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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2월16일(토요일) 강화나들길 제 15코스(고려궁 성곽길) 탐방일정
탐방지 : 강화나들길 제 15코스(고려궁 성곽길)
[강화나들길 제 15코스(고려궁 성곽길)
고려궁 남문을 출발하여 가뿐 숨을 몰아 쉴 때쯤 남장대에 이르면 시야가 360도 열리며 마치 하늘을 나는 새가 아래를 조망하 듯 강화읍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고려가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줄기차게 항전했던 39년 간의 궁궐과 관아, 민가 등을 에워싸고 있었던 강화산성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며 남문인 안파루(晏波樓), 서문인 첨화루(瞻華樓), 북문인 진송루(鎭松樓), 동문인 망한루(望漢樓) 등 4개의 문을 차례로 만나는 코스다. 오를 때는 하늘과 맞닿은 산성길 따라 고려시대로, 벗어나면 조선시대로, 다시 오를 때는 고려시대로, 송림이 뿜어내는 향기에 머리에서부터 폐 깊숙이까지 상쾌함도 느끼며 걷는 고려와 조선이 섞여 있는 길이다.
산성길 고갯마루를 넘으며 시름 하나 벗어놓고, 한 구비 돌아서며 마음 하나 비우며 걷는 장엄하고 도도한 길이다. 황금색으로 익어가는 조산평야의 반듯한 논과 멀리 보이는 마을이 더할 수 없이 평화로운 한 폭의 풍경화다. 스케치북에 누구나 똑같이 그릴 수밖에 없는 전형적인 강화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비나 눈이 온 뒤에는 미끄러울 수도 있다. 특히 겨울철에는 바람도 불고 미끄러워 옷차림과 스틱 등 장비를 잘 갖추어야 한다.]
탐방코스 :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1.0km)~강화산성 남문~(1.6km)~남장대~(1.6km)~국화저수지~(1.7km)~강화산성 서문~(1.5km)~강화산성 북문~(0.7km)~고려궁지 매표소~(128m)~고려궁지 외규장각~(128m)~고려궁지 매표소~(0.4km)~대한성공회 강화성당~(348m)~용흥궁~(513m)~강화산성 동문~(755m)~견자산 현충탑~(732m)~강화산성 남문~(2.9km)~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1.0km)~현대아파트 버스 정류장] (약 15km)
탐방일 : 2023년 12월 16일(토요일)
날씨 : 구름이 낀 날씨 [강화군 강화읍 : 최저기온 영하 10도C, 최고기온 영상 2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5시간5분 소요)
06:20~06:40 구산역에서 6호선 지하철을 타고 합정역으로 가서 합정역 6번 출구로 나옴 [20분 소요]
06:40~07:00 합정역 버스 정류장에서 강화터미널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3000번 버스 승차 대기
07:00~08:48 3000번 버스를 타고 합정역 버스 정류장에서 강화터미널 버스정류장으로 이동 [1시간 48분, 37개 정류장 이동]
08:48~08:50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까지 도보로 이동 [2분, 100m 이동]
08:50~09:05 인천 강화군 강화읍 중앙로 43 번지에 있는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에서 탐방 출발하여 인천 강화군 강화읍 남산리에 있는 강화산성 남문인 안파루(晏波樓)로 이동
[남문의 남쪽 방향(성의 바깥쪽)에는 문의 이름인 강도남문(江都南門)을 적은 현판이, 북쪽 방향(성의 안쪽)에는 성루의 이름인 안파루(晏波樓)가 적혀 있는 현판이 걸려 있다. 두 현판의 글씨는 모두 1975년 남문 복원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이 쓴 것이다. 안파(晏波)는 파도를 편안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강화산성(江華山城)
강화도의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 이래의 성곽으로 강화읍과 내가면·하점면 일대에 걸쳐 있으며, 성문 4개와 첨화루(瞻華樓)·안파루(晏波樓)·진송루(鎭松樓)의 문루, 암문(暗門)·수문(水門)·장대(將臺) 등의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다.
