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숭산 행원의 불교사상 형성의 배경 연구
박 준 호 / 동방문화대학원대학 불교문예학과 박사과정
목 차
I. 서론
Ⅱ. 숭산의 성장과 사회적 배경
Ⅲ. 숭산의 불교사상
Ⅳ. 맺는 말
국문요약
숭산(1927-2004)은 한국불교를 전 세계로 널리 포교한 거의 독보적인 선구자이다. 그가 한국 선불교의 보급을 위해 해외에 설립한 국제선원은 1966년 일본을 필두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32개국 120여개나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숭산의 불교사상 연구는 거의 없다. 본 연구는 당시의 사회사상과 시대적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숭산의 불교사상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는 기초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숭산은 탄생 후 출가초기까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극심한 좌우대립, 6·25전쟁 등 혼란과 격변의 시기를 몸소 겪어왔다. 일제치하에서의 지하 독립운동과 투옥, 6·25전쟁 중 군대 입대는 그의 불교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숭산은 생전 3번의 世界一花大會를 개최할 정도로 세께의 평화를 기원했다. 세계는 하나의 꽃이라는 이 사상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사상이자 동체대비심의 발로인 것이다.
숭산은 민족의 비극적인 시대를 살아오면서 인간 존재의 깊은 성찰을 통해 자연스럽게 불교의 길로 접어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제어
숭산, 불교사상, 선불교, 선사상, 자비, 상생
Ⅰ. 서론
1. 연구의 목적
20세기 들어 한국선불교를 전세계에 알린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코 숭산행원(1927-2004)이다. 그는 1972년 미국에 건너간 이후 120여개 국가에 禪 센타를 건립해 후학을 양성했다. 한국의 선불교를 현양하는 차원을 넘어 동양의 정신문화의 정수를 세계에 보급했을 뿐만 아니라, 동서의 정신문화가 융합할 수 있는 터전을 닦은 인물이다.
숭산은 현대사의 인물이어서 그 행적은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생전에 티벳의 달라이라마, 태국의 틱낫한, 캄보디아 종정 마하 고사난다와 함께 세계의 4대 생불이라 불릴 정도로 세계적인 추앙을 받았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그의 명성에 비해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 할 수 없다. 종단 내부의 위상도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숭산 개인에 대한 연구도 많지 않다. 석사논문이 한편 있는 정도이다. 그런 만큼 새로운 조명을 필요로 한다.
본 연구는 숭산의 불교사상 전모를 연구하기 위한 전단계로 그의 불교사상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간주되는 사회적 배경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탄생과 유소년기, 그리고 출가 초기까지 경험했던 민족의 비극적 시대는 숭산의 출가동기와 말년의 세계일화사상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강조했던 자비와 평등, 평화와 상생이라는 중생구제의 원력과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또한 숭산이 선사상의 실천성을 유난히 강조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본고는 이러한 점에 주목하고 상호연관성이 무엇인가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Ⅱ. 숭산의 성장과 사회적 배경
1. 숭산이 태어나던 시기의 조선
1) 숭산과 조선의 변화
먼저 숭산의 생애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숭산은 1927년 8월 1일 평안남도 순천군 군내면 창리 233번지에서 태어났고 2004년 11월 30일 열반에 들었다. 본명은 이덕인(李德仁), 호는 행원(行願)이다. 순천공립학교와 평양의 평안공립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44년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46년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였고, 1947년 마곡사에서 출가하였다. 1949년 수덕사에서 고봉(古峰)에게 비구계를 받은 뒤, 1951년 마곡사 강원 사교과를 졸업하였다. 1952년 육군에 입대하여 1957년 육군 중위로 전역하였다. 1958년 대한불교조계종회 의원, 화계사 주지가 되었으며 1960년 대한불교신문사를 설립하여 초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61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부 부장, 1964년 동국학원 이사로 재직하였다. 그 뒤 한국 선불교의 보급을 위하여 해외포교에 나서, 1966년 일본 신주쿠[新宿] 홍법원, 1969년 홍콩, 1972년 미국, 1974년 캐나다 토론토, 1980년 영국 런던, 에스파냐 팔마, 1983년 브라질 상파울로, 1985년 프랑스 파리 선원 등 세계 각지에 국제선원을 개설하여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렸다. 2004년 현재 세계 32개국에 120여 개의 선원이 개설되어 있다.
