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가려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두 개의 시집 판매대
서점엘 가보면 시집 판매대가 크게 두 개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성 시인들의 시집이 놓여 있는 곳과 여고생 여중생들의 발길을 붙들어 놓고 있는 시집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곳이 있다. 90년대 초부터 서점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이 시집들은 제목이 길고 만화 같은 삽화를 곁들이고 있으며 소녀적 취향에 맞는 디자인으로 청소년층의 눈길을 붙잡고 있다.
처음에 이 시집들은 '예반'이라든가 하는 외국 시인의 이름으로 독서시장에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문대남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문단에서 누구도 만나 본적이 없는 인물이 저자로 되어 있고 그 저자에게 인세가 지급된 흔적을 찾을 수 없어 특정출판사에서 만들어 내는 가공 인물의 책일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지금도 이런 의문이 다 가셔진 것은 아니지만 몇 년 동안 형성된 이런 시집 독자층의 영향으로 지금은 독자층에서 작가로 올라온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그 중 몇 권의 시집을 골라 함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대체로 비슷한 나이의 작가가 쓴,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비슷한 책 모양을 하고 있는 시집들이라서 손에 잡히는 대로 세 권의 시집을 골랐다.
텍스트로 고른 책은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원태연, 영운기획), '친구라 하기엔 너무 커버린 사랑'(한소라, 함께),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가시는 걸음걸음 왕소금 뿌리오리다'(양재선, 나라원) 등이다. 참고로 원태연의 시집은 92년 1월 20일 초판을 발행한 뒤 93년 4월 12일 중판을 발행했으며, 한소라 시집은 95년 1월 30일 초판 1쇄를 발행하여 1년 반이 지난 96년 7월 25일 초판 25쇄를 찍었고, 양재선 시집은 96년 1월 15일 첫판 1쇄를 발행하여 96년 4월 10일 세 달도 채 안 돼 4쇄를 찍었다. 이 나라의 시와 문학을 이끌어온 시인들의 이른바 본격문학이 몇 년이 지나도록 초판 1, 2천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현실과는 너무도 다른 독서현실의 실체를 못 본 체 외면하고 있는 동안 주 독자층인 학생들은 이미 이런 류의 시집만을 읽어온 지 꽤 오래 된 것이다.
시인가 감상의 편린인가
그럼 이런 시집에 실린 시들은 어떤 시인지 함께 읽어보기로 하자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짜증을 내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고백을 하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을 하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너를 보고 싶어
넌 누구니?
---원태연 '하루에도 몇 번씩' 전문
시인들은
사랑 중인 사람들의 감정을
더 아름답게 꾸며주기도 하지만
힘들여 잊고 살려는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쏟아내게도 한다
---원태연 '시인들은' 전문
윤종신의 노래
Do you love me를 들으면
항상 네게 향한 질문을 만든다
---한소라 'Do you love me?' 전문
그냥 만나서
커피 마시고
밥 먹고
술 마시고
집에 왔다
--양재선 '두 번째 만남' 앞 부분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가시는 걸음걸음 왕소금 뿌리오리다
흐흐흐.....
--양재선 '고이 보내줘?' 전문
이런 시들은 앞에서 공부한 바 있는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 시인가, 해체인가, 실험인가, 시 형식의 파괴와 재창조인가, 새로운 형식의 도전인가, 감상의 편린 또는 낙서인가?
원태연의 '하루에도 몇 번씩'은 단순반복의 단조로움과 생각의 얕음을 금방 느끼게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짜증과 사랑고백을 반복하는 사람과 같이 살 수 있을까 그게 사랑일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말미의 질문처리기법도 수사적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누구인지 몰라서 하는 질문은 아닐텐데 하는 생각과 함께 시 전체가 가볍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원태연의 '시인들은' 그리고 한소라의 'Do you love me?' 는 그저 잠시 떠오른 생각의 한 조각, 단상을 나열한 것이지 시라고 보기 어렵다. 양재선의 '두 번째 만남' '고이 보내 줘?' 는 메모지나 일기장에 적어 본 낙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패러디라기보다 가벼운 농담의 하나라고 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원태연 시집의 뒤에는 이런 시집을 기획하는 출판사의 의도가 이렇게 나와 있다,
"이제 우리의 시는 더 이상 언어의 암호놀이나 하는 일부 시인들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삶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날밤을 새워 언어의 예쁜 집을 짓고 다시 허물며 맑은 코피 한 방울로 마침표를 찍곤 하는 전국의 무명시인 여러분! ....엄정한 심사를 거쳐 채택된 원고는 '함께 사는 세상의 시'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아름다운 향기와 밝은 빛이 되는 시집이 탄생됩니다."
