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新岩面誌에 실린 글
- 이해문(李海文)191~ 1950)
김창배
신암 면지는 2008.12월 발행되었다.
내가 6급 진급 승진하여 발령받아 신암면에 근무할 적에 신암면지 편찬 중이었다.
이해문 선배문인은 공무원 출신이라 감개무량하다.
“그는 공무원의 꿈을 안고 학업에 열중하여 공무원 임용고시(보통고시)에 합격하여 18세 때 신암면 서기로 임명되고 이후 오가면을 거쳐 예산군청에서서 근무를 계속하는 한편 독서생활에 전념했다.”라는 신암면지에 기록되어 있다.
나는 선배문인을 만나 행복하다.
이해문 문인의 생애와 작품을 전면 게재하고자 한다.
※1. 이해문(李海文)1911~ 1950)
이해문은 신문학이후 예산문학의 효시(嚆矢)를 이루는 시인이요 평론가이다. 그는 내 고장 예산은 물론 1930년대 한국문단에서 뛰어난 시인이자 문학 비평가로 활동했다. 문학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일제하, 충남 예산에서 문학의 꿈을 키워 중앙문단에 결실을 맺은 시인이다.
그는 1911년 예산군 대술면 이티리에서 부(父) 이명호(李明鎬), 모(母)청주 한씨 사이에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아호는 고산(孤山), 필명은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그가 어렸을 때 예산읍내 산성리로 이주했다. 어린시절 3년여의 서당 글공부를 마친 후 , 이곳 신식 교육기관인 예산보통학교에 입학, 5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고산은 한학을 독학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었다. 한편 동경제국중학(東京帝國中學)을 통신 강의로 독학했다. 그는 공무원의 꿈을 안고 학업에 열중하여 공무원 임용고시(보통고시)에 합격하여 18세 때 신암면 서기로 임명되고 이후 오가면을 거쳐 예산군청에서서 근무를 계속하는 한편 독서생활에 전념했다.
고산의 나이 15세 때 16세인 안창남(安昌男 : 順興)씨와 결혼하여 16세에 첫아들을 낳았다. 이후 고산의 나이 20세 때 처가의 마을인 예산군 신암면 오산리로 이주했다. 그러니까 고산은 청년, 장년시기를 오산리에서 보내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을 한시기가 오산리요, 의욕적으로 창작활동을 한 시기도 바로 이곳이다. 인생의 황금기 곧 20대에서 30대 초반까지 10수년간 오산리에서 창작활동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시의 원리나 기법 그리고 창작론에 대하여 누구한테 듣거나 배운 바가 없다. 이 모든 것을 책을 통하여 독학으로 터득했을 뿐이다.
고산은 철두철미한 향토적 현장체험에 의거한 현실인식과 이상주의적 세계관으로 1930년대 문단에서 매우 개성적인 경지를 이룩한 시인이다. 고산의 나이 38세 때“바다의 渺茫”을 서울 시인춘추(詩人春秋社)에서 상재할 무렵 일본대학(日本大學)법과를 통신강의로 수료했다.
나의 無限川邊
사랑하는 鄕土 내 無限川邊의 널은 펄 논밧 豊等한 百穀
水災旱魃을 이즌 이 平原 無限川邊의 田園이어
慈愛의 이츰해 ㅅ발이 金烏山우 방긋이 우서줄 때
平原 네 등우에는 고흔아츰을 즐기는 香氣넘처흘럿섯지
한낫(書)農夫의 땀방울이 밧고랑에 떨어질 때
辛苦를 달게 틔기는 님네우슴이 네등우에 넘쳐 흘럿섯지
田園속 아츰안개 싸힌 마슬의 平和론 꿈도
마조던지는 連山의 웃줄거리는 微笑의 날개도
시냇가 마슬안악네 밧분 방망이소리도
-한가론 老人 담거든 漁竿의 微動도
긴-煙氣를 뿜으며 夕陽의 平原 가로馳 빙하는 검은 體軀의 行列도
모다 네품이 안어주는 귀여운 點景들이구나
사랑하는 鄕土 내 無限川邊의 田園아
시냇가 적은 茅屋꿈을 따르는 理想의 所有者
한때는 방랑의 노스탈짜로 南國을 헤메고
한때는 烏山우 太陽을 겨누는 高喊과 함께
聖스런 아츰의 젊은 魂, 自我-淨化를 꿈꾸었건마는
孤獨- 그는 둘업는 내 旅路의 伴侶者
오늘은 理想의 꿈쪼각들이 거의 흐터저 버렷고나
그러면 내 사랑하는 無限川邊의 들아 너 –시내물아
외로움에 싸힌 孤山 – 내몸이 고닮흔 靈을 이끄을때
그리고 여위인 내가 敗殘의 설은 그림자를 네아페 나타내일 때
부대 마저다고 내적은 몸을
외로운 때마다 네품에 안기고시픈 마음의 충동
너는 알리라 내 無限川邊아
그리하야 피곤한내 靈에 때의 休息을 다오
외로운 나는 힘적은 너의 慰撫에서
凱歌에찰 압날에 驀進하는 勇氣도 길러보련다
안윽한 내 無限川邊의 平原아!