간략한 행장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숭산이 성장하던 청소년기의 한국사회는 암울과 혼란이란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일제는 3·1 운동 이후 민중의 정치적 자각과 진출이 급속히 높아지면서 1920년대에 민족운동이 국내외에 걸쳐 활발하게 전개되자 ‘문화정치'라는 기만적인 개량정책을 써서 민족독립운동 역량의 분열과 약화를 모색했다. 특히 일제는 당시 광범위하게 전개되던 실력양성운동을 일제 지배하에서 자치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 자치운동으로 전환시키려 했다. 그러자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원하는 민족주의 세력들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그리하여 숭산이 태어나던 해인 1927년 2월 15일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대항, 정치-사회 사상의 이념을 초월한 독립운동단체 ‘신간회’를 창립한다.
新幹會는 發起人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綱領을 발표하다.
一. 우리는 政治的 經濟的 覺醒을 促進함.
一. 우리는 團結을 鞏固히 함.
一. 우리는 機會主義를 一切 否認함.
發起人氏名, 金明東金俊淵金鐸權東振鄭在龍李甲成李昇薰鄭泰 奭李昇馥李淨文一平朴東完李灌鎔白寬洙申錫雨申釆浩安在鴻張 吉相張志暎曺晩植崔喜益崔元淳兪億兼朴來弘韓基岳韓龍雲李商 在韓偉鍵洪命憙洪性憙李晶燮李鍾麟李順鐸李鍾穆
신간회는 비록 1931년 5월 16일 해소되었지만, 민족협동전선 창립 성공 자체와 4년 3개월 동안의 민족운동의 성과와 영향 및 그 역사적 의의에서 볼 때 신간회운동은 한국근대사와 한국민족운동사에서 매우 크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위대한 민족운동이었다.
첫째, 신간회는 국내의 민족독립운동 노선에 혼란과 교란을 가져오던 각종의 자치론, 내정참정권론과 자치운동을 철저히 분쇄하고, ‘완전독립’·‘절대독립’의 민족독립운동노선을 확고부동하게 정립하였다.
둘째, 신간회는 국내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사상과 이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더 큰 목표를 위해 대동단결해서 좌우합작에 의한 전민족적 최고기관으로서의 단일민족협동전선을 수립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숭산이 태어나던 시기에 우리민족의 운명이 역사적인 변화를 시작한 것이다.
2) 숭산의 민족의식 태동
인간생활의 기본적 단위인 지역은 각자의 문화와 고유의 정체성으로 인간의 성장과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숭산이 태어난 평안남도 순천군은 전국을 통 털어 일제 강점기에 가장 강력한 항일 운동을 전개한 지역이었다.
순천군은 평안남도는 물론 전국에서도 3.1운동 기간 중에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희생자가 많았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순천군에서는 3월 2일 은산면(殷山面)에서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1천여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이어 3월 4일 자산면(慈山面)에서도 천도교인들이 중심되어 만세 시위운동을 벌였고, 3월 5일 신창면에서는 장날을 기하여 기독교인들의 선도로 3천여 명의 장꾼들이 봉기하여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3월 6일 읍내에서 천도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이 합세하여 2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조직적이며 치열하게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한 곳이 신창면이었다. 신창면의 만세 시위운동은 기독교 감리교인이던 박창빈(朴昌彬)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몰래 가지고 와서 이곳에서 담임하고 있던 이윤영(李允榮)목사 에게 전달하면서부터 준비되었다. 그리하여 감리교도들은 현직 신창면 면장까지 포섭하여 면사무소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진 뒤, 태극기를 앞세우고 가두에 진출하여 장꾼들과 함께 격렬한 만세 시위운동을 벌였다. 이 날의 만세시위운동으로 50여 명의 시위 운동자들이 피검된 것을 보아도 그 시위의 격렬함을 짐작할 수 있다.
