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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聖蹟圖
孔子<聖蹟之圖>約出現於明代,有彩繪本、木刻本、石刻本。彩繪絹本共36幅。繪製依據主要是<史記˙孔子世家>,文字也多用原作,選擇的是孔子生平中比較重要的行跡,但由於有些重要事件並未記載,因此懷疑原本可能沒有全部保存,今存的只是殘本。<聖蹟之圖>是我國現存最早,以反映人物事蹟為主,具有完整故事情節的連環圖畫。它圖文並茂,擇要介紹孔子的一生主要的行跡,是一部形象化的孔子編年史。設色鮮明,繪畫精細,人物生動傳神,具有較高的歷史和藝術價值。
공자의 생애 그림(공자성적도)
공자의 생애를 그린 그림(공자성적도)은 대략 명나라 시기에 출현하였으며, 채색본, 목판본, 석각본이 있다.
비단에 채색하여 그린 채색본은 모두 36부이다. 그림 제작은 주로 ‘사기-공자세가’를 근거로 하였으며, 문장도 원작을 많이 사용하였고, 공자 일생 중 비교적 중요한 행적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여러 중요한 사건을 기록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원본이 모두 보존된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것이 잔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고 있다. ‘성적도’는 중국의 현존하는 가장 이르고, 인물의 사적을 위주로 반영하였으며, 완전한 이야기의 줄거리가 갖춰진 연환(연결)그림이다. 이 연환그림은 그림과 문장이 다채롭고, 공자 일생의 주요한 행적을 요약하고 있는, 하나의 형상화된 공자의 일대기이다. 색칠이 선명하고 그림이 정교하며, 인물들이 생동감있어, 비교적 높은 역사,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1、尼山致禱:孔子的母親顏徵在在尼丘山上祈禱后,生下兒子孔子。孔子生來頭頂中間低、四周高,象尼丘山的形狀,故起名叫孔丘,字仲尼。
1. 니산치도(니산에서 기도를 하다)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는 니구산에서 기도를 한 후, 아들 공자를 낳는다.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정수리 중간이 낮고, 주변이 높았는데, 마치 니구산의 모습과 닮아 이름을 공구(니구산의 구)이라 하였고, 자를 중니(니구산의 니)라 하였다.
2、麒麟玉書:相傳, 孔子出生前,有麒麟在孔府出現,並口吐天降之書,上面有文字說:「水精之子,繼衰周而素王。孔子的母親感到很奇怪,就用繡拔繫在麒麟的角上,隔了兩夜才離去。孔子的母親懷孕十一個月才生了孔子。
2. 기린옥서(기린의 옥서)
공자가 아직 태어나기 전에, 한 마리 기린이 공부(孔府)에 나타나 ‘하늘이 내린 책’을 토해 놓는데, 위에 글씨가 써있었다. : ‘옥(수정)의 아들, 쇄락한 주나라를 이어 왕이 되다’ 공자의 어머니는 기이하게 여겨 자수 놓은 천을 기린의 뿔에 묶어 두었는데, 이틀 밤을 지나서야 떠나갔다. 공자의 모친은 11개월 동안 임신하여 공자를 낳는다
3、二龍五老:魯哀公二十二年,孔子誕生的晚上,有兩條蒼龍自天降下,繞護著他家,五位神僊降到他家院中。
3. 이룡오로(두마리 용과 다섯 노인)
노나라 애공 22년, 공자가 탄생하던 날 저녁에, 두 마리의 푸른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의 집을 에워싸고, 다섯 신선이 그의 집 마당에 내려온다.
4、鈞天降聖:孔子出生時,顏氏在房中聽到天上的音樂聲,還聽到空中說:「天感生聖子,故降以和樂之音。」所以孔子生來就與凡人不同,有四十九種標記,如日角月準,河目海口等,胸間還有「制作定世符」的文字。(參見<東家雜記><祖庭廣記>等)。
4. 균천강성(하늘의 음악이 성인에게 내리다)
공자가 태어날 때, 공자의 어머니 안씨(顏氏)는 방에서 하늘의 음악 소리를 들었고, 또한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다. “하늘이 성자의 태어남에 감동하시어, 화평과 기쁨의 노래를 내리셨다” 그래서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범인과 다른 면이 있었는데, 모두 49가지의 자취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마 한가운데 뼈가 불거져 있다던가, 강과 같이 눈언저리가 평평하고 길다거나, 큰 바다같이 입이 크고 깊은 것 등이다. 가슴에는 또 ‘세상을 안정시킨다’는 뜻의 무늬가 있었다고 한다.
