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이(重耳)는 후에 지는 문공(晋文公)이 된다.
43세에 나라를 떠나,
책나라로 도망쳤고, 55세에 제나라로 갔으며, 다시 61세 때에는
진(秦)으로 옮겨갔다.
아니, 진(秦)에 앞서서는 초나라에도 머물렀다.
이렇듯 19년간 이리 전전하다가, 중이는 진목공의 후원을 받아,
드디어 진(晋)의 왕이 된다.
이때가 나이 62세 때다.
옛말에 이르길 운(運)이 오면 쇠(鐵) 나무에도 꽃이 핀다고 했던가?
풍찬노숙, 유리걸식도 마다하지 않던 그가 인생 만년에
활짝 꽃이 핀 것이다.
망명생활 중
먹을 것이 없을 때, 개자추는 제 허벅지 살을 베어,
중이에게 먹이기까지 했다는 일화는 개자추를 생각하면 잊지 않고
떠오르는 이야기다.
이를
할고단군(割股啖君)이라 한다.
진목공의 도움으로
꿈에도 그리던 조국 진(晋)으로 가기 위해, 황하를 건너려던 장면을 끊어 엿보자.
중이를 예전부터 모시던 호수의 모습이 이러했다.
호수(壺叔)은
중이와 그 일행들의 재물과 가재를 맡아,
관리하던 소임을 맡았던이다.
여러 나라를 유랑할 때,
죽을 뻔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요, 배를 곯아도 먹을 음식을 구할 수
없었던 때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고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행장을 수습하게 되었다.
그는 매일 사용하여
부서져 못쓰게 된 대나무 그릇과 나무 그릇이며, 해진 돗자리,
찢어진 수레의 휘장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챙겼다.
심지어는
먹다 남은 술과 음식까지 배에 싣게 하였다.
이에 중이는 크게 웃으며 말한다.
“내 이제 고국에 돌아가면 왕이 될 것이며,
진수성찬만 해도 다 먹질 못할 터인데,
구질스러운 그런 것을 가져가 뭣에 쓰리오.
포숙아 그것을 백사장에 내다 버려라.”
중이는
군사를 시켜 다시 배에서 끄집어내
버리게 하였다.
효숙은 그저 넋 놓고,
군사들이 다시 배에서 끌어내다 버리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이때, 호언이 나선다.
“......
오늘날까지 공자께서
열국을 방황하시며, 망명 중이셨기 때문에, 신이 감히 곁을
떠날 수 없어 모시고 다녔습니다.
그동안 신은 놀란 넋이
이젠 거의 꺼질 것만 같고, 몸도 마음도 다 소진되어 이제는
저 구멍 난 옹기솥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부서진 그릇은
다시 상에 올릴 수 없으며, 찢어진 돗자리는
다시 펼 수 없습니다.
신이 있다 하여
득 될 일이 없고, 떠난다 한들 손해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은 공자 곁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대가 나를
이렇게 심히 꾸짖는 것이 마땅하고 마땅하다.
이는 나의 절목이다.
포숙아 저 백사장에 버린 물건들을 다시 배에 들여놓아라.”
.
그때 개자추는
이들이 하는 양을 보고는 웃으면서
혼잣 말로 중얼거린다.
“공자가 환국하게 되는 것은
곧 하늘의 뜻이라 하겠는데, 어찌 호언은 자기의
공이라고 생각하는가?
저렇듯 부귀를
탐하는 자들과 함께 벼슬을 산다는 것은 나의 수치로다.”
호언이 말인즉,
얼핏 그럴 듯이 섬기는 주공을 깨우치는
아름다운 말인 양 들린다.
하지만, 뒤편으로 돌아
그 뱃심을 살펴보자면, 이제 주공 당신은 부귀영화를 혼자 누릴 터인데,
함께 고생한 우리 신하들도 정해진 돗자리, 깨진 솥처럼
버릴 것은 아닌가?
이리 은근히 다구치고 있음이다.
함께 영화를 누리자 이런 주문인 것이다.
우리들의 공을 잊지 마시라!
이들이
처자식 버리고, 중이 하나만을 믿고,
그리 갖은 고생을 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게 중이만을 위한 것인가?
자신들의 입신양명을 위한 포부는 없었겠는가?
개자추는 순간 비윗장이 뒤틀린 것이다.
