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도전리 → 홍천 성당 → 풍수원 성당 → 강원 감영
69.3Km 35.5Km 37Km
여주 대자집에서 간단히 구운 계란과 과일을 먹고
6시 30분 경 홍천성당으로 향했다.
어제 감곡에서 마쳤으면 이번 여행에서 가지 못할 성지인데
여주까지와서 숙박을 했기에 그리운 사람들도 만나고
홍천성당과 풍수원 성당까지 순례하게 된 것이다.
1시간 남짓 운전하여 홍천에 도착하니 시외터미널이 나오며 식당들이 영업을 했다.
그 동안 아침에 영업하는 음식점이 없어서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했기에
얼른 차를 주차시키고 여러 음식점 중에서 '가보자토종순대국밥'을 택했다.
집에서 홀로 집을 지키고 있을 친구가 생각이 나서 뼈해장국을 시켰다.
그리고 뼈는 주인에게 포장해 달라고 했다.
날씨가 추워 며칠 후까지 상하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집을 비롯해 5~6개 업소가 영업중이었다.
아마도 군부대도 있고 버스터미널 근처이기 때문인것 같았다.
제시간에 아침을 처음 먹은 것 같다.
28. 홍천 성당
홍천 지역에 언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는지는 불분명하나
1903년 풍수원 본당 교세 보고서에 송정 공소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공소 설립 시기는 1902-1903년 사이로 추정됩니다.
송정리(현 홍천군 화촌면)는 박해시대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들어와
터를 일구고 산 옹기촌으로 유명했습니다.
1923년 6월 본당으로 승격된 후 교세 확장을 위해
읍내에 부지를 매입하여 1936년 이전했습니다.
1939년 강원도 지역 사목이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되면서
골롬반회 소속 신부들이 본당 사목을 담당했습니다.
한국 전쟁이 종료될 즈음 부임한 최동오 신부는
1953년 9월 전쟁으로 파괴된 목조 성당을 재건하고
현 성당의 신축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1954년 8월 주임으로 재부임한 크로스비 신부는 성당 신축 공사를 이어받아
1955년 4월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했습니다.
미군 공병대의 도움과 최동오 · 크로스비 신부
그리고 신자들의 헌신으로 건립된 홍천 성당은
돌에 홈을 파서 끼워 넣는 식으로 외벽을 축조한 것이 특징이며,
특히 성당 바닥 마루는 그 아래 넓은 공간을 두고 습기 방지를 위해
새끼줄 타래를 깔아 놓아 현재까지도 양호하게 보존되고 있습니다.
홍천 성당은 1950년대 석조 성당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보존 및 연구 가치가 높아 2005년 4월 15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후 보수작업을 벌여 정면과 측면 강화유리 문을 동판으로 교체하고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했습니다.
석조물로 제단을 새로 꾸미고 안나의 집 증개축과 기도실을 신축하여
2006년 12월 중창(重創)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9. 풍수원 성당
1888년 6월 본당이 설립된 풍수원 성당은 1909년에 낙성식을 가진 건물로서
한국인 신부가 지은 첫 번째 성당이고 한국에서 네 번째로 지어진 성당이다.
또한 강원도 최초의 서양식 벽돌건물이자 한국에서 일곱 번째로 지어진
고딕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다.
특히 이 성당은 신자들이 직접 벽돌을 굽고 아름드리 나무를 해오는 등
건축 소재를 스스로 조달했는데 그 영성은 오늘날 신자들이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또한 1982년에 강원도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역사적 유물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성당 건물은
1982년 11월 3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고,
성당보다 5년 늦은 1912년에 완공되어
현재 유물관으로 개조하여 사용하는 구 사제관 또한
2005년 4월 15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3호로 지정되었다.
구 사제관은 원형이 잘 남겨진 벽돌조 사제관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특징은
첫째, 성직자의 도움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창설했고
둘째, 학문 연구에서 출발한 것이 종교와 신앙으로 발전했으며
셋째, 신앙이 교우들에게 뿌리 내리면서 성직자를 영입하려 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강원도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도 역시 같은 양태로 이루어지게 되며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풍수원 성당이다.
시기적으로 볼 때 강원도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신유박해가 일어나던 1801년경으로 보인다.