※ 鈞天 : 구천(九天)의 하나 / 日角 : 이마 한가운데 뼈가 불거져 있는 모양
5、俎豆禮容:孔子三歲時,父親叔梁紇就去世了。孔子小時玩樂,常常擺上俎豆等禮器,演習禮儀,動作都合乎禮節法度(事見<史記˙孔子世家>)。
5. 조두례용(제사 기물을 가지고 놀며 예절바른 용모를 보이다)
공자가 세 살 때, 아버지 숙량흘이 세상을 떠났다. 공자는 어릴 적 놀 때면 자주 제사용 상과 접시 등 기물을 늘어놓고 예절의식을 연습했는데 동작이 모두 예절법도에 맞았다.
<조선 후기 화원화가 김진여(金振汝)의 조두예용(俎豆禮容)>
6、職司委吏:孔子成年後,曾為季孫氏的委吏(管理倉庫的小官),稱量算數都很公正(事見<史記˙孔子世家>)。
6. 직사위리(창고관리직에 종사하다)
공자가 성년이 된 후, 계손씨 집안의 위리(창고를 관리하는 하급 관리)가 된 적이 있는데, 양을 재는 것과 수를 세는 것이 모두 매우 공정했다.
7、命名榮貺:魯昭公十年,孔子生了兒子,昭公賜給鯉魚,孔子為了顯耀國君的賞賜,給兒子取名孔鯉,字伯魚(事見<孔子家語˙本姓解>)。
7. 명명영황(아들 이름을 지어 받은 선물을 영화롭게 하다)
노나라 소공 10년, 공자는 아들을 낳는다. 소공이 이에 잉어를 하사하였는데, 공자가 임금의 하사품을 과시하기 위해 아들에게 공리(孔:性, 鯉:잉어)라 이름짓고, 자를 백어(맡 물고기)라 하였다.
8. 職司乘田:孔子年輕時,曾為季氏司職吏(管理苑囿的小官),牲畜繁殖增多 (事見<史記˙孔子世家>)。
8. 직사승전(가축을 관리하는 벼슬을 얻다)
공자가 젊었을 때, 계씨 집안의 관리(가축을 관리하는 하급관리)가 되었는데, 가축이 번성하고 많아졌다. ※乘田 : 가축을 관리하는 벼슬
9、問禮老聃:孔子和南宮敬叔一齊到周地去,向老子問禮,因為老子曾做過周王朝的守藏室之史(管理藏書的官吏),熟知周禮(事見<史記˙孔子世家>、<孔子家語˙觀周>、<莊子˙天運>等)。
9. 문례노담(노자를 만나 예를 묻다)
공자와 남궁경숙은 함께 주나라 지방에 도착하여, 노자에게 예에 관해 묻는데, 이는 노자가 이전에 주 왕조의 서적을 담당하는 관리였기 때문에 주나라 예절(주례)에 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0、在齊聞韶:孔子三十五歲時,魯昭公被季孫氏、孟孫氏、叔孫氏打敗,逃奔到齊國,孔子也追隨到了齊國。孔子和齊國太師談論音樂,聽了傳說舜作的樂曲韶樂,沉醉其中,以至三個月都賞不出肉的香味來(事見<史記˙孔子世家>、<論語˙述而>)。
10. 재제문소(제나라에서 소악을 듣다)
공자가 35세 때에, 노나라 소공이 계손씨, 맹손씨, 손숙씨에게 패하여 제나라로 도망갔을 때, 공자도 그를 따라 제나라로 간다. 공자와 제나라 태사가 음악에 관해 담론할 때, 공자가전설상의 순임금이 만들었다는 음악인 ‘소악’을 듣고는, 그 음악에 심취하여, 세 달 동안 고기의 맛을 음미하지 못했다.
