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30여년전 한국은 서방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전도 종족 국가 가운데 한 나라였습니다. 가난과 문맹의 굴레속에서 우상을 섬기며 소망없이 살아가고 있던 이 땅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찿아온 이름 모를 개척자들의 헌신과 순교의 피 위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불과 한 세기 전 복음의 불모지였던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이 이제 21세기 해외선교의 주역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읍니다.
이제 작은 힘들이 모여 주님의 지상명령을 성취하기 위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군사들과 주님에 대한 애틋한 첫사랑의 회복을 기원하는 많은 하나님의 군사들에게 한반도 “한글성경 전래의 길”을 찾아보며, 이제 무르익어 추수를 기다리는 저 넓은 중국대륙의 영혼구원과 아직도 얼어붙은 영혼의 동토, 북녘땅의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행하는 “한글성경 전래의 길” 복원운동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쉽게 구할 수 있는 한글성경의 시초는 1882년 3월 24일 중국 심양에서 문광서원의 이름으로 간행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었습니다. 이 한국 최초의 성경을 번역하고 발간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의 선교사인 존 로스목사와 6명의 의주 청년들이었습니다.
평안북도 의주 사람인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서상륜, 이청송 등은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들이었고 민족 복음화를 위해 파송받은 최초의 한국 선교사들이었습니다.
1883년 봄, 이성하는 조국을 복음화할 웅대한 뜻을 품고 인쇄된 복음서를 등에 지고 중국 심양을 출발하여 압록강 강변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복음서를 구련성이란 여관에 숨겨 놓고 잠시 방을 비웠는데 그 사이에 주인이 들어와 짐을 풀어보고 이 책이 나라에서 금하는 사서임을 알고 대경실색하여 일부는 압록강에 흘려 보내고 일부는 불에 태워 모조리 없애 버리고 말았습니다.
후에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존로스 목사는
"성경책이 던져진 강물을 마시는 조선인들은 생명수를 얻을 것이며 불에 탄 성경의 재는 조선 교회를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습니다.
한반도의 민족 구원을 위해 그 모진 핍박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던 선지자들의 희생과 순교의 피가 그 때 압록강에 뿌려진 성경책처럼 이 땅에 복음의 생수와 거름이 되었습니다.
한민족 복음전파의 성지와 유적들은 중국문화혁명과 무관심속에 자취는 사라지고 그 역사기록만이 남아 있고, 복음의 전래기지였던 압록강을 위시한 북녘은 도리어 복음의 문이 굳게 닫혀 있고 굶주린 영육들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더욱 가슴아픈 일은 육적인 굶주림이 지속될수록 영적인 갈증과 굶주림은 더해져간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누가 그들에게 복음의 생수를 전해줄 수 있을까요?
이제 그곳에 다시 생명의 말씀이 우리민족에게 전해진 곳을 복원하는 운동과 얼어붙은 동토, 북녘에 성경을 전래하는 새로운 소명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 생명의 말씀이 저 북녘땅에 살아 숨쉬는 그날을 위해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할 때 입니다. 우리들이 기도로 북한선교와 복음화를 위한 생수와 거름이 되어 줄 차례입니다. 한민족의 거룩한 요단강인 압록강을 건너게 될 때까지........
“한글성경 전래의 길“순례여행은 우리나라 최초로 한글 성경을 번역하여 전한 존 로스 목사와 그와 함께 활동한 한국인들의 발자취를 찾아서 떠나는 선교여행입니다.
다물투어는 “한글성경 전래의 길“ 순례여행을 통하여 많은 하나님의 군사들이 생명의 말씀인 한글성경을 번역하고 출간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그들의 거룩한 고난의 행로를 따라 만주지역의 땅밟기와 전래지를 복원하고, 중국대륙의 복음화와 지금은 얼어붙은 북녘의 복음화를 위한 기도여행을 통해 선교한국의 비젼을 제시하며, 예수그리스도의 사명을 느끼고 행하는 기쁨의 선교순례여행의 길잡이가 되고자 합니다. 또한“한글성경 전래의 길“ 순례여행의 인도와 주님이 사랑하는 북녘의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북한판 성경보급에 앞장서려 합니다.
성지회복과 북녘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상명령에 많은 참여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영국 해군의 맥스웰 대령이 지휘하는 알세스터호는 1816년 9월 1일 대청군도의 앞바다에 닿았다. 정확히 백령도와 대청도의 중간지점쯤에 배들을 정박시켰고 이 때가 오전 9시였다.
탐사선에서 기독교 선교를 전담했던 클리포드 대위는 탐사지역에 대한 선교를 위해서 관심을 끌 만한 작은 선물과 성경, 전도지 등을 실은 손수레를 끌고 다니면서 주민들의 호기심도 끌고 선교의 가능성도 타진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 포구가 바로 후일 백령도 최초의 중화동교회를 탄생시킨 중화동 포구였다.
(1816년 한국을 방문하고 최초로 성경을 전달 한 Basil Hall선장의 기록)
2) 최초의 선교사 칼 귀츨라프 목사와 고대도 선교
영국 함대가 다녀간후 16년후인 1832년 이번에는 영국 런던 선교회 파송 선교사의 신분인 귀출라프가 개신교 선교사로서는 최초의 발을 한국에 내딛게 된다.
칼 귀출라프일행의 암허스트호는 충남 보령의 홍주만 고대도에서 한달간 머물며 국왕에게 선교청원서와 선물 보냈으며 의료 사업 통해 한역성서 (漢譯聖書)를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며 기독교를 전도하였다.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고대도에 20일을 머무면서 주민들에게 한문 성경과 전도문서와 서적 및 약품을 나눠주고, 감자를 심어주고, 감자와 포도주 재배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가르쳐 주고 그리고 한글 자모를 받아 적은 다음 후에 이를 세계에 알리기도 하였다.
(칼 귀츨라프 선교사)
3) 한국개신교의 뿌리 토마스선교사
토마스선교사는 1863년 7월 21일 런던선교회의 중국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1865년에 서북해안을 찾아와 백령도를 비롯 황해와 평안도를 순회하며 전도를 하다 북경으로 돌아갔다.
미국 국적의 제너럴셔먼호가 많은 상품을 선적하고 조선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이배의 안내원을 맡은 토마스선교사는 월리암슨 선교사로부터 많은 성서를 얻어 가지고 동승하게 되었다.
