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port of Rear Admiral John Rodgers, Detailing the Capture and Destruction of Korean Forts
해군중장 John Rodgers의 보고서 조선국 요새의 점령 및 파괴에 관한 상세보고서
Report of Rear-Admiral John Rodgers. No.43 UNITED STEAMER COLORADO, (1st rate,) FLAG-SHIP OF ASTATIC FLEET,
해군중장 John Rodgers의 보고서 보고번호 43 미합중국 증기추진 기함 COLORADO호 (1등급 기함) 아시아함대 기함
Chefoo, China, July 5, 1871. SIR: In a telegraphic message, under date of June 3, and again in my dispatch No.38 of the same date, I had the honor of conveying His Excellency Mr. Low, United States Minister to China, to Corea, for the purpose of negotiating a treaty in accordance with the instructions received from the Government. In the dispatches referred to, I informed the Department of the unprovoked and treacherous assaults made on the 1st of June, by the forts in Kang-Hoa Island, upon a portion of the squadron engaged in an examination of the Salee River, and of my intention to resent the insult offered to our flag, should no sufficient apology or satisfactory explanation be offered for the hostile action of the Corean government.
각하께 : 삼가, 6월 3일자의 전신보고와, 그리고 동 일자의 긴급전문에서 (보고한 바와 같이), 미합중국 정부로 부터 받은 지시에 따라 조선과 협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조선에 대한 전권공사로 임명되신 중국주재 공사 Mr. Low씨를 모시고 (조선으로 항해하는) 영광을 가졌습니다. 긴급보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염하지역을 탐사 중이던 우리의 분견함대 일부에 대하여 조선 강화도의 요새로 부터 6월 1일 도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의에 반하는 공격이 있었음을 알렸습니다. 또한 조선정부가 그 적대적인 공격에 대하여 만족할만한 설명과 충분한 사과가 없을 시에는 우리 미합중국의 국기에 대하여 가해진 모욕에 대하여 보복할 예정임을 보고한 바가 있습니다.
Again, under date of June 23, I sent a telegraphic dispatch, announcing the results of the retaliatory action which we were compelled to take in vindication of the honor of the flag.
또한 6월 23일자로, 미합중국 국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선 피할 수 없었던 보복군사행동의 결과를 알리는 긴급전신보고를 보냈습니다.
I have now the honor to write more at length concerning these matters. From the time of the attack of June 1, upon our vessels, ten days were allowed to pass before any movement was made. During this time no apology was offered, nor was an accredited officer sent to confer with Mr. Low. Indeed, in correspondence which passed between the minister and the prefect of the district lying hereabout, the ambushed attempt to cut off and destroy our whole surveying party was assumed by the Corean official to be entirely in accordance with the proprieties of intercourse between civilized people, their own civilization being, as was somewhat proudly stated, four thousand years old. Under these circumstances, nothing remained but to fulfill, with Mr. Low's full approbation and concurrence, the expectations which the Corean authorities might reasonably entertain from the words which the minister had addressed to them, to the effect that, in case due amends were not offered to the Minister and Admiral, they would know how to obtain satisfaction for the wanton attempt to destroy their surveying party.
이 문제들과 관련하여 조금 더 충분하게 보고하게 된 것을 저는 지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6월 1일 아군 선박에 대하여 포격이 가해진 때로 부터 우리가 어떤 군사행동을 취하기 전에 10일 간의 여유기간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조선정부의 외교적 유감표명도 없었으며, 또한 전권공사 Mr. Low씨와의 협상을 위한 조선의 공식외교사절도 파견되지 않았습니다. 공사님과 조선국 지역주둔 군사지휘관 사이에 오고간 서신에 의하면, 스스로 상당히 자랑스럽게 말하기를 4천년 간 지속된 문명을 가졌다고 하는 조선인들은, 우리의 탐사대를 절멸키 위해 가해진 그들의 기습적인 공격행위를 문명국 간의 관례에 비추어 볼 때에도, 그들 조선의 관리들은 완전히 당연한 상례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공사님의 완전한 승인과 동의를 얻은 기대들을 충족할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공사님의 기대란 다름이 아니라 공사께서 그들 조선인에게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조선정부가 합당한 조치를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이며, 말씀하신 바란 해군제독인 저와 공사님에게 조선군의 공격행위에 대하여 합당한 사과가 없을 경우에는 우리의(원문에서는 their이나 아마도 필자인 로저스가 our를 their로 사용한 것 같음)탐사대를 향한 이유없는 공격에 상응한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취지로 말씀하신 것을 말합니다.