※ 논어 ; 술이(述而) 제13장
『子在齊聞韶하시고 三月不知肉味하사 曰 不圖爲樂之至於斯也호라』
『공자(孔子)께서 제(齊)나라에 계실 적에 소악(韶樂)을 들으시고, <배우는>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모르시며 “음악(音樂)을 만든 것이 이러한 경지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하셨다.』
11、晏嬰沮封:孔子在齊國,齊景公問孔子如何治理國家,孔子要他節省財力。齊景公很高興,想把尼谿的田地封賜給孔子,但遭到大臣晏嬰反對,於是孔子離開齊國,返回魯國(事見<史記˙孔子世家>、<孔子家語˙弟子行>)。
11. 안영저봉(안영이 봉읍하는 것을 방해하다)
공자가 제나라에 있을 때,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국가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에 관해 물었을 때, 공자는 그에게 재물을 아끼라고 요구하였다. 제나라 경공은 매우 기뻐하며 니계의 전지를 공자에게 하사하려 하였으나, 대신인 안영의 반대에 부딪쳐, 이에 공자는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오게 된다.
12、退修詩書:魯定公時,季孫氏僭越公室,大臣們掌握了,祭祀征伐等國家政事,孔子看不慣這種禮崩樂壞的局面,不求做官,專心修詩書,定禮樂(事見<史記˙孔子世家>等)。
12. 퇴수시서(물러나 시와 서를 정리하다)
노나라 정공 당시, 계손씨는 공무실과 대신들을 장악하여 분수에 맞지 않게 제사와 정벌 등 국가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다. 공자는 이런 예악이 무너진 상황을 차마 보지 못하여, 관리가 되는 것을 구하지 않고, 전심으로 시와 서를 다듬어 예약을 정하였다.
13、夾谷會齊:魯定公十年春,齊魯兩國國君相會於夾谷。獻酬後,齊國演奏四方之樂,孔子以兩君相會,不能用夷狄之樂,迫使齊景公撤走樂舞,齊國又演奏宮中之樂,孔子以匹夫惑亂諸侯迫使齊景公處罰樂人。使魯國在外交上取得了一次勝利(事見<史記˙孔子世家>、<孔子家語˙相魯>)。
13. 협곡회제(협곡에서 제나라와 회견하다)
노나라 정공 10년(BC 500년) 봄, 제나라와 노나라 양국의 임금들이 협곡에서 만난다. 술잔을 나눈 뒤, 제나라에서 변방 국가들의 음악을 연주하자, 공자는 두 나라 군주가 서로 만난 자리에서 오랑캐 음악을 연주하면 안 된다 하여, 제나라 경공으로 하여금 기악과 무용을 물리도록 하였다. 제나라가 다시 궁중의 음악을 연주하게 되었고, 이후 공자는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제후들을 미혹시켜 제나라 경공이 음악가들을 벌하게 만들었다. 노나라 외교상 한 차례 승리를 얻게 한 것이다.
14、歸田謝過:夾谷相會之後,齊景公責備大臣們「以夷狄之道教寡人」,在外交上失禮。齊景公采取臣子的建議,將過去侵占的魯國鄆、汶陽、龜陰之田送還魯國(事見<史記˙孔子世家>、<孔子家語˙相魯>)。
14. 귀전사과(땅을 되돌려줌으로 사과하다)
협곡에서 서로 만난 뒤, 제나라 경공은 대신들에게 ‘오랑캐의 도로 과인을 가르치다니’ 하며, 외교상 실례를 범한 것을 꾸짖었다. 제나라 경공은 한 신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전에 침범하여 차지한 노나라의 국운、문양、구음 땅을 노나라에 반환했다.
15、誅少正卯:魯定公十一年,孔子由大司寇攝行相事,誅殺了「亂政」大夫少正卯。參預國家大事三個月,路不拾遺,男女有別,賣東西的不要虛價,國家呈現大治的景象(事見<史記˙孔子世家>、<孔子家語˙相魯>及<始誅>等)。
15. 주소정묘(소정묘를 참하다)
노나라 정공 11년(BC 499년), 공자는 대사구(대법관)로 인하여 재상 임무를 대행하였는데, 정치를 혼란하게 만든 사대부 소정묘를 사형에 처한다. 국가의 대사에 참여한 지 삼 개월 만에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주워가는 사람이 없고, 남녀가 분별이 생기고, 물건을 파는 자가 가격을 속이지 않는 등, 나라에 큰 치덕의 모습이 드러났다.
