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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문황제(成祖文皇帝)의 생모(生母) 공비(碽妃), 기황후(奇皇后)
高皇帝(고황제) 이후(後孫)의 황제(皇帝)는, 고려인(高麗人) 혈통(血統)
2022년 05월 06일
○ ‘성조(成祖) 문황제(文皇帝)의 생모(生母)’에 관한 이야기는, “명황(明皇)의 후예(後裔)들은 고려인(高麗人)의 혈통(血統)”이라는 제목(題目)으로 ‘2015년 11월 08일’ 게재(揭載) 글이 있다.이것을 보완(補完)하고, 추가(追加)하여 재(再) 정리(整理)한 것이다.
‘고황제(高皇帝)’란 누구를 지칭(指稱)하는 것일까? 「고황제(高皇帝)가 고려(高麗) 여인(女人)을 왕비(王妃)로 맞아 후손(後孫)을 낳았으니 그 후손(後孫)들 역시 고려인(高麗人)의 혈통(血統)을 가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잘못된 표현(表現)일까?
➊ ‘조선(朝鮮)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몽고(蒙古)계 여진(女眞)족【또는 달단(韃靼)족? 여진(女眞)계 몽고인(蒙古人)?】으로, 고려(高麗)에 귀화(歸化), 관리(官吏)가 되었다가,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켜 조선(朝鮮)을 건국(建國)했고, 뒤에 ‘고황제(高皇帝)’라 불려졌다.
➋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은, 고아(孤兒)로 먹을 것을 찾아 전전(轉轉)하다가 승려(僧侶)가 되었고, 극심(極甚)한 혼란(混亂) 와중(渦中)에, 봉기(蜂起)한 민중(民衆)의 난(亂)에 참여(參與), 승리(勝利)한 후(後), 원(元)을 내쫓고, “명(明)”을 세우고, 뒤에 ‘고황제(高皇帝)’라 불려졌다.
➤ 이성계(李成桂)의 왕비(王妃)가 하나든, 여러 명(名)이든 이는 모두 고려(高麗) 여인(女人)이었으니, 후손(後孫)들 모두는, 고려인(高麗人) 혈통(血統)을 가진 것이고,
➤ 주원장(朱元璋)의 마황후(馬皇后)는 소생(所生)이 없고, 공비(碽妃)【공비(碽妃)는 원(元) 순제(順帝)의 황비(皇妃)였던 기황후(奇皇后)다. 포로(捕虜)가 되어 주원장(朱元璋)의 비(妃)가 되었다고 전해진다.】소생(所生)만 있으니, 그 뒤의 후손(後孫)들 모두는 고려인(高麗人)의 혈통(血統)이다.
➌ 그렇다면 “고황제(高皇帝)”가 누구이던, 뒤의 후손(後孫)들은 모두 고려인(高麗人)의 혈통(血統)을 가졌다는 이야기다. 또 고황제(高皇帝)는,
조선(朝鮮)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를 말하는 것일까?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본래(本來)에 “한 사람”이었으나, 사가(史家)들의 목적달성(目的達成)을 위해「한 사람을 유체이탈((有體離脫)시켜, ‘두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것일까?」
➤ 묘하게도,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이 말하는 중국사(中國史)와 ‘한국사(韓國史)=조선사(朝鮮史)’는, “똑같은 때, 똑같은 시기(時期)에 흥(興)하고 망(亡)하기를 거듭한다.” 9천 년(千年), 5천 년(千年)의 역사기록(歷史記錄)에서 ‘수십(數十)년이니 몇 년(年)’이니 하는 말은, 무시(無視)해도 좋다. 즉(卽) 같다는 뜻이다.
고대(古代) 왕조(王朝)인 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부터 그 이후(以後)의 여러나라들의 흥성(興盛)과 소멸(消滅)은, 「중국사(中國史)나 조선사(朝鮮史)가 한 몸처럼 연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사실(事實) ‘조선사(朝鮮史)’는 면면(面面)히 이어져 왔으나, ‘중국사(中國史)’라는 말은, 그 존재(存在) 자체(自體)가 없다. 즉(卽) 중국(中國)이라는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20세기(世紀) 후반(後半)부터 사가(史家)들에 의해 중국사(中國史)라는 것이 만들어졌을 뿐, 그 어디에도 중국사(中國史)라는 말이 없었다. 현대(現代)의 용어(用語)일 뿐이다.】
《본래(本來), 면면(面面)히 이어온 ‘하나의 역사(歷史) 조선사(朝鮮史)’를, ‘두 개의 역사(歷史) 즉 조선사(朝鮮史)와 중국사(中國史)’로 ‘재편성(再編成)=재편집(再編輯)’하여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疑懼心)이다.
➤ 이렇게 만들어 놓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많은 이야기들이 실제(實際) 존재(存在)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얘기로 : “동정귤(洞庭橘)”은, 동정호(洞庭湖) 주변에서 생산(生産)되는 토산물(土産物)로, ‘고유명사(固有名詞), 고유지명(固有地名)’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동정귤(洞庭橘)’이 14세기(世紀)로부터 ‘고려(高麗)와 조선(朝鮮史)’의 ‘제주(濟州) 토산물(土産物)’로 기록(記錄)되어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제주(濟州)와 탐라(耽羅)’가 동일(同一)한 곳을 말하는가? ‘토산물(土産物)로 보면, 별도(別途)의 땅에, 따로 따로 있었다’고 말 할 수 있다.】
○ ‘주원장(朱元璋)의 황후(皇后)’는 ‘마황후(馬皇后)’였으나, 그의 소생(所生)이 하나도 없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주원장(朱元璋)의 ‘아들과 딸(子息)’ 모두는 ‘공비(碽妃)의 소생(所生)’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공비(碽妃)’는 바로 원(元) 순제(順帝)의 비(妃)였던 ‘기황후(奇皇后)’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알려져 있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원사(元史)에서는, “순제(順帝)와 함께 막북(漠北)으로 도주(逃走)했다”고 하였으나, 실제(實際)로는, 〈명군(明軍)의 포로(捕虜)가 되어 주원장(朱元璋)에게 보내졌고, 왕비(王妃)가 되었는데, 바로 “공비(碽妃)가 기황후(奇皇后)였다”〉는 사실(事實)이다.
즉(卽) 순제(順帝)는 야반도주(夜半逃走)하고, 기황후(奇皇后)는 명군(明軍)의 포로(捕虜)가 되어 주원장(朱元璋)에게 보내졌다고 하는데, 사서(史書)에서는 마황후(馬皇后)가 “의문태자 표(標)ㆍ진왕 상(秦王樉)ㆍ진왕 강(晉王棡)ㆍ성조 문황제(文皇帝)ㆍ주왕 숙(周王橚), 그리고 영국(寧國)ㆍ안경(安慶) 두 공주를 낳았다.”고 하였으나,
➤ 명(明) 때의 필기(筆記) 실화(實話)와 야사(野史)에서는, “마황후(馬皇后)는, 죽을 때까지 임신(妊娠)한 적이 없다” 고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태자 표(標)·진왕 상(秦王樉)·진왕 강(晉王棡)·성조 문황제(文皇帝)·주왕 숙(周王橚), 그리고 영국(寧國)·안경(安慶) 두 공주(公主)”는 “공비(碽妃)의 소생(所生)이다”라는 것으로, 이는 “남경태상시지(南京太常寺志)”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는 것이다.