'시가 더 이상 암호놀이나 하는 일부 시인들의 전유물'이어서는 안 된다는 진단은 맞다. 그러나 낙서놀이여서도 안 된다. 그리고 소녀취향의 얄팍한 감상성만으로 학생들의 건강한 정서와 세계관을 오도하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이 시집들에는 학생들, 이 나라 십대 이십대 젊은이들의 삶과 고뇌와 어려움과 갈등과 그것을 딛고 일어서려는 노력 등 그 어떤 것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오직 사랑과 이별과 눈물만이 가득 넘칠 뿐이다. 그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느껴지는 깊은 고뇌와 슬픔이라기보다 공허한 슬픔과 내용 없는 아픔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들뿐이다. 시는 진정으로 함께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한 아름다운 향기와 밝은 빛이 되어야 한다. 지독한 개인주의와 그늘진 습기와 상업주의의 어두운 그늘에 이용당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최소한 시의 꼴을 갖추어야 한다
시는 시의 고유한 특징이 있다. 그저 산문을 행이나 나누어 놓은 것이 시는 아니다. 이건 시의 기본이다.
극장에 와서 담배를 태우고 신문을 보고 팝콘을 먹으며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데 언젠가 우리가 했던 농담이 생각이나 그냥 나와버렸다 '극장 구경은 내가 시켜 줄께 영화구경은 네가 시켜 줘' 하자 귀엽게 웃다가 툭 치면서 '동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네가 진 거구 뒷면이 나오면 내가 이긴 거다. 진 사람이 표 사기'
극장을 나와서 담배를 태우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알고 그런 건지 모르고 그런 건지 와 보니 니네 집이었다.
이런 글이 있다고 하자. 이건 시인가 산문인가. 굳이 대답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산문이기 때문이다. 자 그런데 이 글을 다음과 같이 바꾸었다고 해 보자.
극장에 와서
담배를 태우고
신문을 보고
팝콘을 먹으며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데
언젠가 우리가 했던 농담이 생각이나
그냥 나와버렸다
'극장 구경은 내가 시켜줄께
영화구경은 네가 시켜 줘' 하자
귀엽게 웃다가 툭 치면서
'동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네가 진거구
뒷면이 나오면 내가 이긴거다.
진사람이 표사기'
--원태연 '영화보러 갔다가' 중에서
이건 시인가 산문인가. 산문을 행만 바꾸었다고 시가 되는 게 아니다. 그 안에는 일정한 가락이 있어야 한다. 시적인 표현이 있어야 하고 시적인 정서가 배어 있어야 한다. 시라고 할 만한 요소들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산문시도 그 안에는 내적 질서가 있고 리듬이 있다. 그래서 시인 것이다.
우연히도 너랑 수업이 같은 금요일 5,6교시
저 멀리에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딴 아이들과 웃으며 앉아 있는 너
창 밖에서 부서지는 차가운 바람은
내 기억을 흩어놓으려 함인가,
아른거리는 너의 목소리
따뜻하기만 하던 그 미소
날카로운 추위는
기억 저편, 보이지 않는 추억마저
끌어내고 있다.
어색한 관계에서 상관없는 사이로
그렇게 변해버린 너와 나
우리란 단어에 취하기도 전에
남남으로 익숙해져 가려는 걸까
미움은 사랑이 넘쳐서 생겨나는
마음이라지만
너의 무관심은
아직도 네 옆에 서길 원하는 나를
너무도 비참히 밟고 있구나
--한소라 '한국 민주주의' 전문
이 시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어보았지만 끝내 이해되지 않는 곳이 있다. 이 시가 왜 '한국 민주주의'를 이야기한 시인지 모르겠다. 이 시는 남남이 되어 가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 아직도 너를 사랑하고 있는 나, 무관심한 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게 한국 민주주의와 어떻게 연관된다는 걸까. 거듭거듭 읽어도 그걸 이해할 열쇠언어를 우리는 끝내 찾을 수 없다. 이렇게 시의 제목을 붙인 이유를 시인 자신은 알고 있겠지만 그 의도가 시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시의 제목을 이해가 가지 않게 붙인 시도 많지만 아무렇게나 붙이고 있는 시들도 많다.