1866년 8월 9일 중국을 떠난 이양선 제너럴셔먼 호는 일주일 후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나타났고, 이어서 강 상류인 평양에 도착하게 되었다.
포구에 배가 정박했을 때에 토마스 선교사는 이 배에 몰려온 사람들에게 성경책을 자그마치 500여 권이나 배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날 성경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훗날 기독교인들이 되었으며, 한국 복음화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제너럴셔먼 호가 그만 물이 줄어들면서 모래 위에 멈추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화공으로 공격하는 조선병사들에게 제너럴셔먼 호는 불타 버렸고 불을 피해 강으로 뛰어들었던 승무원들은 대동강변 모래 위에서 죽음을 맞았다. 토마스 선교사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1866년9월 2일 토마스는 27세의 나이로 아직도 개신교의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땅, 뒷날 그가 거름이 되어 수많은 교회가 그의 죽음 위에 세워졌던 평양의 대동강가에서 피를 흘렸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복음의 말씀을 이 땅에 전하려하였다.
(조선땅 최초 기독교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
4) 존 로스 선교사의 바이블 로드(Korea Bible Road)
(토마스선교사의 희생을 따라온 존로스 선교사)
영국의 토머스 선교사의 순교로 인하여 기독교의 한국선교는 일시적으로 중단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계속 이어져 토머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바로 영국의 스코트랜드에서 존 로스(John Ross)목사와 매제(妹弟)인 매킨타이어(John Mclntyre)목사가 한국선교를 위하여 1872년 4월 중국에 오게 된 것이다.
1874년 10월 9일 존 로스목사는 영구를 떠나 순회전도를 나섰고, 첫 번째로 고려문(Corean Gate)을 방문했다.
1876년 4월말과 5월 초에 고려문으로 두 번째 여행을 했다.
한약장수였던 이 응찬은 존로스목사와 일주일 있은 뒤에 이후 존로스목사의 교사가 되었다. 존로스 목사는 조선인 이 응찬 밑에서 조선말을 배운후 신약성경 번역에 착수했다.
1879년 고려문을 넘나 들며 장사를 하던 의주 청년들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이성하, 서상륜, 김청송등은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존 로스,맥켄타이어목사와 성경을 한글로 번역,출간하게 되었다.
1881년 존로스목사는 '심양 문광셔원'을 창설하고 최초의 한글 기독교문서인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을 출간하였으며 1882년 한국인 번역자들과 심양 문광서원에서 최초의 한글 성경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를 3월에,'예수셩교요안복음젼서'를 5월에 출간하였다.
(존 로스선교사)
2. 한글성경 전래의 역사
1) 한국 개신교선교의 개척자-존 로스선교사
(존로스목사와 가족)
존 로스는 1842년 7월 6일 스코트란드 북부의 닉(Nigg)이라는 지방에서 휴 로스(Hugh Ross)라는 양복업자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66년에 제네랄 셔만호 사건으로 순교한 토마스(R.J. Thomas) 목사에게 조선선교를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다량의 한문성서를 제공하였으며, 본인 스스로 1868년 봉황성에서 조선인들에게 한문성서를 팔았던 경험이 있는 윌리암슨 목사는 존 로스와 함께 만주에서부터 조선에 이르는 장래의 선교지 확장의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존 로스 목사 부부는 1872년 10월 만주의 영구(營口)에 도착하여 만주선교를 위한 준비를 한다.
이후 전생애의 대부분을 만주지역과 조선반도선교에 보냈으며 1910년 선교사에서 은퇴를 한 로스 목사는 에딘버러의 메이휠드(Mayfield) 교회의 장로로서 봉사하다가 1915년 4월 28일에 런던의 기독교 문학회(ChristianLiterature Society Conference) 에 참석했는데 그것이 공식적 행사로서는 최후의 것이었고, 같은 해 8월 6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 앞으로 갔다.
중국에서는 교인들이 존로스목사의 죽음을 듣고 봉천의 동관교회 제단 뒤에 위패를 모셨다.
"존 로스 목사님은 스코틀랜드 분이시다.
그 음성이나 모습이 여전히 계시는 듯해 경의를 표하노라.
하나님게 충성하고 교우들을 사랑하기를 38년간 사방에 교회의 붐을 일으킨 관동(산해관 동쪽)의 한 분이시며 교회당을 신설하고 설교하시니 그 덕행이 받들림을 받도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만고에 보존하기 위해 돌에 비문을 새기니 길이 길이 남아 있으리라"
- 심양동관교회 추모비명
0.만주교회의 창시자
“중국인에 의한 중국인의 교회”를 강조하는 그의 선교정신으로부터 중국인 자신들에 의한 중국교회의 형성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이러한 그의 선교방법이 만주교회가 굳건하게 형성되는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만주교회의 창시자로 평가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대중적인 선교보다는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현지인 지도양성에 크나큰 비중을 두고 교육선교에 그의 노력을 집중시켰다. 존 로스목사는 만주지역의 많은 중국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했으며(봉천/심양,개원,철령,신빈,안산,해성,영구,통화,환인등) 지금까지도 만주지역의 기독교의 설립자로 칭송을 받고 있다.
현재 로스선교사가 세운교회로는 영구시 기독교회, 해성시 우장진기독교회와 철령의로교회 그리고 심양의동관교회등이 남아 있다. 그리고 최초의 한국교회인 황해도의 솔내교회가 세위지는 역사적인 일을 하신 선교사들이다.
(만주와 조선선교의 본부 심양동관교회 소개문)
0.연합선교운동가
산동지방의 많은 교파의 선교단체들과의 경쟁선교를 피해 만주에 온 존 로스 목사는 그의 뒤를 이어 시작된 다른 선교단체들과의 연합선교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1891년부터는 양교단의 허락을 얻어 아일랜드 장로교회의 만주선교부와 통합을 하고 하나의 장로교 선교부를 설립하였고 신학교를 공동으로 운영하기도 했다. 이 만주장로교선교부는 만리장성 동쪽에서 흑룡강변에 이르는 광활한 선교지역에서 로스의 연합정신이었던 “중국인을 위한 단 하나의 교회”라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교파교회의 이식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교회의 정착을 위해 애쓰던 존 로스 목사의 선교정신은 오늘의 한국교회도 본받아야 할 점이다.
0.교육자와 학자
1873년부터 영구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임할 때에도 학생들에게 성경과목을 강요하지 않고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중국의 학문을 먼저 가르치게 하는 원칙을 가지고 학교를 운영하였으며, 교사도 기독교인에게 국한시키지 않았다. 또한 본인도 사서삼경을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는데 유교의 가르침과 가치관을 이용하기도 했다.