I may here remark that the delay of ten days had, apart from the propriety of giving the Coreans an opportunity to reconsider the hostile attitude which they had assumed, been expedient on account of the more favorable tides which would prevail at the expiration of that time, when the neap tides would render navigation in the little known and difficult passages of the Salee River less perilous than it was during the preval!!ence of the spring tides. Even with the more moderate neap tides our vessels did not escape injury, as will be hereafter seen.
10일 간의 여유기간은 조선정부에게 그들이 취했던 적대적인 태도를 재고할 기회를 부여하는 외교적 관례라는 점을 별도로 하면 그 기간의 만료시점에서의 조류흐름이 보다 (우리의 군사작전에) 유리할 것이라는 측면에서 시기적절한 것이었다고 여기서 말하자 합니다. 10일간의 경과기간이 끝나는 때 쯤이면 염하의 거의 알려진 것이 없고 항해곤란한 해상에서 (조류의 흐름이 약해지는) 소조(조금)때로서 물살이 거센 사리때 보다 항해를 휠씬 안전하게 해줄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보고에서 보시게 되는 것과 같이, 그렇게 보다 유리한 물때를 맞추었는데도 우리 함선의 피해는 불가피했습니다.
All preparations for our movement being completed, at 10 o'clock a.m., on the 10th of June, the expedition started. In pursuance of the humane policy indicated in the letters of instructions from the State and Navy Departments to Mr. Low and myself, it was decided that the punishment to be inflicted upon the Coreans should be confined to the forts from which the offense had been given. Copies of my orders to Commander H.C. Blake and to Commander L.A. Kimberly, marked respectively A and B, are herewith transmitted. The force dispatched consisted of the Monocacy, Commander E.P. McCrea; Palos, Lieutenant Commander H. F. Picking, conveying the boats of the squadron, in which were embarked all the men available for a landing force. The Monocacy received the additional armament of two 9-inch guns, transferred from the Colorado. The force detailed from the Colorado, Alaska, and Benicia, numbered seven hundred and fifty-nine men. Of these, the crews of the steam-launches and the boat-keepers numbered one hundred and eighteen men, leaving the actual force put on shore six hundred and fifty-one men. Of these, one hundred and five were marines. Seven howitzers were landed. Commander H.C.Blake, of the Alaska, commanded in chief. He was to remain afloat, and went on board the Palos. Commander L.A.Kimberly, of the Benicia, was detailed, at his own request, to command the landing force. Lieutenant Commander Silas Casey commanded the artillery. Captain McLane Tilton commanded the marines. Accompanying this dispatch I transmit a chart, upon which the positions and movements of the two days' operations are given.