저들 공을
다투고 있는 무리들의 비릿한 모습이 역겨웠다.
허벅지 살까지
베어 고깃국을 끓여, 굶주린 중이의 배를 채운 개자추. 그는
과연 사심이 없었던 것일까?
***
귀국 후,
개자추는 병을 핑계로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는 몸을 굽혀, 짚신을 삼으며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논공행상에서도
개자추는 빠지고, 세월은 그저 무심히 흘렀다.
개자추는 급기야
노모를 모시고 면상산(綿上山)으로 은거해버린다.
이웃 사람인
해장(解張)은 이를 불공평하다고 느껴,
밤중에 글을 써서 조문에 걸었다.
有龍矯矯 (유룡교교)
悲失其所 (비실 기소)
數蛇從之 (수타 종지)
周流天下 (주유천하)
龍飢乏食 (용기핍식)
一蛇割股 (일 사하라고)
龍返于淵 (용반 우연)
安其壤土 (안기 영토)
數蛇入穴 (수사 입 열)
皆有寧宇 (개유 영웅)
一蛇无穴 (일사 무혈)
號於中野 (호어중야)
힘찬 용이 있었는데,
그 있던 곳을 잃고 슬퍼하였다.
여러 마리의 작은 뱀들이 용의 뒤를 따라, 천하를 떠돌아다녔다.
용이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자,
뱀 한 마리가 허벅지 살을 베어 내어 용을 먹였다.
용이 드디어 깊은 연못으로 돌아가,
그 땅을 안정 시켰다.
많은 뱀들은 자기 굴로 찾아가
모두들 편안히 지내게 되었도다.
하지만, 뱀 한 마리는 들어갈 구멍도 없어,
들판에서 헤매며 울고 있구나.
신하 하나가
아침에 이 글을 떼어 지는 문공에게 받쳤다.
문공이 읽기를 마치자 크게 놀라 묻는다.
“이것은 개자추가 나를 원망하며 쓴 글이다.”
문공은 길게 탄식을 하며, 백방으로 개자추를 수소문하게 했다.
이윽고 수배되어 끌려온 이웃 사람 해장은,
그 글은 개자추의 공이 잊힐 것을 염려하여 자기가 직접 쓴 것이며,
개자추가 면 샹산에 은거하고 있음을 고한다.
이에 지는 문공은 연상산으로 가서 개자추를 찾는다.
하지만, 산은 깊고 풀이 무성하여, 개자추 간 곳을 몰랐다.
며칠을 뒤져도 자취를 찾을 길이 없었다.
“개자추가 어찌 나에게 이렇듯 한을 심하게 품고 있는가?
내가 듣기에 개자추는 효자라서 만일 산에 불을 놓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 모친을 등에 업고 산속에서 나올 것이다.”
이때, 위주란 신하가 나서며, 이리 말한다.
“옛날에 천하를 유랑할 때 개자추 한 사람만이 공을 세운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그 한 사람만을 갖고 이렇듯 번거롭게 하십니까?
오늘 개자추가
주군으로 하여금 어가를 며칠간이나 머물게 하여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하였습니다.
만일에 그가 불을 피해 산속에서 나온다면,
신이 마땅히 그에게 수치를 알게 해주겠습니다.”
위주가 군사를 시켜 산에 불을 지르게 하였다.
하지만, 개자추 모자는 끝내 나오지 않고 불에 타죽었다.
군사들이
시신을 거두어 문공에게 바쳤다.
문공은 눈물을 흘렸다.
면상산(綿上山) 밑에 사당(祠堂)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아울러 면 이상 산을 개자추의 성을 따라 개산(介山)이라 바꿔 부르도록 하였다.
산을 태운 날이 삼월 오일 청명절(淸明節) 이었다.
나라 안의 사대부들은
개자추가 불에 타 죽은 것을 기려, 불을 지피지 않고 익히지 않은 찬 음식을
한 달 동안 먹었는데, 후에 날짜를 줄여 삼일로 했다.
청명절 하루 전날을
한식절(寒食節)이라고 하고, 그 때가 되면 집집마다
대문 앞에 버들가지를 꽂아 놓고, 개자추의 혼을 부르고자 하였으며,
한편 들판에 제사를 지내는 단을 세워, 종이돈을 태웠다.
이 모두
개자추로 인해 생겨난 풍습이다.
[출처] 한식날과 개자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