중국인을 위한 신학교육에도 강조점을 둔 존 로스 목사는 심양에 1883년부터 3년제 신학원을 개설하고 1890년에는 4년제의 정규신학교로 발전시켰다. 이것이 현재 한국교회가 관심을 갖고 지원하고 있는 심양의 동북신학교의 전신이었으며, 이곳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한국인들도 신학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선교적인 목적에 의해 저술된 중국어교본(1876)과 한국어교본(1877)을 필두로 해서 1882년에는 한국어 성경번역과정에서 집필된 한국어문법 및 단어집을 출판하기도 한다.
한국어교본은 영어로 기록된 최초의 어학교재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존로스목사의 한글단어집)
0.한국 개신교선교의 개척자
존 로스목사는 그의 선교활동 초기부터 한국선교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의 한국선교에 대한 열정과 업적들을 자세히 소개할 수 없지만, 대표적인 일들만 간추린다면, 만주에서 신약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 접촉한 많은 한국인들을 개종시키고 훌륭한 교회의 지도자들로 훈련시켰다.
1879년에는 한국인 최초의 세례교인을 배출케 했으며, 서상륜, 백홍준, 김청송, 김진기, 이성하 등과 같은 인물들을 배출하여 한국 개신교의 형성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케 했다. 특히 1882년 누가복음의 출판 이후 1887년에 완성되어 출판된 최초의 한국어 신약성서인 [예수셩교젼셔]는 외국 선교사들이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개시하기 이전에 한국인들 스스로 기독교 복음을 접하고 받아들이게 한 성서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한국내에서도 존 로스목사에게 가르침을 받은 자들에 의한 신앙공동체가 여러 지방에 형성되었는데, 의주와 강계의 신앙공동체는 물론 백낙준 박사가 “한국 개신교의 요람지”로 불렀던 황해도의 솔내교회와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의 형성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특히 존 로스목사의 성서번역에 관계하며 복음을 받아들였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주 출신이었기 때문에, 의주는 1906년 당시 상주 선교사가 없는 상황에서도 평양 다음으로 큰 신앙공동체(약 5000여 신자)를 형성할 수 있었다. 만주 한인촌의 신앙공동체로부터 솔내와 새문안교회의 형성과정에 이르기까지 공동적인 특징은 존 로스목사에게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우리말로 번역된 성서와 전도지를 통한 자발적인 복음 수용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존 로스목사의 선교는 “한국의 초대교회가 세워진 토대“였다.
2) 존로스와 메킨타이어 목사의 고려문 전도
고려문은 책문이라고 하며 조선의 북쪽 국경도시인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약 120리 지점에 있던 국제 교역지였다. 중국과 일본은 일찍이 문호를 개방하여 카톨릭과 뒤이어 프로테스탄트의 전교가 자유로웠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늦도록 쇄국정책에 갇혀 복음전래는 물론 일반 통상의 길도 막혀 있었다. 이와같은 쇄국정책은 병인양요이후 대원군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으므로 뜻이 있는 청년들은 국외로 도피해 나갔고, 그들의 집합처가 고려문이었다.
고려문에는 춘추로 교역시장이 개최되어 많은 중국인과조선인 그리고, 서양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므로 "고려문전도"란 단순히 고려문 시장전도만 가리키지 않는다. 이곳에 모여왔던 지역들, 즉 우장과 봉천등지를 포함한 초기의 국외전도를 가리키고, 한국교회 설립의 전초기지가 된 것이다.(현재는 요녕성 봉성시 변문진이다).
토마스목사의 순교이후의 큰 사건을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 두 목사의 “고려문 전도”라 한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만주지방의 주재원인 윌리암슨목사는 1867년 고려문을 방문한다. 직접적인 목적은 토마스목사의 정확한 안부를 알기 위함이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74년, 존로스목사는 중국인 서기를 동반하고 고려문을 첫 번째 방문했다. 그러나 한국내의 쇄국정책과 금교령이 너무 준엄하여 고려문의 한국인들은 서양인 선교사를 만나주지 않았다.
실망하여 여관에 있던 존로스 목사에게 한국의 상인(백홍준의 부친)이 한 사람 찾아왔고 존로스 목사는 그에게서 한국정세와 한국인의 발음법 등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존로스 목사는 그에게 한문 신약성서와 《훈아진언》(訓兒眞言 Peep of Day)를 건네주고 돌아오게 되었다.
한편 존로스 목사에게 신약성경과 소책자를 받아간 한국 상인은 그것을 자신의 아들과 친구들에게 주어 읽게 하였으며, 그들은 후에 한국개신교의 최초의 수세자들이 된다. 그 상인이 바로 백홍준의 부친이었다.
1876년 두 번째 고려문을 방문한 존 로스목사는 네 의주청년들을 만났다. 그들이 곧 한국인 최초의 프로테스탄트가 된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였다.
존 로스목사와 네 청년들 사이에는 청년들은 한국말과 역사를 가르쳐 주고, 존로스 목사는 후한 월급과 서양과학을 가르쳐 줄 약정이 성립되어 그들과 같이 선교본부가 있던 우장으로 갔다.
네 청년은 약속대로 선교사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고 스스로 서양의 과학문명을 배우면서 지냈다. 이래서 그들이 우장으로 간후 1879년 드디어 그들의 마음이 열려 매킨타이어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873년부터 서상륜은 홍삼과 몇가지 약재를 가지고 만주지역으로 행상을다니기 시작했고,이 무렵 친구인 백홍준(白鴻俊)으로부터 처음 기독교교리에 대해 전해 들었다.
그 뒤 1878년 그는 홍삼을 팔러 만주의 개항장인 영구(營口)에 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에 이르렀다. 이때 친구들의 주선으로 영국인 헌터(Hunter, J.M.) 의사의 치료를 받게 된 서상륜은 병원에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의 만주선교사인 매킨타이어(McIntyre, J.․馬勤泰)목사를 만났으며,그의 병문안과 배려로 완쾌되었다.
