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퍼 리(미국,앨라배마,1926~2016)의 《앵무새 죽이기》는 하퍼 리의 유일한 작품이다. 비록 이 소설은 1960년에 출간 되었지만 이 작품의 배경인 메이콤은 1930년대 미국 남부의 축소판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이 단순히 미국에 국한된 인종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보는 것은 좁은 소견이다. 물론 구체적인 역사적 시간과 지리적 공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작품이 다루는 문제는 좀 더 근본적인 삶의 문제다. 어떤 의미에서 흑백 갈등을 둘러싼 인종 문제는 좀더 보편적인 문제를 다루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품이 성장 소설 전통에 속하면서도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나이 어린 소년이 아니라 소녀를 화자이며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성장 소설은 하나같이 인식론적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경험을 통하여 주인공은 아주 값진 삶의 교훈을 배우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은 스카웃이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진 진 루이즈 핀치다. 작가는 스카웃이 초등학교 입학하기 직전부터 초등하교 2학년까지, 그러니까 줄잡아 3년 동안에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어른이 된 진 루이즈 핀치가 여섯 살에서 아홉 살이 되던 때 일어난 사건을 회상하는 수법을 구사한다. 때로는 스카웃의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이 열 살도 안 된 어린 소녀의 그것이라고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작품이 처음 시작될 때의 스카웃과 작품이 끝나는 장면에서 독자가 만나는 스카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물론 나이를 세 살 더 먹었다고는 하지만 생리적 성장이나 육체적 발육을 훨씬 뛰어넘는 정신적 성장과 영혼의 개안을 느낄 수 있다. 맨 마지막 장면에서 스카웃은 지금껏 그렇게도 만나보고 싶어했던 부 래들리를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된다. 부축하다시피 하여 그를 집에까지 데려다준 뒤 스카웃은 가량비를 맞으며 집으로 향하여 걸어가는 동안 "나는 나이가 부쩍 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 밝힌다. 또한 스카웃은 "집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나는 오빠랑 내가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대수를 빼놓고는 이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별로 많은 것 같지가 않았다" 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필수 과목으로 가르치는 대수를 제외하고 나면 이제 삶에서 더 배울 것이 별로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밝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스카웃이 왜 그렇게 제도 교육을 싫어하는지도 알 만하다. 그녀는 학교 교실 보다는 오히려 삶의 현장에서 삶의 지혜와 교육을 터득한다. 스카웃이 이렇게 정신적으로 '부쩍' 성장하는 데에는 변호사인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의 역활이 무척 크다. 이 밖에도 오빠 젬과 미시시피에서 온 친구 딜을 비롯하여 이웃에 사는 헨리 라파예트 듀보스 할머니와 모디 앳킨스 아줌마, 고모 알렉산드라, 흑인 가정부 캘퍼니아 등도 스카웃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데 안내자 역활을 맡는다.
그렇다면 스카웃이 고통과 좌절을 겪으며 얻는 삶의 교훈이란 과연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남에 대한 배려와 관용 그리고 사랑이다. 스카웃은 요즈음 지식인 사회에서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자신의 입장에서 남을 생각하고 판단하기보다는 이와는 반대로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카웃은 그토록 무서워하던 래들리 집 현관에서 버티고 서서 자신의 집과 이웃을 바라다본다. 스카웃은 "아빠가 정말 옳았다. 언젠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참말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신 적이 있다. 래들리 아저씨네 집 현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고 말한다. 늘 자신의 집 현관에서 래들리 집을 바라보던 태도에서 이제는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래들리 집 현관에서 자신의 집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달라진 입장에서 스카웃은 비로소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참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어버지의 말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는다.
스카웃은 자신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카웃의 이웃집에 살고 있는 부 래들리는 바로 그러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사춘기 때 친구를 잘못 사귄 탓에 잠시 물의를 일으킨 사건 때문에 그는 평생 동안 집 안에서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된다. 마을 사람에게는 완전히 따돌림을 받고, 스카웃과 젬 그리고 딜 같은 아이들에게 놀이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몇십 년 동안 창가에서 젬과 스카웃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그는 그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도와준다. 속이 빈 나무 속에 온갖 선물을 갖다놓은 것도 그였고, 마지막 장면에서 밥 이웰로부터 그들을 구출해준 것도 바로 그였다.
