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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사무라이의 결투 -중(청)일전쟁의 국제정치와 군사정략-
강성학 편저
동학농민혁명이 성공하여 전봉준이 나라님이 되었다면 한반도의 역사가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성공한 동학혁명의 혁명가들은 중국의 모택동이 결국 20세기의 진시황제가 되고 말았던 것처럼 새로운 전제군주로 귀결되고 말았지 않았을까?
역사로서의 중일전쟁 -중일전쟁의 연구사(史)-
이웅현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쟁에서 발을 뺀 소련은 제정 러시아가 체결한 비밀조약 , 외교문서를 공표했고, 1차세계대전 후에는 소위전쟁 책임 문제와 관련하여 독일 정부의 대전 외교문서가 공간되었다.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터키와 같은 중유럽 동맹 국가들은 물론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의 구가들도 대전의 외교문서를 체계적으로 편찬, 출간하였다. 뿐만 아니라 1차 대전과 관련된 군주와 대통령, 정치가, 외교관, 육해군 고급 사령관 및 막료들의 일기, 기록도 발표되었다. 이는 유럽만의 현상이 아니었고 동아시아에도 그 영향을 미쳐 당시 중호민국 국민정부는 베이징의 고궁박물원을 중심으로 청조의 군기처, 총리각국사무아문, 외무부의 기록을 편찬, 공간했다. 이 중국의 자료들은 메이지 시기의 중일관계사 연구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다시의 일본 외무성도 메이지 원년 이래의 조약, 외교문서를 정리하여 1930년부터『대일본외교문서』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소련도 ‘중앙문서고’를 설립하여 중요한 문서들을 정리하여『크라스늬 아르히프』라는 저널의 형태로 1923년부터 1939년까지 부정기적으로 공간하였다. 이 가운데 청(중)일전쟁과 관련된 러시아의 문서가 게재된 것은 1932년 이후였다.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계)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청(중)일전쟁에 관한 중국 최초의 본격적 연구라 할 수 있는 왕신중(王信忠)의『중일갑오전쟁의 외교적 배경』이 출간되었다.
중국이 종주권을 행사하려는 조선 내부의 정치적 역독성 그리고 이에 무지한 채 중국에 도전하려는 근대화도상의 일본의 전쟁정책 형성과정 등을 분석요체로 하여 가치중립적으로 그리고 있다. 다보하시 기요시의『일청전역외교사의 연구』(1951)
시노부 세이자부로(信夫淸三郞)의 1934년 작품『일청전쟁』은 다보하시의 첫연구와 마찬가지로 당시 적국 중국에 이용당할 수도 있는『일청한교섭사건기사』를 자료로 활용하였다는 이유로 간행 즉시 발매금지에 처해진 연구서다.
용과 사무라이의 전투 -중일전쟁의 군사전략적 평가-
강성학
국제적으로 지칭되는 “Sino-Japanese war"중일전쟁”으로 부를 것이다.
중일전쟁의 목적이 한반도으 장악이었다면 일본이 전쟁의 수행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정치적 목적달성에는 분명히 실패했다.
위안스카이는 19일 한성에서 베이징으로 돌아가는 러시아 무관의 중국인 하인으로 위장하고 한성에서 도망쳤다.
고종을 감금했다. 조선의 주권자를 유괴한 행위는 중국에게 부인할 수 업느 전쟁의 구실이었다. 이 날 오후 일본군은 한성에서 조선의 병영을 무장 해체시켰다.
리훙장은 적대행위의 발생할수도 있어 한성에 대한 협공작적을대비하여 남쪽으로는 아산에, 북쪽으로는 평양에 병력을 배치했다.
24일 아산에서 일본군이 이미 한서의 왕궁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출항했던 중국의 군함들은 귀환명령을 받았다.
