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꿈으로 제 기억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크고 중요한 사건인 출애굽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출애굽 사건은 자신의 민족을 존재할 수 있게 한 실로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만일 출애굽이 없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은 이름 없는 작은 민족으로 남의 나라에서 노예로 살다가 사라져 버린 비참한 소수 민족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을 소유한 약속의 민족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에게는 영원히 기념해야 할 일이요,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 기독교인에게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건입니다. 특별히 이번 주일은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을 받은 8·15 기념주일입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는 출애굽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해 한국 기독교 초기의 많은 성도들의 기도와 독립운동이 밑거름이 된 것은 이제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이 귀한 날,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을 함께 듣기를 원합니다.
1. 출애굽을 위해 어린양이 죽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흠 없고 일년 된 수컷"(5절) 어린양을 잡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애굽에 내릴 열 번째 재앙을 앞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라는 모세의 요청을 계속해서 거부했습니다. 많은 재앙을 거듭해서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의 강팍한 마음은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내리기로 결심하셨는데 바로 온 애굽의 장자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모두 죽이는 무시무시한 재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엄청난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존하시고자 흠 없고 일년 된 수컷 어린양을 온 이스라엘 백성이 잡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흠 없는 어린양"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흠 없는 어린양은 아직 사람의 손에 이용되지 않은 순결한 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흠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직 새끼를 낳지 않았으며 사람에게 이용되지도 않은 양을 가리킵니다. 또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아직 사람을 태운 적이 없는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예수를 낳게 된 마리아가 동정녀였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동정녀란 아직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깨끗하고 순결한 처녀를 일컫는 말입니다. 물론 결혼한 여인이라고 해서 흠이 생겼다는 말은 아닙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를 낳을 어머니는 동정녀의 몸이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에 의해 더럽혀진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일에 사용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부정함은 결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어울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에 대제사장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정결케 하는 예식을 하고 물두멍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본 이 후에야 지성소에 나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만일 부정한 모습으로 지성소에 들어갔다면 그는 결코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을 가능케 했던 "흠 없는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린양을 취하여 그 고기를 먹고 그 피를 이스라엘 집의 문지방과 문인방에 바르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온 애굽을 뒤덮을 때 어린양의 피가 묻어있는 집은 하나님의 진노가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그 날을 유월(踰越)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섭취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하리라"(요6:35)고 말씀하셨습니다. 흠 없는 어린양이 출애굽 백성들을 위해서 희생했듯이 예수께서 죄인된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몸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월남 파병을 위한 훈련 중에 중대장이었던 강재구 소령은 수류탄으로 전 중대원이 몰살당할 위기에 자기 몸을 던져 날아오는 수류탄을 끌어안고 산화하므로 모든 중대원을 다 살렸습니다. 그는 자기 몸을 자기 부하들을 위해 희생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은 자기 몸을 드려 전 인류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셨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이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의 값을 대신 치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친 것입니다.
2. 출애굽 때 어린양의 피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어린양을 취하여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7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장자들이나 생축의 처음 난 것들이 흘려야 할 피를 대신 "흠 없는 어린양"이 흘리도록 한 것입니다. 결국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의 집은 넘어가게 되었고 온 이스라엘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며 구원의 감격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본래 인간은 죄로 인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의 문제, 즉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니"(롬3:23)라고 인간의 죄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이 죄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결코 사죄함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히9:22)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 흘려야 할 피는 누구의 피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히9:14) 그러므로 출애굽을 위해 흘렸던 어린양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피를 흘려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아들을 유월절 어린양으로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놀라운 구원의 의지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결국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곳에서 구원하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이러한 계획은 이미 첫 사람 아담에게서부터 발견됩니다. 