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오카(靜岡) 공항에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시즈오카 역으로, 도카이도혼센(東海道本線) 철도를 타고 미시마(三島) 역으로, 이즈하코네(伊豆箱根) 철도로 슈젠지(修善寺) 역으로, 이즈하코네 버스로 온천마을 슈젠지온센(修善寺溫泉)으로 들어간 게 지난 11일 오후였습니다. 더듬거리는 일본말로 길을 묻고 차편을 확인하는 동안 아내는 처음 대하는 일본 사람들의 친절함, 길거리의 청결함, 자동차들의 질서정연한 운행에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현관 앞의 작은 꽃밭과 정원수, 차도 옆 가로수 하나하나에 들인 정성에도 놀라워했습니다.
정말 기분 나쁠 정도로 길거리, 정류장 어디에서도 담배꽁초 하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성미 급한 우리 같으면 30분이면 족할 거리를 버스 기사는 속도제한 표지판 그대로 지켜가며 꼬박 한 시간을 달렸습니다. 아내는 물질적으로만 잘 사는 게 일등국가, 일등국민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는 듯했습니다.
비행기를 내려서도 두어 시간 서너 차례 차를 갈아타고 가다보니 숙소인 슈젠지 온천 마을 여관에 도착한 시각은 딱 정해진 체크인 타임 오후 3시였습니다. 지배인쯤으로 보이는 반백의 여성이 아드님 연락을 받았다며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차를 대접하고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는 여관 내력도 설명했습니다. 또 남녀의 이용이 시간에 따라 바뀐다는 실내 온천탕, 누구든 아무 때나 이용할 수 있다는 노천탕과 가족탕 이용 요령을 알려주고 예약된 방 ‘가즈미 7호실(霞七)’로 안내했습니다.
마을 구경도 할 겸 간식도 할 겸 여관을 나섰다가 막 라면가게를 찾아들어갔을 때였습니다. TV에서 쓰나미(津波)로 도시가 물에 잠기는, 아니 도시 전체가 물에 떠밀려나가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집도 자동차도 배도 함께 뒤섞여 구겨지고 찌그러지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저게 언제 어디서 일어난 얘기지요?” 물었더니, 주인아주머니가 “지금 막 센다이(仙台) 근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랍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세상에! 저런 일이 정말 일어나다니. 그것도 하필이면 센다이에서.’ ‘해운대’ 영화 장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더 놀라운 건 주인아주머니의 표정이었습니다. 엄청난 재난에도 마치 예전에 보던 만화를 다시 보듯 덤덤하기만 했습니다. 하긴 우리가 투숙한 여관 사람들은 아예 내색조차 하지 않았었습니다. 여행객을 맞는 숙박업소로서는 무엇보다 민감한 사안이고 전혀 모를 리도 없었을 텐데.
아들 내외가 아내의 환갑 선물로 마련해준 일본 여행이어서 가급적이면 일본 사람들이 사는 참모습을 보여주자는 게 제 욕심이었습니다. 큰 도회지 번화가라야 어느 나라엘 가든 똑같은 풍경. 생긴 모습이나 의식주는 비슷해도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의식(意識)을 가진 일본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찾아낸 게 이즈반도(伊豆半島) 깊숙이 자리한 온천 마을의 일본식 여관이었습니다.
아내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하마마쓰(浜松)의 한국어 선생님인 30여년 전 하숙생과 만나는 일입니다. 6년 전 용케도 우리 내외를 다시 찾아내 재회한 이후 일본 제자들의 한국어 실전훈련을 겸해 서울에 올 때마다 우리 내외와 만나곤 했습니다. 이젠 피붙이 언니동생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늘 마음속으로만 생각할 뿐 그 동생의 안부를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합니다. 꽤 오래 전부터 중한 병을 앓았기 때문입니다.
정작 본인의 언행이나 생활은 명랑활달하기 그지없습니다. 일본으로 떠나오기 직전 메일 말미에는 “그럼 기대하시라!! 떴다! 떴다! 비행기! 언니네 비행기~~♪” 하고 써놓아 아내와 배꼽을 쥐고 웃었습니다. 마침 시즈오카에서 세미나를 갖게 되는데 우리 일정과 꼭 겹친다며 시즈오카에서 만나자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의 하숙생은 센다이에 살고 있습니다. 다소 먼 거리여서 차마 시즈오카에 다녀가라는 말을 못했는데 아내 얼굴엔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즈반도는 강도 9.0의 대지진을 전혀 느낄 수도 없이 안전했지만 이젠 시즈오카로 나갈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여관에서 간단히 온천욕을 마치고 유카타를 맵시 있게 차려입은 여종업원이 올리는 저녁상을 받았지만 시선은 TV에 고정되었습니다. 태평양을 향한 연안 전체에 쓰나미 경보, 도처에 교통이 통제된다는 소식이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난리 통에…’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스루가만(駿河灣) 페리 터미널에 전화를 걸어 보았습니다. 역시나 쓰나미로 페리 운항은 불가하다는 답변. 당초엔 시즈오카에서 후지산(富士山) 아래 스루가만 북쪽 해안가를 철도로 돌아서 슈젠지에 들어갔다가 이즈반도 중서부 토이항(土肥港)으로 내려와 페리를 타고 시미즈항(淸水港)을 거쳐 시즈오카로 나가는 순환루트를 염두에 두고 이즈드림패스(伊豆 Dream Pass)까지 사 두었던 것인데 쓸모없게 돼 버렸습니다.