25일 중국으로 귀환명령을 받은 중국 군함 중 2척이 아산으로부터 중국으로 귀환 중 풍도에서 3척의 일본 순양함과 마주쳤다. 일본측은 선전포고도 없이 중국군함에 기습공격을 가하여 1척을 항해불능케 만들고, 또 다른 1척에 손상을 입혔다. 손상된 배를 추격하던 중 일본인들은 또 다른 수송선, 즉 중국에 임대했지만 영국소유인 증기선 노우싱호(Kowshing)를 발견했다. 다구에서 1천 1백 명의 병력과 장교들을 승선시켰었던 이 배는 25일 이산을 향해 출항했지만 3척의 일본 군함에 저지당했다. 승선하고 있던 중국의 장성들은 자신들을 따르라는 일본측의 명령을 거부했다. 몇 시간의 성과 없는 협상에서 중국측은 일본측의 명령을 거부하고, 유럽인 승부원들의 권고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또 유럽인들이 떠나도록 허락하지도 않았다. 도고 하이하치로 일본측 사령관은 관련 국제법 규정을 면밀히 조사한 뒤 법조항이 자신의 편에 있다고 판단하자마자 코우싱호를 침몰시켰다. 선박이 가라앉기 시작하자 헤엄질 줄 아는 많은 유럽인들은 배에서 뛰어내렸지만, 중국인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발포했다.
중국과 일본의 풍도의 적대행위 후 전쟁태세에 있었고, 코우싱호가 병력을 수송하고 있었으며 합당한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영국정부는 일본의 코우싱호의 격침이 정당했다고 간주했다.
아산의 동북쪽 약 10마일 지점에 위치한 성환....아산에 주둔중인 중국군이 요새를 세우고 참호를 파고 토루를 쌓고 주변 논에 물을 가득 채운 것으로 보아 일본군이 곧 들어 다길 것을 인지했던 것처럼 보였다. 일본군은 야간습격을 위해 병력을 나누었다. 소규모의 척후 병력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주력군은 중국군 측면의 후방으로 진격했다.
3천명의 일본군과 4천명의 중국군은 5시간동안 전투를 치뤘다.
아산의 중국병사들 대부분이 일본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도망쳤는데 일본군은 29일 신속히 중국군을 패퇴시키고 아산을 장악했다. 이로인해 한성에 대한 중국의 남북 포위망은 깨지게 된다.
일본의 최초 상륙은 웨이하이와 뤼순에 있는 중국의 해군기지에서 가능한 한 먼 조선의 동해안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원산에서 이루어졌다. 다른 수송선은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부산에 상륙시켰다. 이런 상륙작전은 한성까지 고난의 행군을 요구했다. 따라서 8월 말, 질병, 피로, 행군시간 등을 고려한 일본육군은 인천상륙작전의 모험을 감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리훙장은 일본의 병력수송을 공격하지 않음으로써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그는 중국의 함대에게 압록강과 웨이하이를 잇는 해상선의 동쪽으로 발진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중대한 전략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중국 병력의 배치를 보호하는 호위작전에 함대를 사용하기 위해 일본함대와 교전하는 모험을 최소화하기를 원했다.
평양에 주둔한 4명의 중국군 사령관들은 개별적 계획만을 갖고 있었으며 최악의 상황에 대한 대비책도 없었다. 단지 평양의 방어선이 무너지면 압록강에 방어선이 세워질 것이라는 계획만 있었다.
평양은 지리상으로 남쪽이나 동쪽에서는 접근하기가 어려웠지만, 만약 공격군이 북쪽에서 대동강강의 우측 제방을 공격한다면 접근하기가 비교적 용이했다.
9월 15일 새벽 4시 30분, 일본인드른 중국인들의 주의를 주력공격으로부터 돌리기 위해서 대동강의 서쪽 제방에 있는 요새들에 포병공격을 퍼부으면서 동쪽방향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주력공격은 북쪽과 북서쪽 방향에서 수행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남쪽으로부터 공격하는 척 하면서 노쯔 미치스라 장군과 오시마 요시마사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가 북쪽으로부터 대규모 공격을 가하는 측면 공격작전을 감행했다. 또 남서쪽에서 공격하도록 계획되었던 일본의 주력병력은 중국의 주요 요새들을 돌파하는 주공격에 가담하지 않고 중국군이 후퇴할 때 그들을 쫒아 괴멸시키는데 집중했다.