숭산은 이와 같이 항일의 열기가 높았던 곳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이 발로되었을 것이다. 또한 교육을 받으면서 의식이 확장되고 식민지배하에서의 일제의 야만성과 나라 없는 민중들의 고통을 목격하면서 민족의식이 점차 고양되어 갔을 것이다.
숭산은 1940년 순천 공립학교를 졸업하였다. 당시 아동들이 학교를 다니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생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韓國의 學齡兒童 총수는 2,706,000名인데 官公私立 1,419校에 453,957名만이 就學하고 있어 7割이 敎育의 기회를 갖지 못하다.
숭산이 1944년 지하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옥고를 치렀다는 기록은 숭산이 평양시에 있는 평안공업고등학교를 1945년에 졸업한 것에 비추어 보아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을 할 정도로 애국청년이었다. 1944년은 일제강점기 중 가장 끔찍했던 민족말살통치시대로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그에 연달은 물자와 인력 공출, 이른바 병참 기지화 정책으로 조선민중을 이전에 겪지 못한 유례없는 고통에 빠지게 한 시기였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며 원래 계획에는 없었던 조선인에 대한 강제징용이나 강제징병을 시작한 시기도 이 때였다. 유관순 열사가 17세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3.1독립운동에 참여한 것과 같이 숭산도 같은 나이, 같은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목숨을 걸고 지하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풀려났다고 하는 것은 3.1절 조선독립운동 25주년이 되는 해 기념식을 시행할 시기에 연행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의 한국독립당이 1944년 3.1운동 25주기를 맞이하여 발표한 격문이다.
三·一節! 三·一節! 이날은 우리나라가 獨立國이며 우리 民族이 自由民임을 世界萬邦에 宣布한 날이다. 3千萬 우리 韓人이 異口同聲으로 우리나라의 獨立을 主張하며 우리 民族의 自由를 要求한 것은 一時的으로 衝動된 排他的 感情이나 或은 自身만 의 生存發展을 위한 利己主義의 作爲가 아니라 實로, 東亞和平의 永久한 建立과 世界人類의 恒久한 發展과 甚至於 敵日本 에게까지 그의 福利를 위하여 悔過自新의 길을 啓示한 곳 互愛互助互濟의 世界一家를 創造하랴는 正正當當한 良心의 發動이었다.
3) 숭산의 동국대 입학과 출가
숭산이 1946년도 동국대학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한국의 대학사회는 신탁통치 찬반운동과 국대안 파동 등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극심한 좌우대립을 겪었다.
이 중 국대안 파동은 군정기인 1946년 미군정 학무국의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발표에 대하여 1948년까지 해당학교의 교수, 학생과 전국의 많은 교수, 학생등이 격렬히 반대한 사건을 말한다.
국대안 반대의 집단행동이 본격화된 것은 1946년 9월 해당 대학교들의 학생들이 등록을 거부하고 제1차 동맹휴학에 들어가면서부터이고 동국대학교도 1947년 2월 집단 맹휴에 참가한다.
이보다 앞서 11월 1일부터 서울 각 대학에서는 등록거부·동정 맹휴가 시작되어 47년 2월 최고조에 달했다. 한양대·연희대·동국대 등 각 대학과 경복·중 동·배재중학, 덕수상·선린상 등 실업학교 및 동명여중 등에서 동맹휴학이 일어나 지방에까지 확대 되었다.
