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씌여진 마가 복음이 기원 70년에 씌여진 것으로 알려지기 때문에, 본문의 이 경고가 과연 역사적 사실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더욱이 이 때, 예루살렘에서 도피하여 목숨을 건진 사례가 되는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이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이 경고는 예루살렘이 멸망되는 사건이 일어남과 거의 동시적이거나 직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경고는 사후 예언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예언기록과 관련하여 이러한 역사 비평적 관점과 이 기록을 한 사도나 제자들의 신앙적 관점을 조화 있게 살펴야 할 것이다. 성서 전체를 역사 비평적으로 고찰할 때, 미래에 대한 예언은 전혀 확실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다가 일부가 비슷하게 성취된 것으로 보이는 것을 마치 예언의 성취인 것처럼 다루고 있을 뿐이다. 구약성서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귀에 걸면 귀 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두리뭉실한 것들 뿐이며 구체적으로 예언된 것이 성취된 것은 없다. 혹 이사야가 예언한 키루스(고레스, 개정)를 언급할 지 모르지만 이 역시 거의 신빙성이 없는 사후 예언일 뿐이다. 따라서 예언이 가지는 의미는 그 사건이 이루어지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을 바라 봄으로써 그들의 삶의 방식을 조정하는 데 있다. 복음서 저자의 의도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가 정확하게 예언되었다면 앞으로 있게 될 만물의 마지막에 대해 정신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따라서 우리의 삶이 경건하고 구별되는 방식으로 살 때 구원을 바라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누구든지 우리의 미래와 관련하여 예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예언의 성격이 선을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미래에 있을 재앙을 생각하여 삶의 방식을 도덕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평소의 생활을 단순히 버리려고 하는 것은 바른 신앙적인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사실 우리는 특정한 예언의 성취 여부와 관계 없이 경건한 삶을 살 것이 요구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심리는 무언가 가까운 미래에 큰 변혁이 일어난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정신은 시시각각 일어나는 세계의 사건들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반드시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희망을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 희망은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 곧 새로운 질서가 반드시 도래한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그것은 어떤 긴가 민가 하는 외부적이고 초월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노력으로 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안에 계시어, 세계를 진행시키며, 우리 안에 계시어, 우리가 노력하여 성취할 수 있도록 계속 작용하여 왔다는 사실이다. 증명될 수 없는 것은 불확실한 것이고 불확실한 것은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 비록 하느님의 존재를 우리의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인류의 역사를 볼 때, 이 세계와 인간을 작용시키는 힘이 이 세계와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신빙성이 있으며, 이성적으로 보다 접근 가능한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