중국군은 일본군이 북으로 100마일 너머 압록강에 다다를 때까지 저지할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중국의 딩루창 제독은 자신의 기함을 노출시켰지만 다른 함선들이 세로로 직렬했있는 일본함대에 발포하기 좋은 위치로 항로를 수정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아마도 겁에 질린 딩제독의 부하들은 이 명령을 무시했다. 깃발로 신호하던 당시에 그의 부하들은 일본함대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기 전에 주포를 발사했는데 딩제독이 있는 임시 갑판을 폭파해 버렸다. 정면으로 발포할 때 이러한 일이 발생하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되었던 것이었다. 결국 딩제독은 다리가 뭉개져 전투 중 걷는 것은 물론이고 일어설 수도 없었다. 따라서 그가 적시에 명령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일본의 계획은 중국 제1의 해군기지가 있는 뤼순과 제2의 해군기지가 있는 웨이하이를 장악하고 베이징으로 협공작전을 펴는 것이었다. 일본의 병력은 3개 종대로 진격할 것이다. 제1군의 일부는 남쪽으로 만주를 통해 요동반도로 진격할 것이다. 제2군은 바다를 통해 요동반도에 상륙하여 반도를 따라 남진하여 뤼순을 장악할 것이다. 그리고 제1군의 나머지 병력은 조선에서부터 청왕조의 고향인 선양을 향해 진격할 것이다. 2군이 뤼순을 장악한 뒤 제1군은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기 위해 만주에서 지상작전을 계속하는 반면에 제2군은 웨이하이에 있는 북양함대의 본부기지를 동시에 칠 것이다. 이것이 성공하면 일본군은 중국해군을 제거하여 베이징을 자신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는 거이다. 청왕조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베이징에 들어가는 강 입구에 있는 다구에서 펼쳐질 상륙작전을 대비하여 히로시마에서 제3군을 조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대응작전은 별것이 없었고 또 그것은 일본인들이 압록강을 감히 건널 수 없을 것이라는 가정 위에 서 있었다.
야마가타 원수의 전쟁수행계획은 정면의 전선에서 공격하는 척하면서 주력군은 추산에 있는 측면에서 진격하는 일종의 성동격서 작전이었다. 이를 위해 그의 군대는 우선 압록강을 건너야만 했다. 10월 24일 밤, 일본군 주력부대는 의주에서 부교를 설치하여 압록강을 도강했다. 25일 중국의 측면에 대한 주력부대의 공격과 적을 교란시키는 정면공격이 동시에 시작되었다.
10월 30일 일본군을 펑황청을 얻고 11월 15일 산요우옌(山曲嚴)을 장악했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일본의 만주작전의 속도가 늦춰졌다.
일본인들은 제해권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뤼순의 장악이 긴요하다고 간주했다.
http://blog.daum.net/ctzxp/3578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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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뻔뻔, 폐하, 다시 왕정, 왕의 영향력
일본에서는 한국이 친러시아 정책을 취할것을 예상 못했나?
한반도에서 왔으면 왔다는 것 전승기록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내 주요 세력 중에 한반도에서 온 가문씨족은 매우 적다.
노기 마레스케 장군 지휘 하에 제2군단 병력이 10월 24일 요동반도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11월 6일 일본인들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진저우를 점령했다. 그릭 7일 노기 장군의 군대는 요동반도에서 가장 좋은 정박지인 다롄을 총한 방 쏘지 않고 장악했다. 이미 전날 밤에 중국군은 뤼순으로 도피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11월 초에 뤼순에 도착했던 북양함대는 웨이하이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아 요동반도의 방어에 참여하지 않았다.
뤼순에서의 지상전투 방어에선 요충지를 언덕에서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요새들 간에 조정이 필요했지만 중국인들은 그러한 조정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일본은 계획된 웨이하이 공략작전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가능한 한 많은 중국 병력을 끌어내기 위한 견제책으로 만주에서 매우 힘든 겨울전투작전을 추진했다.
