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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測雨器)는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한 우량계의 일종으로, 1442년 5월 19일 조선 세종 때에 만들어졌다.
조선 세종 때, 당시 세자였던 문종이 스스로 만든 세계 최초로 국가단위로 표준화된 강우량 측정 기구이다.
빗물이 고이는 부분으로, 고인 빗물의 깊이를 재어 강우량을 측정한다.
측우대는 측우기를 일정한 높이로 올려놓기 위해 받치던 돌로, 바닥에서 튄 빗물이 들어가 오차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강우량 측정 도구는 아니며, 기원전 500년 고대 그리스에서 최초로 등장할 정도로 이와 비슷한 도구는 많이 있었다.
사실 측우기 자체는 별다른 기능도 없는 빗물받이 통일 뿐이다. 한데 교과서나 박물관 등지에서는 측우기를 무슨 대단한 발명품이나 기계장치인 양 치켜세우기에, 오히려 반감을 품은 사람도 많고 측우기를 폄하하는 의견도 흔한 것이 사실이다.
중요한 의미는 최초로 국가단위로 표준화된 기상측정 기구였다는 점에 있다. 이는 16세기 이탈리아보다 무려 200여 년을 앞선다
흔히 장영실이 설계했다고 잘못 알려졌지만, 사실은 문종이 세자 시절에 세종의 명을 받고 설계한 발명품이다.
세자가 직접 구리물을 부어 그릇을 제작했을 리는 없으니 제작작업이야 장영실이 했을 수도 있겠지만 제안하고 고안한 분들이 세종과 문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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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주목되는 것은 국가적인 표준화된 측정단위를 규정했다는 점이다.
국가단위로 측정단위로 위 측우기 무형이 채택된 것이다.
위에서 척이란 단위와 촌의 단위가 있는데
1촌= 3.03cm 라고 한다. 그렇다면 7촌이란 21.21cm 이고
1척은 30.3인데 1.5척이란 45.45라고 할 수가 있다.
주척은 약 20.8 cm. 조선은 주척, 황종척, 영조척, 포백척 등등 여러 가지 척을 사용했고 각각의 길이는 서로 다르다.
그래서 문화재 복원시에도 기록된 척이 무슨 척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아는 30.3 cm짜리 척은 구한말에 일본에서 쓰이는 곡척(30.3 cm)을 받아들인 것으로 우리네 전통이 아니다.
다만 일본의 곡척이 조선에서 주척과 함께 자주 쓰인 영조척(약 30.8 cm)과 길이가 거의 같아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쉽게 받아들였던 점도 있다.
근대에는 서양의 도량형에 근접하는 도량형을 쓰려고 했다.
단적으로 고종이 1902년 발표한 1척은 30.303 cm였는데, 이는 미터법을 전근대 도량형에 맞게 도입하면서 1미터를 3.3척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30.303에 3.3을 곱하면 99.999가 나온다.
이걸 일본은 을사늑약 이후에 일본 도량형에 통일시키면서 무효화했을 정도로, 고종의 도량형은 일본과 별개로 형성되었는데도 30 cm에 근접했는데, 영국식 야드파운드법의 1피트가 30.48 cm인 것과측정단위가 비슷하다.
측정단위가 무엇인가가 측우기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인데...
문종은 왜 위의 측정단위로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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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척과 영조척
도량형 중의 하나로 길이를 재는 단위이자 기구.
도량형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형화된 도량형이 나오기 이전에는 성인 남자의 신체 일부를 이용하여 사물의 길이나 양을 측정하였다.
길이 단위로 등장하는 한 자라는 단위는 원래 한 뼘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한 자라는 뜻을 나타내는 척(尺)이라는 글자 모양이 손바닥(口)의 아래로 양 손가락이 잔뜩 벌어진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도량형의 역사도 일찍부터 시작되었는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척(尺)ㆍ석(石)ㆍ근(斤) 등의 단위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이것이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중국식 도량형제로 개혁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표준척으로 사용되어 온 고구려척은 중국 은(殷)나라 척도인 것으로 보이는 기전척(箕田尺)이 사용되어왔다. 통일신라 때에는 당나라에서 당대척(唐大尺)과 주척이 도입되어 기전척과 같이 통용되었다.
조선시대의 도량형 제도는 성종대에 편찬된 《경국대전(經國大典)》공전 도량형조에 규정되어 있다. 그 종류로는 황종척ㆍ주척ㆍ조례기척ㆍ포백척ㆍ영조척이 있다. 이것은 자의 쓰임새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황종척은 각종 악기의 제조와 음률을 맞추는 표준자이다.
