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세계 평화의 날)) 희망의 순례자 새해 첫날이다. 이렇게 어수선하고 무겁고 어두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았던 때가 얼마나 있었을까 싶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새해 첫날 하느님의 어머니를 기념하며 세계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이 더욱 의미가 있다. 교회는 정말 예언자다. 올해는 25년마다 돌아오는 정기 희년이고, 이번 희년의 주제는 ‘희망의 순례자’다. 마치 우리나라를 위한 희년이고, 교회는 작년 12월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거 같다. 어둡지 않다면 빛이 필요 없고, 절망적이지 않다면 희망을 말할 필요 없을 거다.
모두가 바라는 평화지만 평화를 이루는 길은 멀고 험난하다. 무지하고 무도한 권력자는 자기 식대로 평화를 이루려고 폭력을 사용한다. 야만적이다. 대화하고 타협하고 협의해서 최고는 아니라도 우리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선택과 결정을 해나가야 한다. 모두가 만족하는 제도가 어디 있겠나, 불만스러워도 참고 아쉬운 대로 그렇게라도 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거지. 그게 사실 우리의 일상이었다. 불평하면서 따르고 피해를 보는 이들을 위로하고 도우며 다음에는 더 좋은 일이 있으려니 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의 오만과 잘못된 신념으로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이 다 깨졌다. ‘도량발호(跳梁跋扈)’, 교수들이 뽑은 작년 올해의 사자성어라고 한다. ‘권력이나 세력을 제멋대로 부리며 함부로 날뛰는 행동이 만연하다.’라는 뜻이란다. 그 외에도 ‘낯짝이 두꺼워 부끄러움이 없다.’라는 뜻의 ‘후안무치(厚顔無恥)’와 ‘머리가 크고 유식한 척하는 쥐 한 마리가 국가를 어지럽힌다.’라는 뜻의 ‘석서위려(碩鼠危旅)’가 그 뒤를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자성어들은 잠시나마 엉킨 실타래처럼 답답한 속을 풀어주고 내가 세상을 잘못 읽고 있는 게 아니라고 위로해 줄 뿐이다. 현실은 여전히 그 말들 그대로이다. 가야 할 길은 멀고 험난하다. 혼란스러우니까 질서를 말하고, 어두우니 빛을 찾고, 절망적이니 희망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갑자기 이렇게 된 게 아니라 잠재해 있고 어두운 곳에 숨어 있던 것들이 다 드러난 거다. 정치인들과 권력자들의 속내와 민낯이 다 드러났다. 초등학생처럼 참으로 유치하고 이기적이다. 그리고 위대한 시민들의 평화로운 힘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하느님은 권력자들이 아니라 시민들 가운데 계시다는 걸 똑똑히 봤다. 평화는 하느님 편이고, 폭력은 그 반대편이다. 폭력은 평화를 이기지 못한다. 하느님을 이길 자는 없다. 평화적이고 자발적인 시민들 편에 서서 걸으면 평화롭고 마침내 승리한다.
새해 첫날에는 이런 축복의 말씀을 듣는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불의의 사고로 가족과 친구를 잃은 이들의 눈물 속에서, 자발적이고 평화롭게 외치는 시민들 속에서 주님의 얼굴을 본다. 그날 밤 목동들이 보았던 구유에 누인 아기가 그들 가운데, 평화를 바라는 우리 가운데에 계신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우리 그리스도인들 하느님의 자녀는 희망의 순례자다. 그리고 그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줄 안다(로마 5,5). 희년이 끝나는 올 연말 혹은 내년 이맘때면 우리 믿음이 그르치지 않았음을 보게 될 거다.
예수님, 희망이 있으니 삽니다. 주님이 계시고 저희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고 믿으니 용기와 인내로 주님 뒤를 따릅니다. 저희 안에서 큰일을 이루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선하고 의로우신 하느님을 무한히 신뢰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