○ 우리 카페(Cafe)에서는, 이미 전회(前回)에 게재(揭載), 논의(論義)된 바 있는 주제(主題)이다. 이를 좀 더 “보충(補充)하고, 원문(原文)과 관련(關聯)된 기록(記錄)을 찾아 재정(再訂)”한 것이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공비(碽妃)편 등(等), 여러 고전(古典) 원문(原文)과 함께 자세(仔細)하게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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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碽妃) 【원(元) 순제(順帝)의 기황후(奇皇后), 주원장(朱元璋) 비(妃)】
《靑莊館全書) 60권 : 盎葉記七[出處:한국고전번역원db] /
碽妃 : 元末明初.選朝鮮女入宮.元順帝第三妃奇氏.改姓肅良哈氏.名完者忽都.高麗人.揔部散郞子敖女. : 공비(碽妃) : 원(元) 말(末) 명(明) 초(初), 조선(朝鮮) 여인들을 선발하여 궁인(宮人)을 삼았다. 원(元) 순제(順帝)의 셋째 비(妃) 기씨(奇氏)도 비(妃)가 된 뒤에 성(姓)을 숙량합(肅良哈)으로, 이름을 완자홀도(完者忽都)로 고쳤는데, 고려인(高麗人), 총부산랑(摠部散郞) 자오(子敖)의 딸이었다. 明周憲王元宮詞.杏臉桃腮弱柳腰.那知福是禍根苗.高麗妃子初封冊.六月陰寒大雪飄. : 주헌왕【周憲王 : 명(明)의 종친으로 이름은 유돈(有燉), 시호는 헌(憲)】의 원궁사(元宮詞)에, “살구꽃 얼굴 복사꽃 뺨에 허리도 날씬한데, 복이 도리어 화의 싹일 줄 뉘 알았으랴. 고려의 여인을 비로 책봉하니, 유월도 차가워 큰 눈 휘날렸네” 하였다. 張昱宮詞.宮衣新尙高麗樣.方領過腰半臂裁.連夜內家爭借看.爲曾看過御前來. : 장욱【張昱 : 원(元)인으로, 자는 광필(光弼), 호는 일소거사(一笑居士)】의 궁사(宮詞)에, “궁의(宮衣)가 새로 고려(高麗) 모양 유행되니, 모난 옷깃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반비를 걸쳤네. 밤마다 궁중에서 서로 빌려다 구경하니, 그 맵시 일찍이 임금의 눈에 든 때문일세” 하였다. 周憲王又云.奇氏家居鴨綠東.盛年纔得位中宮.翰林昨日新裁詔.三代蒙恩爵祿崇.白酒新蒭進玉壺.水亭深處暑全無.君王笑向奇妃問.何似西凉打刺蘓.昨朝進得高麗女.太半咸稱奇氏親.最苦女官難派散.總敎送作二宮嬪.: 주헌왕(周憲王)은 또, “기씨(奇氏)가 본시 압록강(鴨綠江) 동쪽에 나서, 한창나이에 중궁(中宮) 자리 차지하니, 다시 한림에 지시 조서 만들어, 삼대를 소급 융숭한 작록 내려졌네. 좋은 술 새로 걸러 옥병에 바치니, 물가 정자 깊숙한 곳에 더위마저 가시네. 임금이 웃음 띠고 기비에게 묻기를, 왜 그리 서량의 타랄소처럼 고우냐고, 엊그제 들어온 고려의 여인들, 반수 이상이 다 기씨의 족속인데, 그냥 여관으로 늙히기 싫어, 또다시 두 궁빈 삼았다네”하였다. 劉誠意巫山高.刺奇后也.庚申.君寵高麗奇妃.立以爲后.專權植黨.濁亂宮闈.故作巫山高.以諷諫焉.其畧曰.山中妖狐老不死.化作婦女蓮花腮.潛形譎跡托夢寐.變幻涕淚成瓊瑰. : 유성의【劉誠意 : 명(明) 유기(劉基)의 봉호(封號)】의 무산고(巫山高)에도 기후(奇后)를 조롱(嘲弄)하였다. 이는 경신군(庚申君)이 고려의 기씨를 총애하여 후(后)로 책봉하자, 기씨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당파를 만들어 궁금(宮禁)을 문란시킨 때문에 무산고를 지어 풍자한 것이다. 그 대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산속의 여우 늙도록 죽지 않고, 연꽃처럼 고운 미녀로 둔갑해서, 자취 감추고 꿈속에 나타나, 눈물을 환화(幻化)시켜 좋은 구슬 만드네.” 하였다. 楚妃難.亦爲奇后作.又梁甫吟.外間皇甫聞豔妻.馬角突兀連牝鷄.亦爲奇后而作. : 그의 초비탄(楚妃嘆)도 기후(奇后)를 읊었고 그의 양보음(梁甫吟)에도, “외간의 황보 염처의 소문 듣고, 뿔난 말이 암탉과 결탁하듯 하였네” 하였으니, 역시 기후를 읊은 것이다. 司綵王氏.明宣德中女官宮詞.璚花移入大明宮.一樹凝香倚晩香.贏得君王留步輦.玉簫吹徹月明中. : 사채(司綵) 왕씨(王氏)는, 명나라 선덕【宣德 선종(宣宗)의 연호)】시대의 여관이었는데, 그 궁사에, “구슬꽃나무 대명궁에 옮겨 심으니, 한 그루 엉긴 향기 만향정(晩香亭)을 이웃해, 능히 임금의 발길 멈추게 하니, 은은한 옥소 소리 달밤에 들려오네” 하였다.
【‘압록강(鴨綠江) 동(東)쪽’이라는 말은, “압록강(鴨綠江)은 남북(南北)으로 흐르는 강(江)이었다”는 것을 암시(暗示)하며, 그곳은 한반도(韓半島)일 수 없다는 뜻이다.】
靜志居詩話.朱彜尊撰.元制.歲貢高麗貢美女.故張光弼輦下曲.宮衣新尙高麗撲云云. :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주이준(朱彝尊)이 지었다】에, “원(元)의 세공(歲貢)제도에 고려에서 미녀를 바치게 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장광필(張光弼)의 연하곡(輦下曲)에 ‘궁의가 새로 고려의 모양 유행되네.’ 했다.” 하였다. 楊廉夫宮詞.北幸和林幄殿寬.勾麗女侍婕妤官.君王自賦昭君曲.勅賜琵琶馬上彈. : 양염부【楊廉夫 양염부는 명(明)의 양유정(楊維楨)의 자】의 궁사에, “화림(和林)에 거둥할 때 행궁(行宮)도 거창한데, 고려(高麗)의 미녀가 여관으로 모셨구나. 임금이 직접 소군곡 부르면서, 말 위에 올라 비파를 타라고 하네” 하였다. 明初相沿未改此.孝陵有碽妃.長陵有權妃也.權爲高麗光祿卿永均女.善吹簫.宮中爭效之. : 명(明) 초기에도 이런 풍조가 고쳐지지 않고 인습되어, 효릉【孝陵 명 태조(明太祖)】에게는 공비(碽妃)가 있었고, 장릉【長陵 명 성조(明成祖)】에게는 권비(權妃)가 있었다. 권비(權妃)는 고려 광록경(光祿卿) 권영균(權永均)의 딸로 퉁소를 잘 불었으므로 궁중에서 앞을 다투어 서로 배웠다. 寧献王詩.宮漏已沈參差到.美人猶自學吹簫. : 또 영헌왕【寧獻王 명 태조의 아들로 이름은 권(權), 시호는 헌(獻)】의 시에, “궁중의 누수는 점차 멎어가건만, 미인은 아직도 퉁소만 배우고 있네” 하였다. 王司綵亦云云.皆爲權貴妃作. : 왕사채(王司綵)도 위의 시를 읊었으니, 모두 권 귀비(權貴妃)를 두고 지은 것이다.
