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할 수 있는 정영문[1]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 작품론
00.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2]를 읽다 그만둔 지점은 우주선에 탑승한 고양이를 기념한다기보다 회상하는 일련의 문단이다. 그 이후로 대중없이 펼쳐보고 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전작인 <오리무중에 이르다>나 <어떤 작위의 세계>를 함께 펼쳐보기도 한다. 어떤 장면은 붙기도 하고 어떤 장면은 붙지 않기도 한다.
여기서 사용한 ‘장면’이란 어휘는 의식적으로 택해진 것은 아니다. 나는 왜 장면이라고 쓴 걸까. 장면(張勉)은 대한민국의 제4대 부통령이지만 아쉽게도 여기서 내가 떠올린 장면은 영화의 쇼트(shot)나 전시장을 채우고 있는 그림 한 점(點)에 가깝다. 따라서 그가 쓴 글의 더미는 유동적이며 관객들에게 자신의 글을 해체해서 재구성하라는 요청이나 유혹을 하지는 않을지언정 자기 영화를 보면서 졸아도 된다고 했던 유럽의 모 감독이나 반달리즘과 퍼포먼스를 분간하기 어려운 한 단체의 회원들이 작업복을 입고 갤러리를 찾아와 ‘의도적으로 흩뿌려진’ 레디메이드 작품을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고, 당황한 갤러리 측은 작가에게 다급히 연락을 취했지만 ‘상관없지 않나?’라고 말했다던 유럽의 모 작가처럼(왜 전부 유럽일까?) 우리가 그의 글을 여기저기 스크랩하거나 다시 이어 붙여도 정영문 씨가 역정을 내진 않으리라는 것이다.
장면을 재배치한다는 말이 텍스트를 한 문장, 한 문단 단위로 완벽하게 분해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닌데 가령 잭슨 폴록이 한 캔버스에 그린 작품을 정방형으로 잘라 팔면서 “내 작품은 어떻게 잘라가건 동일하다”고 말한 것과 같은 특성을 그의 작품에 비유하고 싶다는 철없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비약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 목차는 없지만 가상의 목차는 존재한다.[3] 물론 이 목차란 작품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선형의 구조 위에 찍힌 지표는 아니지만, 의미 단위로서의 시퀀스를 구분해 볼 수는 있다. 쇼트(shot)를 문장, 인접성에 따라 묶인 쇼트들을 씬(scene)이라고 한다면, 씬들은 시퀀스(sequence)로 결합됨으로써 작은 이야기 단위를 이룬다. <강물>은 시퀀스들의 순서를 배열할 수 있고, 종종 한 시퀀스 내부의 씬과 쇼트들을 섞을 수도 있지만, 시퀀스를 횡단하면서 쇼트와 씬을 교환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강물>에서는 이런 삼중의 구분 역시 다소 모호한데, 말하는 대상이 아니라 말하고 있다는 의식적 행위가 부각됨에 따라 <강물>이라는 결합체 내부에는 작은 이야기(시퀀스)들이 갖는 기능과 지위가 상대적으로 균일해진다. 이에 상응하듯 문체의 측면에서 쇼트(문장)의 길이가 극단적으로 길어지며 때로는 한 문장이 한 문단을 넘어 플랑 세캉스(plan sequence)[4]에 가까워 지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이야기 중 하나를 건져내어, 빗방울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흘려보내는 놀이와 같이 강의 이곳저곳에 놓아볼 수 있다. 한번 해보아도 좋다. 그것은 그곳에 맞게 또다시, 아니면 ‘또’나 ‘다시’와 같은 시간의 범주들과 무관히 떠내려간다. 우리는 그것이 떠내려간다기보다 그것이 곧 강물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이 글은 강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01. 강물에서
서사(narrative)라는 말은 애매하고 모호한 말이다. 문학에 한정 짓지 않더라도 여타의 사상 일반에서 서사의 부정이 천명되어 왔다. 우리는 80년을 맞이하며 리오타르가 쓴 <포스트 모던의 조건>에서 공식적 시초를 찾아볼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면 너무 멀리 돌아와야 할 것 같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서사라는 어휘 아래로 모인 의미들을 제멋대로 꿰어볼 뿐이다.