16、女樂文馬:齊國聽說孔子執政,擔心魯國稱霸會吞併齊國,采用黎鉏的建議,贈送給魯定公女樂八十人、文馬三十駟,企圖使魯國君臣玩樂喪志(事見<史記˙孔子世家>、<孔子家語˙子路初見>)。
16. 여악문마(여자악사 와 아름다운 말)
제나라에서 공자가 집정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노나라가 패권을 쥐고 제나라를 병합시킬 것을 두려워하여, 려서(黎鉏)의 건의를 받아들여, 노나라 정공에게 여자 악사 80인과 아름다운 말 120필을 보내, 노나라 군신들이 음악과 놀이에 빠져 의지를 상실하게 하고자 하였다.
17、因膰去魯:魯君上了齊人的當,往觀女樂,終日不歸,怠惰於國家政事,郊祭後又沒有按照慣例向大夫們分送祭祀的胙肉。孔子於是辭職出走,開始周遊列國(事見<史記˙孔子世家>、<孔子家語˙子路初見>等)。
17. 인번거노(제사고기로 인해 노나라를 떠나다)
노나라 임금이 제나라에게 속아넘어가, 여자 악사를 보러 가서는 종일 돌아오지 않고, 국가 정사에 태만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에 관례에 따라(按照)사대부들에게 나누어 주던 제사지낸 고기를 나눠주지 않았다(沒有). 공자는 이에 사직하고 떠나, 열국을 주유하기 시작하였다.
(膰, 胙 : 祭肉 번, 祭肉 조)
※논어 ; 미자 제4장(第四章)
『齊人이 歸女樂이어늘 季桓子受之하고 三日不朝한대 孔子行하시다』
『 제(齊)나라 사람이 여악(女樂)『[미녀(美女)의 악공(樂工)]』을 보내니, 계환자(季桓子)가 그것을 받고 3일(日)을 조회(朝會)하지 않자, 공자(孔子)께서 떠나셨다.』
18、匡人解圍:孔子離開魯國去衛國,從衛國去陳國,路過匡地,魯國的陽虎曾施暴於匡人,孔子長得像陽虎,匡人就把孔子師徒圍拘了五天,孔子派隨從求助於衛國大夫寧武子才解了圍,離開匡地(參見<史記˙孔子世家>、<論語˙子罕 제5장>、<孔子家語˙困誓>等)。
18. 광인해위(광나라 사람이 공자를 풀어주다)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갔고, 위나라에서 다시 진나라로 가는데 광나라 땅을 지나야 했다. 노나라의 양호(陽虎)가 이전에 광나라 사람들에게 폭정을 하였는데, 공자의 모습이 양호와 닮았다하여, 광나라 사람들이 공자 무리를 닷새 동안 잡아두었다. 공자는 수종자를 위나라 대부 녕무자에게 보내 도움을 구해서 풀려나게 되었고, 광나라 땅을 떠나게 된다.
※논어 자한(子罕) 제5장
『子畏於匡이러시니』
『공자(孔子)께서 광(匡)땅에서 경계심을 품고 계셨다.』
『曰 文王旣沒하시니 文不在玆乎아』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문왕(文王)이 이미 별세하셨으니, 문(文)이 이 몸에 있지 않겠는가?』
『天之將喪斯文也신댄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어니와 天之未喪斯文也시니 匡人이 其如予何리오』
『하늘이 장차 이 문(文)을 없애려 하셨다면 뒤에 죽는 사람[공자]이 이 문(文)에 참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이 문(文)을 없애려 하지 않으셨으니, 광(匡)땅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19~20、丑(醜)次同車:孔子離開衛國,到了蒲地,一個多月又回到衛國。一天,衛靈公和夫人坐在一輛車上,讓孔子坐在後面的車上,孔子生氣的說:「我從沒有見過像喜歡美貌女子一樣喜歡美德的人!」於是離開了衛國(參見<史記˙孔子世家>、<論語˙衛靈公>、<孔子家語˙七十二弟子>等)。