攷事撮要.魚叔權撰.永樂六年戊子.帝遣太監黃儼.選女子以進.工曹典書權執中女.仁寧府左司尹任添年女.恭安府判官李文命女.侍衛司中領護軍呂貴眞女.中軍副司正崔得霏女.預選。七年己丑.又遣黃儼.令更進好女.選知宜州事鄭允厚女.以送.光祿卿權永均赴京.欽奉宣諭.再來時休打海上過.只旱路上來.永均權氏兄也. : 고사촬요(攷事撮要)【어숙권(魚叔權)이 지었다.】에 이렇게 되어 있다. “영락[永樂 명 성조의 연호]6년(1408, 태종 8)에 황제가 태감(太監) 황엄(黃儼)을 보내어 여자를 간선(揀選)하여 바치게 하므로, 공조 전서(工曹典書) 권집중(權執中)의 딸, 인녕부 좌사윤(仁寧府左司尹) 임첨년(任添年)의 딸, 공안부 판관(恭安府判官) 이문명(李文命)의 딸, 시위사 중령호군(侍衛司中領護軍) 여귀진(呂貴眞)의 딸, 중군 부사정(中軍副司正) 최득비(崔得霏)의 딸이 간선되었고, 7년(1409)에 또 황엄을 보내어 예쁜 여자를 바치게 하므로, 지의주사(知宜州事) 정윤후(鄭允厚)의 딸을 간선하여 보내었다. 광록경 권영균이 명 나라에 갔다가 황제의 유시를 받아 돌아올 때 위험한 수로(水路)를 버리고 평탄한 육로로만 왔는데, 영균은 권비(權妃)의 오라비이다.
十二年甲午。譯官元閔生。於椶殿內。欽奉聖諭。自皇后崩逝後。令汝國權妃。管六宮事。汝國呂氏。請於高麗內官金得,金良。借砒礵於銀匠。和楜都 案卽胡桃 茶。以與權妃毒死。朕已殺內官銀匠。又用烙鐵。烙呂氏一箇月殺了。你說與權永均知道。: 12년(1414)에 역관(譯官) 원민생(元閔生)이 종전(椶殿) 안에서 황제의 유시를 받았는데 ‘황후(皇后)가 서거한 뒤에 너희 나라의 권비로 하여금 육궁(六宮)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그런데 너희 나라 여씨(呂氏 여귀진의 딸을 이름)가 너희 나라의 내관(內官) 김득(金得)ㆍ김량(金良)에게 부탁하여 은장(銀匠)에게 비상(砒礵)을 얻어다가 호도다(楜都茶) 상고하건대, 호도다(胡桃茶)이다. 에 넣어 권비를 독살시켰으므로, 짐이 이미 내관과 은장 등을 죽이고 또 낙철(烙鐵 불에 달군 쇠젓가락)로 여씨를 한 달 동안 지져서 죽였으니, 너는 이 사실을 영균에게 알리라.’는 내용이었다.
十五年丁酉。元閔生。回自京師。奉聖諭。選宗簿副令黃河信女。知淳昌郡事韓永矴女。與同黃儼等送進。: 15년(1417)에 원민생이 경사(京師)에서 황제의 유시를 받고 돌아와서, 종부부령(宗簿副令) 황하신(黃河信)의 딸과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 한영정(韓永矴)의 딸을 간선하여 황엄 등과 함께 보내었다.
洪煕元年乙巳。遣尙寶監少監金滿。賜祭權氏兄永均。宣德二年丁未。以帝勅。選工曹判書成達生女。右軍同知摠制車指南女。右軍司正吳倜女。右軍司正安復志女。侍衛司右領護軍鄭孝忠女。中軍副司正崔瀰女。左軍司直盧從得女。同欽差昌盛等送進。: 홍희[洪熙 명 인종(明仁宗)의 연호] 원년(1425, 세조 7)에 상보감 소감(尙寶監少監) 김만(金滿)을 보내어 권비의 오라비 영균에게 사제(賜祭)하였고, 선덕(宣德) 2년(1427)에 제(帝)의 칙명으로 공조 판서 성달생(成達生)의 딸,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차지남(車指南)의 딸, 우군사정(右軍司正) 오척(吳倜)의 딸, 우군사정 안복지(安復志)의 딸, 시위사 우령호군(侍衛司右領護軍) 정효충(鄭孝忠)의 딸, 중군부사정(中軍副司正) 최미(崔瀰)의 딸, 좌군사직(左軍司直) 노종득(盧從得)의 딸을 간선하여 흠차[欽差 황제의 명으로 보낸 차견사(差遣使)] 창성(昌盛) 등에게 딸려보내었다.
三年戊申。以帝勅。選知淳昌郡事韓永矴女。同昌盛等送進。宣德四年己酉。帝遣少監金滿。賜祭于崔氏父得霏。: 3년(1428)에 황제의 칙명으로 지순창군사 한영정의 딸을 간선하여 창성 등에게 딸려보내었고, 선덕 4년(1429)에 황제가 소감 김만을 보내어 최씨의 아버지 득비에게 사제(賜祭)했다.” 彤史拾遺。毛奇齡撰。 權妃者。朝鮮人。永樂七年五月。朝鮮貢女。充掖庭妃。隨象女入。上見妃色白而質復穠粹。問其伎。出所攜王管吹之。窈眇多遠音。上大悅。驟拔妃。出衆女上。逾月。冊賢妃。授妃父永均。爲光祿卿。: 동사습유(彤史拾遺)모기령(毛奇齡)이 지었다. 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권비(權妃)는 조선인으로, 영락 7년(1409, 태조 9) 5월에 조선에서 바친 여인인데, 액정(掖庭 비빈ㆍ궁녀들이 거처하는 궁전)을 채울 때 권비도 여러 여자들을 따라 들어왔다. 임금이 권비의 하얀 얼굴에 체질이 순미(純美)함을 보고 무슨 재주가 있느냐고 묻자, 권비가 가지고 있던 옥피리를 꺼내어 불었다. 그 소리가 요묘(窈渺)하여 멀리까지 메아리치므로 임금이 매우 기뻐하여 바로 다른 여자들보다 높이 선발하였다가 한 달쯤 지나서 현비(賢妃)로 책봉하고 권비의 아버지 영균을 광록경으로 삼았다.
八年十月。妃侍上北征。凱還而疾。至臨城曰。不能復侍上矣。遂薨。上哀悼。親賜登謚曰恭献。命厝其柩于澤縣。勅縣官守之。時朝鮮所貢女。其見具位號者。復有任順妃,李昭儀,呂倢伃,崔美人四人。皆命其父。爲京朝官。順妃父添年。爲鴻臚寺卿。昭儀父文。文下落命字。 倢伃父貴眞。爲光祿少卿。美人父得霖。霖得霏之譌。 爲鴻臚少卿。其後永均。以宣德 一作洪煕。 中卒。訃聞。上仰惟先澤。遣中官賜祭。賜其家白金二百兩。文帛表裡有次。 : 8년(1410)에 권비가 임금을 모시고 북정(北征)하였다가 개선(凱旋)하는 길에 병이 발생, 임성(臨城)에 당도하여 ‘다시는 폐하를 모실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고 드디어 훙(薨)하므로 임금이 매우 애도하여 손수 제사를 지내고 공헌(恭獻)이란 시호를 내린 다음, 영구(靈柩)를 역현(嶧縣)에 안치하고 현관(縣官)을 명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그때 조선에서 바친 여자 중에 그 위호(位號)가 드러난 자로는 또 임 순비(任順妃)ㆍ이 소의(李昭儀)ㆍ여 첩여(呂婕妤)ㆍ최 미인(崔美人) 네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버지에게 모두 명나라의 관직을 내려주었다. 즉 순비의 아버지 첨년은 홍로시경(鴻臚寺卿), 소의의 아버지 문(文) 문 자 밑에 명(命) 자가 탈락되었다. 과 첩여의 아버지 귀진은 광록소경(光祿少卿)을, 미인의 아버지 득림(得霖) 임(霖) 자는 비(霏)자의 잘못이다. 은 홍로소경(鴻臚少卿)을 삼았다. 그 뒤에 영균이 선덕(宣德) 혹은 홍희(洪熙)로 되어 있다. 연간에 죽어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이 그의 은혜를 생각하여 중관(中官)을 보내어 사제(賜祭)하고 그의 집에 백금(白金) 2백 냥과 문백(文帛 무늬 있는 비단)으로 된 겉옷감ㆍ안옷감을 골고루 하사했다.”