고려말 몽고군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유린되자 1232년(고려(高麗) 고종(高宗)19) 6월 대몽항쟁을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왕궁과 도성시설이 완비된 것은 아니고, 1234년 1월부터 도성과 궁궐 및 백사 공해(百司公해)를 송도(松都)의 것과 방불하게 만든 것이다. 이때의 성은 내성(內城)·중성(中城)·외성(外城)이 있었는데, 내성은 주위 3,478척의 규모로 토축이었고, 중성은 1250년에 축성된 것으로 둘레가 2,960여간(間)으로 8개의 성문이 모두 개경(開京)의 도성(都城) 성문의 이름을 본뜬 것이다. 즉, 동쪽에 선인문(宣仁門)·서쪽에 선기문(宣祺門)·남쪽에 태안문(泰安門)·북쪽에 북창문(北昌門)을 두고, 그사이 방향인 동남에 장패문(長覇門)·서남에 광덕문(光德門)·서북에 선의문(宣義門)·동북에 창희문(彰熙門)을 둔 것이 그것이다. 외성은 중성을 보다 외곽에서 수비하기 위하여 해안의 배가 건너는 곳들을 차단하기 위한 대규모의 것으로, 1233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1235년 12월에 각 주현(州縣)의 일품군(一品軍)을 징발하여 강화의 동쪽 해협을 따라 3만 7,070척에 이르는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실시하였다. 이 외성도 토성으로 지었으며, 몽고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방어 시설이자 고려의 강도(江都)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보급 물자를 안전하게 지원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270(원종(元宗)11)년 몽고와의 강화조건으로 내성과 외성까지도 모두 헐게 하였다. 조선왕조의 초기에 읍성을 다시 축성하면서 고려의 도성이던 강화성은 변형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군(淸軍)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고, 1677년(숙종(肅宗)3) 강화유수(江華留守) 허질(許秩)이 대폭 개축하여 고려 시대의 규모로 넓혀 석축하였다. 1709년(숙종(肅宗)35) 강화유수 박권(朴權)이 중수하였고,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인 보수공사가 있었다. 이때 체성(體城)은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여장(女墻)도 설치하였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성내에는 남장대(南將臺)·북장대(北將臺)·서장대(西將臺)가 있었고 수문이 두 개 있었다.
남문은 안파루(晏波樓)·북문은 진송루(鎭松樓)·서문은 첨화루(瞻華樓)·동문은 망한루(望漢樓)라 하였으나, 동쪽 성벽은 시가지화되었고, 성벽은 남북쪽의 산자락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강화산성 복원사
북문 진송루 누각은 병화로 헐리고 석축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에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서문 첨화루는 숙종 38년(1711)에 당시 유수 민진원에 의해 복원되었는데 1955년 5월 많은 비로 인해 붕괴 되었던 것을 1975년 문루와 성곽의 일부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문 안파루는 서문과 같은 시기에 복원되었다. 그러나 동문 망한루는 2004년에야 복원을 시작하여 2004년 8월에야 마쳤다.]
09:05~09:08 사진촬영
09:08~09:33 인천 강화군 강화읍 남산리 439-73 번지에 있는 강화산성 남장대(강화산성의 3개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로 이동
[남산(222.5m) 정상에 공작새처럼 솟은 화려한 2층 한옥이 남장대南將臺다. 누각 자체는 병인양요(1866) 이후 허물어졌던 것을 2010년에 새롭게 복원한 것이다. 사방으로 시야가 트인 천혜의 전망대이자 장군의 지휘소다. 조망도 장군급이다. 376m의 김포 문수산이 저렇게 높았나 싶을 정도로 거대한 장벽을 이루고, 북쪽으로는 개성 땅이 드러난다. 북한이 이토록 가깝다는 것에 놀란다. 날씨만 좋으면 바다 뒤로 북한의 송악산도 한 눈에 들어온다. 읍내 최고봉 남산 아래로는 강화읍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강화읍 뒤편으론 바다가 보인다. 북서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국화저수지 한쪽에는 낚시꾼들을 위한 방갈로도 설치되어 있다.]