저녁 늦게 아들과 하마마쓰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했습니다. 여관 쪽에서 전화를 안 받아 크게 걱정했다며 야단들이었습니다. ‘잘 있으니 걱정 말라’ 해놓고서도 그날 밤은 TV의 대지진과 쓰나미 중계 소리, 마을 한복판을 흐르는 가쓰라가와(桂川) 물소리에 졸다 깨다 잠을 설치고 말았습니다.
TV에선 이튿날 아침까지도 미야기(宮城), 후쿠시마(福島), 니이가타(新瀉), 나가노(長野) 지역의 여진과 재난 소식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온 일본 섬이 들고일어난 것만 같았습니다. 그 난리 속에 집도 차도 가족도 다 잃은 아낙이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죽은 줄만 알았다가 다시 만난 남매는 부둥켜안은 채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아침 고요에 파묻힌 슈젠지 온천 마을을 떠났습니다. 미시마로 올라갔더니 시즈오카행 도카이도혼센은 해안가에 붙어서인지 불통이고, 그보다 조금 위쪽 신칸센(新幹線)만 다닌답니다. 육로가 뚫린 것이 확인되고 급히 갈 일도 없었지만 도리 없이 두 배의 요금을 내고 신칸센을 탔습니다. 화창하게 맑은 날씨, 차창 밖으로 햇볕에 반짝이는 눈 덮인 후지산 정상이 보였습니다. 발아래서 일어나는 엄청난 난리에도 후지산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시즈오카 역에 내리는 순간 거기 기적처럼 하마마쓰의 동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긴 포옹이 끝난 후 아내는 센다이의 소식을 물었습니다. 시즈오카로 나오는 동안 내내 센다이 하숙생의 안부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잘 있을 거예요. 집이 비교적 안전한 곳에 있으니까. 지금은 또 그곳 가까운 사람들끼리 통화하는 게 중요하니까 나중 확인되면 언니에게 알려줄게요.” 정말 안전한지, 그렇게 안심시키려고 한 말인지, 더 이상 묻질 않았습니다. 아니, 물을 수 없었습니다.
저녁엔 일본 사케를 마시고 싶다는 제 청을 받아들여 하마마쓰 동생의 착한 일본인 남편이 시즈오카 역 근처 이자카야(居酒屋)로 안내했습니다. 분위기가 좀 누그러져 아내가 처음 본 일본에 대한 느낌을 전했습니다. ‘정갈함, 친절함, 질서의식…’ 덧붙여 저도 새로이 본 일본에 대한 느낌을 말해보았습니다. ‘자연재해를 생로병사의 숙명처럼 담담히 받아들이는 자세, 대자연에 대한 순종…’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서 그가 동의하는 것인지, 부정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일본에서는 길거리나 차 안에서 사람들이 내는 요란한 소음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다중 공용의 찻간에서는 휴대전화도 하지 않는 게 기본적인 예의라고 합니다. 거친 입씨름이나 주먹다툼, 멱살잡이는 물론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측할 수 없는 대자연의 변덕에 시달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반면 우리네는 그렇게 사계절 아름답고 인간에게 자애롭기만 한 자연의 품에 안겨서도 걸핏하면 멱살 잡고 소리 지르고 욕하고… 사람들끼리의 아귀다툼에 시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품고 있는 자연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최악의 재난을 당한 일본 사람들의 심중을 헤아리고 싶어 시즈오카 호텔 방에서는 일부러 일본 신문을 주문해 살펴보았습니다. 지진과 쓰나미 다음엔 으레 화재, 건물 붕괴, 정전, 교통 두절, 통신 장애, 식량 부족, 부상과 오염으로 인한 질병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재해지역 어느 곳에서도 아비규환의 울부짖음이나 무질서의 아우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재난 속에서 오히려 가장 일본 사람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대지진 발생 사흘째 되던 날 시즈오카신문(靜岡新聞) 1면 제목은 ‘안부불명(安否不明) 수만인(數萬人)’, 2면 사설에는 ‘긴 투쟁은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재난 보도 한복판에 해외에서 보내온 위로와 격려를 전하는 기사도 보였습니다. 그 가운데 영국 인디펜던트 일요판(The Independent on Sunday)은 전면 가득 일장기의 원을 그리고, 그 속에 세로 두 줄로 “かんばれ, 日本(Don't give up, Japan). かんばれ, 東北(Don't give up, Tohoku)."이라고 쓰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겐 너무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그러나 블의의 대재앙을 맞은 일본 땅을 떠나면서 일본 사람들에게 제가 꼭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지금의 대재난을 이기고 다시 일어서는 날 지구촌 이웃들이 보내준 위로와 격려를 잊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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