그러나 친일 교수 배격, 경찰의 학원 간섭 정지, 집회 허가제 폐지, 국립대 행정권 일체를 조선인에게 이양할 것, 미국인 총장을 한국인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한 국대안 반대운동은 점차 해방공간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좌우익의 대결로 흘러가게 되었다. 국대안 반대운동은 학원 문제를 넘어 정치적 성격의 문제로 진화하였고 이에 따라 좌우익 학생들이 국대안 문제에 대해 동맹 휴학 유지와 중지로 갈라지게 되었다. 국대안 사태는 해방 공간 좌우 대립의 축도와 같은 것이었다.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할 정도로 애국청년이었던 숭산은 좌우의 사상대립과 이념투쟁을 보면서 해방의 기쁨 이상의 상상할 수 없는 심각한 좌절과 환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숭산이 재학 중이던 동국대학교에서의 집단 맹휴를 둘러싼 학생들의 대립은 그의 출가를 더욱 재촉했을 가능성이 있다. 숭산은 집단맹휴 몇 개월 후 그 해 10월 마곡사로 출가하게 된다. 숭산이 세상의 평화와 인간 본연의 성찰을 위해 출가를 선택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남한의 정치적 상황이 극도로 불안했던 때였습니다. 결국 숭산스님은 자신의 정치적 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머리를 깎고 절대적 진리를 얻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맹세 하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 세 달 동안 그는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같은 유교경전을 공부하였으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친구 중 한 사람이 작은 암자의 스님이었는데 스님에게 금강경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무릇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모양이 있는 것이 모양이 아님을 알면 그가 곧 부처이니라.(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금강경의 이 구절이 스님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아아, 바로 여기가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동양철학이 일치하는 곳이구나. 불교의 골수가 여기에 있구나' 스님은 이 경전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때 어떤 스님이 산을 다니다가 절에 들렸습니다.
"학생, 무엇을 읽고 있나?"
"금강경을 읽고 있습니다"
"불경은 왜 읽지?"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불교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야"
"예?"
"불교는 잊어버리는 것일세. 학생도 아는 것이 너무 많구먼. 불교는 이제까지 배운 걸 다 잊어버리는 것이지 이해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듣고 보니, 그 말에 뜻이 있었습니다.
'아! 불교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이구나. 그런데 어떻게 해야 잊어버릴 수 있을까?'
이로부터 스님의, 아니 정확하게는 청년 덕인(스님의 속명)의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출가를 할 것인가? '
아니다. 4대 독자인 내가 남한에 내려와 중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실 것인가'.그러면 크나큰 불법 진리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평생 속가인으로 살아갈 것 인가?
'아니다. 4대 독자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부처님은 한 나라의 왕자로 모든 걸 다 버리고 설산으로 들어가셨는데 이만한 용기도 내게는 없단 말인가'
스님은 결국 1947년 10월에 마곡사에서 계를 받아 출가를 하셨습니다.
Ⅲ. 숭산의 불교사상
1. 숭산의 불교정화운동 참여
숭산은 1952년 12월 3일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육군으로 입대하고 5년간의 군 생활 후 1957년 7월 20일 중위로 전역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1958년 3월 화계사 주지로 취임하고 효봉 동산 청담 경산스님 등과 함께 불교정화운동을 추진하고 1962년 비구ㆍ대처 통합종단조계종 비상종회 초대의장에 피선된다.
불교정화운동이란 ‘정화운동(淨化運動)’ 혹은 ‘정화불사(淨化佛事)’로도 불리며, 대체로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대처승의 배제, 비구승에 의한 종단 재건, 한국불교 전통 재건, 불교 근대화 운동을 내용으로 하는 불교 내 자정운동이다.
이 운동의 직접적 계기는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이 전통불교사원에서 ‘대처승은 물러가라’는 요지의 유시를 내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본래 대처승은 한국불교의 독신 전통과 달리,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승려들을 강제 결혼시키면서 나타나게 되었다. 불교정화운동은 우선 일본 불교의 대처승단 영향으로부터 한국 불교의 독신 승단 전통을 복원시키려는 운동이었다.
숭산이 불교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비구ㆍ대처 통합종단조계종 비상종회 초대의장의 중책을 맡게 된 것은 숭산이 경허 만공 고봉으로 이어지는 덕숭법맥의 명실상부한 계승자였기 때문이다.
근세 한국불교의 중흥조이자 덕숭산맥의 개조인 경허는 1899년 해인사에서 정혜결사를 통해 부처님의 정법을 지켜가려는 치열한 정진을 하였다. 경허는 1899년 11월 최초의 근대선원인 해인사퇴설선원을 개설하면서 「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을 발표하였다.
