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10,22)
예전 읽었던 복음 묵상 글이 아주 신선하게 저에게 다가왔기에 적어 두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민들레라는 다년생 풀이 있지요. 짓밟혀도 잘 죽지 않고 즙이 매우 쓰기 때문에 가축들도 잘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노란색의 꽃이 4~5월에 피는데 민들레의 꽃은 생명을 다하면 홀씨가 되어 날아갑니다. 그리고 어디엔가 터를 잡으면, 그곳에 자기 영토를 만들어 다시 꽃을 피우면서 곳곳에 퍼져 나갑니다. 민들레의 이런 생존 방식은 마치 초기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초대교회는 외부의 자극, 곧 박해와 스테파노의 순교를 시발점으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마치 구슬이 바닥에 떨어지면 사방팔방으로 튕겨 나가 흩어졌습니다. 이렇게 피신하는 과정에서 여러 지방으로 퍼져나갔고 새로운 복음 선포를 위한 전기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전화위복이었던 것입니다.
어젠 주님의 성탄을, 오늘은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천상 탄일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 다음 날을 스테파노의 축일로 지내는 것일까요. 스테파노 순교자의 축일을 굳이 성탄 다음 날 지내는 이유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지극히 상반된 ‘출생과 죽음: 시작과 마침’을 연이어 기억하는 그 근저의 동질성은 ‘사랑’입니다. 오늘 본기도에서, 『숨을 거두면서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성 스테파노를 본받아,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소서.』라고 교회는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세상에 탄생하심으로 가져온 구원을 기억하면서, 스테파노가 처음으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사랑으로 바침으로써 천상에서 탄생하게 되었음을 교회가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탄이 지상에 태어남이라면, 순교는 하늘에 태어남인 것입니다. 오늘 입당송의 『복된 스테파노에게 하늘의 문이 열렸네. 첫 순교자로 오른 그는 하늘에서 승리의 월계관을 받았네.』라고 노래하고 있음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스테파노의 축일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스테파노와 우리 모두 구원되었음을 전제로, 예수님의 지상에 탄생하심으로 우리가 하늘에서 탄생하였음을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축일을 통해서 교회는 선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축일은 단지 스테파노 성인만의 축일이 아닌 하늘나라를 위해 증거하고 봉사하고, 순교한 모든 이들의 죽은 날이 곧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희망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주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지상과 천상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낮추심과 올라감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가난하심과 부유하심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죽음과 태어남의 교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심으로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한 그 첫 사람이 바로 첫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입니다.
오늘 독서 사도행전에 의하면 스테파노 성인은 평판이 좋고(6,3) 은총과 능력이 충만(6,8)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분(7,55)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는 많은 신도 가운데서 사도들이 직접 뽑은 식탁 봉사를 위한 일곱 봉사자, 부제들 가운데 한 분이셨으며 사도들과 더불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진리를 증언하는 역할을 담대하게 수행했습니다. 그가 왜 첫 순교자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 독서에 의하면 그는 다른 봉사자들 가운데서 탁월한 능력을 소지하고 있어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으며(6,8) 이 일로 인해 디아스포라에서 온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해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지만, 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힘입어서 말하는 스테파노의 언변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초라하게 한 스테파노에 대한 열등감과 그에 따른 분노로 속이 끓어올라 이를 갈았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7,54참조)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탓하기보다 스테파노에 대한 분노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못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분노에 스테파노의 다음과 같은 말이 마치 타오르는 불꽃에 기름을 쏟아붓는 격이 되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7,56) 물론 이 말은 성령으로 충만한 스테파노의 신앙의 증언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을 더욱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든 표현이자, 자신들이 지키고 싶은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결정적인 이단이었고 신성 모독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마침내 스테파노의 이 말은 유대인들의 분노에 분노를 더한 증오의 불을 타오르게 하는 불쏘시개가 되어 순교라는 결정적인 결과를 낳게 되었으리라 봅니다. 자존심의 상처를 입고 열등감으로 이를 갈던 그들에게 이제 스테파노의 이 말은 그들에게 마지막 버팀목인 자존심마저 짓밟혔다고 느꼈기에, “큰 소리로 지르며 귀를 막았다.” (7,57) 고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미 집단적인 광기가 스멀스멀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단지 일제히 달려들어 스테파노를 성 밖으로 몰아내려고 했지만, 그 과정에서 군중의 집단적인 폭력성이 고조되면서 누구라고도 할 것 없이 모두가 돌을 던졌던 것입니다. 성 밖으로 몰아내는 광경은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 나자렛에서 회당에서 첫 설교 이후 고향 사람들의 반응과 비슷하며,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자신을 죽이려고 하자 스테파노의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7,59)라는 기도는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드렸던 기도를 연상시킵니다.
교회는 성탄의 큰 축제 중에 첫 순교자 스테파노 축일을 지냄으로써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호출하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신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무릇 그분처럼 아니 스테파노처럼 자신의 존재와 삶을 통해서 세상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고 배척하며 박해할지라도 꿋꿋이 ‘주님의 사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서 자신 안에서 내주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 사랑’으로 언제 어디서든지 증거해야 한다, 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 사랑에 대한 응답은 바로 사랑을 바탕으로 한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테파노는 예수님을 가장 닮은 존재였고, 사랑을 바탕으로 자신의 존재를 ‘복음과 예수님 때문에’ 기꺼이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놓은 분이시기에 교회는 오늘 축일을 성대히 지내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성령으로 충만한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순교하셨습니다. 순교는 사랑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여! 스테파노는 박해와 죽음까지도, “끝까지 견디었기에 구원을 받은 것”(10,22)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