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여사울 성지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출생지이며, 최초로 충청도 교회에 복음 활동을 펼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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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울은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의 출생지이며,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그가 천주교를 받아들여
전교 활동을 펼친 곳이다. 이후 이곳의 복음은 내포 평야 지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여사울은 내포 교회, 넓게는 충청도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 여사울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이존창이 1784년 겨울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스승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 스코 하비에르) 형제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고향으로 내려와 천주교 신앙을 전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이곳의 복음은 내포 평야 지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여사울은 내포 교회, 넓게는 충청도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에 앞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李瀷, 호 星湖, 1681~1763)의 제자로 일찍이 서학을 받아들인 홍유한(洪儒漢, 호 隴隱, 1726~1785)도
경상도로 이주하는 1775년까지 이곳에서 거주하였으며, 1777년에는 이존창의 스승인 권철신과 이기양(李基讓, 호 茯庵, 1744~1802)이 여사울
이존창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 마을은 예부터 부자들이 많이 살아 온통 집들이 기와집뿐이어서 마치 서울과 비슷하다 하여 ‘如서울’이라
불렸던 것이 여사울로 되었다고 한다.
우리 교회 최초의 신부들인 김대건과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의 집안이 바로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다.
단원 이존창은 한국 교회의 기틀을 잡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한 분이다. 충청도는 그 당시 가장 큰 교세를 형성했고 충청도 신자들은 박해 때 전국으로
퍼져 복음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이존창 루도비코는 1786년 이래 초기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이 조직한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 模倣聖職者團)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1791년의
신해박해로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고, 그해 말에는 여사울을 떠나 충청도 홍산을 거쳐 전라도 고산(윤지충의 동생 윤지헌과 함께 저구리에서
지냈다)으로 이주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공주에서 체포되었다가 배교하였으나 그는 자유의 몸이 되자 자신의 잘못을 통회하고
더 적극적으로 전교 활동에 들어갔다.
고향을 떠나 홍산으로 가서 전교에 열을 올렸으며 그 후 가성직 제도가 잘못된 것을 알고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의 입국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존창은 다시 공주 감영에 끌려가 심문을 받고 서울로 이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공주 감영에서
1801년 2월 28일(음)에 참수형을 받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친척들이 그의 시체를 거두러 갔을 때 여섯 번 칼질에 잘라진 목이 다시 굳게 붙었고
목에 실낱같은 흉터가 둘러쳐져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