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백련사는 용인시 포곡면 가실리 산43번지에 있는 용주사의 말사이다. 백련사에 가는 길은 영동고속도로 마성I.C에서 나가 에버랜드 정문 쪽으로 가다가 정문 가까이 이르러 좌측으로 난 산길을 따라 1.5㎞ 정도 들어가면 된다. 진입로는 산길을 굽어 돌아가기 때문에 경치가 아름답다.
백련사는 에버랜드 안에 있기 때문에 에버랜드의 부속사찰처럼 보이지만 에버랜드가 들어오기 한참 전부터 있었던 오랜 역사의 사찰이다. 산이 깊고 험해 그전에는 어떻게 오갔을까 싶다. 용인 백련사는 근래까지도 백련암이라 불리는 작은 암자였다.
백련사는 이름이 불교적이고 좋아 전국에 같은 이름의 사찰이 8개가 있으며 백련암까지 합치면 15개에 이른다. 이 중에서 강화도 고려산에 있는 백련사는 삼국시대에 인도 승려가 이곳에 와 절터를 물색하다가 고려산(당시는 오련산) 정상에서 다섯 색깔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을 발견했다. 스님은 이 오색의 연꽃을 꺾어서 공중에 날리고 꽃들이 떨어진 곳마다 절을 세웠는데 힌 꽃이 떨어진 곳에 세운 절을 백련사라고 하였다는 전설도 전한다.
제천의 백련사는 의상대사가 백련지 동쪽에 작은 암자를 지은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무주의 백련사는 신라시대에 백련이 초암을 짓고 수도하던 중에 그 장소에서 백련이 솟아나와 절을 창건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진에도 백련사가 있으며 경기도 안성군에도 고려 때 혜소국사가 칠장사의 암자로서 지은 백련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소실되었다.
용인 백련사가 처음 지어진 것은 통일신라 801년에 신응선사(愼應禪師)가 암자로 지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현재 백련사에 보관되어 있는 1791년에 쓰여진 ‘백련암약사’라는 책에 의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기록 외에 사찰에 전하는 이를 증명할 만한 역사적 유적과 유물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신응선사의 행적마저 알려져 있지 않아 안타깝다. 그 후에는 고려 말 1389년에 천공(泉公)스님이 절을 고쳐 지었다고 한다. 천공스님 역시 행적은 보이지 않지만 현재 삼성각 아래에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석가여래좌상이 남아 있어서 아마도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분명히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초에는 태조와 인연이 깊은 무학대사도 이곳 백련암에 와 18나한상을 만들고 절을 고쳐지었다고 한다. 무학대사가 과연 이 절을 중수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으나 아무튼 무학대사가 만들었다고 하는 18나한은 대웅전에 모셨다가 지금은 나한전을 따로 짓고 여기에 모셨다. 16나한에 2명을 더 한 것으로 주존불의 협시불로 제작된 가섭과 아난 보살을 합해 18나한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나한은 아라한과를 증득한자로서 원래 부처를 가리키는 말인데 더 이상 배우고 닦을 게 없다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을 의미하는 불제자들의 이상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나한신앙이 시작되었으며 나한상은 500존이나 16존을 모시는데 나한상을 모신 전각을 보통은 영산전이라고 부른다. 나한은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 입멸에 들지 않고 중생을 구제한다. 나한은 전생에 박쥐였던 인계타, 부끄러움이 많아 남 앞에 나서지 않았던 소빈타, 바보라고 놀림받던 주다반탁가 등 부처님의 16제자들이다.