09:33~09:40 사진촬영 후 휴식
09:40~10:05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에 있는 국화저수지로 이동
[1978년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조성된 인공 저수지다. 현재는 저수지 둘레에 총 3.6km에 달하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10:05~10:10 사진촬영
10:10~10:35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883-1 번지에 있는 강화산성 서문인 첨화루(瞻華樓)로 이동
[서문은 숙종 37년(1711) 당시 강화유수 민원진이 세우고, '아름다움을 본다'라는 뜻의 첨화루(瞻華樓)라는 현판도 직접 썼다. 그 후 낡아서 무너진 것을 정조 20년(1796)에 유수 김이익이 다시 고쳐 세웠으며, 지금의 모습은 1977년에 수리한 것이다.]
[서문 앞 공터에는 연무당 옛터라 세겨진 비석이 있다. 건물의 초석도 남지 않은 이곳에서 한국사를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연무당터는 강화도 조약이 최종 조인된 근대사의 비극을 담고 있는 장소다. 연무당은 원래 강화 진무영 군사들이 훈련하던 곳으로 농협 강화군지부 자리에 있었으나 고종 7년(1870) 서문에 당을 세우고 그 전면에 훈련장을 만들면서 지금의 자리로 오게 되었다. 하지만 1876년 이곳에서 강화도 조약이 최종 조인되면서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한복판으로 요동치게 되었다.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기점으로 인천, 부산, 원산을 연이어 개항했고, 다른 서양 열강 국가들과의 굴욕적인 조약과 외세 수탈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런 중요한 장소가 서울 한복판도 아니고 강화의 외딴 장소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싶다.]
[연무대터를 지나 성벽을 따라가다 보면 자그마한 개천인 동락천을 만나게 되는데 성벽은 도중에 끊기지 않고 위로 수문을 내었다. 석수문이라 부르는 이곳부터 성벽은 산자락을 따라 아찔한 경사가 이어진다.
강화 석수문(江華 石水門)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수문이다.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다.
강화읍의 중심부를 흐르는 동락천 위에 설치하였던 수문이다. 조선 숙종 37년(1711)에 강화산성의 내성을 쌓을 때 연결하여 처음 설치하였으나, 광무 4년(1900)에 갑곶 나루터의 통로로 삼기 위하여 개천 어구에 옮겼다. 그 뒤 1977년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길이는 18.2m이고 높이는 2.7m, 너비는 4.7m이다. 무지개 모양의 수문이 3개이며, 화강암을 다듬어 쌓았다.]
10:35~10:40 첨화루(瞻華樓)와 연무당 옛터와 석수문을 사진촬영
10:40~11:02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83-2 번지에 있는 강화산성 북문인 진송루(鎭松樓)으로 이동
[북문은 본래 누각이 없었으나 조선 정조 7년(1783)에 강화 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우고 진송루(鎭松樓)라고 하였다. 그 뒤 북문은 전쟁으로 부서지고 석축만 남아 있었으나 1977년에 강화중요국방유적복원정화사업을 통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는 현판 글씨는 강화산성의 4대문 중 유일하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여 있다. 진송(鎭松)은 소나무를 지킨다는 뜻이라고 한다.]
11:02~11:05 사진촬영
11:05~11:15 인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번지에 있는 고려궁지 매표소로 이동
11:15~11:20 고려궁지 입장권 구입
11:20~11:40 [매표소~고려궁지~강화유수부 이방청~외규장각~강화유수부 동헌~매표소]의 동선으로 고려궁지를 탐방
[강화 고려궁지 (江華 高麗宮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江都) 시기(1232~1270년)에 사용하던 궁궐터다.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관청리)
종목 : 사적(1964년 06월 10일 지정)
역사적 변천
1232년(고종 19) 6월 강화에 궁궐을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현재 강화 고려궁지라고 부르는 곳이 정궁(正宮)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그러나 1270년(원종 11)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 강화 고려궁은 정궁의 지위를 잃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 자리에 건물과 외규장각(外奎章閣) 등이 건립되었다.