僿說 李瀷撰 名臣錄云。驪妃 案妃號以驪未知何意 韓氏。淸州韓永矴之女。永矴生二女。俱膺明朝之選。妃兄確。年十九。太宗召赴京師。寵遇殊等。拜光祿少卿。: 성호사설(星湖僿說) 이익(李瀷)이 지었다. 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명신록(名臣錄)에 ‘여비(驪妃) 상고하건대, 비(妃)의 호(號)에 여(驪) 자를 놓은 것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한씨(韓氏)는 청주(淸州) 한영정(韓永矴)의 딸이다. 영정이 두 딸을 낳아 모두 명(明) 나라의 간선에 들어, 큰딸이 성조(成祖)의 후궁으로 여비에 봉해지고 여비의 오라비 확(確)은 19세 때에 태종의 명으로 명 나라에 들어가 특별한 은총을 받아 광록시 소경(光祿寺少卿)에 제수되었다. 我世宗受禪。確爲冊封正使。以帝旨。遂留不還。以副使劉泉復命。後又赴召。欲以仁宗之女尙之。辭以母老。不果。: 우리나라 세종(世宗)이 즉위할 당시에는 확이 책봉정사(冊封正使)로 들어갔다가 황제의 명으로 그곳에 머물러 돌아오지 않고 부사(副使) 유천(劉泉)만 보내어 복명(復命)하게 하였다. 그 뒤에 또 그를 불러들여 인종(仁宗)의 딸을 아내로 삼아주려 했으나, 늙은 모친을 봉양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양했다.’ 하였다. 按 李瀷撰 宣德三年。選知淳昌郡事韓永矴之女。送進。宣宗乃太宗之孫。而韓氏二女。俱爲後宮可異也。確是西原府院君。其女又是我章順王妃。韓氏之尊崇如此。: 상고하건대, 李瀷이 지었다. 선덕 3년에 지순창군사 한영정의 둘째딸을 간선하여 선종(宣宗)에게 바쳤는데, 선종은 바로 성조의 손자이다. 한씨의 두 딸은 모두 들어가 후궁이 되었으니 색다른 일이고, 확은 바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으로 그 딸이 또 우리나라의 장순왕후(章順王后)가 되었으니 한씨의 존귀함이 이와 같다.
弇州別集云。永樂中權貴妃,任順妃,李婕妤,崔夫人。案妃號。與毛氏所錄。互有異同。而無呂婕妤。皆朝鮮人。權妃之父光祿卿永均等。皆貴至列卿。而尙居本國云。然永均乃貴妃之兄。: 감주별집(弇州別集)에 ‘영락 연간에 권귀비·임순비·이첩여(李婕妤)·최부인(崔夫人) 【상고하건대, 비(妃)의 호가 모씨(毛氏)의 기록과 다르고 또 ’여 첩여‘가 빠졌다.】은 다 조선(朝鮮) 사람이었고, 권비(權妃)의 아버지인 광록경 영균 등은 다 열경(列卿)의 귀(貴)에 올랐는데 그대로 본국에서 살았다.’ 하였으나, 영균은 권비의 오라비이다. 案朱氏毛氏。弇州不知永均爲妃兄。弇州猶不及韓妃事。則有未備。而永均等不聞官光祿卿。亦必因西原事之誤傳也。案魚氏毛氏所錄。俱言永均爲光祿卿。李氏偶未之考也。: 상고하건대, 주씨(朱氏)ㆍ모씨ㆍ왕감주(王弇州)는 영균이 권비의 오라비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감주는 한비(韓妃)의 사적에 언급하지 않았으니 미비된 점이 있다 하겠고, 또 영균 등이 광록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없으니 반드시 서원부원군의 사적을 그들의 것으로 오전(誤傳)한 것이다.” 상고하건대, 어씨(魚氏)와 모씨의 기록에 다 영균이 광록경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이씨(李氏)가 미처 상고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德懋按此皆我國女子入中國大槩.而碽氏事尤奇異.國人鮮有知之者.今表出之.字彙.梅膺祚撰.碽姓. : 덕무(德懋)가 상고하건대, 이는 다 우리나라의 여자들이 중국으로 들어간 사적의 대략인데, 공씨(碽氏)의 사적이 더욱 기이하여 다른 나라에서 아는 자가 적기 때문에 지금 표명하려 한다. 자휘(字彙)【매응조(梅膺祚)가 지었다】에, “공(碽)은 성(姓)이다.” 하였다. 太常寺志.明祖妃碽氏.案集韻.音公.擊石聲. : 태상지(太常志)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명 태조의 비(妃) 공씨(碽氏) 상고하건대, 집운(集韻)에 “공(碽)의 음(音)은 공(公)인데, 돌을 치는 소리이다.” 라고 하였다.
靜志居詩話.明南都太廟.嘉靖中爲雷火所焚.尙事湛若水.請重建而夏言阿世宗意.請罷.有旨幷入.奉先殿.按長陵.每自稱曰.朕高皇后第四子也. :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에 이렇게 되어 있다. “명(明) 남경(南京)에 있던 태묘(太廟)가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연간에 벼락에 맞아 소각되자, 상사(尙事) 담약수(湛若水)가 다시 짓기를 주청하였으나 하언(夏言)이 세종의 비위를 맞추어 혁파하기를 주청하므로, 유시를 내려 위패를 모두 봉선전(奉先殿)에 모시도록 하였다. 상고하건대, 장릉【長陵 : 성조(成祖)】은 항상 ‘짐은 고황후(高皇后) 마씨(馬氏)의 넷째 아들이다.’ 고 자칭했다.
然奉先廟制.高后向南.諸妃盡東列.西序惟碽妃一人.具載南京太常寺志. : 그러나 봉선전의 제도에 고황후의 위패를 남향하여 모신 다음, 여러 비빈(妃嬪)의 위패는 다 동렬(東列)에 모시고 서열(西列)에는 공비의 위패만 모셨다. 이 말이 남경태상시지(南京太常寺志)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葢高后從未懷妊.豈惟長陵.卽懿文太子.亦非后生也.世疑此事不宲.誦沈大理詩.斯明徵矣. : 대저 고황후는 끝내 임신(懷妊)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장릉만이 고황후의 소생이 아닐 뿐이겠는가. 의문태자【懿文太子 태조의 장자(長子)요 건문제(建文帝)의 생부(生父)이다】도 그 소생이 아니다. 세상에서 이 일을 사실이 아니라고 의심하는데, 심 대리(沈大理)의 시를 보면 명확한 증거가 될 것이다. 明詩綜.朱彜尊輯.沈玄華字邃伯.嘉興人.嘉靖壬戌進士.大理少卿. : 명시종(明詩綜)【주이준(朱彝尊)이 지었다.】에 심현화(沈玄華) 자는 수백(邃伯)으로 가흥(嘉興) 사람인데, 가정(嘉靖) 41년(1562)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벼슬이 대리소경(大理少卿)에 이르렀다. 詩.敬禮南都奉先殿.紀事微臣承祀事.入廟歌鳧鷖.高后配在天.御幄神所栖.衆妃位東序.一妃獨在西.成祖重所生.嬪德莫敎齊.一見異千聞.宲錄安可稽.作詩述典故.不以後人迷. : 삼가 남경 봉선전에서 제사를 올리다’라는 시가 있다. ”기사(紀事)에, 미신(微臣)이 제사를 올리고, 태묘에 들어 부예를 노래하니, 고황후는 고황제를 짝하여, 어악에 남향으로 모시고, 여러 비빈은 동쪽 서열에 모셨는데, 공비(碽妃)만이 서(西)쪽 서열에 모셔졌으니, 성조가 그 생모(生母) 존중하여, 공비(碽妃)의 덕 높이 드러냈네, 한 가지 일이 천 가지로 다르니, 실록인들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시(詩)로 전고(典故)를 서술해, 후세(後世)의 의혹 없애려 하네” 하였다.