특히 아담이 죄를 짓고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가죽으로 옷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아담을 위해 한 생명이 대신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입었던 가죽옷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6:53)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가 최초에 한국에 전래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기독교인은 모두가 다 사람의 살과 피를 먹는 식인 습관이 있다는 큰 오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말씀은 예수의 속죄적 희생을 마치 음식을 먹고 마시듯이 내면적으로 깊이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그저 겉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죄의 은총을 내 생명처럼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3. 하나님께 순종하므로 출애굽의 복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어린양을 취하여 먹고 그 피를 그들의 문지방과 문인방에 발랐습니다. 언뜻 이와 같은 행동은 주술적이고 미개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미신적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고통과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신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이 일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사건을 예시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큰 믿음을 가지고 모세의 말에 순종하여 흠 없는 어린양을 취하고 그 피를 바른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으로 하나님의 진노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집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온 애굽 성안이 장자들의 죽음과 생축들의 떼죽음으로 큰 통곡 소리가 그치지 않을 때 이스라엘의 집은 오히려 자신들을 구원하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평안이 넘쳐났습니다. 하나님의 계속된 진노와 하나님의 종 모세의 계속된 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던 애굽의 바로는 죽은 황태자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대제국 애굽을 다스리는 바로라도 더 이상 하나님께 저항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결국은 온 이스라엘이 빨리 애굽을 떠날 것을 말하였습니다. "너희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며 하나님을 향한 마지막 자비를 구했습니다. 바로와 애굽 사람들은 떠나는 노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과 금과 패물과 의복을 구했을 때 그들의 요구대로 온갖 패물과 의복을 다 건네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때서야 하나님이 전능하시며 그 누구도 하나님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온 이스라엘에게 모세의 출발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이 명령을 듣고 모든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대행진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430년의 노예 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약속과 희망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그들의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죄악의 땅, 노예의 땅, 통곡의 땅, 죽음의 땅을 떠나 영광스러운 가나안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자신들의 고통을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이스라엘이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모두 순종할 때에 드디어 출애굽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푸신 많은 기적중에서 가장 처음 행하신 기적이 바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베푸신 기적이었습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다 떨어졌을 때 예수님은 모친 마리아를 통해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하인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그들은 무슨 연유인지도 모르는 채 예수의 말씀대로 물을 아구까지 채웠습니다. 예수께서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하인들이 예수의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항아리에 채워진 것이 물인지를 뻔히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이러한 순종을 통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물이 변하여 최고상품의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그 잔치는 처음보다 더욱 기쁨이 가득한 잔치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다만 순종이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그 자리에 언제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광복 56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연합군에 의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날입니다. 그 날 우리 민족의 만세 삼창의 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손이었지만 일본의 손은 패망과 굴욕의 손이었습니다. 그런 일본이 56년이 지난 오늘 다시 군군주의가 부활할 기미를 보이고 있으며 우리를 36년이나 강점하면서 비인간적 폭력을 자행하고도 그것을 미화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시류에 의해 다시 동북아의 평화가 긴장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과거 일본의 죄악상을 온 세상에 일깨우고 그들의 회개를 부르짖으며 남북의 협력과 하나됨을 통하여 일본 군국주의 부활에 대해서 잘 대처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흠 없는 어린양을 잡아 취하고 그 피로 해방을 받았듯이 우리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 국가가 되어 세계를 섬기는 위대한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를 대대에 기념하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출 12: 1-10
1. 양이 있어야 합니다(1-5)
며칠 전에 새벽에 교회에 나오는데 육교 아래 택시들이 서 있는데 하도 길어서 세어 보니까 스물 한 대나 되었습니다.
공항에 와서 기다리는 택시들의 줄이 너무 길어서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하는 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전에 장인어른 장례식이 있어 서울에 바쁘게 다닐 때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오면서 택시 기사분께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보통은 1시간 30분, 그리고 길면 두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항에 들어올 때도 손님을 태우고 들어올 때도 있지만 빈 택시로 들어와서 기다릴 때가 더 많다고 했습니다.
다들 살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일거리가 있는 사람들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일거리 자체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고, 열심히 일했지만 부도가 나서 빚더미에 올라앉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중에는 구원에 대해서 보다 지금 당장 먹고사는 것이 문제고, 직장이 문제고, 사업이 문제이니 그런 것을 해결할 방법에 대해서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하시는 분들도 혹시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려울수록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믿음에 굳게 서기 위해 더욱 애를 써야 합니다.