내용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피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해인 1232년(고종 19) 6월에 창건되었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최우(崔瑀)는 이령군(二領軍)을 동원하여 이 궁궐을 지었다고 하였다. 강화도에 국왕과 왕족, 관료와 백성들이 옮겨왔기 때문에 궁궐과 관부가 필연적으로 조성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 때 왕궁과 도성 시설을 모두 갖추지는 않고, 1234년 1월부터 송도(松都)의 것과 비슷하게 도성과 궁궐, 각 관청을 건립하였다.
강화도에는 정궁 이외에도 행궁(行宮)·이궁(離宮)·가궐(假闕) 등 많은 궁궐이 있었는데, 이곳 강화읍 관청리 부근은 정궁이 있었던 터로 추정된다.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궁궐을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松岳)이라 하였다. 궁의 정문 이름은 승평문(昇平門)이었고, 양측에 삼층루의 문이 두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廣化門)이 있었다. 강화 고려궁은 1270년(원종 11)에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할 때 모두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 1631년(인조 9)에 고려궁지에 행궁을 건립하여 국난시 이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강화유수부, 외규장각, 장녕전(萬寧殿), 만녕전(萬寧殿) 등을 세웠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거의 소실되었다. 현재 조선시대 관아 건물인 명위헌(明威軒), 이방청(吏房廳) 등과 복원된 외규장각이 남아 있다.
특징
현재 강화 고려궁지라는 이름으로 문화재 지정이 되어 있으나, 실제 고려 궁궐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고 조선시대 관아 건물 몇 채만이 잔존해 있으며 복원된 외규장각이 있을 뿐이다. 한편 강화 고려궁지의 위치와 범위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었고, 현재도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의의와 평가
비록 국난을 피하여 천도를 한 시기이기는 하지만 고려시대 정궁이 있던 자리로 의미가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관아 건물 등으로 사용되며 지방 통치에 이용된 장소이며, 정조가 추진했던 개혁의 일환이었던 외규장각이 건립된 곳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며 외침으로 인한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외규장각 도서
1782년 정조는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세웠다. 외규장각은 1776년 창덕궁에 설립된 규장각의 분소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고 병인양요로 불타 없어지기 전까지 1,007종 5,067책이 소장돼 있었다고 한다.
1866년 병인양요가 발생하여 프랑스 함대에 의해 강화 행궁과 외규장각 도서들이 불에 타 없어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프랑스 군대는 은궤, 어새 등과 함께 외규장각 도서 중 의궤류와 고문서들을 약탈해 갔다. 프랑스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는 지난 1975년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 씨가 베르사이유 별관 파손 창고에서 처음 발견, 세상에 알려졌으며, 1992년 7월 주불 한국대사관이 외규장각 도서반환을 요청하면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후 1993년 9월 서울에서 열린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미테랑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에서 '교환 기본원칙'이 합의됐고, 이때 한 권이 '반환'됐다.
그러나 한국 측은 무조건적인 반환을 주장하는 한편, 프랑스 정부 측은 외규장각 도서를 국내로 반환하는 대신에 국내에 소장 중인 비슷한 가치를 지닌 우리 문화재를 대신 프랑스에 내주는 '등가교환'을 내세워 협의를 했으나 약탈당한 문화재를 상호대여 형식으로 돌려받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우리 문화계의 반대로 합의가 무산됐다.
한편 2010년 11월 G20 정상회의에서 양국 대통령은 외규장각 도서를 5년 단위 갱신이 가능한 임대 형식으로 대여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이에 따라 296권이 모두 반환되었다.]
11:40~11:46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27번길 10 번지에 있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으로 이동
[대한성공회 강화성당(大韓聖公會 江華聖堂)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대한제국기에 건립된 한옥 형태의 대한성공회 성당. 성공회성당. 사적.