彤史拾遺。馬皇后生懿文太子標,秦王樉,晉王棡,成祖文皇帝,周王橚,寧國,安慶兩公主。初。后生成祖。有龍見于寢。嘗夢遇賊。成祖以馬進。扶后執鞚。賊見成祖避去。后以故鍾愛之。及上厭太子柔弱。后始以夢告。其後卒有靖難之功。: 동사습유(彤史拾遺)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고황후 마씨가 의문태자 표(標)ㆍ진왕 상(秦王樉)ㆍ진왕 강(晉王棡)ㆍ성조 문황제(文皇帝)ㆍ주왕 숙(周王橚), 그리고 영국(寧國)ㆍ안경(安慶) 두 공주를 낳았다. 마 황후가 막 성조를 낳았을 때 용(龍)이 침전(寢殿)에 나타난 꿈을 꾼 적이 있었고 또 도적을 만났을 때 성조가 말을 가지고 와서 마 황후를 부축하여 말에 태우고 굴레를 잡으므로 도적이 성조를 보고 피해 달아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이런 까닭에 마 황후가 성조를 가장 사랑해 오다가 태조가 태자의 유약함을 싫게 여기자, 마 황후가 비로소 그 꿈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그뒤에 마침내 정난(靖難)의 공(功)을 이루게 되었다.”
德懋按毛奇齡。與修明史。則其所載錄。可以取信。然朱彜尊。亦史官。其所考據的確可信。高后未嘗懷妊。必有所見。况有太常寺之志。沈玄華之咏。明白無疑乎。: 덕무가 상고하건대, 모기령이 명사(明史) 편수(編修)에 참여하였으니, 그의 수록을 거의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주이준’도 사관(史官)으로 있었으니, 그의 고거(考據) 역시 정확하여 믿을 수 있으므로, 고황후(高皇后)가 끝내 임신(妊娠)하지 못하였다는 말은, 반드시 그만한 소견(所見)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태상시(太常寺)의 기록이 있고 또 심현화의 시(詩)까지 명백하여 의심이 없음에랴.
考萬姓統譜及我國氏族諸書。元無碽字姓。近世羅杰入燕京。見博明問碽妃事。明曰。卽故元元妃。見明太常志云。: 만성통보(萬姓統譜)와 우리나라의 씨족에 관한 책들을 널리 상고해 보면, 본래 공(碽) 자의 성이 없는데, 근세에 나걸(羅杰)이 연경에 들어가서 박명(博明)을 만나 공비에 관한 일을 묻자, 박명이 공비는 곧 원(元) 나라의 원비(元妃)로, 그 사실이 《태상시지》에 보인다고 하였다. 博明。蒙古人。元世祖之後也。官主事。博學多著輯工書。有曰。故元元妃者。亦有所據。: 박명은 몽고 사람이요, 원 세조(元世祖)의 후예로, 벼슬이 주사(主事)에 이르렀고 학문이 넓어 저술이 많은데다가 글씨에도 능하니, 원(元)의 원비(元妃)라는 말도 상고한 바가 있을 것이다. 葢庚申君與奇氏同入。元亡後。爲太祖之妃。而國史諱之。或是貢姓而加以石旁歟。: 대저 경신군(庚申君)이 기씨(奇氏)와 함께 들어갔으니, 원(元)이 망한 뒤에, 기씨가 태조(太祖)의 비(妃)가 된 것을, 명나라 사신(史臣)이 휘(諱)한 것인지, 아니면 본래 공(貢)자의 성(姓)을 석(石) 자 옆에 붙인 것인지 모를 일이다.
余見僿說。有吳后事。今附見女子入中國而尊貴者。如奇皇后,權妃,韓妃之類。人皆知之。如明宣宗吳皇后。鮮有識者。吳氏鎭川人。: 또 성호사설을 상고해 보면, 오후(吳后)에 관한 사적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제 부기(附記)하고자 한다. “여자로서 중국에 들어가 존귀하게 된 자는 기 황후와 명 성조의 권비ㆍ한비 등으로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명 선종의 황후 오씨의 경우는 아는 자가 적은데, 오씨는 진천(鎭川) 사람이다. 按攷事撮要。宣德二年。選右軍司正吳倜女。其進。當是此人也。始爲後宮。生景泰。後。景泰尊爲太后。后思念本土。以畫像。歸之東國。旣無以處也。乃置之僧舍。樵牧侮玩。至今尙存。: 고사촬요를 상고해 보면, 선덕 2년에 우군사정(右軍司正) 오척(吳倜)의 딸을 간선하여 사행(使行)에 딸려 보냈다고 하였으니, 그가 바로 황후 오씨일 것이다. 오씨는 처음에 후궁이 되어 경태(景泰 명 경제(明景帝)를 말한다)를 낳았는데, 뒤에 경태가 태후(太后)로 높였다. 태후는 본국을 그리다 못해 자신의 화상을 그려 본국에 보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처리할 수 없어 절에 갖다 두었으므로 초동 목수(樵童牧叟)들도 마음대로 구경하였는데, 그 화상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續通攷云。母丹徒人。都督吳彦名女。肰影還本國。眞有其事。此豈可誣者耶。意者。明史以外夷諱之耶。或言后父官至參判。:속통고(續通考)에는 ‘그 모친은 단도(丹徒) 사람인데, 도독(都督) 오언명(吳彦名)의 딸이다.’ 하였다. 그러나 화상을 우리나라로 보낸 것이 사실이라면 이 어찌 속일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는 아마 명나라 사관이 우리나라를 외국이라 해서 휘(諱)해 버린 것 같다. 어떤 이는 ‘황후의 아버지는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한다.” 德懋按若如李氏說。則景泰誕生戊申。見於明史。吳倜女子。丁未入選。翌年生景泰。然則仁宗之喪未終。宣宗尙在諒闇中也. : 덕무가 상고해 보건대, 만약 이씨의 말과 같다면 경태가 선종 3년(1428, 세종 10)에 태어났다는 말이 《명사》에 보이니, 오척의 딸이 선종 2년(1427)에 선종의 후궁으로 들어갔다가 그 이듬해에 경태를 낳은 것이다. 그렇다면 인종(仁宗)의 상(喪)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선종은 아직 복중(服中)에 있었던 것이다.》 [출처 : 고전번역원db : 인용/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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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내용(內容)을 살펴보면 복잡(複雜)한 것 같지만 … … 허나 아주 간단(簡單)한 이야기다.