성경 요1서 5:4에 보면 '대저 하나님께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했고,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돈이 우리를 조금 더 행복하게 할 수도 있고, 조금 더 불행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 행복은 돈이나, 출세나, 성공에 있지 않습니다. 참 행복은 하나님 안에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형편에 있어도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자기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사람의 모든 지각을 초월한 평안이 있는데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 평안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다윗처럼 만족하며 살았고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사58:11 말씀에 보면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한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굳게 서기만 하면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에게 문제될 것이 없게 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하다가 주님 나시기 약1400년 전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3,400년 전에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유월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전에 2절에 보면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이 달'이라고 했는데 '이 달' 즉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달은 원래 이스라엘의 월력으로는 7월이었습니다.(오늘날 우리가 쓰는 태양력으로는 3월과 4월 사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달이 7월이었지만 그때부터는 그 7월이 해의 첫 달 즉 1월이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이제부터는 이 세상의 자연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구별된 생애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후5:17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한 것처럼 삶의 모든 것의 중심이 하나님이 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어린양을 한 마리씩 준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달라고 여러번 말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무서운 재앙들을 내렸지만 바로가 끝까지 거역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날을 정하시고 그날 애굽에 있는 모든 맏이를 죽이겠다고 하셨습니다. 해의 첫 달이 되게 한 그 달 14일 밤 애굽에 살고 있는 모든 집의 장자를 죽이겠다고 하시면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면 그것이 표시가 되어서 그 집에 들어가 그 집의 장자를 죽이지 않고 그냥 유월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逾越하는 말의 逾자는 넘을 유자이고, 越자도 넘을 월 자입니다. 그러니까 그 피가 있는 집에는 들어가 그 집의 장자를 죽이지 않고 그냥 넘어 가겠다(passover)고 하신 것입니다.
이 유월절 사건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어린양이 있어야만 했던 것처럼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대신 피를 흘려줄 하나님의 어린양이 있어야만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어린양 예수님을 당신께서 친히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라고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2. 피를 발라야 합니다(6-7)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양의 피가 있어야 했지만, 양의 피가 있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피를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라야만 했습니다.
마22에 보면,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임금은 사람들에게 '어느 어느 날 나의 아들의 혼인이 있으니 그날 꼭 와 주십시오' 하고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다 그날 오겠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잔칫날이 되었습니다. 청했던 사람들에게 종을 보내어 잔치에 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관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어떤 사람은 밭으로 일을 하러 가야 하고, 어떤 사람은 장사를 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못오겠다고 했습니다.
잔치가 다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종들에게 거리에 나가 아무 사람이나 만나는 대로 데려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종들이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리고 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천국은 누구든지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 사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 집안에 있는 사람이 어떤 인품을 가진 사람이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출신하고도 관계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도 양의 피를 바른 사람은 구원을 얻었고,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도 그 말을 안 믿고 양의 피를 안 바른 사람은 그 밤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잔치가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왔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들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임금은 '어찌하여 예복을 안 입고 여기에 있느냐'고 화를 내면서 '수족을 결박해서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의 배경을 잘 알지 못하면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갑자기 오라 해놓고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화를 내면 어떻게 하나?' 또 '아니 다른 손님들은 언제 어디서 예복을 준비해서 입었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러니까 2000년 전, (2000년 전이면 우리 나라의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보다 훨씬 더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을 보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그저 가죽옷을 하나 가지고 평생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는 그 옷을 손자에게 물려주고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잔치에 간다고 특별히 입고 가는 예복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 예복이라는 것은 잔치를 준비한 사람이 준비해서 청한 사람들이 오면 입고 있는 옷 위에 걸치라고 주는 까운과 같은 것이 었습니다.
주인이 준비를 해서 손님들이 들어올 때 하나씩 다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손님들은 그 겉옷을 입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또 잔치 자리에서는 그 겉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복을 준비해 주었는데도 그것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 비유로 해주신 말씀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복을 입어야 하는것 처럼, 또 양의 피를 발라야 하는것 처럼우리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흘려주신 예수님의 피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요3:14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민21)
막16:16에 보면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3. 고기를 먹어야 합니다(8-10)
애굽에서 죽지 않고 구원을 얻는 것은 어린양의 피를 바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피가 발라진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8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고기를 먹으라고 했습니다.