1981년 7월 15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1월 4일 사적으로 번경되었다.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코프(Corfe, C. J.)에 의하여 1900년(광무 4)에 건립되었다.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 코프가 초대 한국 주교로 영국에서 서품을 받음으로써 시작되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한 사람의 신자도 없었고, 한국인에게 처음 세례를 베푼 것은 주교 축성이 있은 지 7년 뒤인 1896년 6월 13일 강화에서였다.
대한성공회에서는 이러한 인연으로 강화에 제일 먼저 성당을 건립한 것인데, 대한성공회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게 되었고, 현존하는 한옥 교회건물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유럽의 바실리카(Basilica)양식과 동양의 불교사찰양식을 과감하게 조합시켜 건립하였다.
교회의 내부공간은 바실리카양식을 따랐고, 외관 및 외부공간은 불교사찰의 형태를 따랐다. 목재는 압록강에서 운반하여 사용하였으며,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수가 건축을 맡았다.
경사지의 대지를 축성하여 입구 계단, 외삼문ㆍ내삼문ㆍ성당ㆍ사제관을 동남향 종축으로 배치한 외부공간의 구성이 불교사찰의 구릉지가람(丘陵地伽藍)과 비슷하며, 성당 앞마당에는 큰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외삼문 솟을대문은 팔작지붕으로 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 칸에는 초대 사제(司祭)의 묘비가 서 있다. 내삼문은 평대문에 역시 팔작지붕이고, 서쪽 칸은 종각으로 쓰이고 있으며, 성당은 정면 4칸, 측면 10칸의 바실리카식 평면구성이다.
성당 내외부에는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순수한 한식 목조건축이면서도 교회기능에 충실한 내부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가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 역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성당건물이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성당
강화성당은 고요한(Charies Jone Corfe) 초대 주교가 1900년에 축성한 건물로 성베드로와 바우로 성당으로 명명되었다. 당시 건축공사는 궁궐 도편수가 주도하였고 이후 몇차례 보수가 있었으나 처음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성당터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로서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배의 형상을 따랐다. 성당 건물은 장방형(넓이 4칸, 길이 10칸) 중층구조로 전체적인 건축양식은 한국전통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배치와 내부구조는 서양식 바실리카 건축양식을 응용하여 조화의 아름다움과 토착정신을 드러나게 하였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1981년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로 처음 지정된 이래 강화군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되면서 인천지방유형 문화재로 변경되었다가 2001년 1월에 국가사적으로 변경 지정되었다.]
11:46~11:50 사진촬영
11:50~11:55 인천 강화군 강화읍 동문안길21번길 16-1 번지에 있는 용흥궁으로 이동
[용흥궁(龍興宮)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조선 후기 철종(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까지 살았던 집.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동문안길21번길 16-1 (용흥궁)
크기 : 1동 1,554㎡
조선시대 왕의 장자인 왕세자와 같이 정상적인 법통이 아닌 다른 방법이나 사정으로 인해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하였는데 이는 주역에서 유래된 말이다. 용흥궁(龍興宮)은 강화도령으로 불렸던 조선의 25대 왕 철종(哲宗)이 강화도에 은거하며 살았던 집을 후일 그가 왕위에 오르고 난 이후에 보수하여 단장하고 그 이름을 궁이라고 고쳐 부른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잠저로는 태조의 함흥 본궁과 개성 경덕궁, 인조의 저경궁과 어의궁, 영조의 창의궁 등이 있다. 대개 잠저는 왕위에 오른 뒤에 다시 짓는다. 용흥궁도 원래는 보잘 것 없는 초가였으나, 1853년 철종이 보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강화 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지금과 같은 집을 짓고 용흥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뒤 1903년(광무 7)에 청안군(淸安君) 이재순(李載純)이 중건하였다.