고려인(高麗人) 즉(卽) 조선(朝鮮)의 여인(女人)들이 대거(大擧) 궁중(宮中)으로 들어가 황후(皇后)와 비(妃)가 되어, 황제(皇帝)의 자식(子息)들을 낳았고, 같은 비빈(妃嬪)끼리 질투(嫉妬)와 시샘 때로는 협력(協力)하여, 황제(皇帝)의 맘을 사로잡으니, 궁중(宮中)의 여러 가지 법도(法道)들이 고려풍(高麗風)으로 유행(流行)되었고, 대신(大臣)들도 이를 따르다 보니, 경성(京城)에 고려(高麗)의 여러 가지 풍속(風俗)들이 넘쳐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특히 이 중에서 “공비(碽妃)”는, 원(元) 나라의 마지막 황제(皇帝)였던 순제(順帝)의 황후(皇后)였던 기황후(奇皇后)였으나, 주원장(朱元璋)의 군대(軍隊)에 포로(捕虜)가 되어 주원장(朱元璋)에게 보내지고, 그의 비(妃)가 되어, 주원장(朱元璋)의 ‘네 명의 아들 또는 다섯의 아들’을 낳고, 두 명의 공주(公主)까지 낳았다는 것을 설명(說明)해 주고 있는데,
또 다른 기록(記錄)에서는, 주원장(朱元璋)의 마황후(馬皇后)는, ‘평생(平生) 회임(懷妊)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고,
➤ 또 다른 기록(記錄)에서는, 주원장(朱元璋)의 비(妃)가 된 기황후(奇皇后)는 “공비(碽妃)”가 되어, 성조(成祖) 문황제(文皇帝) 즉 ‘영락제(永樂帝)의 생모(生母)였다’는 겄을 고증(考證)한 기록(記錄)을 설명(說明)하고 있는 것이다. 즉(卽),
➊ “명(明)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의 네 아들과 딸은, 황후(皇后)였던 마황후(馬皇后)의 소생(所生)이라고 기록해 놓았으나, 명(明) 때의 필기본(筆記本)에서는, 실제(實際) 마황후(馬皇后)는 평생(平生) 회임(懷妊) 한 적이 없으니, 소생(所生)이 있을 수 없다.
➋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의 공비(碽妃)는, 원(元) 순제(順帝)의 비(妃)인 ‘기황후(奇皇后)’로, 주원장(朱元璋)의 네 왕자(王子)와 두 공주(公主)를 낳았다.」는 것이고, 따라서 ‘성조(成祖)인 영락제(永樂帝)’는, “그의 생모(生母)인 ‘공비(碽妃)’를 서(西)쪽 서열에 별도(別途)로 모셨다”는 것이다.
➌ 「주원장(朱元璋)인 고황제(高皇帝) 이후(以後), 명(明) 황실(皇室)에서는, ‘많은 고려(高麗) 여인(女人)들이 비빈(妃嬪)으로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으며, 이후(以後)의 황실(皇室)은 고려인(高麗人) 혈통(血統)으로 이어진 것이다.」라는 것이다.
‘고황제(高皇帝)’는 누구를 지칭(指稱)하는 것일까? 명(明)나라가 실존(實存)했다면, 반도(半島) 땅 모퉁이의 “조선(朝鮮)”에서는 감히 황제국(皇帝國)의 이름을 참칭(僭稱)하여 “고황제(高皇帝)”라 지칭(指稱)할 수 없다. 이건 천자(天子)를 능멸(凌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대륙(大陸)의 사가(史家)들은 이를 어떻게 기록(記錄)했고, 현대(現代)에서는 이를 어떻게 설명(說明)하고 있을까?
위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말하고 있는 그대로를 설명(說明)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특히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이를 대서특필(大書特筆)하고 있다는 사실(事實)까지를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당시의 명(明)이나 청(淸) 사가(史家)들도 이를 알지 못해 조선사(朝鮮史)【총칭(總稱)】를 참고(參考)하면서, 필기본(筆記本)이나 남경태상지(南京太常志)를 상고(詳考)하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현재(現在)의 중국(中國)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공비(碽妃)”에 대한 것들을 찾아보았다.
(1) 현대(現代)의 대륙의 학자(學者) 《文裁縫(문재봉) : 明成祖朱棣的生母是朝鲜人吗》에서 주장(主張)하기를 :『據《南京太常寺志》記載:「孝陵祀太祖高皇帝、高皇后馬氏。左一位李淑妃,生懿文太子、秦愍王、晉恭王;左二位皇妃,生楚王、魯王、代王、郢王、齊王、蜀王、谷王、唐王、伊王、潭王;左三位皇貴妃,生湘獻王、肅王、韓王、沈王;左四位皇貴人,生遼王;左五位皇美人,生寧王、安王;右一位碽妃,生成祖文皇帝.』라고 하여,
▶ 남경태상사지(南京太常寺志)에 의하면 : 〈공비【碽妃 : 원(元) 순제(順帝)의 기황후(奇皇后)】의 소생(所生)이 ‘성조(成祖) 문황제(文皇帝)’이다〉라고 한 것이다.
(2) 明成祖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위키백과] : 明成祖朱棣(1360年5月2日-1424年8月12日),或稱永樂帝,明朝第三代皇帝,公元 1402年至1424年 在位,在位二十二年,年號永樂。這段時間稱為永樂盛世。明太祖朱元璋皇四子,安徽鳳陽人,生於應天府(今江蘇南京),時事征伐,並受封為燕王。洪武三十二年或建文元年(1399年)建文帝削藩,燕王遂發動靖難之役,起兵奪位,經過三年的戰爭,最終勝利,驅逐其姪建文帝奪權篡位稱帝。
家族 [主條目:朱棣生母] : 《明史》記載朱元璋前五個兒子、第二女和第四女[240] 都是馬皇后所生。根據《明實錄》第四子明太宗(即明成祖)生於至正二十年4月17日,第五子周定王生於至正二十一年7月9日。馬皇后這種過於頻繁的生育情況歷來都被懷疑,認為五位皇子並非是馬皇后所生。而且明人早就指出「或曰高皇后無子」[241]。根據朝鮮使臣權近《奉使錄》記載,朱棣的生母不是馬皇后[242]。
▶ 가족(家族) : 주체(朱棣) 생모(生母)편에서는 : 명사(明史)에서는 다섯 아들과 두 공주(公主)가 마황후(馬皇后) 소생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혹 이르기를 “고황후(高皇后)는 자식(子息)이 없다.” 고 하였다. 그 근거(根據)로 내세우기를, 조선(朝鮮) 사신(史臣) 권근(權近)의 “봉사록(奉使錄)”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주체(朱棣)의 생모(生母)는 마황후(馬皇后)가 ‘아니다(不)’라는 것이다.』
➤ 여기서 주목(注目)해야 할 것은, 사가(史家)들 조차 알지 못해, 조선(朝鮮) 사신(史臣)의 “봉사록(奉使錄)”을 근거(根據)로 채택(採擇)하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이 말을 바꿔 설명(說明)하면, 「“마황후(馬皇后)=고황후(高皇后)”는, 평생(平生) 소생(所生)이 없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는, “당시(當時)의 명(明)이란 나라가 존재(存在)했는가?” 라는 의심(疑心)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南京太常志》:「孝陵神位,左一位淑妃李氏,生懿文太子、秦愍王、晉恭王。右一位碽妃,生成祖文皇帝,孫貴妃生周王。」但李淑妃的父親李傑投奔朱元璋時,才二十六歲,同時,朱標已在前一年出生。
▶ 남경태상지(南京太常志)에 의하면 : 〈효릉(孝陵) 신위(神位), 좌(左)측 첫째 숙비(淑妃) 이씨(李氏)의 소생으로 의문태자(懿文太子)와 진민왕(秦愍王), 진공왕(晉恭王)이고, 우(右) 첫째 신위(神位)에는 공비(碽妃)이며, 소생(所生)은 성조(成祖) 문황제(文皇帝)이며, 손귀비(孫貴妃)생으로는 주왕(周王)이다.〉라고 하였으니,
“성조(成祖) 문황제(文皇帝)의 생모(生母)는 “공비(碽妃)”라는 설명(說明)이다.
