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무시하다 그리움이여
지워지지 않은 눈빛이여”
세상의 모든 눈빛들과 일상의 먼지들조차 감싸 안는 손택수의 신작 시집
등단 20여년 동안 네권의 시집을 상재한 중견 시인으로, 탄탄한 시세계를 펼쳐 보이는 손택수 시인의 신작 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가 출간되었다. 농경사회적 상상력과 민중적 삶의 풍경을 담금질해냈던 손택수는 이번 시집에서 현실의 간난신고나 일상의 먼지 같은 순간들조차 빛나게 하는 따뜻하고 살뜰한 시선을 보내는데, 단순히 세월과 연륜의 결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시적 경지에 이르렀다 평가할 만하다. 여백의 아름다움, 간결함의 미학, 풍성한 시적 리듬의 실험 등 다채로운 시적 향취를 선보이면서도 현실과 시인의 삶, 혹은 삶다운 삶에 대한 궁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시정신이 돋보이는 시집의 탄생을 목도할 수 있다.
세월과 일상, 여유와 넉살로 빛난
손택수가 터득한 시적 경지
한 시인의 시세계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도 힘들겠지만, 시집을 펴낼 때마다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독자의 즐거움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손택수 시인의 경우 앞선 네 시집을 소개하는 문구들을 살펴본바 ‘가족과 고향’(호랑이 발자국) ‘민중적 시정과 대지의 삶’(목련 전차) ‘도시적 삶의 애환’(나무의 수사학) ‘삶의 안팎을 성찰하는 사유’(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였다. 강약의 변화와 시정의 폭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표현들이다. 그 여정을 거쳐, 다섯번째 시집에 이른 손택수는 한결 여유롭되 넉살이 늘었고, 힘은 빼되 간결함은 더한 시편을 써내려갔다.
시인의 여유와 넉살을 두고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송종원은 ‘무구함’으로 읽어낸다. “냉이꽃 뒤엔 냉이 열매가 보인다/작은 하트 모양이다 이걸 쉰 해 만에 알다니/봄날 냉이무침이나 냉잇국만 먹을 줄 알던 나”(「냉이꽃」)가 나이 쉰이 되어서 깨달은 것은 비록 하잖을지라도 그때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일 터이다. “벗의 집에 갔더니 기우뚱한 식탁 다리 밑에 책을 받쳐놓았다/주인 내외는 시집의 임자가 나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차린 게 변변찮아 어떡하느냐며/불편한 내 표정에 엉뚱한 눈치를 보느라 애면글면”(「시집의 쓸모」)하는데, 시인은 책을 슬쩍 밀어버려 ‘고소한 복수’를 하는 짓궂은 상상을 하지만 결국 뜨끈한 된장국처럼 ‘상한 속’을 달래주는 시집의 ‘쓸모’에 공감한다.
송종원은 이번 손택수의 시집을 설명하는 몇가지 키워드 중에 ‘기쁨도 슬픔도 아닌, 아슴아슴 있는 일’이라는 표현을 택하기도 했다. 치열한 삶의 현장을 묵직하고 진지하게만 바라보던 시선이 한결 가벼워진 덕이라고 해석한다. “못물에 꽃을 뿌려/보조개를 파다//연못이 웃고/내가 웃다//연못가 바위들도 실실/물주름에 웃다”(「연못을 웃긴 일」)와 같은 시구들은 시각적인 단출함뿐 아니라 독자들조차 슬며시 웃게 만드는 상상력을 보이되 시로써 ‘삶의 풍요를 배울 기회’를 제공하는 미학적 경지를 보여준다. 시인이 터득한 경지에 은근슬쩍 독자들을 청하는 시인의 ‘너스레’와 ‘여유’가 느껴진다. 그 경지를 표현하는 다양한 형식과 끝을 알 수 없는 소재들은, 중견에 이르러 으레 도달한 ‘먼 곳’을 가리키는 수사학이 아니라 손택수 특유의 유순하지만 당당한 시선을 증언해준다.