'네 속에 내가 머물러 있는 만큼 내가 있으며 네 속에 내가 지워진 거리만큼 내가 멀어지고'이런 제목은 시의 일부분인지 제목인지 구분이 잘 안가고, '드디어 헛소리를', '하여금', '태연태', '쪼다가 뭐야', '괜히?', '냅둬!', '나 미쳤나 봐' 이런 제목들은 시 제목을 아무렇게나 붙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주제의 천편일률성
이런 시집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은 하나같이 사랑과 이별이다. 원태연 시집을 보면 사랑이란 단어가 한 시집에 63번이나 나온다. 눈물은 30번, 이별은 19번, 아픔이 19번, 울음이 16번, 슬픔이 19번이나 등장한다. 눈물과 울음과 슬픔이 이별 때문에 생기는 비슷한 정서라는 것을 감안하면 슬픔을 표현하는 어휘가 한 시집에 65번이나 쓰이고 있는 것이다. 시집 전체가 슬픔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비가 배경이 되어 있는 시가 많다. '비까지 오다니', '초라한 이별', '비 내리는 날이면', '기로', '비 말고' 등이 비가 내리는 날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시속에 비가 소재로 쓰이고 있는 시도 '과천으로', '너>빈대떡', '밤의 그리움', '사랑하면 공휴일이 없을걸', '한 개피만 더', '아직도 모르시겠다면', '이별 후1', '오직 하나의 기억으로', '당신은 제게 있어', '내 속에 네가 머물러 있는 만큼~' 등 수없이 많다.
비가 내리는 날 사랑과 이별 때문에 눈물 흘리는 내용의 시가 주를 이룬다는 것인데 문제는 그런 눈물과 울음에 그럴만한 설득력 있는 이유가 느껴지지 않는다는데 있다. 슬픔이 슬픔으로 마음을 정화하며 맑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작위적인 슬픔 만들어 낸 눈물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는 것이다. 다음 시는 이런 사랑의 실체를 솔직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한순간 사랑이라 말하고
그 순간 후회하면서
버리고도 버림받은 듯 동정을 바라며
착각 속에 서글픔을 즐기며
만들어 낸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원태연 '우린 지금' 중에서
이들 사랑시의 내용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는 솔직한 고백이다.
지나친 이상형의 추구와 사랑의 비현실성
이들의 사랑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 되었길래 그토록 아픔을 주는지 우선 이들이 추구하는 사랑의 대상을 이들이 쓴 시를 통해 알아 보자.
돈 없을 때 내 표정을 읽고
전표 먼저 잡는 사람이 내는 거라며
잽싸게 전표 잡던 아이
............
연시 좋아 한다고 봄에 말한 것 같은데
가을에 바나나 까지 사들고 와 먹여 주던 아이
..........
그 사람 많은 토요일 오후
명동 골목골목을 몇 시간이나 걸어다녀도
짜증은커녕 시간이 너무 빠르단 생각을 들게 해 주던 아이
..........
술 취해 전화 거는 걸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술 취해 전화 걸어 헛소리 한 것 같은데
아침에 찾아와 해장국 사주며
실 수 한 거 없어 하고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이젠 안 그럴 거지 하던 아이
반찬은 잘 안 먹는 내 버릇을 알고 수저에 반찬 올려주는
그런데도 닭살은커녕 한 그릇 더 먹게 하던 아이
마른 안주 시키면 먹기 좋게 찢어 주던 아이
평소에는 김미숙 같은 분위기로
나이트나 가라오께 가면 김완선보다 날리던 아이
--원태연 '회상' 중에서
무식하고
못나고
많이 먹는 여자라도
내가 아니면 아무 일 못하고
내가 먹여 주지 않으면
굶고 사는 여자
그런 여자가 있으면
물심양면으로 사랑해 줄텐데
내일도 오늘처럼 따분할 것 같으면
잠 속에서 연애나 해야겠다
못생긴 강아지가 찡얼대고
담배는 꽁초도 없고
한숨만 나온다
사랑하는 라이터가 있으면
사랑하는 시가 있으면
사랑하는 여자가 있으면
도대체 얼마나 좋을까
--원태연 '그저께 낮 2시 27분 쯤' 중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었을 때
해님보다 먼저 반갑게 인사해
상쾌한 하루를 갖게 하는 남자
어느 지루한 오후,
불쑥 찾아 와서는
기차 타고 여행 가자는 남자
다른 남자 얘길 할 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듣고 있다가
며칠 후 만나서
너 때문에 방황했다고 말해주는 남자