부처님 회상에서 阿那律尊者가 너무 잠을 많이 잠으로 부처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7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정진하다가 장님이 되었으나 天眼을 얻었으며 아난존자는 가섭존자에게 꾸지람을 듣고 비사리성에 머물며 홀로 정진하다가 몸과 마음의 피로가 극도에 도달한 뒤에야 아라한과를 얻었다.
모든 불보살이 함께 발원하고 도를 이루었다는 것이 經에 없는 데가 없으니 가까운 예전에 慧遠法師는 廬山에서 결사하고, 白樂天은 香山에서 결사하고 牧牛子는 八公山에서 결사하였다는 것이 모두 이러한 뜻이다.
이와 같이 수선정혜의 결사의지를 다지고 「정혜계사규례」 30조항의 규례를 발표하여 결사의 청규로 삼아 결사에 동참한 대중은 어느 곳에서 수행하더라도 이를 반드시 이행하도록 맹약하였다.
또한 덕숭산문의 확립자인 만공은 일제의 회유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부처님의 계율에 따라 청정 비구승으로 한국불교의 전통을 지키고자 하였다. 만공 스님은 1936년 총독부에서 열린 31본산주지회의에서 총독에게 이렇게 ‘할(喝)!’을 하였다.
“일한 병합 이전에 우리 조선 사원 안에서 파계자에게는 뒤에 북을 울려 산문 밖으로 쫓아내어 우리 조선 승려들은 규모 있는 교단생활을 계승하여 불조의 혜명을 이어 왔습니다. 합병 이래로부터는 사찰령 등의 법령이 반포되고 또한 삼십일본말사의 사법이 인가된 후로 소위 주지들 전단이 감행되자 승풍이 문란되었으니 곧 취처하는 승려와 음주식육을 공공연히 하 는 것을 공인화 되어 이때부터 조선승려들 전부가 파계승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불제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법령인 계율이 지엄하니 이 율법에 의준하여 삼천 년이라는 장구한 동안에 교법을 계승하여 왔는데 일본불교도의 공공연하게 파계하는 영향을 받아 조선불교 승려들은 전부가 파계승이 되어 버렸으니 나는 이 책임이 전부 당국에서 이같이 불철저한 법령으로써 조선불교를 간섭한 데서 인유한 바라고 생각합니다.
경에 말씀하기를 ‘한 비구로 하여금 파계케 한 죄악은 삼아승 지겁 동안 아비지옥을 간다’ 하였사오니 이 같은 칠천 명 승려로 하여금 일시에 파계케 한 공 이외에는 당국자에게 무슨 그리 대단한 업적이 있습니까?”
이와 같이 숭산의 불교정화운동은 경허 만공에게 그 뿌리가 닿아있는 것이다. 숭산은 청년승려로서 문건작성이나 기자회견 준비, 정부 요인 면담 주선 등 실무적인 책임자 역할을 하였다. 숭산은 조계종의 토대를 만든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숭산이 현대적 교육을 받았고 미국 등의 선진제도를 최일선에서 받아들인 선각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군에서의 장교 생활은 이러한 활동을 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당시 군대는 외국의 선진시스템과 교육체제를 갖춘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인 집단이어서 집단갈등 해결 능력이나 행정 기술 등을 제일 먼저 습득할 수 있었다.
2. 숭산의 간화선과 세계일화사상
1)숭산의 간화선
한국불교의 대표종단인 조계종은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간화선을 종단의 중심수행체계로 삼고 있다. 숭산은 청년시절 금강경을 읽고 발심한 바, 금강경을 중심으로 선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숭산이 간화선을 가지고 세계에 포교하고 천착한 것은 아무래도 덕숭문중의 수행법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경허가 “콧구멍 없는 소”로 깨달음을 얻은 후 만공은 無字화두로 전법을 받았고 고봉스님 역시 숭산의 공안을 철저히 점검한 후에야 인가를 해준 것이다.
고봉스님은 1,700가지 공안 중 어려운 것을 골라 물었는데, 숭산스님이 막힘없이 모두 대답하였습니다.
이를 본 고봉스님이 말했습니다.