정지
손택수
꽃잎 속 수술과 암술이 만나려고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걸 지켜보고 있을 때,
벌이 꿀을 따먹느라 붕붕거리는 소리가
간지럽게 들려오고 있을 때
이상하게 나는 여기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존재하지 않아도 좋은 무엇이 된 것만 같다
그때 잠시 나는 어디에 있었던 걸까
꽃속으로 내가 빨려들어갈 때,
저 혼자 일어났다 저 혼자 가라앉는 바람처럼
꽃잎 가상이를 내 숨결로 흔들어보고 있을 때
먼 곳이 있는 사람
손택수
걷는 사람은 먼 곳이 있는 사람
잃어버린 먼 곳을 다시 찾아낸 사람
걷는 것도 끊는 거니까
차를 끊고 돈을 끊고
이런저런 습관을 끊어보는 거니까
묵언도 단식도 없이 마침내
수행에 드는 사람
걷는 사람은 그리하여 길을 묻던 기억을 회복하는 사람
길을 찾는 핑계로 사람을 찾아가는 사람
모처럼 큰맘 먹고 찾아가던 경포호가
언제든 갈 수 있는 집 근처
호수공원이 되어버렸을 때를 무던히
가슴 아파 하는 사람
올림픽 덕분에 케이티엑스 덕분에
더 멀어지고 만 동해를 그리워하는 사람
강릉에서 올라온 벗과 통음을 하며
밤을 새우던 일도 옛일이 돼버리고 말았으니
올라오면 내려가기 바쁜
자꾸만 연락 두절이 되어가는
영 너머 먼 데를 잃고 더 쓸쓸해져버린 사람
나는 가야겠네 걷는 사람으로
먼 곳을 먼 곳으로 있게 하는 사람에게로
먼 곳이 있어 아득해진 사람에게로
연못을 웃긴 일
손택수
못물에 꽃을 뿌려/ 보조개를 파다// 연못이 웃고/ 내가 웃다// 연못가 바위들도 실실/ 물주름에 웃다// 많은 일이 있었으나/ 기억에는 없고// 못가의 벚나무 옆에/ 앉아 있었던 일// 꽃가지 흔들어 연못/ 겨드랑이에 간질밥을 먹인 일// 물고기들이 입을 벌리고/ 올라온 일// 다사다난했던 일과 중엔 그중/ 이것만이 기억에 남는다
지게체(體)
손택수
부산진 시장에서 화물전표 글씨는 아버지 전담이었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아버지가 시장에서 대접을 받은 건
순전히 필체 하나 때문이었다
전국 시장에 너거 아부지 글씨 안 간 데가 없을끼다 아마
지게 쥐던 손으로 우찌 그리 비단 같은 글씨가 나왔겠노
왕희지 저리 가라, 궁체도 민체도 아이고 그기
진시장 지게체 아이가
숙부님 말로는 학교에 간 동생들을 기다리며
집안 살림 틈틈이 펜글씨 독본을 연습했다고 한다
글씨체를 물려주고 싶으셨던지 어린 손을 쥐고
자꾸만 삐뚤어지는 글씨에 가만히 호흡을 실어주던 손
손바닥의 못이 따끔거려서 일찌감치 악필을 선언하고 말았지만
일당벌이 지게를 지시던 당신처럼 나도
펜을 쥐고 일용할 양식을 찾는다
모이를 쪼는 비둘기 부리처럼 펜 끝을 콕콕거린다
비록 물려받지는 못했으나 획을 함께 긋던 숨결이 들릴 것도 같다
이제는 지상에 없는 지게체
망원동
손택수
도라지 속살은 막 퍼올린 찬물 빛이다
역 귀퉁이 쓸모없어진 전화 부스 옆에서
하루종일 도라지 껍질을 벗기던 노인
도려낸 상처 위로 끼치던
그 정갈한 향을 나는 얼마나 좋아하였던지
코끝에 심심산골을 옮겨온 듯
시장 귀퉁이 들끓는 소음 먼지 속에
그저 정물처럼 묵묵히 앉아 있었다
지상에 와서 아까운 몇 가지를 뽑으라면 십년 넘게
내 귀갓길을 지켜준 노인의 도라지를 빠뜨릴 수 없으리라
껍질을 벗기는 일이 우물을 푸는 일이라
바가지 가득 넘실넘실 길어올리는 일이라
먼지잼처럼 지나가던 망원,
돌아와 보니 그곳이 가장 먼 곳이었네
시집의 쓸모
손택수
벗의 집에 갔더니 기우뚱한 식탁 다리 밑에 책을 받쳐놓았다
주인 내외는 시집의 임자가 나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린 게 변변찮아 어떡하느냐며
불편한 내 표정에 엉뚱한 눈치를 보느라 애면글면
차마 말은 못하고 건성으로 수저질을 하다가
(책을 발로 밀어 슬쩍 빼면
지진이라도 난 듯 덜컥 식탁이 내려앉겠지
국그릇이 철렁 엎질러져서 행주를 들고 수선을 피우겠지)
고소한 복수 생각에 젖어 있는 동안
이사를 다니느라 다치고 긁히고 깨진 식탁
각을 잃고 둥그스름해진 모가 보인다
시집이 이토록 쓸모도 있구나
책꽂이에 얌전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기보단
한쪽 다리가 성치 않은 식탁 아래로 내려가서
국그릇 넘치지 않게 평형을 잡아주는,
오래전에 잊힌 시집
이제는 표지색도 다 닳아 지워져가는 그것이
안주인 된장국마냥 뜨끈하게 상한 속을 달래주는 것이었다
냉이꽃
손택수
냉이 꽃 뒤엔 냉이 열매가 보인다
작은 하트 모양이다 이걸 쉰 해 만에 알다니
봄날 냉이무침이나 냉잇국만 먹을 줄 알던 나,
잘 익은 열매 속 씨앗은 흔들면 간지러운 옹알이가 들려온다
어딜 그렇게 쏘다니다 이 제사 돌아왔니
아기와 어머니가 눈을 맞추듯이
서로 보는 일 하나로 가지 못할 곳이 없는 봄날
쉰내 나는 쉰에도 여지는 있다
나는 훗날 냉이보다 더 낮아져서,
냉이뿌리 아래로 내려가서
키 작은 냉이를 무등이라도 태우듯
들어 올릴 수 있을까
그때, 봄은 오고 또 와도 새
봄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