주척은 주로 측우기 등 기구를 측정하거나 사대부집 사당의 신주(神主)를 만들 때 사용하며, 그밖에 도로의 거리수, 묘지의 영역, 훈련관 교정의 거리수, 활터의 거리수를 잴 때, 그리고 토지를 재거나 시체를 검시(檢屍)할 때도 사용하였다. 주척은 원래 주나라 때 거리, 면적 등을 측정하는 데 사용하는 기준자로써 삼국시대에 당나라로부터 들어와 고려, 조선시대까지 사용하였다.
조례기척은 종묘나 문묘 등의 각종 예기를 제작하는 데 사용하는 자로 예기척이라고도 한다.
포백척은 포목의 무역과 의복을 만드는데 쓰는 자로서 침척(針尺)이라고도 한다. 포백척은 옛날부터 우라 나라에서 사용해온 자로 지방에 따라, 또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길이가 일정하지 않았다. 세종 12년에 다른 도량형기는 모두 교정되었으나 포백척만은 교정되지 않아서 세종 13년에 각 관으로 하여금 죽척(竹尺)을 만들어 경시시(京市署)로 보내어 교정하게 하였다.
그리고 영조척은 원래 곡척(曲尺), 대척(大尺), 금척(金尺) 등으로 불리웠다.
가옥과 성벽, 봉화, 사직단(社稷壇) 등의 단, 산릉(山陵)과 궁궐 등을 건축하거나, 되, 말 등의 양기(量器)를 만들 때 표준척으로 사용하였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각종의 자를 미터법으로 환산해보면 그 평균 수치가 다음과 같다.
황종척(黃鐘尺)은 34㎝, 주척(周尺)은 20㎝, 영조척(營造尺)은 30㎝, 조례기척(造禮器尺)은 28㎝, 포백척(布帛尺)은 4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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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계산이 필요 없는 우량 측정 기기
‘측우기(測雨器)’는 글자 그대로 비의 양을 측정하는 그릇이다. ‘수표(水標)’는 물의 높이를 재는 막대를 말한다.
비의 양은 측우기로 재면 되고, 불어난 강물의 양은 수표로 재면 된다.
이렇게 간단한 기상관측 기구를 적어도 15세기 이전까지는 아무도 창안하지 못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사실 빗물의 양을 쟀다는 국내외의 기록은 상당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5세기경부터 빗물의 양을 쟀다.
기원전 4세기경에는 고대 인도에서 둥근 항아리에 빗물을 받아 양을 측정했고,
기원전 2세기경에는 고대 유대인 역시 그릇에 빗물을 담아 양을 쟀다고 전해진다.
1639년 이탈리아의 카스텔리(B. Castelli)는 위와 아래가 똑같이 둥글고 평편한 원기둥 모양의 그릇에 빗물을 받아 깊이를 쟀다. 우리는 이보다 200년 이상 앞서 측우기를 만들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3(1441)년 4월의 기록에는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 마다 비 온 뒤에 땅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쟀으나 정확하게 푼수를 알 수 없었으므로, 구리로 주조한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를 조사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위의 기록을 근거로 하면 측우기의 발명은 세종의 아들인 문종이 된다.
문종 이전에는 비가 온 후 땅을 파서 비가 젖어 들어간 깊이를 쟀다. 그러나 비가 스며든 깊이는 비가 오기 전 땅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정확한 깊이를 재는데도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간편하게 위아래가 둥근 원기둥 모양의 그릇을 만들어 빗물의 양을 재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 세종시대에는 측우기를 이용해 전국적으로 우량을 관측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졌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3(1441)년 8월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호조에서 여쭙기를, 각도의 도지사가 강우량을 보고하도록 하는 법이 있으나 땅이 말랐을 때와 젖어 있을 때에 따라서 땅 속에 스며드는 빗물의 깊이가 같지 않아 그것을 재기 어렵습니다. 청하옵건대 서운관(書雲觀)에 대를 만들고 길이 2척(尺), 지름 8촌(寸)의 철기를 주조하여 대 위에 놓고 빗물을 받아 본 관원에게 그 깊이를 재서 보고하도록 하십시오. ..... (중략) ...... 또한 외방의 각 고을에서는 서울에 있는 철기를 본 따 자기(磁器)나 와기(瓦器)로 만들어 관청의 뜰 가운데에 놓고 책임자가 직접 물의 깊이를 재서 도지사에게 보고하도록 하고, 도지사는 다시 서울로 보고하도록 청하기에 왕이 이에 따랐다. ”
당시 서울의 서운관(조선 시대의 천문기상대)을 비롯해 각 지방에도 우량을 관측하는 측우기가 설치됐다. 전국적인 관측망을 통해 모인 전국 강수량 자료는 국가 재정을 운영하는 데 기초자료로 활용됐을 것이다. 자연을 측정하고 관리하려는 국가의 진보적인 변모를 확인할 수 있다.
