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6 호 |
가려워도 긁을 수 없는 곳, 영덕 |
정 지 창 (영남대 독문과 교수) |
영덕이 어딘지 아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은 그게 어디더라,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그래도 몇 사람은 ‘아, 대게로 유명한 동해안의 항구 도시’라고 대답하겠지만, 이것도 정확한 답은 아니다. 실제 대게의 집산지이자 영덕대게축제가 벌어지는 곳은 영덕이 아니라 그보다 조금 남쪽에 위치한 강구 항이기 때문이다. 대게는 큰 게가 아니라 다리가 대나무처럼 쭉쭉 뻗은 게라는 뜻임을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영덕은 서울에서 가장 가기 힘든 곳인지라, 서울에 사는 한 작가는 영덕을 가리켜 가려워서 긁으려 해도 팔이 잘 닿지 않는 등 한 복판과 같다고 했다. 영동고속도로에서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안동이나 영주까지 내려온 다음 동쪽으로 험준한 태백산맥을 넘어야 영덕에 닿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서울서 강릉까지 간 다음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것이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길도 단순하고 경치 구경으로 나을지도 모르겠다. |
원자력 산업··· 벙어리 냉가슴 앓듯 이대로 있어야 하나? |
지난 3월 11일 우리 일행은 대구에서 포항을 거쳐 7번 국도를 타고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영덕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강구에서 해맞이공원으로 이어지는 블루 로드라는 해안 도보 산책길을 꽃샘바람이 맵찬 가운데서도 걷고 있는 수십 명의 여행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해맞이공원에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박혜령 씨와 영덕 주민들을 만나 인사를 나눈 다음 우리는 경치 구경도 접어둔 채 원전 건설예정지를 둘러보기 위해 길을 서둘렀다. 초등학교 6학년짜리 딸을 둔 박 씨는 17년째 영덕에서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짓고 있는 가정주부인데, 원전반대운동에 나섰다가 등을 떠밀려 이 지역의 녹색당 총선 후보로까지 추대되었다. 몇 개의 마을을 지나 우리는 약 1백만 평 규모로 건설된다는 원전 예정지에 도착했다. 전망 좋은 언덕배기에 올망졸망 펜션과 카페가 들어찬 마을 뒤편 태백산맥 쪽으로는 채석장이 보인다. 수백억을 들여 채석장을 개발한 업자는 이곳 일대가 원전 부지로 수용될 경우, 앞으로의 예상 수익금까지 합산하여 약 천3백억 원을 보상금으로 챙길 것이라는 소문이다. 그러니 그가 지역발전을 내세워 원전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3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원전을 건설하면서 주민들의 의견을 직접 물어보지 않고 비밀작전을 수행하듯이 슬그머니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다음, 정부는 원전을 폐기하거나 건설 계획을 축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일본을 제칠 수 있는 기회는 이때’라면서 원자력 산업을 육성하여 해외에 수출한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 그러더니 아니나 다를까, 금년 초 경상북도는 경주~포항~영덕~울진을 잇는 동해안에 2028년까지 13조원이 넘는 돈을 들여 원자력복합단지(클러스터)를 만들어 원자력 수출 전진기지로 삼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국내 원전의 절반이 집중돼 있고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까지 있어, 경북 동해안이 원자력 수출기지로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 추진 이유란다. 현재 국내에서 가동 중인 원자력발전소 21기 가운데 울진에 6기, 월성(경주시)에 4기 등 10기가 있는데 이곳에 추가로 6기를 더 만든다니, 만약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경북 동해안은 세계 최대의 원전밀집지역이 될 것이다 |
목에 걸린 가시처럼 꺼림칙한 원자력 |
그렇다면 영덕 일대는 제2의 후쿠시마가 될 가능성이 더 커지는 셈이다. 그렇게도 안전하다는 원전도 후쿠시마와 체르노빌, 스리마일 등에서 벌써 몇 차례나 대형 사고를 일으켰으니 앞으로 언제까지 무사고 안전 운행이 계속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10년 동안 무사고 운전을 한 모범운전자도 나이 들어 순발력과 집중력이 떨어지면 사고를 낼 가능성이 커진다. 그리고 사고는 나만 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지진이나 해일, 이상기후는 물론이고 미생물에서 철새까지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요인들이 끔찍한 사고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영덕에서 나는 일본 근해에서 잡은 방사능 오염 해산물들이 러시아를 거쳐 우리나라로 수입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잠시 충격을 받았으나 ‘그래, 돈벌이가 된다면 못할 일이 없는 세상이니까…’하고 체념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가 영덕을 다녀온 며칠 후, 부산의 기장에 있는 고리 원전에서 심각한 고장을 한 달 동안이나 숨겨왔다는 사실이 밝혀져 또다시 충격을 주고 있다. ‘그래, 원자력 산업의 속성이 원래 끝까지 잡아떼고 거짓말하고 숨기는 것이니까’하고 넘기기에는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꺼림칙하다. 이번 총선에서 핵발전소 폐기를 공약으로 내건 단 두 명의 후보가 나선 곳은 모두 원전 밀집지역인 경북 영덕과 부산 기장이다. 원전에서 멀리 떨어져 흥청망청 전기를 쓰는 사람들은 머나먼 영덕이나 기장에서 자식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들만큼 불안감과 분노를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녹색의 가치가 황금의 가치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 후쿠시마와 영덕, 기장 주민들의 고통과 절망과 분노에 공감할 수 있어야만 우리나라에도 독일처럼 녹색당이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원전확장 정책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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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정지창 |
· 영남대학교 독문과 교수 · 전 민예총대구지회장 · 저서 : <서사극 마당극 민족극>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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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녹색의 가치가 황금의 가치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자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일요일 블루 로드 트래킹 했습니다. 빗속이라 초반에 접어야 했지만 빗속 블루 빛 바다가 환상이었습니다.
개발 보다는 보존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것 같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