좁은 고샅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둔 이 궁의 건물은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낙선재(樂善齋)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만들어졌다. 세월이 흘러 비바람에 헐어진 것을 1974년에 보수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잠저구기비각 1동, 내전 l동, 외전 1동, 별전 1동 등이며,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집이다. 내전은 앞면 7칸, 측면 5칸이며 건평은 90㎡이다. 별전은 앞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형 집으로 건평이 95㎡이다. 비각은 정사각형으로 앞면과 측면이 각각 2.5m로 넓이가 약 6㎡이다.
내전의 오른쪽과 별전의 왼쪽에 각각 우물이 1개씩 있으나 사용할 수 없다. 별전에는 마루 앞으로 작은 정원이 있고, 별전 오른쪽에는 조금 더 큰 규모의 정원이 있었으나 잘 가꾸지 않아 화초가 전혀 없다. 별전 주변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으나, 거의 베어져 밑둥만 남아 있다.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용흥궁의 위치는 강화경찰서 왼쪽 담 옆길을 따라 70m 정도 서쪽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기와집이다.]
11:55~12:00 사진촬영
12:00~12:08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225-1 번지에 있는 강화산성 동문인 망한루(望漢樓)로 이동
[망한루는 강화산성의 4대문 중 가장 최근에 복원된 성문이다. 문화재 발굴조사를 거쳐 200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문의 바깥쪽에는 江都東門이란 현판이, 안쪽에는 望漢樓란 현판이 걸려 있다. 한양을 바라본다는 명칭처럼 육지에서 강화로 들어올 때 이문을 지나가야만 했다.]
12:08~12:10 사진촬영
12:10~12:23 견자산에 있는 현충탑으로 이동
[강화산성의 동문과 남문의 사이에 있는 나지막한 산이 견자산(60m)이다. 견자산 자락은 고려 무신 집권자 최우의 저택인 진양부가 있었다 전해지며 왕이 살던 궁궐보다 호화로웠다 전해진다. 지금 견자산에는 그런 자취를 찾을 길은 없었고, 6.25 전쟁 당시 전사했던 군경들을 기리기 위한 현충탑만 우뚝 서있다. 하지만 견자산에는 이 산의 명칭과 관련된 특별한 일화가 전해진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로 천도한 고종은 더 이상 전쟁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방치할 수 없기에 회담을 열게 되었다. 강화의 도심을 지키는 강화산성은 남산, 견자산, 북산을 따라 이어진 약 7km의 산성으로 수원화성과 거의 비슷한 규모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 차례의 협상 끝에 고종 대신 그의 아들 안경공 창을 몽골로 보내게 되었는데, 아들이 생각날 때마다 산에 올라가 북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의 행차는 이어지게 되었고, 백성들은 이 산의 명칭을 아들을 바라보는 산이라 하여 견자산(見子山)이라 불렀다 전해진다.]
12:23~12:25 사진촬영
12:25~12:37 인천 강화군 강화읍 남산리에 있는 강화산성 남문으로 원점회귀
12:37~13:20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강화대로154번길 12-21 번지에 있는 강화 기독교 역사기념관으로 이동
[강화 기독교 역사기념관은 사업비 77억 원을 투입해 강화읍 용정리 1086-7번지 일원에 연면적 1,877㎡, 지상2층 규모로 건립됐다.
개관식은 2022년03월21일 거행되었다.
전시관에는 △교산교회, 니콜라회당으로 시작된 강화 기독교의 전파 과정 △초기 선교사와 강화 기독교인의 삶 △기독교를 통한 만인이 평등한 교육·문화·의료체계 구축 △강화 기독교인의 3.1운동과 항일운동 △기독교 가치와 실천의 공간을 조성했다. 또한, △성재 이동휘(강화중앙교회) △ 송암 박두성(교동교회), △ 유봉진(길직교회) 등 기독교 인물들을 통해 기독교의 근대사적 가치와 오늘날의 시대정신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길에서 만난 기독문화유산] 강화도에 교회가 많은 이유?
기자명 : 유창선 기자
데일리굿뉴스 기사 입력일 : 2023.09.14.