19~20. 추차동거(뒤 따르는 수레에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다)
공자가 위나라를 떠나 포나라 땅에 도착하였고, 한 달 쯤 뒤 다시 위나라로 돌아왔다. 하루는, 위나라 령공과 부인이 함께 수레를 탔는데, 공자로 하여금 뒤따라오는 수레에 앉게 했다. 이때 공자가 화를 내며 말하였다. “나는 이제껏 여자를 사모하는 것처럼 덕을 사모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에 위나라를 떠났다. (丑=醜)
論語˙衛靈公 12장『子曰 已矣乎라 吾未見好德如色者也로라』
“어쩔 수 없구나! 내 덕(德)을 좋아하기를 여색(女色)을 좋아하듯이 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21、宋人伐木:魯哀公三年,孔子離開曹國到宋國,在大樹下演習禮儀,宋國的司馬桓魋要殺孔子,伐掉了大樹。弟子們勸孔子快走,孔子說:「老天使我有了這樣的品德,桓魋能把我怎麼樣?」(事見<史記˙孔子世家>、<論語˙述而22장>等)。
21. 송인벌목(송나라 사람이 나무를 베다)
노나라 애공 삼년(BC 492년, 공자 60세), 공자는 조나라를 떠나 송나라에 도착한다. 큰 나무 아래에서 제사 예절을 연습하는데, 송나라의 사마환퇴가 공자를 죽이려고 큰 나무를 베어버렸다. 제자들은 공자에게 빨리 떠날 것을 권하였지만, 공자가 말하길 “하늘이 나에게 이러한 품격과 덕을 주셨는데, 환퇴가 나를 어쩔 것인가?”라고 하였다.(老天:하늘 / 怎:어찌 즘)
<옥애(玉崖) 김진여(金振汝) - 송인벌목(宋人伐木)>
※논어 ; 술이(述而) 제22장
『子曰 天生德於予시니 桓魋其如予何리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이 나에게 덕(德)을 주었으니, 환퇴(桓魋)가 나에게 어찌 하겠는가.”』
22、楛矢貫隼:孔子到陳國,寄寓在司城貞子家。過了一年多,有隼鳥飛集到陳國廷中死去,是被長一尺八吋、由制箭桿、石制箭鏃的箭射中的。陳湣公派人去問孔子,孔子說,這是肅慎氏的箭,武王克商以後,曾分給陳國,陳湣公派人到府庫中果然查到這種箭。(事見<史記˙孔子世家>等)。
<작자미상 - 호시관준(楛矢貫隼)>
22. 호시관준(화살이 매를 관통하다)
공자가 진나라에 왔을 때, 사성정자의 집에 기탁하여 살았다. 일 년 남짓 지나, 매 한 마리가 진나라 궁정에 날아들어 죽었는데, 새 순으로 만든 화살대와 돌로 만든 화살촉으로 된, 길이가 50cm에 달하는 화살에 맞아 있었다. 진나라 민공이 사람을 보내 공자에게 물으니, 공자가 말하길, 이는 숙신 사람의 화살로서, 무왕이 상나라를 무찌른 후, 진나라에 나눠준 것이라 하였다. 진나라 민공이 궁정 창고에서 조사해보니, 과연 이 종류의 화살을 찾을 수 있었다.
23、適衛擊磬:孔子過蒲到衛國,和弟子們擊磬,有一個挑著草筐子的人從門前經過,便說:「有深意啊!擊磬的。」過了一會又說:「可鄙啊!磬聲硜硜,這就罷休好了。」,並以<詩經˙匏有苦葉>中的詩句勸諭孔子:「水深,穿著衣裳走過去,水淺,撩起衣裳走過去。」(參見<史記˙孔子世家>、<論語˙憲問>)。
23. 적위격경(위나라에 가서 경쇠를 치다)
공자가 포나라에서 위나라로 갔다. 제자들과 같이 (의례용) 종을 치는데, 한 광주리를 멘 사람이 문 앞에서 지나가며 말하였다. “깊은 뜻이 있도다, 종을 치는 자여” 잠시 후 또 말하기를 “천박하도다, 쨍쨍거리는 경박한 종소리, 그만 치는 게 낫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시경의 포유고엽(박은 쓴 잎을 가지고 있다네)’ 중의 시구절로 공자에게 권면하기를 “물이 깊으면, 옷을 입은 채 지나며, 물이 얕으면, 옷을 걷어 올리고 지나갑니다”라고 하였다.