작전을 위한 모든 준비는 6월 10일 오전 10시 정각에 완료되어, 원정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공사님과 저에게 내려진 국무성과 해군성으로 부터의 훈령에 지시된 인도주의적 정책에 따라 조선국에 가해질 징벌적 공격의 범위는 우리에게 공격을 가했던 조선의 요새들에 국한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지휘관 H.C. Blake와 L.A. Kimberly에게 내린 저의 작전명령서 사본은 각기 A와 B로 표시되어 같이 제출합니다. 파견되는 함선은 E.P.McCrea함장의 Monocacy호, 모든 상륙병력이 탑승한 상륙정들을 호송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H. F. Picking함장의 Palos호로 구성되었습니다. Monocacy호는 Colorado호로 부터 2문의 9인치 포를 추가적인 무장으로 넘겨 받았습니다. Colorado호, Alaska호, 그리고 Benicia호로 부터 작전에 동원된 병력은 모두 759명이었습니다. 이들 중 증기단정의 승조원과 상륙정 수비병력의 숫자는 118명이었으며, 해안에 상륙할 실제 전투병력은 651명이었습니다. 상륙병력 중 해병대원은 105명이었습니다. 7문의 howitzer포도 함께 양륙되었습니다. Alaska호의 함장인 H.C.Blake중령이 Palos호에 승선하여 해상에서, 총지휘를 하였으며, Benicia호의 함장인 L.A.Kimberly 중령은 본인의 강력한 희망에 따라 상륙병력을 지휘하도록 하였습니다. Silas Casey는 포병대를 지휘하였으며, McLane Tilton은 해병대를 지휘하였습니다. 이 긴급보고서와 함께 이틀간 작전에서의 병력이동과 위치를 표기한 지도를 함께 제출합니다. (* 작성자인 로저스 제독의 오타인지는 모르겠으나 병력수의 착오가 있음. 총병력은 759명, 선박수비병력은 118명, 상륙병력은 651명으로 수비병력과 상륙병력을 합하면 표기된 총병력 보다 10명이 더 많음)
The expedition moved with the Monocacy, preceded by two steam-launches surveying the channel in advance, while the Palos, having in tow twenty-two boats with the landing force, followed. The Monocacy had the duty of shelling the enemy's first fort, and of clearing away opposition to the landing. This first fort, now designated on the chart "marine redoubt," is distant about --miles from the anchorage at Isle Boissee. As soon as the Monocacy came within good range, she opened upon the enemy's works with shell. The enemy returned the fire for a time, but was soon driven out, and when our landing was made abandoned the position and fled. The Palos coming up with the boats pulled in for the shore, and effected a landing below the fort. The point chosen for the disembarkation, while seemingly as good as any in other respects, was, for military reasons, deemed the best, since it flanked the enemy's works, and left nothing to be feared in our rear.
협수로를 정찰하는 2척의 증기단정을 선두로 하여 Monocacy호가 발진하면서 작전은 시작되었습니다. 한편 Palos호는 상륙전투병력이 탑승한 22척의 상륙정을 예인하며 뒤따랐습니다. Monocacy호는 적의 첫번째 요새(초지진)에 대한 포격임무와 상륙을 저지하려는 적을 소탕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이 첫번째 요새는 지금 작전지도상에는 "해병요새"라고 명명되었는데, 작약도의 정박지로 부터 수마일 거리입니다. Monocacy호는 유효한 사거리에 접근하자 적의 진지에 포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적은 한동안 응사를 했으나 곧 후퇴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륙이 시작되자 진지를 포기하고 퇴각했습니다. Palos호는 상륙정을 예인하여 해안으로 접근하였으며 요새 남쪽 해변으로 상륙작전이 진행되었습니다. 상륙지점으로 선정된 지점은 다른 지점 보다 외관상으로는 유리해 보였으며, 군사적 측면에서 적진지의 측면에 해당되고, 우리 병력의 후방이 염려되지 않는 지점으로 판단되었습니다.
The character of the shore was unknown, and it proved to be most unfavorable for our purpose. Between the water and the firm land a broad belt of soft mud, traversed by deep gullies, had to be passed. The men stepping from the boats, sank to their knees, and so tenacious was the clay, that in many cases they lost gaiters and shoes, and even trowsers' legs. The guns sank above the axles of their carriages, and it required the strenuous exertions of many men to get them through.
해안의 지질적 특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으나, 곧 우리의 목적에는 가장 나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는 깊은 도랑이 가로지르는 넓은 갯벌지대가 있었으며 이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보트에서 뛰어내린 병사들은 무릎까지 빠졌으며, 질척거리는 갯벌로 인해서 많은 경우 그들은 신발과 각반을 잃거나 심지어는 바지를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포들은 포가의 축 위 까지 갯벌에 잠겨, 포들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병사들이 엄청난 노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The landing was covered by the guns of the Palos and the steam-launches. The boats reached the shore at about noon. As soon as firm ground was attained, the infantry battalion was formed, and the marines deployed as skirmishers. The advance at once began, and the fort was quietly occupied. This fort was constructed of stone, its walls being about 12 feet high. From the upper flank stretched a long water battery; it mounted thirty odd guns of various caliber, most of them being the small bronze breach-loading pieces of from one to two inch bore; five or six were about 18-pounders, and there were two 32pounders.