“유럽 노블과 한국 노블의 일반적 사례들에서 소설가의 자아는 특정 인물의 형태로 출현하기보다 오히려 다수의 인물을 고안하고 배치하고 관계시키는 행위 속에 암시된다. 소설가의 자아는 다수의 의식을 서사적으로 통합하여 사회적으로 공유가 가능한 세계의 표상을 만들어냄으로써 그 선험적 권위를 실현한다.” [5]
이는 황종연 씨의 「노블, 청년, 제국」의 맥락 없는 인용이다. 우리의 시야에는 으레 서사의 결과물만이 나타나지만 서사는 단순히 시간이나 인과라는 범주 아래에서 형성된 의미의 흐름, 흐름의 총합이 아니다. 서사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가상선을 따라가면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가상선 자체도 아니거니와 내 생각에는 그 손가락이다. 혹은 <일본근대소설의 기원>에서 고진이 말한 선형원근법의 비유를 빌리면, 일점투사에 의해 형성되는 원근법적 짜임 그 자체이지 그것을 채우고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렇기에 서사는 시간적이라기보다 실상 공간적이다. 그 짜임 내부에서 각각의 요소들은 자신의 자리를 부여 받는다. 그리고 자아는 이러한 서사의 일점의 위치에 가정적으로 위치한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이르러 “진실을 추구하며 그 자신을 다른 진실 모델에 선행하는 것으로 그 모델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하는 “소설가의 자아”가 이제 사회적으로 무용한 것이며 미학적으로는 따분하다고 취급받는다 하여도, 우리는 ‘소설(가)의 자아’에 관하여 물을 수 있고 물을 가치가 있다. 그 자아에 우리는 이제 사회적이라거나, 미학적이라거나, 구조적이라는, 역설적인 어휘들을 가져다 붙일 수도 있다(그리고 우리는 이 외양상의 역설을 다시 되돌려 놓아야 한다). 여하간 어떤 술어든 와서 달라붙을 수 있는 자아의 선험성(transcedentalness) 앞에서, 정영문이라는 소설(가)의 자아는 어떤 것인지 묻고 싶다.
02. “우리는 ‘나’로부터 벗어난 것인가?”
이는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가 사소설을 비판하며 했던 말이다. 1인칭 ‘나’의 문제는 곧 자아의 문제가 가장 가시화된 형태일 것이다. 철학을 코기토(Cogito)에 근거 지으려다 심리주의로 발이 미끄러진 사람들 옆에서, 소설 또한 ‘나’의 순수한 활동성 위에 서사적 주체성을 덧입히며 선험적 자아와 심인적 자아를 동일시하는 자폐적 세계의 상을 만들어 내는 일이 빈번하다. 여기서 까다로운 것은 ‘나’로의 환원이 단순히 1인칭을 버린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인데, 그것은 텍스트 내부의 한 요소인 ‘나’가 아니라 ‘텍스트’라는 종합의 차원으로 옮겨가 여전히 존속하면서, 이런저런 사건과 의미들을 선험적으로 결정짓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은 이야기들은 전체이자 하나인 큰 이야기(나)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 소설이 움직이는 2차원의 시간을 부감으로 촬영해보면 이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는 히데오가 예언하듯 쓴 다음 문장을 기억해야 한다. “사소설은 다시 새로운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6]
그렇다면 1인칭의 연속이 빈번히 발견되는 정영문 소설의 ‘나’는 어떠한가? 물론 이 ‘나’는 모든 사건의 중심에 서서 그것을 가능케 하는 주체가 아니라 가상의 중점과 같은 것이다. 모든 쇼트가 시점쇼트로 찍힌 영화, 그러나 시점의 주인공은 결코 등장하지 않는 영화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것이 “누군가”의 시점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누군가”는 카메라의 운동에 따라 그 성격 여하가 결정되는 것이지 이것이 “누군가”의 시점이라는 형식적 가설의 필연성에 따라 특정한 주관에 매몰되는 것은 아니다. 주어의 자리, 따옴표의 내부는 비워두어도 좋다.