( 穿著:입다 / 撩起;걷어 올리다)
※논어 헌문(憲問) 제42장
『子擊磬於衛러시니 有荷蕢而過孔氏之門者曰 有心哉라 擊磬乎여』
『공자(孔子)께서 위(衛)나라에서 경쇠를 두들기셨는데, 삼태기를 메고 공씨(孔氏)의 문 앞을 지나가는 자가 듣고서 말하였다. “깊은 마음이 있구나. 경쇠를 두들김이여!”』
『旣而오 曰 鄙哉라 硜硜乎여 莫己知也어든 斯已而已矣니 深則厲요 淺則揭니라』
『조금 있다가 말하였다. “비루하다. 너무도 딱딱하구나! 자기를 알아주지 못하면 그만두면 그 뿐이니, 물이 깊으면 옷을 입고 건너고, 얕으면 옷을 걷고 건너야 하는 것이다.”』
『子曰 果哉라 末之難矣니라』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과감하구나! 어려울 것이 없겠구나!”』
24、學琴師襄:孔子向師襄學習彈琴,十日不更換曲子,襄子勸他練習別的曲子,孔子以還沒有掌握此曲道理而推辭。以後襄子又先後兩次觀他,他又分別以沒有了解此曲志向、為人做理由而推辭。後來才知道此曲是相傳周文王所作的琴曲<文王操>(事見<史記˙孔子世家><孔子家語˙辯樂>)。
24. 학금사양(양자로부터 거문고를 배우다)
공자가 양에게 거문고 치는 것을 배우는데, 열흘이 지나도 곡을 바꾸지 않았다. 양자가 그에게 다른 곡을 연습할 것을 권하자, 공자는 아직 이 곡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이후에 양자가 다시 두 차례 그를 보았는데, 그는 역시 이 곡의 포부와 품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나중에야 비로소 이 곡이 주나라 문왕이 만든 거문고 곡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25、西河返駕:孔子在衛國得不到重用,想到晉國去見趙簡子,到黃河邊上聽說晉國殺了賢大夫竇鳴犢、舜華,他臨河嘆息,認為「君子諱傷其類」,便返歸衛國(事見<史記˙孔子世家>、<孔子家語˙閑誓>)
25. 서하반가(황하 서쪽에서 가마를 돌리다.)
공자가 위나라에서 중용되지 못하자, 진나라로 가서 조간자를 만나고자 했다. 황하 강변에 다달아 진나라가 현명한 사대부인 두명독, 순화를 죽였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강가에 이르러 탄식하며 말하였다. “군자는 같은 군자를 해치지 않는다.” 이에 다시 위나라로 돌아갔다.(諱:꺼릴 휘)
26、靈公問陣:魯哀公二年,孔子回到衛國,一天,靈公問孔子如何排列軍陣。孔子講求禮義,反對戰爭,回答說沒有學過,衛靈公很不高興。第二天,同孔子談話時,靈公仰觀飛雁。孔子於是離開衛國,到陳國去(事見<史記˙孔子世家>、<論語˙衛靈公>)。
26. 령공문진(령공이 전쟁의 진영에 대해 묻다)
노나라 애공 2년(BC 493년), 공자가 위나라에 돌아온 첫 날, 령공이 공자에게 어떻게 군진을 배치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다. 공자는 예와 의를 강조하고 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배운 적이 없다고 답하였다. 령공은 매우 불쾌하였다. 둘째 날, 공자와 이야기할 때, 령공은 날아가는 기러기를 바라보았다. 공자는 이에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갔다.