상륙작전은 팔로스호와 증기단정의 포들에 의하여 엄호되었습니다. 상륙정들은 정오 경에 해안에 닿았습니다. 육지에 오르자, 보병대는 전투대형을 갖추었으며, 해병대는 척후병으로 산개하여 배치되었습니다. 전진은 즉시 시작되었으며 요새는 저항없이 점령되었습니다. 요새는 돌로 축성된 것으로 성벽의 높이는 약 12피트였습니다. 상부 흉벽으로 부터 양쪽으로 뻗은 길쭉한 해안포대였습니다. 요새는 30문의 다양한 구경의 기묘한 화포들로 장비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들 중 대부분은 1인치에서 2인치 구경의 소형 전장식 청동제 포였으며, 대여섯문의 포는 18파운드 급이었고, 2문의 포는 32파운드 급이었습니다.
The destruction of the fort was at once begun. The guns were cast into the river, with the exception of the 32-pounders, which were spiked. The walls of the fort were thrown down and the stores of powder, provisions, and clothing burned. By this time the afternoon was so far gone that it was not expedient to make a further advance on that day. The force, therefore, went into camp upon a favorable spot in the vicinity of the fort.
요새의 파괴는 즉시 시작되었습니다. 포신을 손상시킨 2문의 32파운드급 포를 빼고 모든 포는 강으로 던져졌습니다. 요새의 벽들도 무너뜨렸으며, 노획된 화약, 식량, 군복 등은 소각하였습니다. 그러고 나니 당일로 더 이상 전진하는 것은 시기적절하지 않을 만큼이나 오후가 훌쩍 지나갔습니다. 병력들은 그래서 요새 주변의 알맞은 곳을 선택하여 숙영에 들어갔습니다.
The marines, with one howitzer, occupied the position in advance of the main body of the force, and pickets were established to guard against surprise during the night. The Coreans made an attack at about midnight, but it was confined to distant firing upon our lines, and a few shells thrown by the howitzers caused their retreat. On the morning of the 11th, the destruction of the first fort was made more complete, and the advance began, at an early hour, toward the main objects of attack, the enemy's forts on the point at the turn of the river, about three miles above. The next defense of the enemy was a stone fort, built upon a bluff, about a mile distant from that already occupied. It is now designated on the chart Fort Monocacy. This fort also had been shelled by the Monocacy, and being reconnoitered by the marines, was found to be entirely deserted. It was a square structure and occupied a strong position; it mounted about the same number of guns, similar in character to those destroyed in the first fort. This place was also dismantled without delay.
해병대는 1문의 호이쩌포를 장비하여 본대의 전방에 전초로 자리를 잡고 목책을 설치하여 야간기습에 대비하였습니다. 조선군이 자정 즈음하여 공격을 하였으나 그들의 사격은 우리의 병력 배치선에 거리가 미치지 못하였으며 몇발의 호위쩌포 사격으로 격퇴하였습니다. 11일 아침, 첫번째로 점령한 요새의 파괴가 완료되자 이른 아침 중으로 주된 공격목표인 3마일 쯤 북쪽의, 강의 만곡부를 방어하는 조선군 요새(광성보)를 향하여 전진이 시작되었습니다. 적의 다음 방어진지(덕진진)는 석재로 축성되었으며, 바다쪽으로 삐죽하게 나온 절벽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거리는 이미 점령한 첫번째 요새로 부터 약 1마일 거리였습니다. 이 요새는 작전지도 상에는 Monocacy요새로 명명되었습니다. 이 요새 또한 Monocacy호에 의해 포격이 가해졌으며, 해병대가 정찰을 한 결과, 적이 완전히 포기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요새는 사각형의 형태로 강력한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파괴된 첫번째 요새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수량과 성격의 화포로 장비되어 있었습니다. 이 요새 또한 지체없이 해체되었습니다. (* 함포 뿐만 아니라 미군 육상병력이 장비한 호위쩌포는 다양한 종류의 탄두를 장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 동원된 포가 활강포인지 강선포인지는 불명확하지만, 가장 기본인 공성용의 shot탄두[덩어리탄], canister탄두[산탄], 또한 당시로서는 최첨단 무기인 shell탄두[지연신관 또는 충격신관 장착]도 사용가능했다. 