애굽에서 해방되는 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오면 바로 가나안 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광야를 지나가야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광야는 낮에는 무척 뜨겁고, 밤이 되면 추운 곳이었고, 전갈들이 많은 위험한 곳이었고 또 무엇보다고 걷기가 힘든 사막이었습니다. 그 사막을 지나가려면 힘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기를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힘을 얻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합니다. 적당하게 쉬기도 해야 하고, 적당하게 운동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것은(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것입니다. 먹지 않으면 사람은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영적으로도 똑같습니다. 신앙인들이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무력감에 빠지기도 하고, 신앙의 경주에서 낙오하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피는 발랐지만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빌2:12에 보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또 히4:16에서는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벧 2:2에 보면,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은)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이루라고 했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도 구원이지만 진짜 구원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애굽에서 나오는 구원을 justification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아무런 공로가 없지만 예수님의 피공로를 믿으면 의롭다고 인정을 해 주시는 구원입니다.
이렇게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날 때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신학적으로는 glorification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구원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완성을 얻기 위해서는 광야를 무사히 지나가야 합니다.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구원을 성취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구원을 신학적으로는 sanctification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애굽에서는 나왔지만 잘 먹지 않으면 광야를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콩나물 시루의 콩은 물을 계속 먹어야 합니다. 물을 제때 제대로 못 먹으면 처음에는 억세집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잔뿌리가 납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못 먹으면 결국에는 말라 비틀어져 죽고 맙니다.
영적으로도 똑같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먹지 않으면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예배를 통해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8,9절의 말씀을 보면 날로나 물에 삶아 먹지 말고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같이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날로 즉 생것으로 먹으면 안됩니다(날탱이로 먹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정성없이 듣고 읽는 것이 날로 먹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이 없이, 또 간절히 사모함이 없이 팔짱을 끼고 앉아서 '오늘은 무슨 말을 하나 한번 들어나보자' 하는 자세로 듣는 것이 날로 먹는 것입니다. 또 조금 피곤하고, 조금 춥다고, 방바닥에 배를 깔고 성경말씀을 읽는 것이 날로 먹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물에 삶아 먹어서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희석 시켜서는 안됩니다.
고후 2:17에 보면 사도바울이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는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한다'고 했습니다.
여기 혼잡하게 한다는 말은 당시에 그런 일이 흔하게 있었는데 포도주에 물을 타 양을 많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말했지만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겠나?' 하면서 적당히 빼고 더하고 해서 말씀을 희석시켜서 전한다면 그것이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성도들이 말씀을 들을 때 '설교는 그렇게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하고 자기 마음대로 걸러서 듣는 것이 바로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이고, 고기를 물에 삶아 먹는 것입니다. (*레마선교회 - 이명범)
불에 구워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불에 구워 먹어야 합니다. 설교자도 기도로 말씀을 성령의 불에 구워야 하고, 성도들도 기도로 들려주시는 말씀을 성령으로 구워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령의 불로 구워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맛이 있고, 소화가 잘 되고, 탈이 나지 않습니다. 불에 구워 먹으면 얼마나 맛이 있는지 모릅니다. 꿀 곧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불에 구워 드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영의 힘이 세집니다.
마지막으로 불에 구운 고기를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무교병이란 누룩이 들어가지 않는 빵입니다. 빵은 누룩이 들어가야 부드럽고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무교병과 함께 먹으라고 하셨습니까?
성경에서 누룩은 죄를 상징합니다. 말씀만 먹어서는 안되고 죄를 제해 버린 삶을 살면서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쓴 나물은 고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필수적으로 따르는 것이 절제생활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신앙생활은 곧 절제생활이고 절제생활은 곧 고통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당하는 소극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주일성수, 술, 담배 등등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적극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새벽기도, 봉사 등등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쓴 나물이지만 그것을 고기하고 같이 먹으니까 참 맛이 있었습니다. (한식회관)
어려운 때입니다. 어렵고 힘이 들수록 하나님께 바짝 다가가야 합니다. 말씀을 불에 구워 맛있게 먹으시고 힘을 얻으셔서 영육간에 꼭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의 피를 뿌리는 생활