측우기의 뿌리 논쟁
애석하게도 세종 때 발명된 측우기는 현재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이후 시기에 제작된 측우기가 오늘날 국립기상청에 남아있을 뿐이다. 이것은 헌종 3년(1837)에 제작된 것으로 과거에 충청남도 공주에 설치됐던 것이다. 1915년경 인천측후소에 근무했던 기상학자 와다(和田)가 일본으로 반출해 일본 기상청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것을 1971년에야 비로소 반환 받았다. 더 안타까운 일은 우리의 측우기를 중국에서 먼저 발명했다는 억지 주장이다. 이런 중국의 주장을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더 안타깝다. <조선왕조실록>에 분명하게 기록이 남아있는 데도 측우기를 중국에서 발명했다고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중국에서는 1954년부터 측우기가 중국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해왔다. 미국에서 현대 기상학을 공부한 기상학자 축가정(竺可楨)은 1954년에 그의 제자 도장망(途長望)이 편찬한 <기상학논문집 1919~1949> 서문에 중국 기상학의 역사를 거론했다. 그는 측우기가 중국에서 발명됐고 이를 청나라 건륭 시대인 1770년에 조선에 보내줬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은 중국 기상학의 역사를 다룬 모든 논문에서 아무런 비판 없이 재인용 되고 있다.
측우기가 중국의 발명품이라는 주장은 아주 단순한 근거에 기초한다. 첫 번째 근거는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측우대에 새겨진 “건륭 경인 오월조(乾隆庚寅五月造)”라는 문구이다. 건륭은 청나라 황제 이름이며, 건륭 경인은 1770년을 뜻하는 연호다. 청나라의 연호가 찍혀있는 것으로 보아 이 측우대는 중국이 것이고, 그 위에 얹어진 측우기 역시 중국에서 제작됐다는 것이다. 참으로 빈약한 근거다. 당시 조선에서는 중국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중국 연호가 찍힌 유물이 우리나라에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1770년에 측우기를 다시 만들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과 <서운관지>라는 서적에 분명히 남아있다.
두 번째 근거는 남송시대 수학자 진구소(秦九韶)의 <수서구장(數書九章)>에 게재된 ‘천지측우(天池測雨)’의 문제다. 수학 서적인 <수서구장>은 9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와 답이 담겨있다. “[문제 3] 둥그런 그릇에 빗물을 담았다. 입구 지름이 1척5촌이고, 가장 튀어나온 부분의 지름이 2척4촌, 밑바닥 지름이 8촌이다. 물이 깊이는 1척 6촌이었다. 이렇게 생긴 그릇에 빗물의 깊이가 1척 2촌이었다면, 원과 지름 사이의 공식을 밀율을 사용했을 때, 평지에 내린 빗물의 양은 어느 정도 깊이겠는가?
[답] 평지의 비가 내린 양은 1척 8촌과 78088분의 64483이었다.” 중국에서는 이것이 바로 측우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내용은 원에 관련된 복잡한 수학문제와 답일 뿐이다.
우량계로서 측우기의 장점은 위와 같은 복잡한 수학 계산을 할 필요가 없다는 데에 있다.
측우기의 윗면과 아랫면이 모두 같으며, 계산이 필요 없이 비가 온양을 손쉽게 잴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아무 그릇이나 비를 담아두고 그 양을 재는 것이 측우기라면, 그 공적은 기원전 350년경의 인도의 학자 카우틸랴(Kautilya)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측우기는 윗면과 아랫면이 똑같은 크기의 원으로 이루어진 원기둥 모양의 단순한 기구이다.
그 단순함 때문에 측우기의 발명이 종종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그러나 최소한 15세기까지 이렇게 간편한 측우기를 만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대로 측우기를 대단한 발명품이라고 강변하는 부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발명품이라면 왜 세계의 기상학에 기여한 바가 미약한가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측정원리의 정교함이라든지 단순함에 그 가치가 있는 것6이 아니라
측정단위그 자체인 것이다.
왜 측정단위를 원통형으로 하고 높이 30센티 지름 14센치로 했는 가이고 그 측정단위가 과연 무엇을 근거로 설정되었나 하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그 측정단위가 그자체가 금척이라는 점이다.
환단문명은 금척의 역학원리로 이루어진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금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의미가 무엇인가?
현재 지구상의 보편적인 시간측정단위가 초로 환산하면 하루는 86400초입니다.
이 하루시간을 초로 그렇게 측정한 것이 서양사람들에 의하여 설정되었습니다만.
만일에 금척이라면 이 측정단위와는 다른 것일까요?
다릅니다. 금척 즉 고조선의 시간계산법이라면 반드시 하루는 86164초입니다.
어느것이 더 정확한 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측우기의 측정단위가 무엇인가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