정영문 씨의 ‘나’를 마주하기 전에(마주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잠시 돌아가 보자. 다음은 에두아르 르베(Edouard Leve)의 <자화상>의 한 부분을 내가 임의로 잘라온 것이다(이 텍스트는 정영문 씨가 번역하여 2015년 은행나무 사에서 출간되었다).
“나는 적어도 3년 전부터 고무장화를 신지 않는다. 나는 불필요한 것은 억제한다. 나는 지팡이를 들고 다니면 더 멋져 보인다. 나는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나는 말을 많이 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나는 하루에 세 번 먹는다. 나는 간식을 먹지 않는다. 나는 하루에 차를 2리터 마신다. 나는 적어도 하루에 한번은 외출해야 한다. 나는 여섯 살 때 몽파르나스 대로에서 사촌과 경주를 했는데, 우리는 각자 다른 보도에서 중학교로 뛰어갔고,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길을 건너다 자동차가 나를 쳤다.……”[7]
물론 이러한 기법은 정영문 씨의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여기서는 ‘나’의 과잉이, 미처 돌이켜 심리적으로 회상할 틈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나’가, 우리가 1인칭을 사용하는 일상적 용법의 동기가 되는 심리적 ‘나’를 오히려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반면 정영문 씨의 ‘나’는 과잉되기보다 어느샌가 잊히고 되찾기 어려워지는 지경에 이르는데, 이는 번역가로서 글쓰기를 시작한 정영문 씨 문체의 특징과도 상응할 것이다. 정영문 씨의 만연체는 그것이 쓰인 한국어의 운율적 감각에 의해 지탱된다기보다, 영어를 비롯한 인도유럽어족의 문법적 특징인 관계사에 의해 한없이 길어지는 수식과 명제 논리식으로 기호화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명확히 짚어지는 연결사들(아니다~, 또한∨, 그러나 및 그리고∧, 이면→)의 조합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이 고양이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다른 것들로 보이기도 하지만 고양이가 아닌 다른 것들이 되어가는 고양이는 아닌 이 고양이는 고양이로서 더할 나위 없는 고양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이 고양이의 이름은 아직 없고, 그래서 어떤 이름으로도 불릴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나는 내가 키우고 있는, 혹은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고양이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양이로 부르고 있는데 내가 고양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고양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고양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데, 사실 그것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없다.”(58-59쪽)
우리가 중심으로 인지하는 것은 ‘나’도 아니고 실상 ‘고양이’도 아니다. 이러한 익명성의 감각은 문체와 일치된 의식의 진행 방향이, 화자나 저자의 특수성에 의존하기보다 사유 형식의 일반성에 의존하여 발생한다. 그렇기에 문장과 텍스트의 주체는 특정한 사적 자아로부터 벗어나 의식의 운동성에 가까워진다. 그곳에서는 X와 –(not)X의 놀이만이 계속된다. 위의 예시가 긍정(X)과 부정(-X)의 계속되는 꼬리물기라면, 우리는 아래와 같은 병치도 곳곳에서 즐길 수 있다.
“나는 소설 속 인물들에게 좋거나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서로에게 좋거나 좋지 않은 말이나 행동을 해 그로 인해 서로가 서로에게 좋거나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서로에게 가까워지거나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서로가 좋거나 좋지 않게 사람이 달라지고 뭔가가 바뀌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어쩌면 재래식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은 언젠가 이후로 쓸 수 없게 되었는데……” (59쪽)
놀이에 참여하는 문장은 명제화 되기를 거부하며 진리주장을 문장 자신의 한계까지 미루다가, 마지막에 이르면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 없었다”거나 “상관없었다”거나 “알 수 없었다”거나 “일 것 같았다”는 유예와 부정의 결론으로 빠져나간다. 지난하고 즐거운 문장게임의 지속을 함께하면서, (김태환 씨가 <어떤 작위의 세계>의 해설에 달았던 “세상이 강요하는 가짜 의미들과의 대결”이라는 말처럼) 여타의 가짜 선험성들은 스스로 벗겨져 나간다.