원문에 by shell이라는 말로 포격을 표현한 것으로 볼 때, 인마살상용으로 가장 강력한 shell탄두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The force again moved on. The march was a most difficult one. The country is a succession of steep hills, with deep avines between, over which foot soldiers passed with great fatigue, while the guns were got on only by widening the paths, where there were paths, and by cutting out the bushes and filling up gullies in other places. They were dragged up steep acclivities, by whole companies detailed to help the artillerists, or lowered down from the heights with ropes. A squad of sappers and miners, provided with shovels, picks, and axes, was very useful in facilitating the passage of the artillery, as well as in destroying the fortifications. As the advance continued toward the upper and main fort, large bodies of the Coreans were seen on the left flank of our force, and in such position that when the direction of our march was changed, as it must be to approach the forts, they would be behind us, and have us cut off from retreat should we be repulsed in the assault upon the forts in front. To guard against danger of an attack upon our rear while engaged in front, five howitzers, with three companies of infantry, under the command of Lieutenant Commander Wheeler, were placed in strong position, which they held as a rear guard during the advance of the main body. Their service was most valuable, inasmuch as they checked several attempts of the enemy to advance, and by their accurate fire prevented a very large body from ever getting fairly into action. They also did good service by their fire, directed over our forces, against the forts beyond.
병력은 다시 전진했습니다. 전진은 가장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 지역은 가파른 언덕과 언덕 사이마다 깊은 도랑의 연속이었기에, 병사들은 매우 피곤하게 그 곳을 통과했습니다. 한편, 비록 소로길은 있었지만 어떤 곳에서는 잡목숲을 제거하고 다른 곳에서는 도랑을 메우면서, 길을 넓혀야 만이 포가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병사들은 포병들을 도와 깎아지른 절벽으로 포를 끌어올리거나, 내리막길에서는 포를 밧줄로 묶어 내려야만 했습니다. 삽과 곡꽹이, 그리고 도끼를 장비한 1개 분대의 공병들이 요새를 파괴할 때와 마찬가지로 포대를 위해 길을 내는 데에도 유용했습니다. 북쪽의 주 요새로 전진하고 있을 때, 대규모의 조선군이 우리 병력의 좌측방면(대모산)에 있는 것이 관측되었습니다. 그 위치는 우리가 주된 요새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격방향을 바꾸어야만 하는데, 그 때 우리의 후방에 해당되며 전면의 요새를 공격하는 도중 반격을 받을 경우 우리의 퇴로를 차단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전면에 대한 공격 중에 후면을 공격당하는 위험에 대한 대비를 위하여, 5문의 호위쩌포와 3개 중대의 보병을 Wheeler의 지휘아래 요충지에 배치하였습니다. 그들은 본대가 전진하는 동안 후방 방어의 역활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의 작전수행은 적의 몇번에 걸친 진출시도를 저지했을 만큼이나 매우 유용했습니다. 그리고 정확한 사격으로 대규모의 적군이 제대로 전장에 투입되지 못하도록 방어하였습니다. 또한 전진하는 본대 너머로 적의 요새를 향하여 적절한 사격을 가했습니다. (* 이때 미군은 수병들은 9개 중대로, 해병대는 1개 중대로 공격제대를 편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At about 11 o'clock, on the forenoon of the 11th of June, the hill nearest the enemy's stronghold, or citadel, was gained. The Monocacy having moved up the river, keeping nearly abreast our land force, had taken position and shelled the forts for some time before our men came up to their vicinity. This fire was continued until our assaulting force was ready, when signal being made it was discontinued. Behind the crest of the hill which they occupied our men were formed for the assault upon the citadel, now distant about 150 yards, and, covered from the enemy's fire, they rested awhile to recover from the exhaustion of the hurried march under a hot sun. Up to this time, although there had been some brisk skirmishing, but few of our men had been wounded; several had been prostrated by sunstroke. The citadel about to be assaulted, the key to the defenses upon the point below, was built upon the apex of a conical hill about 150 feet high from the bottom of the ravine, through which our men had to pass to reach it. The hill side was very steep, and walls of the fort joined the acclivity with scarcely a break in the line. Had not the face of the walls been somewhat shattered by the shells from the Monocacy and the howitzers on shore, the escalade would have been most difficult.