강화도에만 210여 교회…복음화율 50%
100년 역사 기본, 복음의 토착화 성공사례
인천 강화도에는 유독 교회가 많다. 강화 읍내에만 어림 잡아 50곳이다. 강화도 전체로 보면 200곳이 넘는다. 육지에서는 보기 어려운 대한성공회 성당만 12개다. 교산교회(옛 교항교회)와 홍의교회, 강화중앙교회, 성공회 강화성당 등 100년 역사는 기본이다.
교회 수만큼 성도도 많다. 강화도 인구의 절반이 개신교인이다. 길에서 만난 사람 둘 중 하나는 크리스천이라는 얘기다. 목회데이터연구소의 자료를 보면 대한민국 개신교인 비율은 15%. 강화도 개신교인 비율이 3배 이상 높다.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이영훈)이 주최한 ‘근대 기독교 문화유산 답사’를 통해 강화도의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첫 방문지는 2022년3월 개관한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이사장 최훈철)이다. 강화대교 건너 오른쪽 둔덕 위에 세워진 이곳은 강화 기독교 역사순례길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면 지금은 사라지다시피 한 교회종이 중앙에 놓여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군수물자로 쇠붙이를 탈취해갈 때 교회 마루바닥 아래에 숨기면서까지 지켜낸 종이다. 함께 놓인 십자가 형태의 비석은 1899년 입국해 강화도 여성 선교에 앞장선 영국성공회 출신 로다 선교사를 기리며 지역주민들이 직접 새겼다.
이곳 강화도에 복음이 처음 전해진 것은 이보다 앞선 1893년이다. 영국성공회 워너 신부(한국명 왕란도)가 도성 관문인 진해루 밖 갑곶 나루터에 기도소를 세우고 고아를 돌보며 선교했다.
이때쯤 인천 제물포 내리교회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이승환이 고향인 강화로 돌아와 노모를 전도하면서 강화도에 복음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승환은 당시 제물포교회에 부임한 조지 존스(한국명 조원시) 선교사에게 어머니의 세례를 요청했으나 이 지역 양반 김상임이 서양 선교사의 입성을 막아 한밤에 배 위에서 존스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바로 ‘선상세례’다. 이후 전도인 이명숙과 전도부인 백헬렌이 강화 시루미로 파송돼 이승환의 집에서 첫 교회공동체를 만들었다.
역사관을 둘러보니 당시 강화도는 외국인 선교사의 입도가 불가능했다. 선상세례 건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교회를 박해하던 양반 김상임과 박능일이 신앙을 갖게 되면서 강화도 선교가 본격화됐다. 김상임은 이승환과 교항교회를 처음 세웠고, 홍의마을에 살던 박능일은 1896년 자신의 마을에 홍의교회를 개척했다. 키오스크를 활용하면 강화도 내 교회에 대한 정보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이곳 기념관에는 강화도 선교의 시작은 물론이고 특징, 발전과정, 인물 등을 실제 유물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특히 강화도의 기독교가 일제 강점기에 이은 한국전쟁의 참상 속에서도 의료와 교육 선교로 발전을 거듭한 과정도 자세하게 나와있다. 특히 교육에 힘썼던 선교사들은 갑곶니콜라회당을 비롯해 5개의 교육기관을 세우면서 다음세대를 길러냈다. 실제로 기독교대한감리회만 봐도 전쟁이 한창인 1951년 4만5,000여 명이던 교인이 10년 만에 10만명을 넘어설 정도로 성장했다.
강화도 기독교 역사를 둘러보다 보면 성재 이동휘, 조광원 신부, 종순일 목사 등 기독교 인물을 따로 만날 수 있다.
특히 종순일 목사는 홍의교회 출신으로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무자비한 종에 대한 비유’를 읽고, 채무자들을 모두 불러 빚을 탕감해준 일화로 유명하다. 이를 계기로 강화도의 복음화가 급속히 이뤄졌다. 기념관 이사장인 최훈철 목사도 종순일 목사의 후손이다.