집에 데려다 주는 길에
<난 널 사랑해>를 멋지게 불러주는 남자
처음 만난 날이나 백일말고도
나도 챙기지 못하는 날까지 다 찾아서
따뜻하게 말 한마디라도 해 주는 남자
심하게 다투고, 버스 타고 오면서
다시는 안 만날 거라 마음먹었는데
집 앞에서
택시 타고 와서 기다렸다며
<정말 미안해>라고 말해주는 남자
같이 길을 가는데
자꾸만 한 눈 팔 길래 심통난 척 했더니
<역시 ,네가 젤 이쁘다>해버려
미워할 수 없게 하는 남자
--한소라 '어디 이런 남자 없나요?" 전문
술 마실 때 항상 생각나는,
길을 가다 공중전화를 보면 목소리가 그리운,
일요일 아침 모닝커피를 함께 마시고픈,
용돈이 생기면 뭔가 해주고 싶은,
재미있는 얘길 들으면 꼭 들려주고 싶은,
하루 종일, 24시간 생각나는,
깜깜한 밤이면 저절로 보고 싶은,
면허증 땄다는 말에 미니카라도 사주고 싶은,
--한소라 '나 혹시 그앨 짝사랑하고 있는 건가?' 중에서
원태연의 시에서 찾는 여자는 '돈에 대해 부담주지 않는 여자', '일년 내내 남자만 생각해 주는 여자', '잘 참아 주고 따르는 여자', '잘못해도 이해하고 받아 주며 도리어 미안해하는 여자', '심청이 같은 여자', '작은 것까지도 마음을 쓰며 남자를 위해주는 여자', '얌전하고 예쁘면서도 놀 땐 잘 노는 여자'이다. 인용문에서 축소한 부분에는 인내심이 많으며, 내 걱정을 많이 하고, 한 번도 화내지 않으며, 속없이 귀엽고, 서구적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국적인 맛을 알며, 남자가 사랑을 고백할 때 망설여지거나 창피하지 않게 하는, 착한 여자를 원하고 있다.
'내가 아니면 아무 일 못하고 / 내가 먹여 주지 않으면 굶고 사는 여자' 이런 여자가 있으면 물심양면으로 사랑해 주겠다고 한다. 이렇게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여자를 실제로 원하고 있을까. 이렇게 수동적이며 생활능력이 없는 여자를 실제로 사랑할 수가 있을까. 그 시속의 화자는 담배 살 돈도 없는 남자이다. 담배 살 돈도 라이터 하나도 없으면서 어떻게 여자를 굶기지 않고 먹여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자를 답답할 때 찾는 노래나 담배 피울 때 필요한 라이터와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연애는 따분함을 메꾸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생각 자체부터가 문제다. 삶이 무엇이고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비현실적인 사람의 단상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고 있다.
한소라의 시에서 찾는 남자는 어떤가. '밤새도록 여자를 생각하고 새벽부터 나타나 기분 좋게 해 주는 남자', '지루할 때 동반자가 되어 주는 남자', '자기만 사랑해 주는 남자', '낭만적인 남자', '여자의 세세한 것까지 다 기억하고 신경 써 주는 자상한 남자', '이해하고 관용하며', '자기를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남자'이다. '술 마실 때 항상 생각나고', '길을 가다 그립고', '하루종일, 24시간 생각나는' 남자이다. '용돈이 생기면 뭔가 해 주고 싶고', '면허증 땄다는 말에 미니카라도 사 주고 싶은' 남자다.
시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들의 '소망적 사고'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한 상상과 꿈인 경우가 많다. 그걸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친 비현실적인 것들이라거나 너무 높은 이상형일 경우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그만큼 상처만 커진다는 것이다.
원태연의 시를 보면 삶에 대한 진지함이 없다. 가벼움만이 널려 있다. 올바른 세계관과 사회인식을 갖는 인물은 나오지 않고 세상일에 대한 무관심과 몰가치적인 인간이 있을 뿐이다. 주체적 적극적인 인간보다는 대부분 소극적 수동적인 인간이 주를 이룬다. 개성적인 인물은 보이지 않고 남자를 위해 존재하는 여자, 백치 같은 여자, 귀엽고 예쁘지만 화도 내서는 안 되는 몰개성적인 여자만을 찾는다. 여성 자신의 삶보다는 남성을 위해 존재하는 인물들이다. 이것은 지극히 남성중심의 이기적인 사랑이다. 그런 이기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한 사람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다 가버렸다고 눈물짓는 사랑이다.