출 12: 1-13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해방할 때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하고도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방법을 사용하실 때의 상황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방법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손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이러한 정말 생각지 못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군대도 없고 무기도 없었던 이스라엘 민족을 당시에 가장 강력한 군주국가인 애굽에서 탈출하여 해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의 현장에 개입하셨을 때에는 놀랍게 일이 되어지고 술술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귀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은 항상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냥 '좋은 설교 한편' 듣는 것으로는 우리 영혼과 인생에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우선 본문에 나온 내용을 살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어 10일에 어린양을 취하여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잡으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양을 잡을 때 흘린 피로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합니다. "양의 피를 발라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생명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사는 것이요, 듣지 않으면 재앙을 면치 못합니다. 애굽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그 말씀만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입니다. 다른 이론과 방법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말씀입니다. 9가지의 재앙을 당했던 애굽의 바로가 이번에도 반기를 든다면 이제 자기의 맏아들이 죽어나갈 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도 여전히 불신앙과 반역의 위치에 있는 바로에게 마지막 재앙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애굽땅에 있었던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지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재앙을 면키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의 성공과 실패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사는 길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다른 말씀을 들으면 안됩니다. 석가의 말씀을 들어도 안됩니다. 김용옥씨의 말을 들어도 안됩니다. 아무개의 말에 귀를 쫑끗해 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근신하며 깨어있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대적 마귀가 삼킬자를 찾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귀는 항상 그리스도인들의 근처에 어슬렁거리면서 '틈'을 노립니다. 그 틈이 생길 때에 비집고 들어와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을 점점 악화시킬뿐 아니라 파멸시킬려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5:7절에 보면 "염려하지 말고 다 주께 맡기라"고 합니다. 다시말하면 "염려"는 마귀가 틈을 노리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됩니다. 이 염려는 우리의 환경속에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습니다. 염려로 밥을 먹는 것처럼 염려를 합니다. 아직 오지 않았어도 미리 당겨서 염려합니다. 1년후에 있을 일을 오늘 가지고 와서 염려합니다. 5년후에 일어날 일을 잘못될 줄 확신을 하고 염려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믿지 않으면서 염려는 만들어서 염려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신앙의 기반이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환경 그것도 잘못될 것을 짜놓고 안될 것을 믿습니다. 염려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를 분리시키는 틈이 됩니다.
또 벧전5:5절에 보면 젊은이들이 범하기 쉬운 '교만'이 마귀가 노리는 틈이 됩니다. 겸손하지 않고 조금 안다고 교만하면 반드시 마귀가 틈을 타게 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겸손한 것이 생명입니다. 또 교회의 지도자들이 범하기 쉬운 '더러운 이'를 목적으로 무엇을 할 때에 마귀가 틈을 탑니다. 뿐만 아니라 지도자들이 생명력을 가지고 은혜속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타성에 젖다보니 '부득이함으로' 할 때에 마귀가 틈을 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벧전4:12-13절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과 '시련'이 오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믿음으로 견고케 하실려고 허락한 축복의 기회인데 마귀는 이것을 낙심케 하고 넘어뜨리는 일에 사용합니다.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되는데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는다면 마귀에게 결정적으로 틈을 보이게 되어 쓰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며 그 말씀을 중심으로 생활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문제는 주의 말씀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은 사람들은 "양의 피를 발라라"하는 말씀을 따라 바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제가 성도들에게 가끔 시험삼아 묻습니다. "신앙생활 하기가 쉽지 않지요? 참 어렵지요?" 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쉽습니다. 사고의 전환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어렵다고 생각하면 어렵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너무 어렵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성경대로 신앙생활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교회 다니는 것은 할 수 있지만 말씀대로 살기는 정말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부흥회 기간중에 다른 교회에 다니는 성도가 부흥회에 참석을 했다가 지금 큰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생각했던 신앙생활이 "모두 헛된 것이었나?"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말씀을 붙잡고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십니다. 다시말하면 믿음생활의 모델입니다. 우리는 그 모델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불가능한 것을 세워놓고 할 수 없는 것을 만들어 놓고 우리에게 하라고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쉬운 것입니다. 누구나 믿음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피를 바르라"고 하면 바르면 그 뿐입니다. 다른 무엇을 해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출 12: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문에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치지 못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피만 바르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런 것입니다. 성령님을 구하라고 하면 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응답하신다고 했으니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명령하라고 했으면 명령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믿고 순종하는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삼하24장에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 전역에 인구조사를 실시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두고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큰 징계가 임합니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단순히 인구조사를 한 것 때문에 노하셨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에 즉흥적으로, 순간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 이전에 어떤 계기가 있을 것이고 그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말씀드리지 않고 자기의 생각으로 일을 처리할 때에 하나님은 여러번 두고 보십니다. 