6월 11일 정오 가까운 오전 쯤인 약 11시경에, 적군 요새(광성보)에 매우 근접한 언덕을 점령했습니다. 모노카시호는 우리의 육상부대와 나란히 강을 따라 전진하여 위치를 잡고 우리 병사들이 요새 근처에 도달할 때 까지 한동안 적의 요새에 포격을 가했습니다. 이 포격은 육상병력이 공격준비가 완료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신호가 주어질 때에야 포격을 멈추었습니다. 적의 사격으로 부터 엄폐가 되는 이미 점령한 언덕의 능선 뒤편에서 우리 병사들은 이제 거리가 150야드 쯤 되는 요새에 대한 공격진형을 형성하고, 뜨거운 태양 아래 급속한 진격으로 인한 피로를 풀기 위해 한 동안 휴식을 취했습니다. 이때 까지, 상당한 정도의 활발한 척후활동이 있었음에도 약간의 병사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또 몇명은 일사병으로 쓰러졌습니다. 적의 요새는 공격당하기 직전이었는데, 방어자가 유리한 요소는 높은 위치였습니다. 우리 병사들이 요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건너야만 하는 협곡의 바닥으로 부터 약 150 피트 높이의 원추형 언덕 정상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언덕의 측면은 가파른 경사를 가졌으며, 요새의 벽은 틈새가 거의 없이 가파르게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모노카시호와 호위쩌포에 의한 포격에 의하여 상당히 파괴되지 않았더라면 성벽을 오르기란 매우 곤란할 수 있었습니다.
Our men kept up a fire from their resting place upon the fort whenever an enemy exposed himself, and this they did constantly and with the most reckless courage, for they maintained an incessant fire, mounting the wall and discharging their pieces as fast as they could load. There was no artillery in the citadel. When all was ready, the order was given to rush forward down the slope and up the opposite hill. The enemy maintained their fire with the utmost rapidity until our men got quite up the hill, then, having no time to load, they mounted the parapet and cast stones upon our men below, fighting with the greatest fury. Nothing could check our men; on they rushed. The heroic McKee was first to mount the parapet, and the first to leap into a hand-to-hand conflict. There he fell, as his father fell in Mexico, at the head of his men, first inside the enemy's stormed works. Other officers and men were quickly over the parapet. The fighting inside the fort was desperate. The resolution of the Coreans was unyielding; they apparently expected no quarter, and probably would have given none. They fought to the death, and only when the last man fell did the conflict cease. The point to the river was opened to a rear attack by the capture of the citadel, and the garrison fled. Many of them, however, fell under the fire of our musketry and howitzers, which had nearly cut them off from retreat.
우리 병사들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장소에서 적의 요새를 향하여 적군 병사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그들의 몸을 돌보지 않는 용감성으로 끊임없이 사격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끊임없는 사격을 지속하는 동안 성벽을 오르고 그들의 병기를 최대한 빠르게 장전해야 했습니다. 요새에는 적의 포병이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되자, 언덕의 경사면을 내려가 반대편 언덕을 오르라는 돌격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병사들이 언덕을 거의 다 오를 때까지 적군은 최고의 속도로 사격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재장전할 시간이 없자 그들은 성벽으로 뛰어올라 아래 쪽의 우리 병사를 향하여 돌을 던졌습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우리 병사들이 돌진하자 어느 것도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영웅적인 McKee소위가 최초로 성벽을 올랐으며, 처음으로 백병전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그러했듯이, 자기 병사들의 선두에 서서, 적군 진지를 혼란으로 몰아넣으며, 거기서 쓰러졌습니다. 다른 장교와 병사들도 재빨리 성벽을 넘었습니다. 요새 안에서의 전투는 필사적이었습니다. 조선군의 결론에 항복이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항복을 통한 용서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명백했으며, 아마도 항복했더라도 용서받지 못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싸웠으며, 마지막 병사가 죽었을 때 전투는 끝났습니다. 요새가 점령되자, 강에 면한 초소(용두돈대를 말하는 듯)가 후방이 노출되자, 그곳의 조선군 주둔병사들이 도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우리의 소총사격과 포격에 의하여 후퇴도 거의 할 수가 없었으므로 사살되었습니다.