朱彝尊《靜志居詩話》卷十三沈元華條:「奉先廟制(南京太廟奉先殿)高後南面,諸妃盡東列,西序惟碽妃一人,具載南京太常寺志。善高后從未懷妊,豈惟長陵,即懿文太子亦非后生也」 李清《三垣筆記》:「南太常志載成祖為碽妃所生,訝之。錢宗伯謙益有博學名,問之,亦不能決,以志言東側列妃嬪二十餘,西側止一碽妃。因啟寢殿驗之,入視果然,乃信」
▶주이존(朱彝尊)의 ‘청지거시화(靜志居詩話)’ 13 沈元華 조(條)에서 이르기를 : 봉선묘제 즉(卽) 남경태묘봉선전(南京太廟奉先殿)에, 고후(高後)는 남면(南面)에, 여러 비(妃)는 동(東)쪽에 쭉 별여 놓았는데, 서(西)쪽에는 유일하게 공비(碽妃) 한 사람뿐이다. 남경태상사지(南京太常寺志)에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고후(高后)=마황후(馬皇后)’는 끝내 회임(懷妊) 하지 못했다.
이청(李淸)의 ‘삼원필기(三垣筆記)에서도 이르기를 : ’성조(成祖)는 공비(碽妃)의 소생이라고 남태상지(南太常志)에 기재(記載)되어 있다‘고 하였다.
靖難後朱棣自稱是孝慈高皇后所生的嫡子。但談遷、朱彝尊、傅斯年、吳晗考證其生母為高麗人碽妃[243][244][245]。另一個證據是明成祖建南京大報恩寺中對碽妃的供奉,中國古建築專家潘谷西持有這種觀點。[246]
➤ 정난(靖難) 뒤에, 주체(朱棣)는 자신(自身)은 효자(孝慈) 고황후(高皇后) 소생(所生)의 적자(嫡子)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여러사람들[談遷, 朱彝尊, 傅斯年]의 고증(考證)을 보면 성조(成祖) 주체(朱棣)의 생모(生母)는, ’고려인(高麗人) 공비(碽妃)‘이다.
但是碽妃到中國的時候為1365年春,當時的朱棣已經5歲了(1360年四月十七日出生於應天府吳王宮),所以她不可能是成祖的生母。所謂的明《太常寺志》是被偽造和篡改過的,篡改者是張廷玉,這在民國時期就有人考證過了,吳晗認為張廷玉的取材是明朝政府的內部記錄,但也拿不出具體證據,「行歷不詳,只好闕疑。」然而明成祖登位後兩次下令重修《明太祖實錄》從而可以正面角度描寫自己,因此實錄中朱棣的出生日期有可能被篡改以符合朱棣是馬皇后所生(也就是說朱棣是嫡子)這一說法。
▶공비(碽妃)가 중국으로 온 때는 1,365년 경(頃)으로 보는데, 주체(朱棣)는 1,360년 4월 17일 생(生)으로 응천부 오왕(吳王)의 궁(宮)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이미 5살이 된 때라고 하는 반론(反論)이 있으나,
“몇 살 차이는 몇 백년(百年) 전의 일을 감안(勘案)해 보면, 큰 의미(意味)가 없다.”는 것이 ’필자(筆者)의 주장(主張)‘이다.
劉繼莊說明成祖生母是蒙古人,甚至色目人。劉繼莊《廣陽雜記》參照《蒙古黃金史》認為:明成祖母為甕氏,蒙古弘吉剌人,以其為元順帝妃,故隱其事。「宮中別有廟藏神主,世世祀之,不關宗伯。有司禮監為彭躬菴言之,少時聞燕之故老為此說,今乃信也。」以上都是明人的記載。但考証,徐達、常遇春1368年攻入元大都前,元順帝早帶著后妃北逃元上都,而1360年出生的明成祖此時已經九歲了,1369年常遇春攻破元上都,明成祖已經十歲,所以其生母也不可能是甕氏。
➤ 또 다른 이설(異說)은, 성조(成祖) 문황제(文皇帝)의 생모(生母)는 ’몽고인(蒙古人) 즉 색목인(色目人)으로 옹씨(甕氏)‘인데, 원(元) 순제(順帝)의 비(妃)였으나, 그 사실을 숨겼다는 주장(主張)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當時)로 보면 ’주체(朱棣)‘가 이미 ’9살 되던 해의 일‘이라고 하니, 그 주장(主張)의 신빙성(信憑性)이 더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 아래의 것은 위 주장(主張)의 근거(根據)가 되는 주석(注釋)편이다.
註釋 / 朱彝尊說:「中述孝慈高皇后無子,不獨長陵為高麗碽妃所出,而懿文太子及秦晉二王,皆李淑妃產也。聞者爭以為駭。史局初設,彝尊嘗以是質諸總裁前輩,總裁謂宜仍實錄之舊。今觀天啟三年《南京太常寺志》,大書『孝陵殿宇中,設高皇帝後主,左配生子妃五人,右只碽妃一人』。事足徵信。然則實錄出於史臣之曲筆,不足從也。」(朱彝尊:《曝書亭集》卷44)
朱彝尊:《曝書亭集》卷44)《南京太常寺誌》跋 / 曩海寧談遷孺木,館於膠州高閣老弘圖邸舍,閣老導之借故冊府書縱觀,因成《國榷》一部,掇其遺為《棗林雜俎》,中述孝慈高皇後無子,不獨長陵為高麗碽妃所出,而懿文太子及秦晉二王,皆李淑妃產也,聞者爭以為駭。史局初設,彝尊嘗以是質諸總裁前輩,總裁謂宜仍《實錄》之舊。今觀天啟三年《南京太常寺誌》,大書孝陵殿宇,中設高皇帝後主,左配生子妃五人,右祗碽妃一人,事足征信。然則《實錄》出於史臣之曲筆,不足從也。漢之文帝,自言朕高皇帝側室之子,於義何傷?而《奉天靖難記》每載長陵上闕下書及宣諭臣民曰:“朕太祖高皇帝孝慈高皇後嫡子。”考妣必並舉,壺漿欲掩,而跡反露矣。《誌》凡四十卷,嘉善沈若霖編。
▷ 주이존(朱彝尊) 설(說) : 효자(孝慈) 고황후(高皇后)는 자식(子息)이 없다. 장릉【長陵 : 성조(成祖)문황제(文皇帝)】는, 고려(高麗) 공비(碽妃)의 소출(所出)이다. 중략(中略). 실록(實錄)은 사신(史臣)들이 올바르게 기록(記錄)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傅斯年以為,「實為碽妃子,不為高后」,「庚辛帝子一說乃妄人之談,敵國之語,不足道者也」
▷ 부사년(傅斯年)이 이에 대해 말하기를, “실제(實際)로 공비(碽妃)의 아들로, 마황후(馬皇后)는 자식이 없다.” 고 하였다.
朱希祖在其《明成祖生母記疑辯》反對傅斯年的說法:「若高麗果有過碽氏為太祖妃或成祖母,則高麗史亦必大書特書,載其家世,如元順帝皇后奇氏矣。且明太祖妃韓氏、明成祖權妃、任順妃、李昭儀、呂婕妤、崔美人皆能詳其家世,獨碽妃則高麗及朝鮮史皆無記載。」
▷ 朱希祖在其《明成祖生母記疑辯》反對傅斯年的說法 : 「고려(高麗) 공씨(碽氏)는 태조(太祖)비(妃) 혹은 성조(成祖)의 어머니로,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이를 대서특필(大書特筆)하고, 그 가세(家世)를 실었는데, 원(元) 순제(順帝)의 황후(皇后) 기씨(奇氏)와 같다. 명(明) 태조(太祖)비 한씨(韓氏), 명(明) 성조(成祖) 권비(權妃), 임순비(任順妃), 이소의(李昭儀), 여첩여(呂婕妤), 최미인(崔美人)등 모두 그 가세(家世)에 대해 자세하게 실었으나, 유독 공비(碽妃)에 대해서는 고려(高麗)와 조선사(朝鮮史)에서 모두 기재되어 있지 않다.」고 하였다.
