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331호인 삼국시대 '청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매우 흡사한 고려시대 초기 작품인 '청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한 국 민간인에 의해 일본에서 국내로 환수됐다.
이 대표가 환수한 고려초기 청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보물 331호(1963년 1월 21일 보물지정) 삼국시대 청동미륵보살반사유상과 매우 흡사한 모습이다.
The copyright belongs to the original writer of the content, and there may be errors in machine translation results.版权归内容原作者所有。机器翻译结果可能存在错误。原文の著作権は原著著作者にあり、機械翻訳の結果にエラーが含まれることがあります。Hak cipta milik penulis asli dari konten, dan mungkin ditemukan kesalahan dalam hasil terjemahan mesin.Bản quyền thuộc về tác giả gốc của nội dung và có thể có lỗi trong kết quả dịch bằng máy.
이상길 보물섬컬렉션 대표,10세기 작품, 일본 오사카 골동상에서 발견
[통영=뉴시스] 신정철 기자 = 보물 331호인 삼국시대 '청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매우 흡사한 고려시대 초기 작품인 '청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한 국 민간인에 의해 일본에서 국내로 환수됐다.
25일 경남 통영시에 소재한 보물섬컬렉션 대표 이상길(59)씨는 "잃어버렸던 우리의 소중한 국보 문화재를 되찾았다"며 실물과 환수경위, 감정 결과 등을 공개했다.
높이 65㎝, 폭 28㎝의 청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영국 대영박물관(Birtish Museum) 문화재 감정 회신을 토대로 검측(일본 고베 과학감정원 성분분석 감정)한 결과 10세기 고려시대 초기 작품으로 확인됐다.
이 대표는 지난해 일본 오사카 천왕사 인근 고마야 골동상에서 우연히 발견한 '청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보고 끈질긴 설득 끝에 수십억원대의 중국 북송시대 도자기 등 황실유물 40점과 맞바꾸어 국내로 귀환시킨 사연들도 공개했다.
또한 지난 2019년 8월 20일 일본 고마야 미술상이 작성한 반가상 출처 친필 확인서도 공개했다.
고려 청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매각한 고마야 미술상의 친필에는 "약 5년 전 작고하신 아버지 컬렉션을 물려받아 매각하기 시작했고, 이번에 매각한 작품은 전 사장님의 컬렉션 중 한 점인 미륵보살상"이라고 밝혔다.
쿠로다 컬렉선은 현 미술상의 할아버지 때부터 수집한 불교미술, 일본풍경 판화, 회화, 갑옷, 투구 등 3000여점의 다양한 작품들이 있다.
이 대표가 환수한 고려초기 청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보물 331호(1963년 1월 21일 보물지정) 삼국시대 청동미륵보살반사유상과 매우 흡사한 모습이다.
고려시대 작품보다 크기가 약간 작은(높이 28.5㎝) 보물 331호 청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7세기 삼국시대 작품으로 청동에 도금해 제작했다.
반가좌에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뺨에 대고 생각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얼굴은 미소없는 근엄한 표정이며 머리 앞, 옆부분에 삼면보관(三面寶冠)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다. 목에 건 구슬목걸이는 X자형으로 교차되어 다리 부분까지 늘어뜨렸다. 전체적으로 얼굴과 몸이 길고 가늘며 옷주름 표현도 간략하고 도식적이다.
이 대표는 "국보급 문화재를 지난해 일본에서 환수했지만 감정 등 절차 등으로 공개가 늦었다"고 말했다.
특히 이 대표는 "우리 정신문화의 원형인 문화유산을 되찾은 순간의 감동과 고려 청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품에 안고 귀국한 그날의 설렘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민족의 자존심마저 잃어버린 어둡고 암울했던 일제시절에 일본이 약탈해간 우리나라 불교문화유산인 고려 청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고마야 골동품점에서 발견하는 그 순간, 숨 막히고 가슴 떨리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고 덧붙혔다.
또한 "발견 당시 청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파손이나 수리가 전혀 없이 원형 그대로 오사카 천왕사 인근 고마야 골동품점 한쪽 구석에 먼지를 입고 방치되어 있었다"고 술회했다.
이 대표는 그 순간부터 고마야 골동상과 길고 긴 흥정을 계속했다. 결국 한국에서 가져간 중국황실 유물 40여점과 맞교환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구입자금이 필요해 일본에 가져간 중국의 유물이었지만 그 순간 만큼은 돈보다는 민족의 자존을 먼저 챙겨야한다는 생각에 무조건 저 고려 청동반가사유상을 조국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