하나님은 오래참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징계를 내리실 때에는 참고 참다가 그것도 긍휼을 가지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다는 것은 자기 속에 '자랑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나라는 강대해지고 부족할 것이 없는 막강한 국가가 되어 큰 소리를 칠만도 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한번 얼마나 나라가 커졌는가를 보기 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루를 살아가는데 실패했을 것입니다. 하루를 실패하면 1년을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왕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놓칠만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합니다. 너무 잘되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고 또 너무 안 좋은 일 때문에 낙심하여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에게 또한번의 테스트를 합니다. 징계를 3가지로 내립니다. 첫째는 7년 기근, 둘째는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달을 도망다님, 셋째는 온 땅에 3일동안 온역이 임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세 번째를 택했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뜻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고 '꼼수'를 두었습니다. 자기가 책임을지지 않고 백성들에게 떠넘겼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할 때의 근성이 또 나왔습니다. 그래서 3일이 가기 전에 7만명이라는 엄청난 백성들이 죽습니다. 그나마 하나님의 긍휼로 중단되었습니다. 다윗이 진실하게 주님께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꼼수'를 쓰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이실직고(以實直告)해야 합니다. 그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진실이 생명입니다. 정직이 사는 길입니다. 다윗은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아라우나가 모든 제물과 제사에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고 했지만 뿌리치고 값을 제대로 치루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피가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피가 없이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피'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피가 없을 때에 항상 '자기 의(義)'가 발동됩니다.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그분의 역사하심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무엇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삼하 24:10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삼하 24:16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삼하 24:21 가로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다윗이 가로되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
삼하 24: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삼하 24:25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제사를 드리고 난 다음에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습니다. 피를 재앙을 막은 것입니다. '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피'는 자신을 살리는 길일 뿐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는 길입니다.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주님은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진짜 '피'를 흘리셨습니다. 짐승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 '피'가 우리를 의(義)롭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 '피'를 원합니다. 그 '피'를 가지고 오기를 원하십니다. 재앙이 넘어가는 것은 오직 '피'로만 가능합니다. 그 피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일이 없습니다(행4:12).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우리를 살리십니다.
이제는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영원한 피'를 발라야 합니다. 생활속에서 발라야 합니다. 자녀들을 위해서도 그 피를 발라야 합니다. 직장과 사업장을 위해서도 그 피를 발라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옳지 않은 감정과 생각을 위해서도 피를 발라야 합니다. 틈을 내었으면 바로 예수님의 피로 수리를 해야 합니다. 수리하지 않으면 더 큰 틈이 생깁니다. 즉시 피를 바르십시오. 예수님의 피가 옳은 것입니다. 그 피를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 믿을 때에만 사용하는 그 피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날까지 그 피는 우리에게 효능있는 피입니다. 실제적인 생명의 피입니다. 저주가 물러나고 재앙이 떠나가고 갑자기 오는 재난을 막아주는 피입니다. 기도할 때에도 피가 필요합니다. 예배드릴 때에도 피가 앞서 나가야 합니다. 그 예수의 피로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떠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우리는 의(義)로와 지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를 바르십시오.
떠남의 원리
출 12: 1-13
고집쟁이 성도 길들이기
소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집에 불이 나서 외양간의 소를 끌어내려고 하면 불빛을 무서워하는 소는 영 나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외양간에 있는 여물통을 엎어 버리면 그제서야 소는 그 곳이 자기가 있을 곳이 못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제 발로 걸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계획대로 인도하시고자 할 때 사람이 깨어지지 않고 고집부리며 자기 뜻대로 하려 하면 사용하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제일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을 잠시 치우시는 것입니다.
육신에 병이 들어도 깨어지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플 때는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 기도 좀 해주십시오. 병만 나으면 이제 예수 잘 믿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병이 나으면“기도를 받고 병이 나았나? 나을 때가 되어서 나았지.”라고 하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쉬운 말로 해서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밥통이 엎어지면 주님 앞에 나옵니다. 몸에 심한 병이 들고 직장을 잃고, 하는 일마다 안되어 올 데 갈 데 없으면 그 때에는 손들고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되고 평안할 때에 주님께 손들고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는 떠남에서 그 출발점을 갖는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출애굽에서 출발합니다. 기독교는 떠남에서 그 출발점을 갖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기생 라합은 여리고를 떠났습니다. 룻은 모압을 떠났고, 베드로는 그물과 배와 고향과 친척을 떠났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으로 향하였고, 청교도들은 영국을 떠났고 선교사들은 미국을 떠나 우리나라까지 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가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고 확장되어 간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종살이를 하다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약 1400여 년 전,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3400여 년 전에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유월절(逾越節)에 대한 내용입니다. 유월절 사건은 성경전체의 중심사상이요, 구약을 풀어 가는 열쇠요, 출애굽기의 핵심입니다.