스카웃은 동료 인간에 대한 관심을 인간이 아닌 다른 피조물로 넓혀 나간다. 아버지 애티커스는 젊었을 때 '명사수'라는 별명을 얻었을 만큼 총을 잘 쏘면서도 총을 사용하지 않는다. 미친 개를 총으로 쏠 때도 마지못해 그렇게 한다. 밥 이웰의 협박을 받은 뒤 아이들이 총을 가지고 다니라고 설득해도 귀를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 이렇게 애티커스가 총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타고난 사격술 때문에 자칫 다른 생명을 빼앗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모디 앳킨스는 스카웃에게 "너희 아빠는 아마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살아 있는 모든 생물에 대해 부당한 재능을 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총을 내려 놓으신 걸 거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총을 쏘지 않겠다고 결심하신 거야" 라고 말한다. 모디 앳킨스도 인간이 아닌 다른 피조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척 남다르다. 스카웃은 앳킨스가 "하나님의 땅에서 자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심지어는 잡초까지도 사랑했다" 고 밝힌다. 스카웃은 젬이 쥐며느리 같은 언뜻 하찮아 보이는 벌레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기도 한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부 래들리보다도 훨씬 열악한 위치에 놓여 있다. 스코츠보로 사건*이나 로자 팍스 사건**,오스린 루시사건***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늘 서자 취급을 받아왔다. 스카웃은 인간이란 피부 색깔에 따라 구분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비단 피부 색깔 만이 아니라, 젬의 지적대로 몸 속에 흑인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흑인으로 취급받는 것이 이 무렵의 남부 사회의 현실이었다. 이웰 집안 사람들처럼 내세울 것이라고는 오직 흰 피부 밖에 없는 백인들에게 흑인은 자신들의 울분과 분노를 터뜨리는 희생양에 지나지 않는다.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를 비롯하여 존 테일러 판사와 메이콤 군의 보안관 헥 테이트 그리고 모디 앳킨스 같은 몇몇 백인을 빼놓고서는 남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인종 차별주의자들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의 제목은 자못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애티커스는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엽총을 사주면서 어치새 같은 다른 새를 죽이는 것은 몰라도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 고 말한다. 다른 새들과 달리 앵무새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줄 뿐 곡식을 먹거나 창고에 둥지를 트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 인간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새를 죽이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이다. 부 래들리와 톰 로빈슨은 바로 앵무새와 같은 인간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들의 편견이나 아집 때문에 고통을 받고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스카웃은 알렉산드라 고모로부터 숙녀가 되도록 강요받는다. 때로는 젬마저도 때로는 스카웃이 '계집애'처럼 처신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스카웃에게 숙녀가 된다는 것은 알렉산드라를 비롯한 남부 여성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숙녀'란 우아하게 드레스를 차려입고 바느질을 하거나 요리를 잘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스카웃에게는 타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의미의 숙녀가 되는 일이다. 찰스 디킨스는 《위대한 유산》에서 나이 어린 주인공 핍을 통하여 '신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다룬다. 《앵무새 죽이기》는 숙녀가 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이점에서 핍과 스카웃은 허구적 남매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이 작품의 주제를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절의 변화를 찬찬히 눈여겨보아야 한다. 전반부에서는 주로 여름이 중요한 시간적 배경으로 등장하지만 후반부에 와서는 가을이 중심적인 시간 배경이 된다. 가을은 조락과 소멸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성숙과 결실의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과 더불어 스카웃은 비로소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스코츠보로 재판 사건
1931년, 흑인 청년 아홉 명과 백인 청년 두 명 그리고 백인 여성 두 명이 테네시 주에서 화물차를 얻어 타고 앨라배마 주로 가고 있었다. 화물차 안에서 흑인 청년과 백인 청년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결국 백인 청년들은 강제로 차에서 내리게 된다. 앨라배마에 도착하자마자 흑인 청년들은 체포되고, 백인 여성들은 거짓으로 흑인 청년들이 자신들을 강간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무려 20년을 끈 재판에서 흑인 청년 여덟 명은 직접 • 간접으로 크나큰 고통을 받았다. 《앵무새 죽이기》를 쓰면서 하퍼 리는 이 사건에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영감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메이옐라 이웰과 톰 로빈슨을 둘러싼 사건은 이 사건과 아주 비슷하다.
**로자 팍스 사건
1955년 12월 앨라배마 주 먼트가머리에서 로자 팍스 라는 흑인 여성이 하루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버스에 올라 뒷자리에 앉았다. 바로 그때 백인 한 사람이 버스에 올라탔고, 운전 기사가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했는데도 로자는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결국 로자는 법을 어겼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먼트가머리에서는 1년에 걸쳐 버스 보이콧 운동이 벌어졌고, 마침내 공중 교통에서 인종 차별을 없애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서린 루시 사건
1955년 오서린 루시라는 여성이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터스컬루사 소재 앨라배마대학에 등록하려고 했다가 백인의 소동으로 입학을 포기하는 사건.
출처:《앵무새 죽이기》하퍼 리/김욱동,문예출판사, 작품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