최 목사는 “강화도 기독교의 역사가 단순히 옛날 이야기가 되지 않길 바란다”며 “이를 위해 전시 마지막을 기도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자리를 옮겨 찾아간 곳은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다. 1900년부터 120년 넘게 마을 언덕 위에 우뚝 서있다. 성당이지만 겉모양은 영락 없는 전통 한옥이다. 미리 알려주지 않았으면 지나쳤을 법하다.
성당이라는 이질감을 없애려 사찰처럼 외삼문과 내삼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심지어 내삼문에는 사찰의 범종을 연상시키는 전통 모양의 종도 걸렸다.
솟을대문에 팔작지붕 형태인 외삼문 현판에는 한자로 ‘성공회강화성당’이라고 씌여 묘한 이질감을 준다. 성당 입구에도 사찰의 대웅전처럼 ‘천주성전’을 한자로 적었다. 심지어 성당 뜰에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곳이라는 보리수가 심어져 있다. 전도를 위해 복음과 전통을 어우른 성공회 신부들의 노력이 엿보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입구가 사찰처럼 건물의 넓은 벽면 쪽이 아니라 좁은 쪽으로 나 있다. 예배 방식 때문이다. 아치 형태의 문은 영국에서 공수해왔다.
지붕도 다르다. 지붕 네 귀의 추녀 끝에 끼우는 토수는 ‘용두(용의 머리)’ 대신 성경 속 예수 그리스도나 베드로를 상징하는 ‘물고기’가 달렸다. 지붕 위 십자가도 끝부분이 꽃봉오리를 연상시킨다.
허은철 총신대학교 교수는 “당시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성당 내부 역시 복음과 전통의 조화가 엿보인다. 한옥의 느낌을 주지만 건축은 바실리카 양식을 따랐다. 바실리카는 ‘왕족’이라는 의미로 기독교가 공식화된 AD 312년 이후 기독교 의식을 치를 수 있는 교회건물로 사용됐다. 회중석과 지성소(제대)로 구분돼 있는 게 특징이다. 돌을 다룰 수 있는 석공이 없어 돌기둥 대신 나무로 기둥을 세웠다. 경복궁 중건을 맡았던 도편수가 지었고, 건축에 쓰인 나무는 백두산에서 가져왔다.
입구쪽 세례대와 안쪽 제대는 강화도 지역 화강암을 재료로 썼다. 세례대에는 ‘수기세심거악작선(修己洗心去惡作善)’, ‘중생지천(重生之泉)’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토착화 사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국가등록문화재 제705호다.
이 성당은 토착화에 성공한 대표적 사례로, 1907년 당시 전국 성공회 성도 가운데 70%가 강화도 주민일 정도로 부흥했다.
강화성당 관할사제인 이경래 베드로 신부는 “성공회는 한국 전통을 존중하며 조선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며 “1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추운 겨울만 빼고는 예배 장소로 쓰이고 있다”고 소개했다.
신평식 한교총 사무총장은 “한교총은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수년간 근대 기독교 문화유산에 대한 발굴, 기록, 보존, 활용 방안을 연구했다”며 “각계 전문인을 초청해 주요 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 문화유산 답사를 최초로 실시해 가치를 알리고 이를 보전하고 관리·발전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13:20~13:40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을 관람
13:40~13:55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에 있는 현대아파트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3:55~14:00 현대아파트 버스 정류장에서 합정역 정류장으로 가는 3000번 버스 승차 대기
14:00~15:48 3000번 버스를 타고 현대아파트 버스 정류장에서 합정역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1시간 48분, 33개 정류장 이동]
15:48~16:00 합정역 7번 출구로 들어가서 역촌역으로 가는 지하철 6호선 지하철 승차 대기
16:00~16:16 6호선 지하철을 타고 합정역에서 역촌역으로 이동 [16분, 8개 역 이동]
강화나들길 제 15코스(고려궁 성곽길) 안내도
강화나들길 제 15코스(고려궁 성곽길)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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