어린양을 준비하라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초태생을 치시기 위하여 들어오시는 날은 애굽에게는 죽음의 날이요 멸망이지만, 하나님의 보호를 입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날이요, 새 출발의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 달로 달의 시작이 되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 어린양을 준비하여 잡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각 사람은 어린양을 취하되 각 가족대로 취하고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인수를 따라 하나를 취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어린양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보호할 것입니다. 즉 애굽의 전지역에서 죽음의 곡성이 울리는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살길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어린양을 준비하도록 명하신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위해 친히 어린양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어린양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유월절을 준비하라
유월절 준비는 집을 중심으로 외부적인 면과 내부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선 외부적인 준비는 어린양의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입니다. 이 어린양의 피는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초태생들을 칠 때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표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어린양의 피의 효력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 속에서 실제화 되었지만 오늘날 우리의 구원에도 절대적으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내부적인 준비는 그 밤에 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는 것입니다. 유월절 식사는 허리에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의 긴박성을 보여 줍니다. 이 밤, 즉 이스라엘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밤에 애굽의 모든 신들은 무기력하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 대학살의 기록과 그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몇 년 전에 미국의 워싱턴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박물관의 입구에는 "기억하는 것이 구원의 시작이다"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히틀러의 치하에서 참혹한 인종 차별 정책으로 600만 명이 죽어갔고 동구권에 흩어져 살고 있던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겪었던 홀로코스트의 생생한 기록과 현장들을 보여주고 있는 그 박물관에는 연일 수만 명의 사람들이 다녀간다고 합니다. 아픈 과거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만이 보다 밝은 미래를 위한 구원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다는 현장 체험입니다.
400년의 기나긴 세월을 억압과 고통과 아픔의 역사에서 해방하시던 출애굽 전날 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직접 제정해 주시고 그런가 하면 유월절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새로운 삶의 출발점으로 삼아 주시면서 지난날의 뼈아픈 과거를 잊지 말고 기억하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셨으며, 어떠한 자리에서 구원하셨는가를 후대가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지침서까지 마련해 주셨습니다.
구원을 위해 각자 어린양을 취하라고 하신다.
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會衆)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每人)이 어린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양을 취하되"
400년 동안 온갖 억압과 고통과 서러움을 받아오던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받게 되던 날 밤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 가족대로 매인(每人)이 어린양을 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양을 취하되 흠 없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어린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흠 없는 어린양과 각 가족대로 잡은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방법과 원리가 사람들 보기에는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여도 거기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사는 길은 이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이 없다고 하여서 아무 양을 취해서도 안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지시한 어린 양으로 하되 흠 없는 어린 양으로 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공로나 선행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어린양의 피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구원의 방법과 원리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죽을병에 걸려 암 덩어리를 떼어 내어야 산다고 하는데 끝까지 고집을 피우면서 항생제를 투여하고 식이요법만을 한다면 그는 어리석게도 자신 스스로 생명을 단축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수술을 통해서 암 덩어리를 떼어 내어야 산다면 달리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수술이라는 한 가지 수단을 동원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출애굽기 12장의 말씀은 유월절(Passover)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본토 아비 집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여 년 동안 살던 애굽 땅을 떠났습니다. 출애굽이란 말을 영어로 exodus 라고 하는데 그 말의 뜻은 탈출한다 또는 떠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33년 동안의 생애를 마치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세상을 떠날 것에 대해서 자주 말씀했습니다.“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요13:1).“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실 쌔"(눅9:31). 여기 별세란 말의 원어는 exodus 인데 출애굽 한다 또는 떠난다는 뜻입니다.