이때 서울과 경기도 용인 등지에 살던 교우들은 박해의 칼날을 피해
강원도나 충청도의 산간 지역으로 숨어들게 된다.
식솔을 이끌고 혹은 혈혈단신으로 관헌의 눈을 피해
산으로 계곡으로 피난처를 찾던 이들 중에서 신태보 베드로는
40여 명의 교우들을 이끌고 강원도 횡성군의 풍수원으로 들어선다.
이들이 바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앙촌인 풍수원을 이룬 당사자들이다.
그들은 여기에서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강원도 최초의 본당 설립을 위한 기반을 닦는다.
바람 소리 새 소리가 유난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감히 다가들지 못하는 첩첩산중에서
이들 신앙 공동체는 소박하지만 평화롭게 기도와 생활을 영위한다.
1866년 병인박해와 1871년 신미양요는
또다시 수많은 교우들을 고향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이 때 교우들은 사방으로 연락을 취해 피난처를 찾던
신자들을 불러모아 큰 촌락을 이루게 된다.
이렇게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끼리 모인 공동체는 한편으로는 화전(火田)을 일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1886년 한불 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교우들은
처음 풍수원으로 찾아든 이래 무려 80여 년 동안을
목자 없이 오로지 평신도들로만 신앙 공동체를 이룬 채 믿음을 지켜 왔던 것이다.
하지만 신앙의 자유가 확보된 그 이듬해 교우들은 목자가 없는 양 떼들을 위해
신부가 상주해 돌보아 주기를 열망하게 된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1888년 당시 조선 교구장이었던
뮈텔(Mutel) 민 대주교는 풍수원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르 메르(Le Merre) 이(李) 신부를 임명했다.
르 메르 신부는 이로써 춘천, 화천, 양구, 홍천, 원주, 양평 등 12개 군을 관할했고
당시 신자수는 약 2,000명에 이르렀다.
아직 서양식 성당 건물을 알지 못했던 이들은 초가집 20여 칸을 성당으로 사용했었다.
그러다가 1896년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한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중국인 기술자들과 함께 현재의 성당을 1905년에 착공해서 1907년에 준공했고
2년 뒤인 1909년에 낙성식을 거행했다.
이 성당은 신자들이 직접 벽돌을 굽고 아름드리나무를 해 오는 등
건축 소재를 스스로 조달했는데
그 열성은 가히 오늘날 신자들이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풍수원 성당의 교세는 크게 확장됐고 원주, 춘천, 양평, 횡성, 평창, 홍천 등
주위의 본당들은 모두 풍수원으로부터 분가되어 나온 것이다.
이처럼 강원 지역 전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풍수원 성당에는
오랜 세월 성숙된 신앙의 유산을 배우고 묵상하고자 지금도 많은 신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풍수원 성당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성체 현양 대회가 매년 열리는데,
제1회 성체 대회가 1920년에 실시된 이래 6·25로 빠진 3년간을 제외하고는 매년 열려 왔다.
오랜 역사만큼 30여 명이 넘는 사제를 배출한 성소의 못자리로서도
풍수원 성당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횡성 풍수원 성당 구 사제관
칭칭나무로 우거진 골짜기를 배경으로 산 언저리에 위치한 사제관은
붉은 벽돌로 세워진 2층 건물이다.
성당보다 5년 늦은 1912년에 지어졌지만,
원형이 잘 남겨진 벽돌조 사제관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당시 사용된 벽돌은 가까운 피미기마을에서 구워 나른 것으로 추정되며,
정규하 신부가 건립진행을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간소한 모습 속에서도 현관, 창호, 처마 주위의 벽돌쌓기장식이 돋보인다.
1,2층 내부에서 거실을 사이에 둔 방 배치와 서재를 보면 당시 사제의 주거생활을 이해할 수 있다.
2층 창문을 열면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떨어진
주막거리가 보이는 높은 위치에 있어 마을의 분위기를 한꺼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신부는 사제관에서 성당 준비실까지 가려면 돌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와야 하는데 그
사이에 예배의 마음가짐을 되새기면서 성당으로 향했을 것이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3호)
30. 강원 감영
강원 감영(監營, 觀察使營)은 강원도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청사로,
강원도에서 원주가 가졌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옛 감영의 모습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조선 시대 감영의 모습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장소이자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원주시 한복판에 위치한 강원 감영은 1395년(조선 태조 4년)에 건립된 후,
1896년 춘천으로 옮기기까지 약 500년 동안 유지되었다.
