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 칼럼] 현대 영화사에 남을 '플라워 킬링 문'
백인 자본가들이 벌인 인디언 연쇄 살인극의 음모
무법과 폭력, 재산 증식 위한 살인도 비즈니스일 뿐
1920년대 광기의 자본주의, 현재와 미래엔 다를까?
11월 비수기 극장가에 나온 뜻밖의, 예기치 못했던 대작 ‘플라워 킬링 문’은 향후 저주받은 걸작이 될 공산이 커 보인다. 러닝타임이 206분이다. 3시간 26분짜리 영화다. 1980년에 개봉됐던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천국의 문’이 219분이었다. ‘천국의 문’을 만든 유나이티드 아티스트(UA)는 이 영화 한 편으로 회사 문을 닫았다. ‘플라워 킬링 문’에 제작비를 댄 애플TV가 그럴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다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미국 근현대사의 흑역사를 파헤친 작품의 경우 평가와 상관없이 대중 관객들의 올바른 지지를 얻고 흥행 수익을 올리기까지는 늘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적 사건)가 다 그렇다. ‘플라워 킬링 문’은 노장 마틴 스코세이지의 작품답게 미국의 역사를 새로 쓴 작품이다. 이 영화는 현대 영화사에 남을 작품이 될 것이다.
1920년대 미국 자본주의가 벌인 인디언 연쇄 살인극
국내 개봉 제목 ‘플라워 킬링 문’은 원제인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Killers of the Flower Moon)’을 개작한 것이다. 제목을 바꾸면서 오히려 의미를 뭉개버려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플라워 문’은 아메이칸 인디언인 오세이지족 언어로 5월을 의미하는 모양이다. 5월의 꽃이 만월의 달처럼 흐드러지거나 5월의 달이 만개하는 꽃처럼 풍요롭거나 해서 그렇게 붙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원제를 직역하면 ‘플라워 문의 살인자들’이고 이건 곧 ‘5월의 살인자들’이라는 얘기인데 여기서 플라워 문은 아메리칸 인디언들, 특히 오세이지족을 지칭하는 바, 그렇다면 영화 제목의 원 뜻은 ‘오세이지족 연쇄 살인사건’이라는 뜻이 된다. 작품 이름을 개작하려면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하는 게 나을 뻔했다. 아니면 ‘내일을 향해 쏴라’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처럼 창의적인 제목을 붙이는 것이 낫다. 영화가 갖고 있는 정치적인 의미를 낮추고 탈색시키려 했던 의도였을까. 국내 배급사가 그만큼 정치(精緻)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메리칸 인디언 부족 중 하나인 오세이지족은 오클라호마 인디언 레저베이션(인디언 보호구역), 당시에는 인디언 준주(準州, Indian Territory)에 살았던 부족이다. 미국 근현대사에 있어 인디언의 역사는 참혹과 비극 그 자체이며 대체로 학살극이다. 우리가 즐겨 봤던 존 웨인의 이른바 ‘역마차 서부극’은 아파치와 코만치, 나바호 족들에 대한 살인극이자 인종차별 영화였다. 그들과 같은 운명은 아니었더라도 이번 영화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체로키, 크리크, 촉토, 세미놀, 치카소 같은 5개 부족의 경우는 백인사회의 하부 구조에 들어가 계급적으로 순종하며 동화된 케이스이다.
오세이지족은 원래 미시시피 지역에 살았으나 미 정부에 의한 강제 이주 절차에 따라 미주리와 캔사스를 거쳐 그 밑인 중남부 오클라호마 주에 살게 된 부족들이다. 특이한 것은 다른 부족과 달리 이들은 오클라호마의 땅을 자신들의 돈으로 매입해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땅을 가진 자들이라면 그 땅에 소속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당연한 바, 오세이지족은 자신의 오클라호마 땅에서 석유가 터져 나온 것이 행운이 된 동시에 재앙이 됐던 사람들이다.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은 행운보다 재앙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바로 그 재앙을 부른 백인들의 음모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는 내용의 작품이다.