(乙亥九月)
출전 : (바다의 渺茫)(詩人春秋社, 1938)
「나의 無限川邊의 전문이다. 이는 고산의 나이 24세 때 지은 작품으로 1935년 9월에 발표되었다. 본 작품에서 우선 제목이 특이하다. ‘無限川邊’이 아니고 고산 자신의 ‘無限川邊’이다. 작품 내면에 흐르고 있는 정열, 자신과의 동화 그 위에 향토애가 짙게 깔려 있다. 귀소본능(歸巢本能)의 정신이 베어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여운이 삽상하다.
고산은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 좋아했다기보다 책은 고산 자체요 분신으로서 약(役)을 다했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밥상이 들어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읽었다. 화장실에 가서도 책을 몰두햇다. 잠도 자지 않았다. 계획된 양의 책을 읽어야만 잠을 잤다. 그런 집념과 의지지라 독학으로 한학을 하고 시학을 한 것이 아닌가.
「노상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책을 보면서 식사를 하는 정도였는데 보다 못한 부인이 옆에서 밥을 먹여줄 만큼 학업에 열중했다.」
고산의 숙모님의 회고담이다. 그 무렵 고산은 인근에 소문이 자자할 만큼 학업에 열중했다.
바다의 渺茫
펄덕이는 心臟 바다 네 묘망한 가슴이어
내 오늘도 그리운 너 回想에
두눈섭 사르르 검어보나니
오오 안고푸고나 네 묘망한 자태여
歸帆돌아오는 氣勢가 기쁨에 넘치고
물ㅅ결을 차는 힌 갈매기 날에 婆瀡우 한가로울 때
戀鄕 애틋한 心情을 해맑은 南國하늘에 붙이던
東洋의 나포리港 그리운 네품이 다시 아쉬웁구나
뭇에서 자라 뭇에서 크게 스물네해
얼마나 네 묘망한 가슴을 젊은 戀人- 볼대기같이 그려햇던고.
지나간 가을 뜻않고 지어진 旅路 惠澤에
항상 그리던 玄海며 太陽 내所有 엇느니만
어이랴 齷齪한 生은 뒤마저 내 발ㅅ거름을 古園에로 재촉했나니
지금에 그러지는 네 자태 안타까움이여
靑春날아간 새를 쓰린 눈물로 回憶하듯이
玄海 네 묘망한 가슴 펄덕이는 心臟이 限없이 아쉽구나.
그러면 바다 내 그러하는 안윽한 품이어
생에 시달리는 魂, 마음고달플 때마다
戀戀한 네 映像에 새로운 勇氣 붓돗는 찬쓰도 심어보리니
부대 기다리라 放浪의 사내 나의 반ㅅ길거듭되기를 ......
- 바다 네 묘망한 가슴이어
내 오늘도 그리운 너의 回想에
두 눈썹 사르르 감어보나니-.
(別府港의 回想)
출전 : <바다의 渺茫)(詩人春秋社, 1938)
「바다의 渺茫」의 전문이다. 고산의 나이 25세 때 1935년에 지은 작품이다. 묘망(渺茫)의 바다와 호흡하고 대화하는 시상이 눈에 뛴다. 장쾌하다. 호연지지가 가슴에 스며든다. 의욕적이고 정열적이다. 하늘만 빤히 보이는 좁디좁은 예산이란 공간에서 현해(玄海)를 넘나드는 옹혼함이 시의 내면에 꿈뜰거린다. 특히<바다>와<渺茫>같은 어휘들은 시대를 탈출하고자 하는 몸부림이요 외침이다. 당시에 유행하던 낭만과 애수, 나약성 등은 다시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고산은 품성이 너무 고왔다. 그리고 착했다. 내성적이지만 자녀들에겐 엄격했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 할까. 집에서는 엄한 아버지로 나가서는 맘씨 좋은 아저씨로 통했다. 평소 부지런했으며 촌음도 헛되이 보내지 아니했다. 근면 성실은 가훈이요, 자녀교육에도 이에서 벗어나지 아니했다.
고산은 세 자녀를 두었으나 장자가 희병(熙炳)이요 차자가 기병(起炳)이며 여식이 정희(貞姬)다. 평소 근엄한 아버지요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장자 희병씨는 회상했다. 그리고 너무도 강직했다.
고산은 일찍이 온갖 책을 두루 섭렵하면서 공직에 올랐다. 그 무렵 고산은 시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으나 그의 나이 16세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당시 예산읍에 있는 문학청년들과 교류함으로써 문학수업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929년 고산의 나이 18세 때 처음으로 「조선지(朝鮮紙)」에 <안 오는 동무>를 발표하고 19세 때에는 성진호(成瑨鎬)가 창간하는 문예지「문예광(文藝狂)에 가입하여 동인으로서 창작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때를 같이하여 이해문은 고산(孤山), 금오산인(金烏山人)이란 호와 필명으로「조선(朝鮮)」「동아(東亞)」「조선중앙일보」등의 신문을 비롯, 「동광(東光)」「신동아(新東亞)」「조선문단」「자오선(子午線)」등의 잡지에 작품을 발표했다.