※논어 ; 위령공 제1장
『衛靈公이 問陳於孔子한대 孔子對曰 俎豆之事는 則嘗聞之矣어니와 軍旅之事는 未之學也라하시고 明日에 遂行하시다』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공자(孔子)에게 진법(陳法)을 묻자, 공자(孔子)께서는 “조두(俎豆)『[제기(祭器)]』에 대한 일은 일찍이 들었거니와, 군대에 관한 일은 배우지 못하였다.” 하시고, 다음날 마침내 떠나셨다.』
27、子路問津:孔子從陳到蔡又到葉,從葉返歸蔡國,碰到長沮、桀溺在一同耕地,孔子派子路去打聽渡口。桀溺說:「像洪水一樣的壞東西到處都是,你們同誰去改變呢? 你與其跟著孔子逃避壞人,哪裡跟得上隨我們逃避這污濁的社會呢?」(事見<史記˙孔子世家>、<論語˙微子>)。
27. 자로문진(자로가 나루를 묻다)
공자가 진나라에서 채나라로 갔다가 다시 엽나라로 갔다. 엽나라에서 또다시 채나라로 돌아올 때, 함께 밭을 갈고 있는 장저와 걸익을 만나서, 공자가 자로를 보내 나루터가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걸익이 말하길 “홍수처럼 못된 것들이 도처에 깔렸는데, 당신들은 누구하고 같이 개혁을 하겠다는 거요?, 당신 차라리 공자하고 같이 못된 사람들을 피하는 게 낫지, 어떻게 우리를 따라와 이 혼탁한 사회를 피할 수 있단 말이요?”라고 하였다. (碰到:우연히 만나다)
28、在陳絕糧:哀公六年,楚國派人聘請孔子到楚國去,陳楚的大夫們擔心楚國重用孔子會給陳楚帶來危險,於是共同發兵將孔子師徒包圍在曠野裡。糧食吃光了,跟隨的人餓得起不來,孔子仍然講誦詩書、撫琴歌詠。後來派子貢到楚國,請來救兵,才得以脫身(事見<史記˙孔子世家>、<孔子家語˙在厄>、<困誓>等)。
28. 재진절량(진나라에서 양식이 바닥나다)
애공 6년(BC 486년), 초나라에서 사람을 보내 공자를 초대하여 초나라로 갔다. 진나라와 초나라의 사대부들은 초나라가 공자를 중용하여 진나라와 초나라에 위험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걱정하여, 함께 병사를 보내 공자와 제자를 빈들에서 포위하였다. 양식이 바닥나고, 따르던 사람들도 배고파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공자는 여전히 시와 서를 읊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하였다. 나중에 자공을 초나라로 보내, 구원병을 보내달라고 청하고 나서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29、子西沮封:孔子到了楚國,楚昭王想把書社之地七百里賜封給他。楚國的令尹子西認為孔子有賢弟子相助,再有了封地,將不利於楚國。楚昭王於是取消了賜封孔子的念頭,孔子也離開楚國,返回衛國(事見<史記˙孔子世家>)。
29. 자서저봉(자서가 영지 봉하는 것을 막다)
공자가 초나라에 도착한 뒤에, 초나라 소왕이 서적 간행을 위한 땅 칠 백리를 그에게 하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초나라 집정관 자서가 공자에게는 현명한 제자가 서로 돕고 있는데, 영지까지 그에게 봉한다면 초나라에 불리하다 생각하였다. 초나라 소왕은 이에 공자에게 영지를 하사하려던 생각을 취소하였고, 공자도 초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돌아왔다.
30、作歌丘陵:魯哀公十一年,孔子六十八歲,在衛國。魯國執政大夫季康子派人攜帶禮物請孔子回國。孔子歸國,作丘陵之歌,抒發自己的感概(事見<史業子˙記問>)。
30. 작가구릉(구릉의 노래를 짓다)
노나라 애공 11년(BC 484년), 공자가 68세 때 위나라에 있었다. 노나라 집정관 계강자가 예물과 함께 사람을 보내 공자에게 돌아올 것을 청하였다. 공자는 귀국하였고, ‘구릉의 노래’(공자의 본명이 구릉(孔丘)임)를 지어 자신의 감개를 토로하였다.
31、杏壇禮樂:孔子回到魯國,結束了十幾年的周遊列國生活,但魯國不用孔子,孔子也不求仕,整理古代文獻,序<書>、傳<禮>、刪<詩>、正<樂>、贊<易>,以詩書禮樂教育弟子,弟子三千,身通六藝者有七十二人(事見<史記˙孔子世家>)。
31. 행단례악(살구나무 제단 상에서 예와 악을 가르치다)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온 뒤, 십 여 년 열국을 주유하던 생활을 마치게 된다. 그러나 노나라는 공자를 임용하지 않았고, 공자 역시 관직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고대 문헌인 서(글), 전(예의), 산(시), 정(음악), 찬(자연원리)을 정리하였으며, 시서예악으로 제자를 가르쳤다. 제자가 삼천이었고, 육예를 체화한 자가 72인이었다.