여성자신의 삶보다는 남성을 위해 존재하는 수동적인 인물로서의 여성상을 보여주는 것은 한소라의 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역으로 지극히 여성중심의 이기적이며 이상적인 사랑만을 추구한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도 충분하다.
이들은 사랑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초컬릿보다 달콤하고
과일보다 상큼하며
담배보다 끊기 힘들다는
사고는 싶은데
파는 곳을 알 수 없는
아! 싸랑이여
--원태연 '지루한 행복'
커피 한 잔의 여유로움과
마쉬멜로우의 달콤함과
샤넬 No.5의 향기로움과
떡볶이 같은 매콤함과
샐러드의 상큼함과
옛친구 같은 편안함과
봄바람 같은 신선함의
작은 듯한
큰 행복이 아닌지
--한소라 '사랑이란 건'
사랑을 초컬릿이나 과일처럼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 물건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달콤하고 상큼한 과자나 과일 같은 물질이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정신적 가치보다 물질적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게 만든다. 사랑에 대한 환상과 기대치를 크게 갖는 나이라 하지만 그 기대치만 크고 현실감각이 없으면 그런 사랑은 당연히 이루어지기 어렵게 되어 있다. 환상적인 아름다움과 허황한 꿈으로서의 사랑은 사랑의 실체를 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달콤함과 향기로움과 매콤함과 상큼함과 편안함과 신선함을 추구하면서 쓰라림과 고통과 어려움과 힘듦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걸 간과하고 있다.
그토록 아프고 눈물 많았던 사랑을 잊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 그들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었던가를 돌이켜 생각해 보게 한다.
지우개로 깨끗이 지우듯
한때 유행했던 노래 녹음 테잎을
망설임 없이 지우듯
이젠 널 잊으련다
이 겨울 다 가기 전에
어딘가에 있을
나를 반겨 줄 사람을 찾아 떠나련다
네가 그랬듯이
뒤 한 번 돌아봄 없이...
--한소라 '안녕히...' 중에서
신세대의 어투 그 가벼움의 문제
'방금 밥 먹고 나왔는데도 / 좋아하는 피자 한 판을 다 먹었다. / 수다 떨면서 먹어서인지 뭔가 아직 허전해서 / 갓구운 바게뜨를 먹었다. / 체리주빌레 파인트를 또 시켜서 먹고 / 해즐럿도 먹고... / 그러나 왜일까, / 소화제를 몇 병이나 마셔야 할 정도로 / 배는 부르지만 / 채워지지 않는 허기짐이 여전한 이유는... // 가슴이 답답해서 / 터미네이터 2를 빌려보고 / 다이하드 1.2.도 다시 보고 / 잘 가지도 않는 노래방 혼자 찾아가서 / 음정박자 다 무시한 채 / 한 시간 내내 소리를 질렀다. / 그것도 부족해 / 오락실에서 이름도 모르는 오락을 / 기계가 부서질 정도로 두드리며 신나게 했는데도 .아직도 꽉 찬 답답함...'
--한소라 '네 사랑 고파하는 나' 중에서
사랑 때문에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힘들어하는 시적 화자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다. 이들은 이런 이십대다. 갈등과 고뇌를 해결하는 방식이 물질적이며 소비적인 젊은이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주변부 문화를 고민 없이 받아들여 이미 그 문화의 일부분이 되어 있고 갈등도 그 소비문화 속에서 해결의 방법을 찾는다. 물질적으로 여유 있고 풍요로운 이십대 도시의 젊은이들이 이런 류의 시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다.
원태연은 작가 소개 란에 스물 한 살이라는 것만 밝혀 놓고 있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한소라는 '1974년 10월 21일 처음으로 세상을 봤으며 벌써 대학교 2학년'이게 약력의 전부다. 어디서 태어났고 어느 학교를 다니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약력 학력이 중요하다는 건 아니다. 책의 저자로 독자에게 자기 자신을 당당히 밝히는 것은 자기 글에 대한 책임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양재선은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현재 영상 디자인을 공부하는 한 일보다 할 일이 더 많은 미대생입니다' 이렇게 나와 있다. 이들 모두 이십대인 것만을 확인할 수 있고 나머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간이 지나며 자기 자신과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책임 있는 얼굴로 독자들 앞에 나와 주어야 할 것이다.