백인 자본가들의 무법과 폭력이 횡행하던 시절
이 영화의 배경, 사건이 벌어지는 정확한 시기는 1918년에서 1924년 사이이다. 이때 벌어지는 살인극의 얘기를 다룬다. 1918년을 시작점으로 삼는 이유는 주인공 어니스트 버크하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전쟁에서 돌아오는 것부터 보여주기 때문이다. 1918년은 1차 대전이 끝난 해이다. 1924년을 콕 집어서 지칭하는 것 역시 영화 속에 캘빈 쿨리지 미 30대 대통령의 모습이 나오기 때문이다. 쿨리지가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 바로 이때이다. 동시에 미국사에서 가장 악명이 높았던 존 에드거 후버Jr.가 최연소 FBI 국장이 된 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모든 살인 사건의 뒤를 쫓는 토마스 브루스 화이트 시니어(제시 플래먼스)는 텍사스 레인저 출신의 FBI 요원으로 나온다. 미국 FBI는 이때 비로소 전국 조직으로서의 시스템과 기능성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토마스는 자신들의 수사가 후버의 명령 때문이라고 말한다.
1920년대라면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마디로 흥청망청의, 광기의 자본주의가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돈이 넘쳐났다. 세기말적 사고도 풍미했다. 다다이즘이 확산됐던 때이다. 스콧 핏체럴드가 창조한 ‘위대한 개츠비’처럼 매일매일을 초호화판 파티와 함께 알코올과 약물로 일상을 보내던 시기이다. 계급의 양극화는 극단으로 치닫고 백인 자본가들에 의한 무법과, 집단 린치에 가까운 폭력이 버젓이 횡행하던 때였다.
1920년대 미국의 극단적 자본가들의 관심은 땅과 철도였다. 1차적으로는 텍사스의 거대한 농장에서 방목하던 소떼, 그 육식의 고기들을 미국 동부로 나르기 위해서였다. 유통망=철도망이 필요했고 그걸 깔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했다. 1920년대 미국의 ‘미친 자본주의’를 이루는 네 가지 요소는 토지/노동력/철강/자본이었다. 토지는 연방정부가 대 주고 최저임금의 노동력은 아메리칸 인디언이나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흑인들, 동부로 끊임없이 밀려들어 오는 이민자들이 원천이 됐다. 철강은 카네기 같은 자수성가형 인물,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노동자의 정체성을 비웃고 깔아뭉갠 카네기 같은 자본가(카네기의 노조 탄압사는 가히 역사적이다), 돈은 JP 모건 같은 금융가가 댔다. 연방정부가 철도를 깔고 자본에 허덕이면 자본가들이 국채를 사들이고 그걸 두 배, 세 배의 가격으로 되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기던 때가 바로 이때이다. 미국의 재벌 가문들 상당수가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자본은 곧 신, 재산 증식 위한 살인도 그저 비즈니스일 뿐
영화 초입부에 주인공 어니스트 버크하트가 삼촌인 빌 헤일(로버트 드 니로)의 거대한 소 목장에 들어서는 모습을 부감 쇼트로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빌 헤일은 목장주이다. 빌 헤일은 자신의 주변 수하들을 이용해 오세이지족의 땅과 부를 가로챌 계획을 세운다. 어니스트는 좋은 먹잇감이다. 그가 홍인(紅人)도 마다하지 않는다면 오세이지 여인과 결혼시킬 생각이다. 순진한 조카 어니스트는 곧 빌 헤일의 장기 말이 돼 조금씩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니스트는 몰리 카일리(릴리 글래드스톤)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게 되는데 현명하고 우아한 인디언 여자 몰리는 그가 ‘사기꾼 코요테’인 것을 알면서도 잘생긴 남자라는 이유로, 또 어니스트가 어느 면에서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와 결혼을 한다.