서상륜(徐相崙)이 1879년 만주 우장에서 로스에 의해, 4년 후 1883년에는 김청송(金靑松)이 그 뒤를 이어 세례를 받아 이제 세례를 받은 젊은이는 모두 여섯 명으로 늘어났다. 이미 이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인들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1966년의 고려문/한국인 최초의 전도가 이루어진 곳)
3) 한국선교의 개척자들
0. 한국기독교 개척자 서상륜
한국기독교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성서번역가인 서상륜(徐相崙)은 1873년부터 서상륜은 홍삼과 몇가지 약재를 가지고 만주지역으로 행상을다니기 시작했고,이 무렵 친구인 백홍준(白鴻俊)으로부터 처음 기독교교리에 대해 전해 들었다. 그 뒤 1878년 그는 홍삼을 팔러 만주의 개항장인 영구(營口)에 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에 이르렀때 영국인 헌터(Hunter, J.M.) 의사의 치료를 받게 된 서상륜은 병원에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의 만주선교사인 매킨타이어(McIntyre, J.․馬勤泰)목사를 만나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고 1879년 세례를 받고 성경번역과 발간,전파를 하였다.
(서상륜장로와 권서)
0.조선의 사도바울 백홍준(白鴻俊)
한국인 최초의 기독교 신자 가운데 한 사람인 백홍준(白鴻俊)은 상인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1874년 10월경 만주의 통화현(通化縣) 고려문(高麗門)을 방문하였다가 영국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선교사인 존 로스(Ross, J.․羅約翰)목사를 만나 한국 정세와 발음법을 가르쳐주고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과 '훈아진언'(訓兒眞言)이라는 소책자를 받아온 일이 있었다. 아버지가 가져 온 책자를 몇몇 친구들과 함께 2~3년간 공부한 다음 북산은 1879년 세례를 받았다.
한글성서 번역을 도운 핵심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북산은 이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가지고 만주 서간도(西間島)의 한인촌에 전도하여 75명의 신자를 만들었으며 의주교회를 설립하였다.
백홍준은 국경을 드나들며 복음을 전했는데 1892년 체포되었다. 백홍준은 평양감찰사 민병석에게 배교(背敎)를 강요받았지만 2년간의 옥고끝에 끝내 순교를 당하니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가 된 것이다.
(백홍준 사도)
0.의주 압록강 쪽복음 이성하(李成夏)
이응찬(李應贊) ․백홍준(白鴻俊) ․김진기(金鎭基)와 함께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고, 존 로스목사를 도와 최초의 성서 한글번역사업에 정열을 쏟았다. 4복음서와 《사도행전》 등을 몰래 숨기고 귀국, 의주 ․서울 등지에서 비밀리에 전도를 하여 한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후 그의 아내는 백홍준의 아내와 함께 압록강에서 행해진 H.G.언더우드 집례의 대세례식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교회 최초의 여자 세례교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0.존로스 목사의 한글교사 이응찬
이응찬은 로스와 매킨타이어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6년 가까이 <예수셩교젼서>의 번역에 매달려 절반 이상 번역과 수정을 한 후인 1883년 9월 콜레라로 소천하였다. 예전에 술과 아편을 즐기던 그가 성경 번역을 몰입하여, 그 복음을 동족에게 전해주려고 애쓰다가 이국 땅인 만주 봉천에서 순교하였다.
“백홍준 아버지의 이야기”-존 로스목사의 최초의 전도자
어느 날 나는 여느 때와 같이 고려문(高麗門-지금의 봉성시 변문진,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 양국사이의 합법적인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에 물건을 사러 갔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생긴 사람을 보았다. 키는 크고, 피부는 하얗고, 코는 오똑하고, 머리색깔은 노란색이고, 눈은 푸르딩딩한, 한마디로 이상하게 생겼었다. '아! 저 사람이 말로만 듣던 서양사람인가 보다.'하고 생각했다. 청나라 사람은 그런 사람을 많이 보았는지 전혀 신경쓰지도 않았지만, 난 처음 본지라 신기해서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나에게 오는 게 아닌가? 그리고, 이야기를 했다. 영국에서 온 로스라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야소교(耶蘇敎) 선교사라고 했다. 야소교,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도리였다.
그 사람이 뭐라고 했지만, 야소니, 성령이니 하는 게 뭔지 몰랐다. 대신 그의 봇짐에 있던 옷감에 눈이 갔다. 그게 뭐냐고 물어봤다. 영국에서 만든 옷감이라고 했다. 양목(영국산 면제품)이라는 옷감. 그것만 조금 샀다. 의주에서 그 옷감은 커다란 인기였다. 무명보다 훨씬 나은 옷감이었다.
다음에 고려문에 갔을 때는 로스라는 사람을 찾아 다녔다. 그가 여관에 묵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관을 찾아갔다. 그리고 양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양목은 더 이상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또다시 그 야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야소가 나의 죄를 위해서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났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이 하는 이야기는 정말 허무맹랑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난 괴로워했다. 야소가 과연 누구길래,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죽었다는 것인가?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저질렀던 죄가 얼마나 많은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고 나서 난 그 로스라는 서양인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달려갔다. 그에게 밤새 했던 고민을 이야기했다. 그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었다.
그리고 도움이 될거라며 訓兒眞言(훈아진언, 한문 신약전서, peep of Day)라는 책을 주었다. 나는 그 책을 집에 가져 와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나의 친구들에게, 아들(백홍준)에게도 읽게 했다.
강화도 조약이 맺어진 해(1876), 로스가 다시 고려문으로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달음에 가서 만나고 싶었지만 날로 늘어나는 일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에 訓兒眞言을 읽었던 마을청년 두명이 그를 찾아가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 중 한 사람이 공식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로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내 아들(백홍준)이 도를 배우러 로스에게 가겠다고 이야기했다. 난 기꺼이 그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서너달 후, 홍준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전갈을 받았다. 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로스가 추진했던 성경번역사업을 돕던 이응찬도 세례를 받았다.
4) 성경의 한글번역, 발간
성경의 번역은 존 로스목사의 계획과 추진, 감독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이 과정에서는 이응찬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이응찬은 존 로스를 도우면서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그를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이응찬은 고려문에 가서 백홍준(白鴻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 등 의주 청년 세 사람을 포섭(包攝)하는 데 성공했다. 이응찬을 비롯하여 네 사람의 한국 젊은이들을 확보한 존 로스 선교사는 한국선교를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 성경 번역이라고 보고 그때부터 성경 번역을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이다.
초창기의 성경 번역 과정은 한국인 번역자들이 선교사들과 함께 한문 성경을 읽고 나서 그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선교사는 그것을 다시 헬라 원문과 대조하여 될 수 있는 대로 헬라 원문에 가깝게 다듬는 방식이었다.