나한상은 대개 표정과 몸짓이 사람들과 같이 소박해 친숙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불상중에 하나이다. 백련사의 나한상은 원래 대웅전에 모셨던 것인데 지금은 대웅전 서쪽에 기와와 진흙으로 만든 소박한 원형 건물을 짓고 그 안에 모셨다. 석조로 만들었으며 25㎝내외의 비교적 작은 나한상들이다. 이후 백련사는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었고 1671년에 이르러 다시 수경(琇璟)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수경대사 행적 역시 알려진 바 없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백련사에는 수경대사의 부도와 비가 전해지고 있다. 이 부도와 비는 백련사의 동북쪽 100여m의 거리에 있다. 백련사를 관람하고 동쪽 진입로로 빠져나와 산 위로 약간 오르면 있다. 부도와 비가 서와 동으로 나란히 함께 서있는데 파손없이 상태가 양호하다. 부도는 화강석으로 만들었는데 넓은 방형의 지대석 위에 종모양으로 만들어 올렸다. 지대석 위에 종모양의 부도석을 올리면서 지대석에 홈을 파 부도석이 안착하고 움직이지 않도록 배려했다. 이 부도는 거칠게 다듬어 자연석의 느낌이 남아 있으나 다른 것에서 보기 어려운 조형기법으로 소박하면서도 힘있게 느껴진다. 옆에 있는 비석은 화강석 통돌로 만들었으며 아무런 장식이 없다. 앞면에는 ‘琇璟堂道元大師之塔’이라고 쓰여 있으며 측면에는 ‘崇禎紀元後五十年’이라고 적혀있다. 즉 부도의 주인인 수경스님은 열반하신 후 받은 당호가 ‘수경’이고 법명은 도원(道元)대사 임을 알 수 있다. 또 부도와 비를 세운 것은 숭정기원후 50년이라고 했으므로 1671년에 중창불사를 한 후 6년이 지난 1677년임을 알 수 있다.
백련사에서 역사적 흔적을 미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유물은 바로 삼성각 아래에 있는 석조여래좌상과 나한상, 그리고 바로 이 도원대사의 부도 등이다. 건물들은 불과 20여년 전에 새로 지은 것들이다.
현재 경내에는 1989년에 새로 지은 정면3칸, 측면 3칸의 비교적 규모가 큰 대웅전을 중심으로 서쪽 바로 옆에는 지장전이 있고 동쪽 옆에 언덕 위에는 삼성각이 있다. 이 삼성각 자리는 원래 심검당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심검당이 대웅전 앞마당 서쪽편에 놓여 동향으로 배치했다. 대웅전의 앞 마당은 한 단 낮으며 좌우가 긴 장방형으로 서쪽에는 심검당이 있고 다시 심검당 서쪽으로 한 단 높은 대웅전 높이로는 원형의 나한전과 현대식 요사채 하나가 있다. 그리고 마당 동쪽에는 대웅전과 함께 지은 종각이 놓였다. 그리고 앞마당 남쪽에는 마당쪽에서는 1층이지만 진입로쪽에서는 3층인 좌우가 매우 긴 14칸의 요사채가 가로놓여 있다. 요사채의 서쪽은 ‘ㄱ’자로 마당 쪽으로 꺾여 올라와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누각겸 요사채인 이 건물은 1∼2층은 콘크리트고 3층만 목조이다. 누각 중앙에는 꽤 높은 계단이 놓여 대웅전으로 진입하도록 했다.
워낙 터가 좁고 경사지에 지은 절이기 때문에 진입로에 대단한 계단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모습이 갖춰진 것은 1989년에 당시 신도회장이었던 허남용의 주도로 지어진 것들이다. 이 때 대웅전과 선원, 요사 3동의 건축물 외에 범종각이 새로 지어졌다. 그 공덕비와 백련사 사적비(1985)가 나란히 사찰 입구 서쪽에 세워져 있다. 이 두 비석을 통해 사찰의 내력을 소상히 알 수 있다. 자연경치는 빼어나지만 워낙 경사지에 축대가 부담스럽게 쌓여지고 집입부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요사채가 14칸의 3층이라는 큰 부피로 놓여 있어서 부담감을 준다.
여기에 계단을 직선으로 대웅전 마당에 이르도록 설치했는데 이 또한 너무 인상이 강하고 부담스럽다. 부석사와 같이 경사를 아름답게 처리하는 조형기법이 도입되었으면 더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로운 백련사가 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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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솔님~~ 건강한 여름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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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전이 참 특이한 건물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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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대웅전에 잠시 머물다 갑니다 구경잘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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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바람소리님 아름다운 그림에 잠시 머물러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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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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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보았습니다.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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