"서식야반 반기기파라.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밥그릇이 깨졌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아니다"
숭산스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문답에서 한 번도 틀린적이 없었다. 얼굴이 벌개져서 또 다른 '여여한' 답을 말했습니다. 고봉스님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참다 못한 숭산스님은 화가 났고 또 실망했습니다.
"춘성스님, 금봉스님, 금오스님들 모두 제게 인가를 해 주셨는데, 왜 스님만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말해라!"
50여 분간 고봉스님과 숭산스님은 서로 성난 고양이 같이 상대방을 노려보기만 했습니다. 불꽃이 번쩍번쩍 튀는 듯하더니 그때 갑자기 숭산스님이 대답을 하였는데, 그것이 '즉여'의 답인 것이었습니다.
고봉스님은 이것을 듣자 눈에 눈물을 고이고 얼굴에 기쁨이 넘치며 환히 웃고 숭산스님을 얼싸안고 말했습니다.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
다음해인 1949년 1월 25일, 고봉스님은 행원스님에게 정식으로 법(法)을 전하는 건당식을 열었습니다. 이 건당식에서 행원스님은 숭산이라는 당호를 받았습니다.
숭산이 간화선을 참구할 무렵에는 간화선 수행자는 용성 한암 동산 만공 고봉 등 소수에 불과했다. 일제 시대 말기 전체 7,000여 명의 승려 가운데 독신인 비구승은 300~600여명 정도였다고 한다. 1935년 선학원에서 발행한 『禪苑지에는 선원은 22개소에 368명의 수좌가 수행하였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1942년의 기록에는 선원이 68개소에서 하안거 대중이 505명, 동안거 대중이 340명이었다고 한다. 일제의 왜색불교 침투와 점차 취처육식으로 세속화 되어가는 승려들에 맞서 선원수좌들은 선풍진작과 한국불교의 전통을 지키기위해 힘겹게 수행을 하였다. 따라서 간화선 수행자들은 단순히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왜색불교의 탈피, 전통불교의 수호, 선수행을 치열하게 하자는 수행정신, 현실의 문제를 자각하는 정신 등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 결과 간화선의 수행체계를 바로잡아 조계종의 위상을 확고히 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숭산은 간화선의 세계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2) 숭산의 세계일화사상
“세상은 한 송이 꽃이다.” ‘세계일화’는 만공스님의 법어다. ‘세계일화’라는 말은 당나라 시인 왕유가 쓴 ‘육조혜능선사비명’의 ‘世界一花 祖宗六葉’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세계는 하나의 꽃이며 조사의 종풍은 여섯 잎이라는 의미로 초조달마에서 육조혜능까지 내려온 중국 선종의 傳法을 절묘하게 표현한 말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만공 대선사께서는 한국 국화인 무궁화 꽃잎을 먹에 갈아 붓으로 “世界一花”를 갈필하고 제자들에게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 조선 땅이 세계일화의 중심이 될 거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법문을 남긴다.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
어리석은 자들은
온 세상이 한 송이 꽃인 줄을 모르고 있어.
그래서 나와 너를 구분하고,
내 것과 네 것을 분별하고,
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다투고 빼앗고, 죽이고 있다.
허나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아라.
흙이 있어야 풀이 있고,
풀이 있어야 짐승이 있고,
네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네가 있는 법.
남편이 있어야 아내가 있고,
아내가 있어야 남편이 있고,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 부모가 있는 법.
남편이 편해야 아내가 편하고,
아내가 편해야 남편이 편한 법.
남편과 아내도 한 송이 꽃이요,
부모와 자식도 한 송이 꽃이요,
이웃과 이웃도 한 송이 꽃이요,
나라와 나라도 한 송이 꽃이거늘,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는
이 생각을 바로 지니면 세상은 편한 것이요,
세상은 한 송이 꽃이 아니라고 그릇되게 생각하면
세상은 늘 시비하고 다투고 피 흘리고
빼앗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니라.
그래서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참 뜻을 펴려면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참새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심지어 저 미웠던 원수들마저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요,
다른 교를 믿는 사람들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니,
그리하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니라.