1878년까지 존 로스목사와 이응찬, 김진기, 백홍준 공역으로 누가복음 초역이 완료되어 이것을 다시 맥킨타이어가 이들 한인 번역자들과 함께 원문에 가깝게 재수정을 가했다.
존 로스목사는 1881년에 봉천(심양)에 인쇄소(문광서원)를 설치하여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한글로 된 첫 개신교 문서인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을 그 해 10월에 인쇄했고, 이어 성경 인쇄에 들어가 1882년 3월에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을 처음 인쇄하고, 그리고 5월에 예수셩교요한복음을 발행했다.
1882년의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셩교젼셔 요한복음의 출판은 한국성경 번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최초의 한글 성경이라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뛰어난 번역자들과 수차례의 재교정을 통해 원문에 충실하면서 순한글로 인쇄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값진 결실이었다.
이렇게 찍어낸 한글성경은 옛날 조선의 사신들이 중국을 다니던 길을 따라 조선에 반입을 시도하게 된다. 당시에는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은 나라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잡히게 되면 처형당하였다.
조선에서 청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하여야 하는 고려문이 바로 존 로스 목사가 한국의 첫 기독교 신자가 된 서상륜,백홍준,이응찬,이성하,김진기등을 만난 곳이며 또한 심양에서 번역된 한글성경이 한국에 들어오는 바이블 로드의 중요한 입구인 것이다.
이성하(李成夏)가 1883년 성경을 등에 지고 심양을 떠나 안동(安東.현재의 단동)에 와서 국경을 넘을 계획을 세우던 중에 여관주인이 이성하의 짐을 몰래 열어보고 성경이 나오자 겁을 먹고 성경일부를 불에 태우고 일부는 압록강물에 던져버리게 된다.
존 로스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던져진 그 강물을 마시고 한국사람들은 생명수를 얻게 될 것이요.불에 탄 성경책의 재는 한국교회를 자라게 할 비료가 될 것이다!”라고 위로하며 예언의 말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백홍준은 성경책을 한 장씩 뜯어 노끈을 만들어 그것으로 망태기를 만들어 갖고 들어오게 된다. 백홍준은 이렇게 반입한 성경을 다시 펴서 다리미질로 원상복구하여 전도에 사용하였으니 당시의 선교작업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의주에 도착한 그는 그 끈을 풀어 다시 성경을 고향과 이웃마을에 전파했고, 약 반년 후에는 10여명의 신자를 얻어 백홍준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의주교회요, 한국교회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정식교회는 아니었고, 기도소 정도였다.
집안출신 김청송이 영신환(靈神丸)이란 약을 팔러 다니다가 존 로스 선교사를 만나 심양의 성경 인쇄소 식자공으로 일하던 중 교인이 되었다. 1882년 3월 매서인이 된 그는 자기가 인쇄한 한글 쪽복음과 전도지를 들고 이양자를 비롯하여 집안 일대 28개 골짜기 마을을 돌며 전도했다. 그 결과 3년 만에 수 백명 개종자들이 생겨났고 1884년 12월 존 로스목사는 이곳 4개 마을에서 7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집안을 중심으로 압록강 서쪽서간도 일대에 한인 신앙공동체들이 형성되었고 거기서부터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집안 이양자교회는 만주에 설립된 최초 한인교회라 할 수 있다.
1883년 그는 이렇게 완성된 성경 100권을 지니고 압록강을 넘어 국내 잠입을 시도했다. 당시 조선왕실은 기독교를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입국을 시도하던 서상륜은 입국 도중 관헌에 발각되고 만다. 구사일생으로 성경 10여권만을 지닌채 탈출한 그는 가족의 고향인 황해도 소래로 피신하여 그곳에 정착했다.
소래에 터전을 마련한 서상륜은 곧 만주의 존 로스목사에게 연락해 성경 6,000권을 선편(船便)으로 전해 받고, 마을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에 나섰다. 얼마 안있어 20명의 세례지망자가 생 겼다. 서상륜 형제(동생 서경조)는 송천에서도 열심히 전도하여 얼마 안가서 58호 중 50호가 믿게되고, 1885년에는 순전히 저들의 힘으로 초가 8간의 한국 최초의 교회당을 건축였다. 이 교회야 말로 "한국프로테스탄트의 요람지"라 불리우는 한국의 최초의 교회이다.
(성경의 한반도전래를 위한 도강현장 좌측은 북한이고 우측은 중국)
(집안이양자교회 각석)
0. 서상륜의 서울전도와 서울지역교회의 설립
동만주일대에 산재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서상륜은 1884년 존로스목사의 요청에 의해 다시 한번 한국내 포교 임무를 맡았다.
당시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이점이 인식되어 기독교에 대한 전도는 어느정도 묵인던 시기였다. 그래서 무사히 국내로 들어온 서상륜은 3개월간에 걸쳐 다량의 복음서를 반포하면서 본래 목적지인 서울로 향했다.
상경한 서상륜은 400여권의 복음서를 약 6개월간 반포하면서 서울에서도 열심히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그는 여러명의 개종자를 얻었고, 존 로스목사에게 '서울로 와서 세례를 원하는 13명의 친구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교회를 조직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존 로스목사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서울 방문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지자 대신 상하이와 제물포간의 기선 항로를 이용하여,1884년 봄 이성하를 시켜 다량의 번역 출판된 쪽복음서,사도행전,소책자 등을 서상륜에게 보내 주었다.
그는 인천세관의 고문으로 있던 뮐렌도르프(Mollendorf)의 도움을 받아 화물을 찾아 전도에 사용했다.
서상륜이 서울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1884년 가을, 알렌이 입국하였고, 그 다음 해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였다. 이 때 서울에는 서상륜의 권서활동으로 이미 3백여 명의 신앙인이 있었으나 다만 공개되지 못하였고, 교회도 없어 정식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참으로 그의 전도 결과는 경이적이었다. 이런 폭발적인 성과를 거둔 능력의 원천은 그가 만주에서 번역 출판한 복음서에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둔다.