장비를 파괴해선 안 된다는 중국의 군사법규는 적을 중국 영토 깊숩히 끌어들여 적의 병참선을 늘리고 혹독한 겨울 날씨로 적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중국의 소모전 전략을 손상시켰다.
일본의 다음 목표인 하이쳉은 12월 13일 함락되었다. 12월 19일에 일본은 하이쳉의 남서쪽 마을 강와쟈이(감옥세)를 장악했다. 이것은 가이핑(開平)과 랴오양의 중국 연계선을 효과적으로 단절시켰다. 이듬해인 1895년 1월 10일 일본의 제2군단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가이핑을 세 갈래로 공격했다. 가이핑 함락 후 3월 초 중국의 3개 군대가 니우장의 북부에 집결했다. 중국인들이 맹렬히 저항햇지만 니우장은 3월 4일에 그리고 항구 도시인 잉코우는 3월 7일에 일본군에게 함락 되었다.
동쪽 공격의 목적은 중국인들의 주의를 서쪽으로 돌리면서 실제로는 웨이하이의 동쪽 30마일 지점에 일본군을 사륙시키는 것이었다.
2월 2일 일본인들이 웨이하이 마을에 진입했을 때 병영은 비어 있었다.
일본은 중일전쟁에서 보다 타이완 관련 전투에서 더 많은 사상자를 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쩡꿔판은 방어적 전쟁의 신봉자였다. 그는 공세적 전투를 반대했으며 자신의 부대가 공세적 작전을 벌일 때조차 공격적 전투를 반대했다.
태평군과 전투시 쩡귀판은 수적으로 몇 배 우세한 적과 대치하는 전투자에서 독자적으로 행동할 유능한 지휘관의 부족을 빈번히 경험했다.
전투 내내 딩제독의 지시는 위해에서 압록강까지 발해의 해안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영국과 러시아의 개입이 거의 확실하여 감히 조선의 독립과 순결을 침해할 엄두를 아직은 내지 못했다.
1872년 징집제도가 채택된 후 일본병사들은 3년간 현역복무하고 4년간 예비군으로 봉사했다. 그리고 모두 획일적으로 무라타총으로 무장했다.
일본정부는 자국의 큰 증기선 회사에게 보조금을 제공하고 전시에 그들의 선박을 이용할 수 있게 했었다.
중국으로부터의 엄청난 배상금(총 2억 3천만 냥)
상대적 국력이론의 관점에서 바라본 중일전쟁(1894~95)
조한승
국력의 크기가 비슷한 경우 국가간의 갈등은 국력 차이가 큰 경우보다 비교적 쉽게 전쟁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레비(Jack S. Levy)의 예방 전쟁(preventive war)
1840년 아편전쟁과 1864년의 청불전쟁과 같은 전쟁이 있었지만 서구 국가들이 중국과 전쟁을 치룬 이유는 중국을 점령한다든가 중국을 정치적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에서의 상업적 이익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는 등 중국 영토에 대한 서구 세력의 실질적 지배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러한 영토적 지배는 중국 내에서 상업 활동을 확대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서의 의미를 가진 것이었지 그것이 중국 점령을 위한 교두부였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중국-일본간 국력 차이를 보면 18831년 이후 격차가 계속 좁혀지는데...근데 1881년에서 1883년까지 단기적으로 중국-일본간 국력 격차가 벌어지기도 한다.
제조업 생산에서 주요국가가 차지하는 비율을 보면.....
1750년 중국이 32.8% 러시아가 5.0%, 일본은 3.8% 1800년은 중국이 33.3%, 일본이 3.5%, 1830년은 중국이 29.8 일본이 2.8%, 1860년에는 영국이 19.9%로 중국의 19.7%를 추월하기 시작한다. 1900년은 중국은 6.2%(일본은 2.4%)이고, 독일이 13.2%로 급부상해 세계 3번째를 차지하게 된다.1913년에는 중국은 3.6%로 더욱 낮아진다. 그치만 이때에도 일본 2.7%보다는 높다. Paul Bairoch
1750년대 중국이 일본보다 세계에서 제조업 생산비율이 월드이 높다고 전쟁을 하면 이긴다고 볼수 있을까? 일본이 중국보다 약할까?
