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북한이라고 부르는 ‘북괴’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처음 시작은 ‘반공 포스터’였습니다. 선생님들은 어린 학생들에게 ‘반공 포스터’를 그리도록 했습니다. 잘된 포스터는 교실 뒤에 있는 게시판에 붙이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은 섬뜩한 구호와 그림이었습니다.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은 아직도 생각납니다. 북한 사람은 악마처럼 여겨졌습니다.
청와대를 공격하려 했던 북한의 특수부대 이야기, 남침용 땅굴 이야기, 판문점 도끼 만행 이야기, 문세광과 육영수 여사의 사망 이야기, 아웅산 테러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북한은 도저히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는 원수였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적이었습니다. 그 증오와 분노의 뿌리는 ‘한국전쟁’이었습니다. 삼국시대 이후 1000년 이상 없었던 민족의 전쟁이었습니다. 형제의 가슴에 총을 겨누었고,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았습니다.
북한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이 있습니다. 그 시작은 정치적인 것이었지만 감동은 운동경기에서 찾아왔습니다. 한반도 기를 들고 올림픽에 참가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남과 북의 단일팀이 일본과 중국의 탁구를 이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소 때를 몰고 판문점을 넘는 것도 보았습니다.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서 포옹하는 장면은 한편의 드라마였습니다. 금강산 관광, 개성 관광이 이루어졌습니다. 북한의 응원단이 부산 아시안 게임을 응원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남한의 연예인들이 북한을 방문해서 공연을 하였고, 북한의 예술인들도 남한을 방문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기억을 후손들에게 남겨 주어야 할까요? 또 다시 ‘반공 포스터’를 그리는 기억을 남겨야 할까요? 서로의 가슴에 분노와 원망, 불신과 증오의 총을 쏘아야 할까요? 다시금 가난을 대물림하고, 주변의 강대국에게 침략을 당하는 모습을 남겨 주어야 할까요?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남한 학생들이 백두산으로 수학여행을 가고, 북한의 학생들이 명동에서 여행을 즐기는 기억을 남기면 좋겠습니다. 아시아 고속도로가 완공되어서 서울에서 평양, 북경, 모스크바를 거쳐서 파리와 로마를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서울에서 신의주, 상하이, 방콕, 하노이, 봄베이를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남한의 기술과 북한의 노동력이 결합되어서 세계 최고의 상품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긴장과 갈등의 상징인 비무장 지대가 세계 최대의 환경과 생태의 공원이 되면 좋겠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성지가 되면 좋겠습니다. 선택은 역시 우리의 몫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의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화해하고,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너그럽게 품어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도 결실을 맺기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의 싸움을 기억합니다. 사소한 일로 서로 싸우는 아이들이 서로 뒤엉켜 있습니다. 덩치가 작은 아이는 덩치 큰 아이의 급소를 잡고 있습니다. 큰 아이는 작은 아이의 목을 움켜잡았습니다.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합니다. ‘놔!’ 그러나 서로 쉽게 놓지를 못하고 울고만 있습니다. 주위에서 그 모습을 보면 우습기도 하고, 안돼 보이기도 합니다. 어린아이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관계는 꼭 시비를 가려야만 해결되는 것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남과 북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시비를 가리려고 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결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엉킨 실타래는 더욱 심하게 꼬이게 됩니다. 불가에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면 원망은 해결되지 않는다. 오직 참음으로써 원망은 해결되나니 이 가르침은 영원한 진리이다. 시비(是非)란 본시 옳은 것만 취한다면 해결되지 않으며, 옳고 그른 것을 동시에 놓아버려야 끝이 난다.
宗敎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라고 합니다. Religion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의미가 있는 영어라고 합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으로 세상사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이 종교라면 그리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그리하여 참된 구원의 문에 도달하려면 꼭 是非를 가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普施와 容恕 그리고 사랑이만이 아름다운 기억을 후손들에게 남겨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첫댓글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