고산에 있어 특기할 것은 시집 「바다의 渺茫」을 발간한 사실이다. 1938년 고산의 나이 27세 때 발간한 이 시집은 해방 전 충청남도에서의 개인 시집의 효시를 이룬다. 「바다의 渺茫」은 4, 6판형, 총 325쪽이나 되는 방대한 양으로 인쇄는 서울「詩人春秋社」에서 했다. 이는 고산의 나이 16세 때부터 27세 때까지 써 모은 작품 총 148편이 수록되었다. 거의 평생을 고향에서 삶을 누렸기 때문에 시의 소재 또한 고향의 자연과 벗과 이웃 등 소위 향토애가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이 초라한 시집을 사랑하는 향토의 모든 인사들께 삼가 드리노라」한 시집의 헌사가 그러하고 고향 지명을 딴 아호, 필명 또한 그러하다. 따라서 작품의 배경이나 무대 또는 향토성에에서 벗어남이 없었으니 이는 곧 생활로서의 향토로서의 향토애의 표출로서 우리 문학사에 한 장을 정함에 모자람이 없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거리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소중히 여기는 바 있으니, 그것은 나의 시이다.」
이는 고산의 자서(自序)중 「시에 대한 나의 法悅」의 일부다. 이렇듯 고산은 시를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다. 계속해서 또 이렇게 말했다.
「고적한 때에 시를 부르고 기꺼운 때에 시를 읊고, 슬플 때 또는 용장(勇將)할 때에도 나는 시를 읊는다. 시, 시, 시, -, 시 속에 나의 생활이 잇다. 아니 내 생활은 시로 되어있다.」
이렇듯 고산은 시를 사랑하고 시를 아겼다. 시라면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잊었다. 시를 제외하고는 삶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살아있는 한, 목숨이 붙어있는 한 시를 쓰지 아니하고는 아니 되는 고산,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고산은 삶을 존중하고 삶을 찬미하는 생명의 시인으로 우리 사사(詩史)에 남아 마땅하다. 시집「바다의 渺茫」을 발간할 무렵 고산은 서울 문인 박노춘(朴魯春), 윤곤강(尹崑崗) 등과 「시인춘추(詩人春秋)」란 동인지를 조직하고 창작활동에 주력했다.
이와 같이 창작에 생업에 몰두하던 고산에게 있어 8.15해방은 생의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해방 이듬해 1946년 가솔과 함께 서울 본정(本町):충무로)4町 6번지로 이주했다. 이주 후 성신(誠信)여학교 서무과에 근무하는 한편으로 한독당 집행위원을 잠시 지냈다. 이어「한성신문」「문예춘추」「문예공론」등에 관여하면서 「백민(白民)」「맥(貊)」「죽순(竹筍)」「사해공론(四海公論)」등에 시 및 편론 등을 발표했다.
그러던 중 민족의 비극 6.25동란은 고산에게 있어 뜻하지 않는 죽음을 가져다준다. 서울은 저들의 손에 들어가고 그래서 가족과 함께 고향인 오산리로 내려왔다. 부친께서 병석에 누워 계셨기에 다시 올라가서 리어카에 싣고 예산군 신암면까지 왔다. 그때 그곳을 장악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에게 검문을 당하고 가지고 있던 시집 등을 모두 압수당했다. 다음날가지 출두하라는 명을 받았다. 피신할 기회가 있었고 또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신하라고 권유했으나 그의 강직성을 막을 자 없었다. “평생 글만 쓴 내가 무슨 좌가 있느냐”고 태연하게 집을 나섰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예감하지 못했다, 고산의 장자 희병씨의 증언이다.
인민군의 소환을 받고 집을 나간 후 예산천주교교회에 수감되어 있다가 20여일 후, 1950년 음 8월18일 새벽, 울려 퍼지는 총성을 듣고 가족들이 달려갔다. 예산읍 시루미 고개 옆 공동묘지 부군에 구덩이를 파고 100명이 넘는 많은 예산의 지식인, 유지들을 동아줄로 꽁꽁 묶어 놓고 총살을 가한 것이다. 9. 28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이 급변하자 도주하던 인민군들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됐던 것이다. 저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서도 가죽들이 모두 달려와 시신을 확인하고 가까운 곳에 가매(假埋)했다가 수복 후 다시 선영으로 옮겼으니 그 곳이 바로 예산군 대술면 화천리(금실)이다.
예산에서 태어나 잠시 서울에서 머문 것을 제외하고는 예산을 지키며 구도자적 자세로 예산을 노래해 온 “영원한 예산의 시인 고산” 죽음치고는 너무도 허망하다. 더욱이 그의 죽음이 예산의 좌익분자들에게 의해서였으니 어찌 비극이 아니고 모순이 아니랴. 화천리 무덤가 아카시아 숲 속에는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고 있다.
※신암면지 795 ~ 801페이지 발췌
*이 글은 노종두 집필위원이 쓴 것으로 추측되어집니다.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