<謙齋 鄭敾 - 행단고슬(杏壇鼓瑟)>
32、跪受赤虹:孔子著作既成,齋戒向北斗星告備,忽然有赤虹自天而下,化成黃玉,刻「孔提命作,應法為赤制」,孔子跪拜接受(參見<春秋演孔圖>)。
32、궤수적홍(무릎 꿇고 붉은 무지개를 받다)
공자의 저작이 완성된 후, 몸을 정결히 하고 북두성을 향해 완성을 고하려고 할 때, 갑자기 붉은 무지개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노란 옥이 되었다. 거기에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공자는 하늘의 명을 받들어 일을 하고, 하늘의 법에 순응하여 정성으로 만들어 냈다.” 공자는 무릎을 굽혀 절을 하고 받았다.
33. 西狩獲麟:哀公十四年春,魯國打獵打死一頭異獸,形狀像麕,長有肉角,孔子認為是麒麟。麒麟是仁獸,天下有道才會出現。現在天下無道,麒麟出而被殺,「吾道窮矣」,於是停止了魯國史書<春秋>的編寫(參見<史記˙孔子世家>,<公羊傳>,<孔子家語˙辯物>,<孔子業˙記問>)。
33、서수획린(서쪽에서 기린을 사냥하여 잡다)
애공 14년(BC 481년) 봄, 노나라에서 한 마리 이상한 짐승을 사냥하여 죽였는데 형상이 마치 노루 같았고, 살로 된 뿔이 자라나 있었다. 공자는 기린이라 여겼다. 기린은 인애(사랑)의 동물로서, 세상에 도가 있으면 겨우 출현하는 것인데, 지금 천하가 무도하니, 기린이 나타나자마자 죽임을 당하였다고 여기고 ‘내 道가 다했구나.’ 라고 하여, 노나라 역사서 ‘춘추’의 편찬을 중지하였다.
34、夢奠兩楹:哀公十六年,孔子病重,子貢拜見,孔子問子貢為什麼來得這麼晚,並傷心地唱道:「泰山其頹乎!梁木其壞乎!哲人其萎乎!」淚隨歌下。孔子說,昨天夢中坐奠兩柱之間,很像殷人殯喪的制度,認為自己快要死了。四月乙丑去世(事見<史記˙孔子世家><禮記˙檀弓上>等)。
34、몽전량영(성전 두 기둥을 꿈꾸다)
애공 16년(BC 479년), 공자의 병이 중하여, 자공이 문안하였는데, 공자가 자공에게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물으며, 슬픔에 찬 노래를 하였다. “태산의 무너짐이여, 대들보의 부러짐이여, 현인의 쇠약함이여!” 눈물이 노래와 함께 흘렀다. 공자가 말하길, 어제 꿈에 제사 성전 양 기둥 사이에 앉았는데, 흡사 은나라 사람이 상을 치르는 의식을 하는 것 같아서, 자기가 곧 죽을 거라 했다. 4월 을축시(북경시간 1시~3시)에 죽었다.
35、治任別歸:孔子死後埋葬在魯國都城以北的泗河邊上,弟子服喪三年,相別而去,獨有子貢在墓側結廬守墓六年才離去(事見<史記˙孔子世家>、<孟子˙滕文公上>等)。
35、치임별귀(맡아 지키고 떠나 돌아가다)
공자가 죽은 뒤, 노나라 수도 북쪽의 사하 강변에 묻었다. 제자들이 3년 동안 상복을 입고난 뒤, 서로 작별을 고하고 떠났으나, 자공만은 홀로 무덤 옆에 오두막을 짓고 육 년을 지킨 뒤 떠나갔다.
36、漢高祀魯:孔子死後,人們每年按時祭祀孔子墓。孔子故居被改作廟宇,保存著孔子生前使用過的衣、冠、琴、車、書。漢高祖劉邦經過曲阜,也以太牢(豬、羊、牛 三牲)祭祀孔子(事見<史記˙孔子世家>)。
36. 한고사노(한나라 고조가 노나라에서 제사지내다)
공자 사후에, 사람들은 매년 시기에 맞춰 공자묘에 제사를 지냈다. 공자의 옛 집은 사당이 되었고, 공자 생전에 사용하던 옷, 관, 거문고, 수레, 책을 보관하였다. 한나라 고조 류방은 곡부를 지날 때, 태뢰(돼지, 양, 소 세 가지 희생물)를 바쳐 공자에게 제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