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갈라디아서 설교를 시작했다. 요즘은 설교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변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갈라디아서 설교를 보면 틀이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러 권의 책을 참고하다보면 여기 저기 뼈대가 되는 몇 권의 책들이 많이 인용되기도 한다.
설교학을 배울 때는 본문에 충실한 주해를 많은 시간 배우지만, 청중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청중의 분석과 전달의 과정을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쉽지 않다. 설교자 스스로가 자신의 청중들에게 맞는 설교를 전달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2. 잠언에는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골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잠 1:20~21) 라고 말하면서, 지혜는 책상이 아니라 현장에서 지금도 소리를 지르고 있다고 설명한다.
반드시 현장에서만 배울 수 있는 지혜가 있다. 심방을 통해서, 소그룹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한다. 목회자가 사람들을 만나서 무엇을 가르치며 말을 많이 하기보다 질문을 통해 들어야 한다. 성도들을 만나 삶의 현장의 이야기들을 들을 때 무엇을 어떻게 전해야할지가 자연스럽게 결정된다.
3. 주해도 필요하고, 성경의 내용을 잘 설명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적실성있게 들려야 한다. 팀 켈러는 '문화 내러티브를 평가하고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화 내러티브란 성경의 진리가 아니라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잘못된 가짜 진리를 믿는 것을 말한다.
바울의 시대에 바울이 싸운 것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 이었다. 이것을 자세히 해설하고 그 시대의 상황을 분석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또 중요한 것은 오늘날 '율법'에 해당하는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분석하고 알려주어야 한다.
4. 존 바클레이는 당시 사람들이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는 이유 중의 하나를 사회적 보장, 여러가지 혜택이 있었다고 말한다. 유대교로 돌아가는 이유 중의 하나가 교리적 확신 때문이라기보다 개인에게 이익이 돌아가기 때문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율법주의는 오늘날 자기개발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내가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정신을 가질 때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가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들이 점점 줄어든다. 신앙의 기초를 쌓으려면 예배를 사모하며, 개인적으로 말씀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기본적인 신앙의 패턴이 훈련되어야 한다.
5. 그러나 많은 현대인들은 기도와 말씀에 대해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의 상황의 문제만도 아니다.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율법주의는 자기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들어와서 더욱 노력하고 더욱 애쓰게 하지만 결국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삶을 살아가게 한다. 바울은 행위로 돌아가려는, 복음이 변질되는 상황에 대해 분노한다. 복음에 대한 애정 즉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이며,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불타는 사랑 때문에 바울은 소리를 높인다. . 6. 오늘날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이 때에, 나는 바울처럼 소리를 높이는, 사랑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소리치는, 간절함이 있는 사랑의 목회자인가를 되돌아본다. 바울의 열정이 있는가? 한 영혼을 위해서 갈등을 피하지 않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외칠 수 있는 확신과 사랑이 있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해본다.
바울은 그런 삶의 결과가 뻔히 보이기 때문에 '저주'한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진정한 은혜의 복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외친다. 복음적 삶은 하나님을 위해 내 삶을 희생하기를 기뻐하는 것이고, 오늘날의 율법주의는 내 삶의 기쁨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7. 팀 켈러는 문화내러티브를 분석하고 평가하고 도전하는 과정에서 조용하지만 바울처럼 우상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 탁월함을 배우고 싶다. 또한 한국적 상황에서는 좀 더 정적인 호소가 필요한 것 같다. 바울처럼 격정적으로 외치는 본문에서는 함께 격정적이 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내 안에 확신과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하나님을 향한, 복음을 향한 확신이 있다면 분명히 선포할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을 향한 바울같은 사랑이 있다면, 반드시 복음 안으로 들어오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싸움처럼, 오늘날도 갈라디어서 갈등은 지속되고 있는 것 같다. 믿음으로, 복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방식을 사는 사람들은 사라지고 자신을 기쁘게 하는 신앙이 점점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다.
8. 오늘날 바울이 강단에 선다면 과연 어떻게 설교할까? 바울의 열정에 압도되어 버렸다. 정말 나는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확신있게 갈등을 일으킬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어떤 저항이 있어도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만큼의 사랑이 있는가? 주해의 과정은 어렵지 않지만 선포의 과정은 어렵다. 내가 바울이었다면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이 왔을 때 피한 사건 또한 공개적으로 복음을 위해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공개적으로 아무말도 못하다가 사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면 베드로를 욕하고 다녔을 것 같다. 이렇게 비겁한 내 삶과 바울의 삶은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위해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건강한 갈등 유발자로서의 바울은 정말 배우고 싶지만 힘든 영역이다. 복음의 자유를 위한 싸움으로 갈라디아서묵상을 시작했지만, 목회자인 나의 내면의 싸움으로 점점 다가온다.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을 직시하라고 갈라디아서는 점점 나를 조여오는 것 같다.
9. 나는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사람인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사람인가? 지금까지 나의 설교는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쪽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라는 것은 책망이 빠진 은혜의 설교는 아닐것이다. 복음중심적 책망에 대해, 바울의 열정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다. |
첫댓글 나는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사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