To return to the vessels engaged: After the boats left the Palos, and had made their landing, that vessel got under way to pass up to join the Monocacy in the attack upon the forts. Unfortunately, she struck a rock on the falling ride. She keeled over, and had a hole stove in her bottom, from which she leaked badly. It was only with the rising tide that she came off, and anchored late in the evening. It required the full employment of her steam-pumps to keep her afloat. The Monocacy dragged her anchors in the night, and was brought up only with an additional anchor, after she had drifted for a considerable distance. In swinging with the tide she also struck and grated upon sunken rocks, but received no serious injury so far as is known. Two of the steam-launches require repairs. These circumstances will serve to indicate the extreme difficulties and hazards which our force afloat encountered. Even with the advantage of the neap tides, comparatively moderate in their force, six steamers engaged, large and small, suffered injury. In the affair of June 1, as mentioned in a former dispatch, the Monocacy received an injury by striking the rocks, from which she leaked so badly that it was thought for a time that it would be necessary to run her ashore to keep her from sinking. Both the Monocacy and the Palos received repairs of a temporary character, by which the leaks were overcome. It will be necessary to dock both vessels, and they have been sent to Shanghai for that purpose.
참전한 선박들 상황에 관하여: 상륙정들이 팔로스호를 떠나 상륙을 완료하자, 팔로스호는 요새를 공격하고 있는 모노카시호와 합류하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팔로스호는 썰물로 인하여 수위가 낮어져 바위에 좌초하였습니다. 용골이 좌초되고, 선저에 구멍이 생겨 그로부터 심각한 누수가 발생했습니다. 팔로스호가 빠져 나온 것은 겨우 밀물 때 수면이 오른 이후였으며, 저녁 늦게 닻을 내렸습니다. 떠있기 위해서 팔로스호는 증기펌프를 최대한 가동해야 했습니다. 모노카시호도 밤에 닻을 내렸음에도 조류에 밀렸으며 상당한 거리를 떠밀려 흐른 이후에야 추가적인 닻을 단지 하나만 가져와 내렸습니다. 조류에 이리 저리 떠밀려 흔들리며 모노카시호도 수중암초에 걸려 좌초했습니다만, 알려진 바로는 큰 손상을 입지는 않았습니다. 두척의 증기단정도 수리를 요했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우리의 해상병력들이 마주해야 했던 재난과 어려움을 잘 보여줍니다. 그 세기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조금 때의 잇점을 이용했음에도 작전에 참여한 여섯척의 증기단정이 크고 작은 손상을 입었습니다. 먼저의 긴급보고서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6월 1일의 사건에서 모노카시호는 바위에 좌초되어 손상을 입었으며, 그로 인해 심각할 정도의 누수가 발생하여 모노카시호가 침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수심이 낮은) 연안 쪽으로 배를 조종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한동안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모노카시호, 팔로스호 둘 모두 임시로 수선이 되어 누수는 극복되었습니다만, 두 배 모두 대수선이 필요하므로, 두 척 모두 수선을 위해 상해로 보냈습니다.
To summarize the results of the operations of the 10th and 11th of June, we captured and destroyed five forts. Fifty flags were taken including that the generalissimo; four hundred and eighty-one pieces of ordnance fell into our hands, besides very many match-locks and gingalls. The guns comprised eleven 32-pounders, fourteen 24-pounders, two 20-pounders, and the remainder, four hundred and forty-four, were 2 and 4 pounders.
6월 10일과 11일 양일간의 작전결과를 요약하면, 우리는 적군 요새 다섯을 점령하고 파괴하였으며, 적의 사령관 기를 포함한 50점의 적기, 481점의 병기에 더하여 수많은 화승총과 총통을 노획하였습니다. 노획한 화포는 32파운드급의 화포 11문, 24파운드급의 화포 14문, 20파운드급 화포 2문, 그리고 그 나머지로서 2 내지 4파운드급 내외의 444문으로 이루어졌습니다.
