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자연묘사를 하였고, 베네치아풍의 색채법을 사용하여 황금조(黃金調)가 아닌 흑회색(黑灰色)이 눈에 띈다.
대부분이 종교화와 초상화였지만, 깊은 명암과
색채, 비정상적으로 길쭉한 인체묘사로 에스파냐 신비주의를 대표한다. 사후 오랫동안 그 진가가 망각되었으나,
19세기 이후 재평가되어 P.세잔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대표작으로 [오루가스 백작의 매장](1586),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그리스도의 세례]를 비롯한 많은
초상화가 있으며,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 에스코리알궁, 톨레도의 미술관과 여러 교회에 훌륭한 컬렉션이 있다.
엘 그레코와 톨레도
엘 그레코(El Greco)는 혁명아다. 그의 작품이 혁명적인 만큼 그의 삶도 혁명적이었다. 서양미술사를 장식한
고전주의 시대의 작품 중에서 가장 현대적인 작품을 꼽으라면 미술사가들은 16세기 후반에 활약한 엘 그레코부터 찾는다.
최고의 기량을 가진 베니스화파에 속했지만, 절정기 무렵의 그의 화폭에 등장하는 인물과 풍경은 현대 추상회화에서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심하게 일그러지거나 뒤틀려 있다.
그의 눈이 심한 난시였거나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시각적 장애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학설이 제기될 정도로
그의 화면은 16세기 때 이미 20세기 추상을 예고하며 심하게 왜곡되고 또 변형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400년이나 앞서가던 사람의 생애 또한 금세기 후반에 나타난 히피의 삶을 연상케 한다.
일반적으로 그는 스페인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스페인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36세 때인 1577년에 정착하여 1614년 73세의 일기로 숨을 거둘 때까지 오래도록 살아왔던 스페인 마드리드
남쪽의 고도 ‘톨레도’의 모든 것은 엘 그레코로 통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그는 톨레도와 한몸으로
일체화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스페인 출신이 아니라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그리스인이다. 엘 그레코라는
이름 자체가 에스파냐어로 ‘그리스 사람’을 뜻한다.
그의 본명은 도메니코 테오토코풀로스였다. 도메니코는 중세 이래로 새로운 미술이라고는 전혀 발전시키지
못했던 고향 섬을 떠나 1566년 베니스로 건너왔다. 당시 크레타 섬은 베니스공화국 치하에 있었고, 마침
그의 형이 베니스공화국의 세리로 임명되었던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베니스에서 도메니코는 스승으로서의 티치아노와 틴토레토를 만난다. 그 두 대가의 작품에 순간적으로
매혹된 그는 자연적인 형태나 색채를 과감하게 무시해도 좋다는 배짱을 기른다.
그 배짱은 예술관이라기보다는 그의 신앙심에서 배양된 것인지도 모른다. 틴토레토와 마찬가지로
그는 아주 격정적이면서도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성서이야기를 딱딱한 양식의 마니에리즘으로
그려낼게 아니라 실제로 있는 일처럼 참신하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베니스는 이 도메니코의 그런 혁명적 의식전환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딱딱한 중세적 권위로 굳어 있었다.
그리하여 도메니코는 유럽의 한 구석인 스페인의 톨레도에 정착하여 그리스에서 온 사람으로서의
엘 그레코가 된다. 톨레도에서 엘 그레코는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묘사를 귀찮게 요구하는
비평가들로부터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요컨대 톨레도에 와서 그의 작품은 현대화로 향해 해방되었고 그 자신은 자유를 만끽했다. “크레타는
그에게 생명을 부여했고, 톨레도는 그에게 붓을 선사했다.” 톨레도의 시인이며 수도사였던 호르텐시오
파라비치노의 이 지적이야말로 어느 화가가 그를 키운 도시와 맺은 천분(天紛)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모든 선지자들은 고향에서 박대를 받는다고 했던가.
크레타와 베니스에서 신통찮은 대접을 받았던 이 혁명아는 톨레도에 오자마자 최고의 평가를 받아
위대한 그리스인이 된다. 그리하여 먼 타향인 톨레도는 엘 그레코 예술의 진정한 고향으로 기능했다.
마드리드에서 승용차 편으로 수 시간 정도 건조지대를 가로질러 남향한 곳에 ‘붉은 산’을 연상시키는
고도 톨레도가 무더위의 한 가운데 불쑥 솟아있었다.
사막의 고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타호강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붉은 바위산 위에 톨레도는 중세의 모습
그대로 견고하기 그지없었다. 타호강 언저리에 녹지대가 조금 비칠 뿐 그 위로 솟아난 성곽과 대성당과
수도원 등의 석조건물들은 작렬하는 스페인 사막지대의 태양 아래 곧 타버릴 듯한 휘발성을 풍기고 있었다.
엘 그레코가 어안렌즈에 나타나는 풍경처럼 극단적으로 변형시켜 하나의 화폭 속에 재창조해낸
톨레도의 경관과 지도’라는 작품에서 풍겨나는 현대성의 정체가 바로 그 휘발성에 기인한다는 것을
그 순간에 깨칠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톨레도의 신비스러운 종교적 정열은
그에게 400년 후를 내다볼 수 있는 심미안을 주었던 것이다. 모든 미술작품에 ‘정확성’이라는 동일한
기준을 적용할 수 없다는 그의 그림을 진정으로 이해하기까지 서양미술사는 400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엘 그레코의 작품은 그만큼이나 현대적이지만 당시로는 너무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미래적’이었다.
엘 그레코와 같은 천재 앞에서는 시간은 때로 성수대교처럼 무너지는가 하면 때로는 남대천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흐름에 역행하기도 한다.
첫댓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의 영향을 많이받은듯...
작품의 대부분이 천지창조의 일부분 같은 느낌이
많이듬니다.
종교화의 거장으로 보이네요.
음악과함께...신의세계로 빨려들어가는듯합니다.
잘감상하고 갑니다.
수고하셨슴니다.
들려주셔서 좋은글에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미세먼지로 하늘이 또 뿌옇습니다..
건강 주의하시고 즐거운 오후가 되시기 바람니다..
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