1893년 육군이 7개 사단, 12만 명이었는데 예비군까지 포함하면 전시 동원 가능 병력이 약 23만 명이었다. 1890년에 해군은 전함 7척, 보조함 24척, 어뢰정 12처을 확보 혹은 건조하고 있었는데, 1894년 전쟁 직전에 현대식 군함은 총 5만 7천 톤으로 28척이었고 어뢰정은 24척이었다. 군사비는 1880년대 초반에 일본 정부의 세출의 20%미만이었으나 1890년대에는 전체 정부예산의 3%를 훨씬 넘었다. 그리고 군사비 지출이 육군은 1881년에서 1887년 사이에 60% 이상 증가했고, 해군은 1881년에서 1891년 사이에 200%가 증가했다.
중국 군함의 톤수로는 약 6만 5천톤으로 일본을 앞섰으나 실제로는 일본의 해군과 상대해야 하는북양해군의 경우 군함의 톤수는 약 3만 5천 톤에 불과했다.
그리고 리훙장 휘하의 북양육군도 3만에 불과했다.
서구 열강은 조선의 독립만 보장된다면 중국과 일본 사이의 패권 다툼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1888년 러시아는 극동 문제에 관한 특별회의를 개최했는데, 여기서 러시아는 부동항 확보차원에서 조선의 획득을 논의했다. 하지만 회의는 조선의 획득은 오히려 러시아의 상업적, 군사적, 외교적 이익에 불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1889년까지는 매우 우호적 이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후인 1895년 4월 11일 특별각료회의에서 “일본의 남만주 장악을 저지하는 것이 러시아에게는 필수적인 이해”라는 결론을 내린다.
1898년 3월 러시아는 랴오둥반도의 뤼순과 다롄을 25년간 할양하는 권리를 얻는다.
해군의 경우 1895년에 전함 3처과 비무장 순양함 12척에 불과했으나 1896년 일본은 소위 ‘6.6 함대계획’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군비확장 10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결과 러일전쟁 개전 시 해군은 총 152척(26만 4천 6백 톤)의 함정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육군은 1894년 당시의 8개 사단에서 러일전쟁 개전 전후 모두 19개 사단(40만 명)으로 증대되었는데, 전시체제 편제로는 약 99만 명이 무장했다.
‘6.6 함대계획’이란 10년간 세계수준의 전함 6척과 장갑순양함 6척5을 근간으로 하는 103척(15만3천 톤)의 함정을 보유하는 계획을 말한다.
삼국간섭시 일본을 방해했던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영국과 제휴하기 시작했고, 프랑스 동아시 함대는 겨우 낡은 전함 1척과 비무장 순양함 5척으로 이루어져 일본을 견제하기에는 무력했다.
병력수로 봤을 때 러일전쟁 직전 러시아의 병력은 약 백만 명 규모였으나 전쟁이 발생하자 총 350만 명이 추가로 동원되었다. 1897년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병력은 4만 명에 불과했으나 전쟁이 발발할 시점에 러시아의 극동 군사력은 3천여 명의 장교를 포함해모두 15만 명 이상이었고 166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1896년까지 극동에서 러시아의 해군은 전함 2척과 철갑 순양함 6척, 비무장 순양함 1척으로 일본 해군에 비해 약가 우위의 위치에 있었다.
일본의 대형전함 건조계획에 맞서 러시아도 1897년 해군계획을 수립하여 극동에 4척의 대형전함을 건조하기로 하였다. 1902년 중엽 러시아는 태평양 함대를 증강하기 시작해 1903년까지 7척의 전함과 7척의 순양함, 25척의 구축함, 27척의 소형 군함을 보유했다. 이는 일본의 해군과 비교해 약간 우위의 전력이었다. 하지만 영국 기술로 건조된 일본의 함대와 비교해서 효율 면에서는 일본에 뒤져있었다.