03. 웃는다는 것
그럼에도 누군가 심각한 표정으로 <강물>을 보고 있는 모습이란 상상하기 어렵다. 이 <강물>에 오즈월드, 마르크스, 콩시더랑, 고향을 빼앗긴 텍사스 원주민들이 흘러감에도 마찬가지며, 앞서 내가 덧붙인 헛소리들이 달라붙어도 마찬가지다. <강물>에서 느껴지는 모종의 가벼움은 정영문 씨의 탁월한 유머 감각 때문일까? 물론 그렇지만 이 역시 필요조건일 따름이다. 바다와 달리 ‘깊이’라는 관념을 거절하는 <강물>은, 3D 그래픽 기반의 게임 속에서 우리는 강물을 볼 수 있지만 들어갈 순 없다는 역설처럼, 강물의 텍스쳐를 지녔을 뿐 그것은 레이어(layer) 이상의 본체적 관념을 거부한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7인의 사무라이로 출현”하고 “7인의 사무라이만 떠내려가는” 강물임에도 “그들이 떠내려가는 강물에 다른 무엇이 떠내려가도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하며” “7인의 사무라이는 3인의 사무리 혹은 9인의 사무라이여도 상관없었고, 사무라이들이 아니라 7인의 서부의 총잡이여도 상관없”으며(60-61쪽), 55쪽에서 시작해 59쪽에서 마무리된 작은 따옴표가 사실은 <강물> 전체에 쳐져 있기에, 이 소설은 “7인의 사무라이 역시도 강물에 떠내려가면서도 그것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고 마무리되는 것이다.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마치 내 생각을 읽고 관심을 보이기도 하는 것 같은 7인의 사무라이”를 마주한 당신은 강물의 바깥에도 안에도 있을 수 없고 당신이 강물을 바라보는 것인지 강물이 당신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강물>에서는 고루한 인식론적 이분법이 허용되지 않는다. 강, 물, 당신, 혹은 나, 어느 쪽이건 상상적 주체는 사라지고 의식의 활동이 전면에 나선다. 우리에게 가벼움을 선사하는 것은, “—에 관한 것”이 아니고서야 지금 말하고 있는 자 따위는 곧장 사라지리라는 <강물>의 필연적 예감이다.
이 가벼움의 곁에서, 우리는 서사의 목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유유히 흘러가는 우연성의 감각 또한 획득한다. 서제이며 텍스트의 중반부터 언급되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는, 즉각 헤라클레이토스의 비유를 떠올리게 하지만 우리는 자연철학의 원자설을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바닥없는 바닥으로 끝없이 내려가는 원자들처럼, 사무라이들은 강물의 흐름에 따라 때로는 서로에게 몸을 부딪히며 떠내려간다. 칠리콩—오즈월드—우주선으로 이어지는 도입부가 그렇듯, 시퀀스가 구분되는 지점들에서 의식의 대상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이동한대도 우리가 그것을 ‘어색하다’고 느끼지 않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 글에는 어디로 가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한다 등의 입장이 없기에 ‘우연성’은 어떤 결함이나 미결의 부정성이 아니라, 그저 받아들일 수 있는 원리의 차원으로 이해되어 버린다. 우리는 ‘칠리콩을 먹음’, ‘폭포의 사진을 봄’, ‘텍사스를 생각함’이라는 의식의 최초 격발 이후에, 의식이 원자처럼 여기저기 부딪히고 자기들끼리 튕겨져 나오는 이 운동성을 따라야 하지, “당신은 왜 여기서 저기로 움직였습니까”라고 물을 수 없다.
04.