Two hundred and forty-three dead Coreans were counted in the works. Few prisoners were taken, not above twenty, and some of these were wounded. Thus was a treacherous attack upon our people and an insult to our flag redressed. On the afternoon of the capture of the "du Conde" forts, Commander Blake sent down to me a dispatch announcing the victory and requesting instructions, stating at the same time that the position gained on shore could be held. It was not deemed desirable to do this, inasmuch as our purpose was not to enter upon extended operations, and on account of the exceeding danger and difficulty of holding the vessels in position in the furious and uncertain currents of the river, he was directed to withdraw the entire force on the following morning, the 12th June. This was effected without hindrance or accident, and the vessels, with the landing force embarked, returned to the Boisee anchorage. It gives me the greatest satisfaction to say that in this expedition our officers and men encountered difficulties which were surmounted only by the most arduous labor, and defeated a determined enemy in a desperate fight with a patience and courage most admirable. A victory was won of which the Navy may well feel proud. It now remains with the Government to determine what further steps, if any, shall be taken toward requiring from Corea those engagements which it was our purpose in visiting the coast to obtain if we might.
전장에서는 243구의 조선군 전사자의 시신이 헤아려졌습니다. 약간명의 포로가 잡혔는데 20명이 넘지 않았으며, 그들의 상당수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우리의 병사에게 가해진 신의에 반하는 공격행위와 우리 성조기에 가해진 모욕에 대한 되갚음이 그와 같았습니다. du Conde요새(광성보)를 점령한 그날 오후, 지휘관 Blake중령이 승리를 알리고 지시를 요청하는 긴급보고서를 저에게 보냈는데, 그 보고에 언급하기를 현재 점령한 해안지역은 확보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확대된 작전에 돌입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목적인 만큼 그렇게 점령하여 지역을 확보하는 것은, 위험하고 예측불허인 조류흐름을 가진 강에 우리 함선들을 위치시켜야 하는 곤란과 지나친 위험성이라는 면에서도 바람직한 것으로 판단되지는 않았으므로, 그에게 다음날일 6월 12일 아침에 전병력과 함께 철수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철수작적은 아무런 방해나 사고없이 상륙한 전 병력이 승선하여, 작약도의 정박지로 귀환을 완료했습니다. 이번 원정에서 우리의 장교와 사병들이 그들의 지대한 노력으로만 극복가능했던 난관을 만났으며, 최고로 격찬받을 만한 용기와 인내로 필사적인 전투에서 결의에 찬 적을 패퇴시켰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저의 가장 큰 만족입니다. 해군에게 있어서 자랑해도 좋을 만한 또 하나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제 정부가 추가적인 조치를 결정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만약 (어떤 추가적인 조치가) 결정된다면 우리가 이 곳 해안을 찾아온 본래의 목적인 조선정부에 조약의 체결을 요구하여 우리가 할 수 있었던 바와 같이 그것을 얻어내는 것 만이 남아있습니다.
Herewith are transmitted copies of my orders to Commanders H.C.Blake and L.A.Kimberly, and the reports of those officers; also, the reports of W.S.Schley, Silas Casey, D.P.Cassel, W.K.Wheeler, and of Captain McLane Tilton, United States Marine Corps, together with the surgeon's list of casualties. Also, I transmit a copy of my General Order No.32. The fleet sailed from the anchorage off Isle Boisee, of the morning of 3rd July, and arrived in the harbor of Chefoo on the morning of the 5th.
여기 저의 긴급보고서와 더불어 지휘관 블레이크 중령과 킴벌리 중령에게 하달한 저의 명령서 사본, W.S.Schley, Silas Casey, D.P.Cassel, W.K.Wheeler 등 참전장교들의 전투 보고서, 그리고 미합중국 해병대장 McLane Tilton의 보고서, 전사상자에 관한 군의관 처치목록을 제출합니다. 또한 저의 제 32호 일반명령서 사본도 함께 제출합니다. 함대는 7월 3일 아침에, 작약도 정박지를 떠나 7월 5일, 중국 산동반도 Chefoo항에 도착하였습니다.
I have the honor to be, very respectfully, your obedient servant, JOHN RODGERS,
출처: 디펜스코리아
출처 글:브리태니커/사진:http://www.shinmiyangyo.org /Marine Amphibious Landing in Korea 1871 /작성및 수정:한 성희 |
첫댓글 많은 내용의 글 천천히 잘 읽어봐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