1894~5년 중일전쟁기의 일본군과 조선
서민교
메이지유신 직후인 1870년에 일본정부는 육군은 프랑스식(1886년에는 독일식으로 변경)을, 그리고 해군은 영국을 모델로 하면서 근대 일본의 ‘천황의 군대’를 건설할것을 결정하였다.
정부는 1868년에서 1887년까지 10년간 평균 국가예산(일반회계)의 15.9%를 군사비에 투입하고 있고 1883년에서 중일전쟁이 발생하는 1894년까지는 평균 국가예산의 25%내외를 군사비로 지출하면서 군비증강에 힘을 쏙아부었다. 또 육군의 경우에는 건군 초기 연대를 중심으로 하던 기간 병제가 1888년 프랑스식에서 독일식으로 바뀌면서 종래의 6개 진대가 폐지되고 기본 보병연대의 상급기관으로서 사단을 편성하여 근위사단과 제1사단에서 제6사단까지 7개 사단일 설치되었고, 사단은 하나의 전략단위로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기동성을 가지게 되었다.
임오군란 이후인 1882년 9월 30일 체결된 제물포 조약에 근거하여 일본은 국제법상으로도 합법적으로 소수이기는 해도 일본군대를 조선에 파견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
수비대는 1896년 5월까지 존재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미 1895년 4월 17일에 중일전쟁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의 성립으로 이미 존재 이유와 그 법적 근거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으로 존재한 것이 된다는 점이다.,
합방이전 근대 일본에서는 시기와 상관없이 조서의 수도 한성(한양)을 나타내는 명칭으로 사료나 서적 속에서 경성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884년의 갑신정변을 경성사변이라거나 1885년의 한성조약을 경성조약이라고 칭하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청일전쟁이후 조선내 일본군 수비대는 경서, 부산 원산 이외 지역에서는 해체되게 되지만 그래도 1896년 5월에 주둔 형식이 주차군으로 바뀔 때까지 주류하였다.
1880년 11월 일본 육군에게 있어서 인접국가인 조선은 국가로서 인정받지 못한 존재였다고 하겠다.
역사학자 오오에(大江)가 강조하는 것은 1880년 당시 야마가타를 비롯한 일본군부의 대외정책의 최중요 관심사는 러시아의 동방정책5이었다. 즉 러시아가 일본의 가상적국이었고, 청국은 ‘인방隣邦’이었다.
갑신정변 직후 선후 처리를 위해 조선에 파견되었던 전권대사인 이노우에 카오루는 조선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확보하기 위해 사츠마의 군벌의 대표인 구로다 기요다카의 지지를 얻어 청국과의 국지전까지도 고려했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영국과 러시아의 개입을 우려하여 청국을 능가하는 군비확장이 끝날 때까지 개전을 보류하였다는 사실이 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일본이 이 시기에도 조선을 일본의 단독 보호하에 두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우라가 현역에서 물러난 것도 군 제도 개혁문제에 대해 사츠마-조슈(줄여서 삿초薩長) 정권의 야마가타 주도에 대해 반대했기 때문이다. 또 이노우에가 외상에서 사직할 수 밖에 없었던 계기가 조약개정 교섭 당시 비밀교섭 내용을 언론에 흘리고 연약 굴복외교라고 정면에서 비파한 사람이 타니 다테키 농상부 대신이었는데, 타니는 육군 중장 출신이었고 월요회 사건으로 미우라 공사와 같이 현역에서 물러났던 아주 막연한 사건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스기무라 후카시는『杉村君日記』를 남겨 놓고 있는데, 이 사료가 일본 토치기현 사노(佐野)시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래 소장자는 스나가 하지메라(須永元)는 사노 지역의 대지주었다.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웠던 게이오의숙 출신으로 정확한 배경을 알 수 없으나 민비 시해사건 관련자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예를 들어오카모토 류노스케에게 평생 생활비를 등으로 거금을 지원하고 있고, 또 우범선에 대한 지원도 남다르게 하고 있다. 우범선의 무덤도 분묘가 되어 사노시에 있으며, 그의 아들인 우장춘의 이본애 후견인도 바로 스나가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