(3) 碽妃 : 朱棣生母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편을 보면 : 관심부분(關心部分)만을 발췌(拔萃), 번역(飜譯), 설명(說明)함
▷ 주체(朱棣)의 생모(生母)에 대해서는, 여러 문헌과 학자들 사이에서 여러 종류의 다른 주장이 있다.【朱棣生母的身份自明朝起,相關文獻和學者就有多種不同說法】
▷ 各類說法 : 《明實錄·太宗文皇帝實錄》[2]、《明史·諸王傳》和《公主傳》所記,馬皇后生五子二女,分別是「太子標、秦王樉、晉王棡、成祖、周王橚[3]」,以及寧國公主、安慶公主[5]。兩位公主年幼於周王朱橚。
▷ 傅斯年指出[6]:94《諸王傳》下文[3]和黃子澄傳記[7],暗示朱棣與太子朱標異母,與周王朱橚同母。[‘제왕전’ 아래 문장 ‘화황자징전기’에 의하면 : 주체(朱棣)와 태자(太子) 주표(朱標)는 어머니가 다르고(異母), 더불어 주왕(周王) 주숙(朱橚)은 어머니가 같다(同母)]라고 하였다.
▷ 담천(談遷) 조림잡조(棗林雜俎) : 마황후(馬皇后)는 자식이 없다고 하였다. 【談遷《棗林雜俎》所記[8],晚明時,明孝陵的太監已俱稱馬皇后無子。1930、40年代,中國學界曾對朱棣生母進行過激烈爭論。學者朱希祖認為馬皇子無子、周王朱橚非同母弟的說法皆疑不足信[6]:93。】
▷ 筆記野史: 필기야사(筆記野史) : 명(明)나라 이래의 여러 각종(各種) 필기(筆記) 야사(野史)중에서 다수(多數)의 주장(主張)이 「주체(朱棣)의 생모(生母)는 공비(碽妃) 혹은 원(元)의 순제(順帝)의 비(妃)였다(홍길랄씨, 옹씨, 고려비)는 주장이며, 청(淸) 나라 땡의 주이존(朱彝尊)은 고려(高麗) 공비(碽妃)라고 칭했고, 지금 유행(流行)하는 주장(主張), 주체(朱棣)의 생모(生母)는 조선인(朝鮮人) 설(說)인데, 또 혹 공비(碽妃), 원(元) 순제(順帝)비(妃), 고려인(高麗人)으로 세가지 신분의 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筆記野史的妃子 / 明代以來的各類筆記、野史中,多見朱棣生母為碽妃或元順帝妃(洪吉喇氏、甕氏、高麗妃)的說法。清代朱彝尊曾稱「高麗碽妃」.今則流行朱棣生母為朝鮮人的說. 又或將碽妃、元順帝妃、高麗人三重身份混為一人.】
▷ 先太后 : 선태후(先太后) : 홍무(洪武)22년[1389년]에, 고려(高麗) 사신(使臣) 권근(權近)이 북평(北平)의 연왕(燕王) 주체(朱棣)를 찾아가 뵈었는데, 권근(權近)의 봉사록(奉使錄) 시제(詩題)에서 이르기를 : 『“연대역(燕台驛)에 도착하여, 연부(燕府)를 보며 갔는데, 먼저 전의소에 이르러, 궁(宮)안으로 들어갔는데, 이때에 선태후(先太后) 기일(忌日)이어서, 예를 받지 않고, 관에 도착하였는데, 7월 15일이다” 라고 하였다. 때가 마황후(馬皇后)는 이미 홍무15년[1382]에 서세(逝世)하였고, 기일(忌日)은 8월 초10일이다. 7월 15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先太后 :洪武二十二年(1389年),高麗王朝使臣權近在北平拜謁燕王朱棣。權近《奉使錄》詩題云:「到燕台驛,進見燕府。先詣典儀所。所官入啟,以是日先太后忌日,不受禮,命奉嗣葉鴻伴接到館。七月十五日也。」時,馬皇后已在洪武十五年(1382年)逝世,但忌日為八月初十,並非七月十五日[11]:44。此外,「先太后」無其它記載】
▷ 元 順帝妃 : 원(元) 순제(順帝)비(妃) 설(說)은, 주체(朱棣)의 생모(生母)는 원(元) 나라의 순제(順帝) 비(妃) 설(說)은, 구체적(具體的) 신분(身分)의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몽고(蒙古)비(妃)[洪吉喇氏、甕氏]이고, 두 번째는 고려(高麗)비(妃) 이다. 재차 주체(朱棣)는 원(元) 순제(順帝)의 유복자(遺腹子)라는 진일보한 설이 있다. 【元順帝妃: 朱棣生母為元順帝妃之說,其具體身份有兩種說法,一是蒙古妃(洪吉喇氏、甕氏),二是高麗妃。更進一步說朱棣為元順帝遺腹子。】
▷ 高麗 : 고려(高麗) 비(妃) : 부사년의 ‘명성조생모기의’에서 명(明)나라 사람의 필기(筆記)에서는 주체(朱棣)의 생모(生母)는 원(元) 순제(順帝)의 고려(高麗)비(妃) 소생(所生)의 유복자(遺腹子)이다. 구체적 필기는 자세하지 않다. 조림잡조, 의집(棗林雜俎·義集)에서는, 효자(孝慈) 고황후(高皇后)는 자식이 없다하였다. 중략(中略). 공비(碽妃)의 소생은 성조문황제로, 홀로 서쪽열에 모셔져 있다. 남경태상사지를 보라. 효릉(孝陵)의 엄인(閹人:환관)들은 모두 말하기를, ‘효자(孝慈) 고황후(高皇后)’는 자식이 없다(無子)고 하였다. 중략(中略).【高麗妃 : 吳晗引[1]:635傅斯年所撰《明成祖生母記疑》,指明人筆記以朱棣為元順帝高麗妃所遺之子。具體筆記不詳。《棗林雜俎·義集》彤管 孝慈高皇后無子.孝陵享殿,太祖高皇帝、高皇后,南向。左淑妃李氏生懿文皇太子、秦愍王、晉恭王,次皇口妃口氏生楚王、魯王、代王、郢王、齊王、谷王、唐王、伊王、潭王,又次皇貴妃口氏生相王、肅王、韓王、沈王,又次皇貴人口氏生遼王,又次皇美人口氏生寧王、安王,俱東列。碽妃生成祖文皇帝,獨西列。見《南京太常寺志》。孝陵閹人俱雲孝慈高皇后無子,具如《志》中。中略.】
현대(現代)의 ‘중국어위키백과’를 보아도 고전(古典) 기록(記錄)을 참고(參考)하고 있으며, 이를 소개(紹介)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이를 다른 말로 바꿔보면, 고황제(高皇帝)의 후손(後孫)들은 고려인(高麗人)의 혈통(血統)이라는 것이고,
이는 “명(明)”이라는 옛 봉건왕조(封建王朝)가 실존(實存)했느냐? 하는 문제(問題)에 봉착(逢着)하게 된다. 과연(果然),
“명(明)”은, 제국(帝國)이었는가?
“명(明)”은, 일개(一介) 제후국(諸侯國)이었는가?
“명(明)”은, 조선(朝鮮)의 이름이었는가? 하는 물음에 답(答)해야 하는데, 필자(筆者)는, “고려(高麗)”의 많은 제후(諸侯)중의 한낱 ‘일개(一介) 제후(諸侯)였다’는 것에 던진다.
이러한 ‘일개(一介) 제후(諸侯)’의 ‘세가(世家) 기록(記錄)’를, 「조선(朝鮮)을 반도(半島)에 넣기 위해 조선사(朝鮮史)를 분리(分離)시켜 만들어 놓은 것이 오늘날의 명사(明史)라고 주장(主張)하는 것이다.」 물론(勿論), 여기에는 많은 고증(考證)과 근거(根據)가 있음은 당연(當然)하다고 하겠다.
2022년 05월 06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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