어쨋든 이들은 이들만의 문화가 있고 살아가는 방식이 있으며 어투가 있다.
너가 있어서 날 찾는 사람이 없음에 슬퍼지고
너가 있어서 호출했는데 응답 안 했다고 욕먹고
너가 있어서 어딜 가나 그가 기다려지고
너가 있어서 친구들이 쉽게 귀찮게 하고
--양재선 '삐삐에게' 중에서
나도 불편할 정도로 하나 가득 넣고 다녔지
<비기 싫어! 당장 동전 지갑 안 사주나 봐라>
--원태연 '동전지갑' 중에서
'네가 있어서' 라고 하지 않고 '너가 있어서'라고 말한다. '보기 싫어'라고 하지 않고 '비기 싫어' 라고 한다.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쓴다. 그렇게 활자화한다. 이런 건 애교 섞인 신세대 어투라고 보아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W호텔에는 / 외제차 타고 온 사람과 / 껌 띠는 할머니가 / 오손도손 살고 있나 보다' 이런 시중에 나오는 '껌띠는'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잘못 쓴 말이라고 해야 하는가 신세대어투라고 보아야 하는가.
양재선의 시 '왜 그러니?'에는 '넌 왜 내게 말하지 않는 거니? / 힘든 모습 영력한데 왜 내게 / 털어놓지 못하는 거니?' 이런 구절이 있다. '역력'을 '영력'으로 인쇄한 책임이 저자에게 있는 건지 출판사에 있는 건지 구분이 안 간다. 이 책들이 초판이 아니라 이미 여러 판을 거듭 거듭 찍은 책들이기 때문이다. 원태연의 시 '현실' 중에는 '무거운 절망만이 짓누르고 / 늙은이의 피가레보다 더 비참한 액체에 / 나 자신을 맏겨버리고' 이런 구절이 있다. 한 행에 하나씩 맞춤법에 맞지 않게 쓴 곳이 있다. 책을 만든 출판사의 무책임함을 탓하기 전에 고쳐가며 읽도록 해야 할 의무까지 독자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인동초 (2005-01-08 01:49:42)
'시가 더 이상 암호놀이나 하는 일부 시인들의 전유물'이어서는 안 된다는 진단은 맞다. 그러나 낙서놀이여서도 안 된다.' 시가 낙서놀이여서도 안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그러나 그 같은 시들이 유행하게 된것은 너무나 어렵게만 쓰는 기존시인님들에게도 책임이 있지않을까요? 물론 선생님의 시는 제외입니다만은...
풀꽃향
---' 시는 진정으로 함께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한 아름다운 향기와 밝은 빛이 되어야 한다. 지독한 개인주의와 그늘진 습기와 상업주의의 어두운 그늘에 이용당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여기와 보니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 지를 알겠습니다. 저도 때때로 감상적인 면이 넘쳐서 가벼운 글들을 많이 썼었는데 이렇게 명확한 답을 주시니 읽고 또 읽으며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산문을 쪼갠 것이 시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지만 읽어보기 쉬운 면이 있어서 그래봤었는 데 그러면 습관이 되리라 걱정도 됩니다.
공부 잘 하고 갑니다.
지니 (2005-01-26 10:52:58)
세계관도 없고 아무런 의식도 없는 시들...
시는 향기와 빛이 되어야한다는...말씀에 공감합니다.
시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네요.
언젠가 신경림 선생님께서도 지적하셨지요.
소위 베스트 세러라며 잘 팔려나가는 쓰레기 같은 시집이야기를 하시며
목소리를 높이셨습니다.
ㅁ야수ㅁ (2005-06-24 15:26:52)
저도 시가 더 이상 암호놀이나 하는
일부 시인들의 전유물이어서는 안 되고,
낙서놀이여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제의 천편일률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이 시인이기 위해 다양한 주제의 글을 쓰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여러 시를 썼는데
그 표현들이 천편일률적이라면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언급하신 작가들의 글을 시(詩)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그냥 바라보고 썼을뿐
시안(詩眼)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첫댓글 그런 시를 읽는 거야, 시라고 믿는거야 그네들의 자유겠지요. 시인은 시를 쓰면 되고요.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도선생께서 이런 글을 다 쓰셨을까 싶어서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좋은 시를 읽으면 참 기쁜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