(새문안교회와 연동교회의 설립)
1887년 9월 27일은 새문안교회 설립일이다. 설립자는 언더우드이다. 그러나 새문안교회 설립과 관련된 한국교회사의 기록들은 창립예배에 모인 14명의 신자들 모두가 서상륜의 전도를 받은 자들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이 교회의 설립에 "한 알의 밀"이 되어 땀흘려 희생한 실제적인 창설자이며 공로자는 서상륜이다. 사실 어느 날 갑자기 선교사가 교회를 설립한다고 광고를 하니 14명의 교인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클락크(Charles Allen Clark, 한국명 곽안련)는 그의 교회사에서 새문안교회 창립 예배시에 만주의 존 로스목사도 참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대문의 연못골(현재 종로5가지역의 연지동)에는 나막신바치, 찬우물골에는 갖바치, 방아다리에는 배추장수, 두다리목에는 병졸 등 주로 양민(良人)들과 천민(賤民)들이 살았다. 이들은 모두 양반들의 착취와 억압 속에 사는 계층들이었다. 이 곳에서 서상륜은 선교사 리(Graham Lee, 한국명 이길함)와 함께 전도하여 가난하고 눌린 자들에게 영혼의 안식처를 마련해 주며 천국의 소망을 깊이 심어 주기 위하여 노력한다. 연동교회의 설립에 서상륜이 주동적 역할을 한 것으로 "1894년 1월 8일 서상륜과 이길함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서상륜의 존재는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선교사업을 펼치는 과정에서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언더우드(H. G. Underwood)도 인정하였으며, “복음의 씨를 뿌리려고 한국에 온 그는 수확을 하고 있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한국인 자신들에 의한 자생적인 기독교인이 많았다. 서상륜은 이 선교사들과 적극적인 협력관계를 이루어 한국교회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특히 선교사들이 안식년 등으로 귀국하게 되었을 때, 그 선교사의 빈자리는 여지없이 서상륜의 몫이었다. 따라서 1907년 한국인 목회자가 배출되기 이전까지 서상륜은 실질적인 한국교회의 한국인 목회 지도자인 셈이었다.
6) 한글성경 전래의 역사적 의의
1872년 존로스목사의 중국영구항 입국을 시작으로 1874년 첫 번째 고려문 방문에서 백홍준의 아버지를 만나 한문성경을 전해주며 시작한 조선의 복음화가 1876년 조선 의주 청년동역자들의 전도로 이어져 1879년 한국인 최초의 기독교 수세자를 배출하였으며 1882년 한글성경의 탄생으로 한민족에게 생명의 말씀이 전해지게 되었다.
참으로 존 로스목사와 맥켄타이어목사, 한국인 최초의 프로테스탄트가 된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와 서상륜,김청송등 조선의주 청년들로부터 시작된 한국기독교전래의 역사는 경이적이었다.
한국이 개신교의 복음을 수용한 것은 외국인 선교사가 한국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이미 한국인들에 의하여 주체적으로 이루어졌다. 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기 이전에 만주의 권서전도인들에 의해 한국인 예배공동체를 형성한 자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선교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평북 의주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주변 마을과 군(郡)들로부터 세례를 받고 입교하기를 원하는 남자들이 100명이 넘게 모여든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중국으로부터 한국의 북부 지방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복음의 씨가 뿌려지고 복음에 관한 책자들이 전달된 것은 선교사들에게 효과적인 사역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현재 한국은 전세계적으로 두 번째의 선교파송국가이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행하고 있다.
한국의 복음화와 세계전도, 이런 폭발적인 성과를 거둔 능력의 원천은 그들이 합심하여 만주에서 번역 출판한 복음서에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여야 할것이다.
3. Korea Bible Road 지역 안내
1) 한국복음화와 한글성경의 시작 영구시(營口市)/우장
요녕성 영구시는 존 로스 선교사가 1872년 들어와 선교를 시작한 곳, 한국인들과 함께 성경 번역을 시작한 곳, 최초 세례가 베풀어짐으로 한국교회사 제 1장 제 1막의 무대가 되었던 곳으로 이곳에 교회를 세우고 만주지역과 조선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던곳이다.
조선의 청년들과 우장에서 성경을 번역한후 맥켄타이어목사는 우장에서 만주지역의 영구,대석교,안산등지를 중심으로 선교를 했으며 존 로스목사는 조선청년들과 심양의 동관교회에 설치된 문광서원에서 한글성경의 인쇄,출판을 하였다.
영구의 옛이름이 우장이며 동북지역의 개항지로 청말 많은 외국과 문물교류가 있었다. 서양의 많은 문물들의 왕래가 빈번하고 특히 동북 만주지역 기독교전파를 위한 시작점이기도 하였다.
1866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중국주재원인 윌리암슨목사가 처음 방문하였으며, 다음으로 1867년 영국장로교 목
사 윌리암번즈가 선교를 위하여 북경으로부터 이주하여 왔다. 1868년 영구시 동서가에 양복음당을 설립하고 중국인들을 위한 선교를 하다가 그해 병에 걸려 죽고 만다.
1869년 아일랜드장로교의 요셉 몰리뉴 헌터의사가 의료선교사로 영구에 도착하여 선교를 하게된다. 영구와 만주지역의 본격적인 기독교의 선교는 1872년 10월 만주의 영구(營口)에 도착한 존 로스목사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영구의 서양인 주거지에서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한 존 로스목사는 중국어를 배우며 준비를 하게 된다.
1873년 5월 11일 처음으로 20분간 중국인을 대상으로 설교를 하였고 5월 13일 부근의 개주지방으로 처음 순회전도를 하였으며 본격적으로 영구와 부근지방의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874년 영구의 동쪽인 대평산에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3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881년에는 영구분설인 개평현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883년 전장대교회(田庄台教会)를 설립하였다
이후 영구기독교회는 분설로 우장,해성,안산,부가장,신개하,태안현,복현(복주),웅악현등지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영구시기독교회(营口市基督教会)/영구시 서시구 연수리 1호는 존 로스목사가 처음 선교를 시작한 곳이다.
(영구기독교당 우장장로교회터에 서있다)
(영구항과 시 전경)
2) 한글성경의 간행지이며 만주선교의 본부 심양(審陽)
심양은 요녕성의 수도로 조선말부터 일제시대까지 우리 민족이 이주하여 정착했던 곳이다. 한국교회사적으로 1877년부터 로스 목사가 이응찬, 서상륜, 백홍준 선생 등과 함께 번역한 한글성경을 발행한 문광서원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문광서원은 동관교회내의 존 로스목사가 사택으로 이용하던곳으로 후에 한글성경을 출간한 곳으로 지금은 옛건물안에 존 로스목사의 기념물과 역사를 전시하고 있는 곳으로 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방문하고 있다.
