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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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나는 기차의 속도로 풍경에서 사라질 수 있다
당신은 그림자에 호기심을 입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삐져나온 것들은 종종, 당신이 조절할 수 없는 조도이거나
공중을 열어 빛을 쏟아지게 한 인상의 절벽
눈(目) 속에는 깃을 떼어낸 갈매기가 파닥인다
타인이 초면 너머에서 짙은 안경을 벗는 동안
나는 기호가 없어진 이정표를 보며
가을로 가는 이명을 앓는다
기다리는 편지는 결코 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것 자체가 이미 편지이기 때문이다
계절에 차가시를 달아준 저녁놀
가뭇없이 스러지는 어둠은, 응시가 편견이다
녹슨 달이 더 깊은 바다에 사슬을 내리는 곳
두꺼운 점자책 무늬처럼 촉(觸)으로 산란하는 눈(目)
낯선 포구 폐선 근처 빈병 속에는
떠밀려온 빛이 들어 있다
시간의 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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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성실하게 습관을 이해했다
사람들은 그해 첫눈을 기념하고
각기 다른 해에 그날의 확신을 버렸다
누구도 황폐한 겨울을 간섭해서는 안 되었다
녹지 않은 눈은 오래된 흉터 같았다
어딘가 비문(非文)으로 남겨진 당신,
나는 악(惡)하게 서술되어 결속되지 못한다
의식하면 할수록 나로부터 강파르고 태연하다
나는 서서히 그림자로 부패해갈 것이고
자글자글한 어둠 속에서 표정을 바꿀 것이다
불현듯 또다른 내가 생각을 입을 때마다
내 뜻으로 버려지는 나는, 검은 가면을 쓰고
불경한 무대 위에서 독백을 시작한다
나를 버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극적으로
추억을 무모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나에게는 아직 눈물과 더러운 이해가 필요하다
흉한 먹구름 속에서 번쩍거리는 집착이
칠흑의 향기를 내뿜으며 흩어져 내린다 나는
아무 정처 없는 단서이면서
탁한 환멸의 무게, 그 속성이며 취미
날씨는 채택에 가깝고 시간은 계속 불황이다
감(感)에 관한 사담들, 윤성택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