하지만 세계일화라는 이 단어를 지구촌 곳곳에 알린 이는 숭산이다. 숭산은 세계일화 사상은 인류평화의 원류이며 인간의 삶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를 포함한 크나큰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경허, 만공, 고봉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이은 숭산은 1960년대 중반부터 해외 포교를 시작해 이후 40년 간 세계 32개국에 120여 선원을 세우며 한국선불교의 씨앗을 퍼트렸다. 숭산으로부터 한국 간화선을 지도받은 제자가 무려 5만여 명이나 되었고, 2004년 숭산의 다비식엔 참석한 해외제자만도 500명이나 이르렀다. 한국불교 세계화의 신기원을 이룩했던 숭산의 해외포교 대장정에는 만공선사의 ‘세계일화’의 가르침이 오롯하게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숭산은 해외 포교에 진력해오다가 세계평화를 염원하면서 환갑이 되던 1987년 세계일화대회를 창설하고 수덕사에서 제 1회 대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매 3년에 한 번씩 세계 각국을 돌며 행사를 진행했다. 이는 중생구제를 위해 절대진리를 추구했던 초발심의 각오를 회향한 것으로 봐야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절대평화의 연꽃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십우도의 마지막 단계인 입전수수의 길로 나아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약 2,600여 년 전 인도 영축산에서 부처님께서 연꽃 한 송이를 들어보이심으로써 우주의 실상을 설파하셨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만공 대선사께서는 한국 국화인 무궁화 꽃잎을 먹에 갈아 붓으로 “세계일화(世界一花)”를 갈필하셨습니다.
두 분 모두 평등, 조화 그리고 평화에 대한 표현이었습니다. 이는 나와 너, 태양과 달, 하늘과 땅, 공기와 물 등이 근본적으로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그 뿌리가 같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만공 대선사께서는 전 인류가 바로 이 공동의 운명체 정신, 우리 모두의 공동된 본체(本體)로 회귀하기를 절실히 소망하셨고, 그 뿌리로부터 평등과 조화와 평화의 세계일화가 피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하셨던 것입니다.
숭산행원 대선사께서는 전 세계의 다른 국가와 전통의 사람들을 이러한 화합과 조화의 정신으로 뭉치게 할 수 있는 장의일환으로 세계일화대회를 창설하셨습니다.
숭산은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마음을 바탕으로 無心을 터득하고 중생을 위해 실제 삶 속에서 구현할 것을 강조한다. 숭산은 이를 위해 독재권력 앞에서도 절대 굴하지 않고 실천적 사상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1982년 미국에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아 편지를 보냈고, 그 결과 귀국 후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숭산은 내가 사랑하는 내 나라, 내 민족이 고난을 겪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글을 쓰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아유(我有)하니 피유(彼有)하고, 아멸(我滅)하니 피멸(彼滅)이라. ‘나’가 있을 때 저것이 있고, ‘나’가 없으면 저것도 없네. 이것이 불교 소학교 과정입니다. 대통령이시여, 당신은 ‘나’를 아시오? 무엇이오? 말해 보세요. 모르지요? 자기도 모르면서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말입니다.”
숭산이 선의 실천성을 강조한 것은 숭산은 나라없는 설움, 갈라진 국토, 찢어진 민심 속에서 민중의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을 경험한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숭산이 만년에 세계일화대회를 개최한 것은 출가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중생구제의 대비심을 끝까지 견지하고 승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Ⅲ. 맺는 말
지금 세계는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통상 인류의 갈등은 크게 국가, 민족, 지역, 인종, 계급, 성별, 종교 갈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오늘날은 이 모든 갈등이 한꺼번에 중첩되어 나타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다 환경문제, 질병문제, 기아문제, 전쟁까지 더해져 그 심각함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세계화시대의 모순이 극명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숭산이 적극적으로 제창하고 실천한 세계일화사상은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키고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는 것은 세계화 시대의 중요한 시민적 자질이다. 유네스코 헌장은 그 전문에서 “전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시작되므로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 할 곳도 인간의 마음속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세계는 하나의 꽃이라는 사상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사상이자 동체대비심의 발로로서 절대평화를 상징한다.