몰리에게는 세 자매가 있는데 언니인 아나, 그리고 두 동생 리타와 미니가 있다. 엄마 리지는 몸이 아프다. 이들 다섯 모녀는 엄청난 땅과 현금을 지니고 있다. 어니스트를 앞세운 빌 헤일이 원하는 것은 이들 여자가문의 돈이다. 인디언 여자가 죽으면 그녀의 배우자에게 재산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돈을 크게 먹어야 한다. 일가족의 돈을 한 사람에게 몰아야 한다. 엄마 리지는 곧 죽을 것이다. 막내 미니는 이유 없이 아프다.
도시 여기저기에서 이런저런 오세이지 인디언 사람들이 술과 약으로 죽어 가는데 그게 이상하게도 자연사처럼 보이지 않는다. 미니도 그 일환으로 보인다. 결국 미니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언니 아나는 총에 맞아 사망하며, 미니의 남편이었다가 나중에 리타의 남편이 되는(자신의 처형과 재혼한 셈) 빌 스미스는 새 아내 리타와 함께 누군가 설치한 폭탄으로 폭사한다. 몰리 카일리, 곧 몰리 버크하트는 심한 당뇨를 앓고 있고 구하기 힘든 인슐린으로 연명하고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 인슐린에도 뭔가 섞이고 있음이 감지된다. 몰리가(家)를 위시해서 오클라호마에 살고 있는 오세이지족, 석유로 떼돈을 번 인디언들에게 이상한 의문사가 바이러스처럼 번지기 시작한다. FBI의 후버 국장은 쿨리지 대통령의 명령으로 수사에 착수한다.
주인공은 사랑하는 아내를 죽여서라도 재산을 가로채야 한다는 악당 자본가인 삼촌의 꼬드김과 가스라이팅에 넘어간다. 그는 처의 일가를 죽이는 살인극에 동조하면서 그들을 죽이면서도 슬퍼하고, 슬퍼하면서도 음모에 휘말리는 우유부단함을 보인다. 역사에는 이런 인간들이 많다. 이해는 하지만 용서할 수 없고, 때론 용서는 돼도 이해는 절대 안 되는 인물들이다. 용서는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인간형이 낫다. 어니스트 버크하트은 용서받을 수 없다. 악당 자본가 빌 헤일은 더욱 그렇다. 빌 헤일 같은 인간들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본의 시스템이 워낙 숭고하고 공고한 것이라 믿는다. 이들은 자본이 곧 선과 같은 것이라 믿는다. 그들 자본가는, 자신이 자본을 증식하는 행위에는 그 어떤 부도덕함이란 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건 그냥 비즈니스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때문에 자신이 벌이는 인간 이하의 살인극조차 종종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자본주의는 바로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미국은 바로 그런 나라이다. 탐욕과 폭력으로 세워진 나라.
1920년대 광기의 자본주의, 현재와 미래에는 다를까?
마틴 스코세이지는 1920년대 배경의 영화를 통해 2023년 현재의 미국, 트럼프라는 광기의 시대를 거친 지금의 미국을 얘기하려 한다. 금광과 석유라는 옛날의 골드러시, 그 광기의 자본주의 시대나 코인과 주식, 코스피 지수에 휘둘리는 혼돈의 현대 자본주의 시대나 사실 그리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영화는 늘 과거에서 이야기 거리를 찾는다. 과거는 미래이고 미래는 늘 과거이다. ‘플라워 킬링 문’은 바로 그런 얘기를 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이다.
‘플라워 킬링 문’은 마틴 스코세이지가 자신의 전작들, 곧 마피아 영화인 ‘굿 펠라스’와 이민사를 다룬 영화 ‘갱스 오브 뉴욕’ 그리고 금융가 뒷얘기를 그린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를 뒤섞어 아예 새 상품으로 내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시네필들이라면 그 혼합과 창조의 요소들을 잘 찾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