1881년 7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의 지원으로 문광서원을 세운 로스 목사는 그해 10월 한국 최초의 기독교문서인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성 교요령을 출간하고 이듬해 첫 한글성경 예수셩교누가복음전셔와 예수셩교 요한복음젼셔를 발간했다.
이를 시작으로 사도행전(1883년), 마가복음과 마태복음(1884년), 에베소서(1885년)에 이어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예수셩교젼서(1887년)를 발행했다. 심양 동관교회는 바로 옛 문광서원이 있던 곳이다.
1876년 심양시의 중가(中街)의 작은집을 구해서 동관교회를 설립하고 전도사역을 시작하였다.
1887년 대동문밖에 건축을 시작하여 1889년 10월 22일 현재의 위치에 예배당을 건축하여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동관교회 오른편에는 존로스 목사가 한글 성경을 번역하고 인쇄했던 문광서원 건물이 남아 있다. 사택으로 추측되는 이 건물엔 '번역조선문성경구지'(飜譯朝鮮文聖經舊址)란 안내 표지가 붙어있었다.
심양동관교회의 본당 십자가 밑 벽면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중국이 공산화되고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고 특히 문화대혁명때 이 비문이 파괴될 위험에 처해지자 교인들은 기지를 발휘하여 그 앞에 벽돌을 쌓아 무사히 보존하게 되었다.
"존 로스 목사님은 스코틀랜드 분이시다.
그 음성이나 모습이 여전히 계시는 듯해 경의를 표하노라.
하나님게 충성하고 교우들을 사랑하기를 38년간 사방에 교회의 붐을 일으킨 관동(산해관 동쪽)의 한 분이시며 교회당을 신설하고 설교하시니 그 덕행이 받들림을 받도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만고에 보존하기 위해 돌에 비문을 새기니 길이 길이 남아 있으리라"
- 심양동관교회 추모비명
1883년 존 로스 목사가 신학 인재 양성을 위해 세운 신학교가 지금은 중국 정부가 인정한 동북신학교로 발전되어 현재 많은 중국인과 조선족 목사들을 배출하면서 중국 복음화의 불을 지펴가고 있다.
(만주와 조선선교의 본부 심양동관교회와 한글성경간행성지 문광서원)
(심양시 전경)
(심양관동영화성 전경)
(심양고궁 전경)
(심양북릉 전경)
(심양동룽 전경)
(심양화하민속촌 전경)
(심양본계수동 전경)
3) 복음전파의 시작과 믿음의 첫 열매 봉성시 고려문(변문진)
0.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지대
고려문이란 봉황성 바로 밑의 작은 촌 거리로서 '루카'라고도 하고 책문(柵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은 청태조가 중원을 통일한 후 조선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장책을 두른 후 설치한 6문중 하나이며, 조선의 사신이나 상인들의 내왕은 오직 고려문으로 제한함으로써 조․청 양국의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고려문은 옛날부터 중국으로 오가는 조선 사신들과 상인들이 반드시 들려야 했던 국경 관문이었다. 그리고 양국 세관이 나와 교역을 관리하는 합법적인자유 무역시장이었다. 그래서 고려문은 두나라 상인들로 언제나 북적거렸다.
지금은 마을 이름이 변문진이며 고려문역이 었던 기차역은 일면산역으로 바뀌었다.
원래는 고려문역이었는데 1964년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할 때 이곳을 지나가기 때문에 역 이름을 일면산역(一面山驛)이라고 바꾸어버렸다 한다.
또한 변문에서 남쪽으로 조금 가면 '조선촌'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름을 탕하(湯河)라고 바꾸어 버렸다. 그 이유는 중국정부에서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할때 조선땅이라고 할까봐 지명과 기차역명을 바꾸었다 하니 중국의 역사왜곡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현재 요녕성 봉성시 변문진으로 오래전 조선과 청나라의 자유무역도시로서의 위용과 규모는 줄어들어 자그마한 변방의 소도시로서 존재할 뿐이다.
고려문은 중국 요녕성 봉성시의 주변소도시로 조선의 국경도시 평북 의주로부터 48㎞ 떨어진 지점에 있었으며 1874년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목사가 의주상인 백홍준의 아버지를 만나 최초로 복음을 전파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옛 고려문은 1966년 홍위병들이 철폐시켰고 1995년 5월에 설치된 변문진(邊門鎭)이란 비석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으며 바로 옆에는 옛 고려문의 흔적을 헐어낸 돌무더기가 보기 흉하게 쌓여 있다.
(고려문 변문진)
4) 만주에서 한반도로 전래의 길목 단동시(丹東市)
단동시는 요녕성에 위치한면적 1만 4,918㎢, 인구 300여만명인 중국최대의 국경도시로 북한의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옛 이름은 안동이었으나 1965년 단동으로 개명하였으며, 그 뜻은아침해가 뜨는 붉은도시란 뜻이다.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인구 70여만명의 국경도시이다.
1960년대 이전에는 안동이란 이름의 오랜도시였으나 이후 중국에서 동쪽에 위치해 있어 아침해가 가장 먼저 떠서 도시를 붉게 물들인다 하여 단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1992년 단동 변경 경제개발구가 압록강 근교에 개발됨으로써 한국, 일본, 러시아 및 중국을 잇는 중요 거점 도시로 발전되고 있다.
2002년 8월 심양-단동간 고속도로(227KM)가 개통되어 심양/단동간 소요시간이 2시간40분으로 단축되었으며 2005년 9월 개통된 단동-대련간 고속도로(300KM)는 3시간 30분의 소요시간으로 교통이 편리하다.
(단동시의 압록강)
0. 성경전래의 도강현장 의주앞 일보과와 호산장성
호산장성은 단동시 동쪽에서 약 12㎞ 떨어진 압록강변에 있으며 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우적도와 의주군을 바라볼수 있다. 호산장성은 고구려시대의 장성으로 조사되었으며 명나라시대인 1469년에 개축되여 400여년의 사회변혁을 거치고 대자연의 비바람과 인위의 파괴로 하여 면모를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되었다. 1990년부터 1993년에 이르기까지 문물과 고고학자들의 조사와 검증을 거치여 600여m의 성벽과 봉화대, 군사영방등 유적들을 발굴하였다. 그 이후에 두차례를 거쳐 장성의 수복공정을 진행하였다.