“나로 하여금 종잡을 수 없는 생각에 빠지게 하는 것에는 플롯도 있었는데” (69쪽)
앞서 언급한 ‘서사’라는 말을 여기서 플롯과 대치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플롯은 여기저기 흩뿌려진 사건들을 하나의 형상으로 묶어내, 마치 별자리의 이름을 붙여주는 가상의 이음줄 역할을 한다. 혹은 앞서 인용한 원근법의 비유 아래서, 원점에서 뻗어 나오는 투시도선들을 플롯이라 불러도 무관하다. 정영문은 플롯이 사물들을 분류해버리기 이전으로 돌아가, 플롯을 사물의 지위로 끌어내린다. 그렇기에
“허리가 잘려나간 플롯. 탁구공들이 이리저리 튀어 다니는 탁구대 플롯. 정어리 통조림 플롯. 해부된 개구리 플롯. 약 오른 플롯. 독 오른 플롯. 자기기만적인 플롯. 먹다 남았지만 마저 먹을 수 없는 플롯.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허허벌판을 걸어가는 플롯…” (69쪽)
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플롯이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혹은 반대로 말해 그 의미를 제외한 다른 의미들은 박탈하는 구조라면, 이런 플롯의 기원은 소설의 내면이 아니라 소설의 바깥에서 들여온 것이다. 우리가 플롯이라는 가상선을 축조하여 그것들이 모이는 어떤 소설적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화되기를 거부하는 어떤 모순적인 소실점으로부터, 다만 그것이 구체화되려는 욕망의 짜임새를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정영문이 나열하는 플롯의 의미는, 이렇게 ‘의미화되어 있는’ 의식을 발견하고 조합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화하는’ 의식 자신과 맞닿는 모든 것이 플롯이 ‘될 수 있다’는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역설적인 가능성과 충만함이다.
05.
그러다 마침내, 정영문 씨는 소설의 중단까지 선언하기에 이른다.
“말 그대로 막장 소설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어떤 장르 소설을 쓸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 소설을 쓰고 나면 더 이상 소설 같은 것은 쓰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62쪽)
그런데 이 말은 내 기억 속에서 오에 겐자부로(大江 健三郎)를 떠올리게 한다.
“내게 소설은 이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쓰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지금껏 부모로서 아들에게 사회와 소통하는 법을 알려 주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 이제 목적을 이루었으므로 내 일은 끝났다. 아들과 함께 생활하는 삶에 비하면 소설은 내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8]
조금 더 공적인 느낌을 원한다면, 우리가 이미 충분히 답변했다고 생각하는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왜 정영문 씨는 그런 소설을 쓰고 나면 소설 같은 것을 쓰지 않아도 될까? 이 문단의 앞, 7인의 사무라이는 목적 없는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다가 결국 그들을 둘러싼 세계(“막장”)가 무너져 내려 죽는다고 묘사된다. 이토록 무의미한 세계의 상을 언어로써 들춰내는 것이 정영문 소설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간편한 말이다.
여기서 느껴지는 것은 결단코 그런 소설 따위는 쓰지 않으리라는 풀죽은 의지에 가깝다. 데리다의 표현대로 문학이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제도”라면 그는 이 제도 아래에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는 말을 해체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렇기에 “누구든 이 플롯들로 시나 소설을 써도 좋지만”, 정영문 씨는 “그 경우 내게 알려주길”(71쪽) 바라고 있다. 그의 소설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정치적 사건들이, <강물>에서는 삽화처럼 삽입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변화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발신자/수신자, 보여주는 자/감상하는 자의 관계로 규정되기보다 텍스트와 동일시되는데, 이는 서사의 서정성에 이입되어 구조의 이끌림을 받는 몰입과는 다른 것으로, 앞서 언급한 주체성의 약화, 익명성의 공유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어떠한 서사로도 이행하지 않으려는 현상에의 머무름, 대상을 규정하지 않으리라는 끊임없는 의식의 뒷걸음질, 뒷걸음질 치는 의식 자신만이 남는 본질적인 미완성주의, <강물>은 이 위치에서 흐른다.
