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성탄 팔일 축제 제7일) 하느님의 자녀 그 사람의 억양으로 그의 고향을 안다. 전라도나 경상도 사람이 서울말을 써도 무의식적으로 새어 나오는 그의 고향 말 억양까지는 감출 수 없다. 하느님 자녀인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 말을 한다. 그렇다고 천사처럼 말한다는 건 아니고 교회 언어에 익숙하다는 뜻이다. 전례 안에서 사용되는 말은 일상에서 거의 쓰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 언어는 사랑, 용서, 인내, 희망 같은 말이다.
그런 말은 인류 보편적 가치다. 가톨릭이란 말은 보편, 일반, 공통 등의 뜻을 지닌 고대 그리스 말에서 유래했다. 나의 신앙은 인류 보편적인 바람과 희망을 담고 있다. 사랑 용서 인내 희망을 말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고, 더 참아주지 못한 걸 죄라고 고백한다. 이를 거룩한 죄책감이라고 부르고 싶다. 세례받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가 왜 그런 죄책감을 느끼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의 언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4-5).”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요한 1,12-13).”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믿음의 세상 안으로 들어왔다. 믿음은 우리가 지금 하느님께로 가는 긴 영적 여행을 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이 세상 삶의 완성이고, 하느님을 뵙기 위해 건너가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한 처음에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이라고 믿는다.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희랍어 원문에는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셨다.’라고 되어 있다. 유다인들에게 하느님의 천막은 한국 사람에게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처럼 아주 익숙한 말이다. 그들 조상이 광야를 헤맬 때 십계명이 새겨진 석판이 담긴 상자, 즉 계약의 궤가 천막 안에 모셔져 있었고, 이동할 때마다 그것을 메고 다녔다. 하느님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다. 예수님이 그걸 몇몇 사람들에게 확인 시켜주셨다.
그리스도인에게서는 그리스도인 향기가 풍긴다. 물론 세례를 받았다고 다 그런 건 아니다. 교회 안에서 듣고 배우고 기도해서 그렇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온 생을 바쳐서 고민하고 연구한 것, 모든 사람이 그토록 찾는 것을 우리 하느님 자녀는 이미 알고 있다. 예수님이 그것이고 그분이 진리다. 그분이 사셨던 모습이 진리에 따른 삶, 충만한 삶이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7-18).” 사람들이 우리가 믿는 대로 살지 않는다고 하는 질책과 비난을 겸허히 그리고 고맙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다시 잘 보여주고, 우리를 응원해 주는 것이다.
예수님, 제 안에 머무르십시오. 저도 주님 안에 머무르겠습니다. 제가 가는 곳은 어디든, 무엇을 하든 저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은 저를 다 보시지만 저는 주님을 뵙지 못해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다 보이는 거보다는 믿는 것이 제게는 이롭다는 걸 압니다. 제게 믿음을 더해 주시고, 그래도 가끔은 저와 함께 계심을 느끼게 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 앞에서 기도할 때마다 천사들과 성인들이 사는 그곳을 더 그리워하게 해주소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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