호산장성의 또 하나의 특수한 코스는 일보과(一步跨)이다. 호산장성 밑 압록강가에 우적도라는 북한섬이 있는데 압록강의 상류로부터 하류로 흐르는중 가장 가까운 한곳으로서 거리가 불과 몇m밖에 되지 않아 한 걸음에 넘을수 있을 정도이기에 어떤 때에는 직접 북한군인과 교류도 할 수 있다.
우리 믿음의 선구자들은 이곳을 통하여 한글성경을 몰래 숨겨 강너머 의주로 반입하였다.
중국이 1990년 장성을대대적으로 복원하여 그 위용이 웅장하고 장대하며 새로운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 또한장성정상에 오르면 북한 의주가 손에 닿을 듯 보이며 건너편에 멀리 관서팔경(關西八景)중 하나이자 한국 누각을 대표하는 건축물 가운데 하나인 통군정(統軍亭)이 희미하게 보인다. 한 발짝만 건너 뛰어도 닿을 것만 같은 지척에 북녘땅이 있다.
북한의 우적도(압록강 하중도의 하나)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호산만리장성 아래에는 폭이 3미터정도 밖에 안되는 개울이 북한과 중국의 경계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 우적도 너머로 의주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의주출신 상인 백홍준, 이응찬, 서상륜, 최성균, 김진기 등이 매서인이 되어 한글성경을 몰래 숨겨 반입하여 의주사람들에 전했고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 성경과 복음이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도강현장.호산장성.일보과 한걸음만 내듣으면 북한이다)
5) 한국 독립운동의 순교지 여순
여순구는 인구가 25만명, 면적은 500㎢, 석회석, 규석등 지하자원 풍부하고 항만시설이 발달되었으며 중국 해군의 본거지이기도 하며 러.일전쟁의 해상격전지이도 하다. 대련 시내에서 약 46km 떨여져 있고버스로 2시간정도 달리면 여순감옥에 닿을 수 있다.
여순감옥은 여순구구(旅順口區) 원보방(元寶坊) 향양가(向陽街) 139호에 있다. 1902년 짜리러시아가 건축하였으며 1907년에 일본군이 확대 건축하였다.
여순감옥은 러시아와 일본이 여순을 점령했을 때 두번 공사를 거쳐 지은 건물이며 많은 사람 잔혹 하게 학살한 장소이다. 감옥은 까만색 벽돌과 빨간색 벽돌로 구분되였는데 까만색은 러시아가 지은것이고 빨간색은 일본이 지은 것이다.
여순감옥은 러시아가 1902년부터 짓기 시작해서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시작되면서 85실만 짓고 중단했으며 전쟁시 잠시 야전병원 과 군대병영 장소로도 쓰였었다.
일본군이 여순을 점령후 감옥이 작다고 생각해 러시아가 지은 기초상에서 253칸으로 증축했으며 동북지대에서 제일 큰 감옥으로 변하였다. 감옥 주위에는 4미터 높이, 725미터 길이의 홍색 벽돌로 싼 담이 있으며 점유 면적이 26000평방미터가 되어 2000명의 죄수를 수용할수 있었다. 수감된 죄수는 다수가 당시 정치범, 사상범과 경제범이며 일본사람 과 한국사람도 있었는데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조선민족 영웅 안중근의사와 단재 신채호선생이다.
안중근의사는 1909년 10월26일 조선통감인 이또히로부미를 하얼빈 기차역에서 암살했다. 안중근의사가 체포된후 이 감옥에 갇혀있었으며 이곳에서 사형을 당했다. 당시 32세 밖에 안 되였으며 사형당시 조선민족 복장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기개를 보여주었다.
사형 집행 전 가족들에게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과 아들(준생,베네딕도)을 성직자로 키워 주기를 유언했고, 또한 2천만 형제 자매들이 교육과 실업에 힘써 국권을 회복시키며, 성직자들은 민족복음화에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고 냉담한 교우들에게 신앙을 독려할 것을 당부했으며,“대한 독립 만세” “동양 평화 만세”를 세 번 부른 후 순국하였다.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문필가, 역사학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단재 신채호 선생은 기독교인으로서 일생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살다간 ‘지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단재 선생은 1919년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이에 참가하였으며, 이후 의정원(議政院, 현 국회)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등과 갈등을 빚게 되자 임정을 떠나 이후 언론활동과 각종 조직 활동에 나섰다.
1925년경부터 아나키즘을 신봉하기 시작한 단재 선생은 1927년 좌우합작의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차 대만으로 가던 중 기륭항(基隆港)에서 일경에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고 이곳 여순감옥에 수감되었다.
단재 선생은 옥고를 치르던 중 1936년 2월 21일 이곳에서 결국 옥사하셨다.
현재 많은 한국사람이 여순감옥을 방문하여 참배하고 있다.
여순감옥은 일본통치시기 1000여명이 갇혀 있었으며 많을 때는 2000명을 초과했다. 평균 15평방미터되는 감옥에 칠팔명 내지 열명이 갇혀있었다. 감옥안에는 중국어, 조선어, 일어로 감옥규칙을 써서 벽에 걸어놓았는데 그 내용은 "벽에 기대지 말 것, 마주보지 말 것, 서로 이야기 하지 말 것, 밖을 내다 보지 말 것"이였는데 규칙을 위반했을 경우는 추가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감옥 동남쪽에 사형실이 있는데 독립된 2층건물이며 밖으로는 보통 건물과 차별이 없다.1942년부터 1945년 8월에까지 700여명 항일투사를 처형했던 곳이다.
여순박물관(旅順博物館)은 약 10만여점의 주요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동북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예술박물관이다. 원래 제정러시아의 육군장교클럽이었던 곳이다. 1917년에 일본에 의해 박물관으로 변경된 건축물 내부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비롯해 목조 바닥과 높은 천장 등 건물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웅장한 건물 내부에는 청동그릇들을 비롯해 회화, 도자기, 옥공예품, 동전·화폐, 불상, 법랑, 서예작품들이 고루 전시되어 있다. 볼 만한 유물로는 청동기에 새겨진 갑골문자와 기원전 206년에 사용되었던 만두찜통처럼 생긴 청동요강과 송나라 때 사용하던 ‘쌍용세’라는 용의 조각이 새겨진 청동안마세숫대야를 꼽을 수 있다. 2층 마지막 전시실의 신지앙(新疆) 출토 문물전에는 신지앙에서 발굴된 1천3백여년 전의 남자 미라 여섯 구가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