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너(W.Turner), 〈노예선〉(The Slave Ship), 1840, 91×123cm, 보스턴미술관.
바다가 검다. 사람들의 손이 촉수처럼 삐져나왔지만 곧 가라앉을 것이다. 촉수 같은 손의 주인들은 쇠사슬에 묶인 노예들이다. 배에 태워져 수송되던 중에 바다에 던져졌다. 왜 노예들이 바다에 던져졌을까. 1781년의 일이다. 노예선 선장이 ‘살아 있는 짐’에 대해 보험을 들었는데, ‘짐’이 죽어 버리면 보험금을 받을 수 없어, ‘해상 손실’로 처리해 보험금을 청구하려고 132명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쇠사슬을 멘 채 바다에 던져 버렸다. 바다가 검은 색으로 변한 것으로 아프리카 흑인들의 죽음을 온 몸으로 고발하는 것일 터다.
하늘은 핏빛이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죽이는 걸 목격한 하늘이 피눈물을 흘린 게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처럼, 아벨의 피를 받은 땅이 붉은 것처럼, 하늘마저 피눈물로 붉다. 이전 세대는 가고 새로운 세대가 왔지만, 하늘은 여전히 충혈된 눈으로 세상을 본다. 1950년의 일이다. 한반도에 총탄과 포탄이 터지던 3년 동안 적어도 1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죽었다. 화약 연기에 충혈되고, 사람들의 죽음에 피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6월의 하늘색은 핏빛이다.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1775-1851)는 현실 자체보다 심상을 그리려 했고, 풍경보다 풍광을 표현하려 했다.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화가의 심상과 가시광선보다 근원적인 풍광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터너의 바다는 검고, 터너의 하늘은 핏빛이다.
핏빛 하늘과 검은 하늘 복판에 느닷없는 빛이 기둥처럼 서 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세상에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시니 존재하던 그 빛이다. 찰나의 빛이 나마, 희망이다. 노예선에 실려 가던 사람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다에 던져지고, 물에 가라앉기도 전에 물고기들에 뜯기는 끔찍한 상황 중에도, 빛이 있다면 희망이다. 빛이 보이는 것은 찰나일지라도, “빛이 있으라”라고 명하신 이가 여전히 말씀하신다면, 검은 바다 위 핏빛 하늘 아래서도 희망하겠다.
그림 하단 복판에 파도의 포말이 없는 평평한 물길이 하늘의 빛과 닿아 있다. 빛이 기둥처럼 핏빛 하늘에 세워지고, 검은 바다 위에 런웨이 같은 길이 났다. 걸으라면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런웨이가 뒤집히는 바다 위에 놓여 있다. 예수께서 폭풍 치는 갈릴리 바다 위를 걸으셨을 때처럼, 베드로가 예수처럼 물 위를 걸었을 때처럼(마 14:25-30) 히브리인들이 홍해 바다 사이를 걸었을 때처럼, 물 위에도 길이 있다. 다만 빛을 보고 걸어야 한다. 오직 빛만 보고 걸어야 한다. 빛은 번개처럼 찰나에만 보이기에, 빛이 보이지 않을 때에라도 빛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바다로 던져졌다면, 리워야단 같은 괴물과 마주하게 됐다면, 물 위로 걸어오는 빛을 보라.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그분이 오시는 길이 곧 내 갈 길이다. 검은 바다 위 핏빛 하늘 아래에 걸어갈 길이 있다.
첫댓글 이 불의하고 고통스러운 세상을 살아갈 힘은 오직 물 위로 걸어오시는 빛,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 분이 오시는 길이 곧 내 갈 길임을 기억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