한국 전쟁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지고
옛 건물로는 선화당, 포정루, 청운당만 남아 있었으나
세심한 발굴 과정을 거쳐 내삼문 및 행각 등의 건물이 복원되어 옛 모습을 찾았다.
전국 각 지방의 감영(監營)은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여
이들에게 배교를 강요하고 온갖 고문을 일삼았다.
그래서 어느 감영이든 대부분 그때 흘린 순교자들의 피와 고통의 역사가 전해져 온다.
원주 강원 감영의 박해 역사도 대부분 문헌으로 남지 못하고 다만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1814년에 전국적인 기근이 들었을 때 신자들의 재산을 노린 일부 백성과 지방관이
자의로 1815년에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천주교 박해를 일으켰다.
강원도 울진에 살던 김강이(金鋼伊, 일명 여생, ?~1815, 시몬)와 그 동생 김창귀(타대오) 형제가
1815년 4월에 체 포되어 원주 강원 감영으로 이송되어 왔다.
여기서 이미 갇혀 있던 6, 7명의 신자들을 만났는데,
원주에서 신자들이 옥에 갇히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꿋꿋하고 결연한 태도로 모든 형벌을 이겨 내다가,
옥에 갇힌 지 8개월 되는 그해 11월 5일 약 50세(또는 그 이상) 나이로
쇠약해진 몸에 이질까지 겹쳐서 옥사하였다.
김강이는 원주에서 순교한 첫 순교자가 되었다.
《병인치명사적》(9권 17∼18쪽)에 의하면,
김강이의 손자인 김선행(1828∼1867, 필립보)이 먼저 1867년 가을에 잡혀 치명하고,
김강이의 둘째 아들인 김양범(1804∼1867, 빈첸시오)은 며느리(김선행의 아내)를 보러 갔다가 잡혀
역시 수원에서 9월에 치명한 것으로 나온다.
기해박해 당시인 1839년 1월 말경 원주시 부론면 손곡2리 서지 마을에 살던 신자들 중
최해성(崔海成, 일명 양박, 1811∼1839, 요한)이 체포되어 원주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최해성은 1839년에 순교한 성 최경환(崔京煥, 보명 永訥, 1805∼1839, 프란치스코)의 먼 친척이다.
그의 집안은 본래 충청도 홍주 다락골에서 살았는데, 1801년의 신유박해 때
그의 조부가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의 서지로 이주하였고, 이곳에 작은 교우촌을 이루었다.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21회의 심문과 18회의 고문을 당한 그는
옥에 갇힌 지 8개월 후인 그해 9월 6일(음 7월 29일) 29세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최해성의 고모인 최 비르지타(1783∼1839)도 조카를 면회하러 감옥에 갔다가 잡혀
갖은 형벌과 고문을 받은 뒤, 그해 11월 3일 순교하였다.
강원감영으로 들어서는 정문인 포정루를 지나면 선화당이 눈에 들어온다.
우아하게 뻗어 내린 기와의 곡선이 아름답기만 하지만,
수많은 교인들이 단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처참하게 피를 흘린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네 군데 처마 끝에 기와로 구운 보호 장구를 갖추고 있는 것이 이색적인 선화당은
관찰사의 집무처로 쓰였으며, 포정루와 함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세워졌다.
포정루는 1660년(현종 1년)에 목사(牧使) 이후(李候)가 다시 건립하였고,
6.25 전쟁 때도 손상을 입었으나 다시 복구하였다.
선화당은 1667년에 다시 세워졌다.
포정루 및 선화당은 조선시대 감영의 형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래서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는데,
지정 당시의 명칭은 강원감영(문루 및 선화당)이었으나
2004년 1월 17일 포정루 및 선화당으로 그 이름이 변경되었다.
포정루와 선화당이 순교의 피를 흘렸던 박해의 현장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원주교구 순교자로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복자품에 오른 김강이 시몬, 최해성 요한,
최 비르지타 등 많은 순교자들이 강원감영의 옥에서 혹독한 옥살이를 했다.
안타까운 것은 감옥 터에 이미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복원할 수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