서문에서 감춰둔 의문을 이제 꺼내고 싶다. <강물>에서 즉각 흥미로움을 유발했던 것은 이 무력한 남자가 어떻게 계속 움직이고 있냐는 점이었다. 그리고 정영문 씨의 미완성주의가 절망의 정서적 결과 따위가 아님은 그가 언제나 유머를 유지한다는 사실에서도 확신할 수 있다. 아무리 이야기 따윈 허상이래도, ‘이야기를 할 수 없다’거나 ‘해서는 안 됨’을 뜻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부정의 형태로나마 말을 이어가고 싶다. 가령 영화 <버닝>에서,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작가가 되고 싶지만 아무런 이야기도 쓸 수 없던 종수가 (왜냐하면 전쟁이 있고 경제성장이 있고 민주화운동이 있던 시대는 종수에게 이제 허물어 가는 집의 영정사진처럼 보이니까) 결국 이야기를 쓰게 되는 것은 서사가 부재한, 오히려 서사가 주체를 거부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그럼에도 계속 이야기를 강요받는 세대를 향한 이창동의 부탁일 것이다. 혹은 2000년대 들어 젊은 세대의 초상으로 그려진 “자취방 리얼리즘”이 “때로 아름다웠지만” 이젠 “오래된 무기력과 우울이 시선의 힘을 소진시켰다는 느낌” [9]을 지우기 어렵다는 한 평론가의 말처럼, 우리는 이제 서사에 대한 불가능한 욕망에서,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좌절에서, 혹은 그것이 쾌락원리로 전환되어 가는 것을 즐기는 마조히즘적 상태에서 벗어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문학에서 급증한 평면적인 형식 실험, 실험이라는 낱말을 벗겨내면 실상 사소설과 다를 바 없는 ‘나’의 관념적 고백들도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금 “참여”와 같은 소진된 언어를 간단히 불러내고 싶진 않다. 그렇기에 나는 정영문에 대하여 썼다).
나는 이 물음에 답하는 일을 비평이 아닌 각자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싶다는 나의 한계와 욕구를 고백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새로운 이야기의 숙명인지 혹은 낡은 윤리적 전제인지 또한 모를 일이다. 한동안 나의 모든 글은 이렇게 끝날 것이다.
[1] 본 표제는 동명의 독립출판물(김현경·정성동 제작, 아무것도 할 수 있는, warm grey and blue:서울, 2017)에서 차용함을 밝힘.
[2] 이하 <강물>.
[3] 이 글에서 문단 사이의 간격이 띄어진 지점은 총 5군데다(22p, 29p, 46p, 54p, 71p).
[4] 하나의 쇼트가 상위 단위인 씬이나 시퀀스의 기능을 하게 되는 경우. <강물>에서 한 문단을 한 씬이라 일괄적으로 등치하기는 어려운데, 가령 자체적으로 문단이 구분되는 71p에서 시작해 78p까지를 장소와 제재로 나눠보면 다음과 같다.
C의 집 / 칠면조 고기 — 야생 칠면조 — 칠면조 연합
술집 / 카우보이들이 모인 술집 — 카우보이와의 만남
교회 / 카우보이들이 모인 교회
특정한 제재는 대개 한 문단 단위와 일치하지만 카우보이와의 만남은 74p-77p까지 총 4문단을 차지한다. 여기서 제재의 변화가 주로 화자의 장소적 이동에서 비롯되고 그렇게 이동해 간 장소의 성격으로부터 발전되는 점도 주목할만 한데, 이 우연성은 이후 본문에서 언급할 것이다.
[5] 황종연, 『탕아를 위한 비평』, 문학동네, 2012, 394쪽.
[6] 고바야시 히데오, 유은경 역, 『고바야시 히데오 평론집』, 소화, 2013, 124쪽.
[7] 에두아르 르베(Edouard Leve), 정영문 역, 『자화상』, 은행나무, 2015, 114-115쪽.
[8] 정회성 역, 오에 겐자부로·오자와 세이지, 『문학과 음악이 이야기한다』, 포노, 2018, 31쪽.
[9] 허문영, 「자취방의 영화」,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546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