별세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세상을 떠난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다른 세상으로 간다는 뜻' 으로 헬라어로 '엑스도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엑스도스'는 출애굽이라는 말인데 모세에게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민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듯이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서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별세한다'는 말을 쓰신 것은 혼자 별세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을 떠나듯이 주님께서 모든 백성들을 이끌고 죽음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을 표현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별세라는 말은 죽는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을 산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22절)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이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한마디로 말하면 십자가에 죽는 것이 떠나는 별세고, 부활하는 것은 다른 세상의 별세입니다. 그래서 별세라는 말 한마디 속에 죽고 사는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날마다'라는 말을 썼는데 날마다는 매일 같이 사는 삶의 현장을 말합니다.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듯이 너도 스스로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죽음을 지고 나를 좇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9장 23절을 본 신앙고백으로 해서 사도 바울이 자기에게 적용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을 떠나고 몸을 떠난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5:8).“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딤후4:6).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입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의 이상현 박사는 기독교 신앙의 특성의 하나는 주변성이라고 했는데 주변성이란 중심에서 쫓겨나고 중심에서 밀려난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밀려나서 갈릴리에서 살고 예루살렘에서 쫓겨나서 사마리아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삶을 강요된 주변성을 지니고 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강요된 주변성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 즉 흩어진 사람들(디아스포라)과 나그네 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발적이든지 강요를 당하든지 고향을 떠나 나그네가 되고, 애굽을 떠나 광야 생활을 하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떠나 가난하고 약하게 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군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입니다.
떠남은 죽음을 의미한다
떠난다는 것은 부정하는 것을 말하고 죽는 것을 말하는데,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 떠나는 종교요 죽는 종교입니다. 고향을 떠나는 종교요 고향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애굽을 떠나는 종교요 애굽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종교요 세상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몸을 떠나는 종교요 몸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별세시키려고 택하셨는데 결국 그들은 별세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별세하기 위하여 믿고 별세의 삶을 살다가 영원한 별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예수 십자가의 죽음에서 자기 죽음을 선언한 바울의 신앙이 우리 자신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애굽을 떠난 출애굽 사건의 중심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애굽에 대해서 죽는 것은 물론이고 집집마다 어린양들을 잡아서 죽여야 했습니다. 자기들이 죽는 대신 어린양을 잡아서 죽여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별세 사건의 중심에도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건이 예수님의 별세 사건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의 순종의 삶의 중심에도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모리아 산 위에서 이삭을 잡아죽이려는 순간 아브라함은 사실은 자신을 죽인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주님만을 따랐던 사도 바울의 생애의 중심에도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고후4:1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2:20).“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요 죽음의 종교입니다.
떠나면 중심에 서고 죽으면 생명에 이른다
기독교에는 역설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쫓겨나고 밀려나서 떠나면 망할 것 같은데 사실은 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이 쫓겨나고 밀려나서 황무지와 산지에 유리 방황했지만 어느덧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를 받아서 쫓겨나고 밀려나서 고향을 떠났는데 얼마 후에는 그들이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도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향과 세상을 떠나 주변성을 지니고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성공한 것입니다. 의로운 죽음은 자기 자신을 생명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4:11,12). 바울의 죽음은 바울을 생명에 이르게 했을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을 생명에 이르게 했습니다.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요 죽음의 종교이지만 실상은 우주의 중심에 서 있는 종교요 생명의 중심에 서 있는 종교입니다. 떠나면 중심에 서게 되고 죽으면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건짐 받은 것이 저희의 무리가 훌륭해서가 아니고 군대가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습니다. 이유가 있다면 하나, 하나님이 저희를 기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유월절을 가장 큰 절기로 기념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하나님,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말못할 어려움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선한 씨, 의의 씨, 사랑의 씨, 진리의 씨, 평화의 씨를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계속 뿌리노라면 통일과 자유 민주주의의 꽃이 피는 날, 세계평화의 날을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났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 세상적인 가치관과 습관에서 떠나야 합니다. 고향을 떠나 이산가족이 된 것이 슬프고 아픈 일이지만 영적인 의미에서는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에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더 많이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이기적이 되었고 배타적이 되었고 탐욕적이 되었습니다. 너무 자기 중심적이 되었고 너무 물질 중심적이 되었고 너무 세상 중심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가치관과 습관에서 떠나야 합니다. 진정한 떠남의 중심에는 죽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붙잡으며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먹으며 우리의 정과 욕심이 죽어야 합니다. 떠남이 중심에 서는 길이고 죽음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