이는 신라 삼국통일 당시 분열되어 있는 모든 종파를 통일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중들의 삶을 위무한 원효의 화쟁 논리에 비견할 만하다. 원효의 화쟁은 작게는 민족통합의 이념이었고 크게는 동시대의 사상을 모두 아우르는 동양사상의 정수였다.
무릇 역사적인 모든 지식과 사상은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관련하여 해석할 때만이 정확한 진상을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숭산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민족의 고비마다 현장에서 온몸으로 진리와 정의를 위해 가열차게 매진해 왔다. 불과 열일곱의 나이로 민족독립운동을 하다 투옥을 당하기도 하고, 해방후 좌우익 이념 대립으로 민족이 분열되자 이에 절망한 나머지 절대적 진리를 찾아 출가한다. 6.25전쟁 중 입대하여 민족의 무고한 죽음과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도하기도 하고, 제대한 직후에는 불교정화운동에 뛰어들어 왜색불교를 청산하고 한국 선불교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한국불교가 침묵할 때 전두환 독재정권을 비판했고, 만년에는 세계일화대회를 열고 세계평화를 염원했다. 숭산의 이러한 행동은 중생구제에 대한 한 생각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세계화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은 다양성의 존중과 관용이 전제되어야한다. 세계일화사상은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이고, 공간적으로는 나와 지역과 지방과 국가와 세계와 우주가 하나임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나와 남이라는 개념이 들어설 수 없다. 그 자체가 절대평화요, 진리다.
숭산의 역사적인 삶과 연결된 세계일화사상의 배경과 의미를 고찰해보면, 세계일화사상은 국가, 민족, 지역, 인종, 계급, 성별, 종교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모티프로서 세계평화와 중생구제, 인류발전의 시대정신이라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참고문헌
1. 주요원전
대한불교조계종 삼각산화계사 홈페이지 www.hwagyesa.org
동국대학교불교편찬위원회편,『한국불교전서』11권,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한국학중앙연구원,『ENcyKorea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02. http://encykorea.aks.ac.kr
2. 저서
서울대학교60년사편찬위원회,『서울대학교60년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숭산,『부처님께 재를 털면: 숭산스님의 가르침 』, 스티븐 미첼엮음, 최윤정 옮김, 여시아문, 1999.
신용하,『한국독립운동의역사46권:신간회의 민족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조계종교육원편,『조계종사(근현대편)』,조계종출판사,2001.
추헌수 편,『자료한국독립운동』1권, 연세대학교출판부,1971.
한국사사전편찬회,『한국근현대사사전』, 가람기획, 2005.
현각,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2권, 열림원, 1999.
____ 『부처를 쏴라』, 김영사, 2009.
3. 언론.
동아일보, 1927. 1. 20.
동아일보, 1928. 3. 26.
동아일보, 2004. 12. 6
<Abstract>
A Study of the background of the great master Soongsan Hangwon’s Buddhism and his thought
Park Junho
/ Dongbang munwha graduate university
The great master Soongsan(1927-2004) had initiated Korean Buddhist missionary work at first all over the world. He had established International Meditation Center for the propagation of the Korean Zen Buddhism for the first time in Japan 1966. And United State, Great Britain, France and so on about 32 nations 120 International Meditation Center. Nevertheless there had not been the studies for his Buddhism and his thought until now. This study is the social thoughts and background of the period of his life time for the great master Soongsan’s buddhism and his thoughts.
The great master Soongsan was experienced directly Japanese imperial regime in Korea, there were many conflicts right and left ideologies severely after independent from Japanese imperialism and 6·25 Korean civil war after his birth to early his buddhist priesthood. He has been influenced his buddhism and his thought deeply that he has been put in jail as his independent movement by Japanese imperial regime and during the 6·25 Korean civil war he has been joined the army.
The great master Soongsan held One Flower World three time in his hole lifetime for the peace of the hole world. His thought of the world is one flower is the doctrine of dependent origination and the merciful mind for the same substance that is the doctrine of the Buddha.
The great master Soongsan ought to be a buddhist because his hole life time was very severely tragedies of Korean people that made him self consideration.
*Key-word
Soongsan, Korean Buddhist, Korean Zen Buddh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