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농경신(農耕神) 자청비는 어디서 왔을까
제주도의 큰굿에 ‘세경본풀이’라는 것이 있다. 세경이란 농경신을 가리키는 이름이고 본풀이는 그의 내력담을 말한다. 즉 자기가 모시고자 하는 신의 탄생과 이력을 담고 있는 이야기다. 쉽게 비유하자면 유교식 제사의 축문과 같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일종의 청배가(請拜歌)다. 굿을 할 때는 언제든지 첫머리에 이 본풀이를 한다.
세경본풀이는 농경신을 창하는 굿에서 부르는 무가다. 그러므로 세경본풀이는 오곡종자를 가져다 준 농경기원(農耕起源) 신화이면서 농축신(農畜神)에 관한 우리의 소중한 신화다.
서사 무가인 이 세경본풀이의 주인공은 ‘자청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다. 갖은 파란과 곡절 끝에 하늘의 옥황상제에게서 오곡 씨앗을 가져와 농경신이 된 인물이다. 세경본풀이는 자청비 여신이 신화의 주인공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자청비 신화’라고도 일컫는다.
그러면 이 본풀이의 줄거리를 한번 살펴보자.
김진국과 조진국 부부는 아들을 원했으나, 바친 재물 한 근이 모자라서 딸을 낳게 되었는데, 그 이름을 자청비라고 지었다.
자청비가 열다섯 살이 된 어느 날, 못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문 도령이 글공부를 하기 위해 그곳을 지나갔다, 그가 자청비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자, 자청비는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주니 문 도령은 화를 내었다. 자청비는 문 도령이 급하게 물을 마시다 체할까봐 일부러 버들잎을 띄웠다고 말하니, 문 도령은 그 말이 뜻이 깊다고 생각하고 그녀에게 반했다.
자청비 또한 문 도령을 보고 반하여, 자기를 자청비 동생이라 속이고 남장(男裝)을 하고 따라가, 문도령과 함께 같은 서당에서 한 방에 머무르며 삼 년을 공부한다. 문도령은 자청비가 여자인 듯하여 ‘오줌 멀리 누기’ 등 여러 가지를 시험하나, 자청비는 그때마다 기지를 발휘해 탄로나지 않고 잘 넘어간다.
삼 년 뒤에, 장가들러 오라는 하늘나라 옥황상제의 편지가 와서 문 도령이 서당을 떠나게 되었다. 자청비도 공부를 마치고 함께 돌아오다가 중도에서 목욕을 하며 문 도령에게 자신이 여자임을 밝힌다. 둘은 자청비의 집으로 돌아와 사랑을 나누고 헤어졌다.
자청비네 집 머슴인 정수남은, 소와 말을 각각 아홉 마리씩 모두 열여덟 마리나 잡아먹고, 이에 혼이 날까봐 자청비에게 산에 문 도령이 놀고 있는 것을 보다가 우마를 잃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자청비는 문 도령의 소식을 듣고 좋아하며 그와 함께 산에 갔으나 문도령은 없었다. 그제야 자청비는 정수남에게 속은 것을 알았다. 이에 더하여 정수남은 겁탈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래서 자청비는 그를 죽여버렸다. 부모는 자초지종도 모르고 자청비가 일 잘하는 남종을 죽였다고 해서 그녀를 쫓아냈다.
자청비는 남장을 하고 서천꽃밭으로 가서 속임수로 서천국의 막내딸과 결혼한 후 생명꽃을 얻어와 정수남을 살린다. 그러나 부모는 여자가 남자를 죽였다 살렸다 한다고 다시 내쫓았다.
자청비는 청태국 마귀할망의 수양딸이 되어 하늘나라 문도령에게 갈 비단을 짜면서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함께 새겨 넣어 보냈다. 그 후 문 도령이 내려 보낸 선녀들을 도와주고 하늘로 올라가 문 도령을 만난다.
문 도령은 부모에게 자청비와 결혼할 것을 청하고, 자청비는 시부모가 숯불을 피운 오십 자 구덩이 위에 칼을 거꾸로 세우고, 그 위를 통과해야 하는 시험을 통과하여 결혼하게 된다.
자청비는, 그 전에 서천꽃밭에서 남장으로 속여 서천국의 막내딸과 거짓 결혼을 한 일이 미안해서, 문 도령으로 하여금 서천국의 막내딸과 결혼하고 돌보아 주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문 도령은 그 집과 이쪽 집을 보름씩 교대로 오가며 남편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 도령이 한 번은 기한이 넘어도 그 집에서 돌아오지 않자, 자청비는 시부모가 죽었다는 거짓 편지를 새의 날개에 끼워 보내 그를 돌아오게 한다.
하늘나라에서는 자청비의 미모가 소문나면서 많은 선비가 모여 그녀를 보쌈하기로 한다. 그리고 선비들은 잔치를 벌여 그녀의 남편인 문 도령을 초청한 후 술을 먹여 죽이려고 하였다. 자청비는 기지를 발휘해 선비들의 보쌈을 모면한 뒤 남장을 하고 서천꽃밭으로 가 환생꽃을 가져와서 문 도령을 살려낸다. 또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자 자청비가 서천꽃밭에 가서 생명을 죽이는 악심꽃을 가져와 난을 진압하기도 했다.
자청비는 이 공을 인정받아 옥황으로부터 오곡 종자를 얻어 음력 칠월 열나흗날 문 도령과 함께 지상으로 내려온다. 와서 보니 부모는 죽어 없고 정 수남은 굶어서 죽어가고 있었다. 자청비는 정수남을 위해 밥을 준 늙은이의 밭에는 풍년을 주고, 밥을 주지 않은 아홉 형제의 밭에는 흉작을 준 후 정수남을 목축신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지상으로 와보니, 메밀 씨를 잊고 와서 하늘에 다시 가서 가져왔다. 그래서 메밀은 수확 시기가 다른 작물보다 조금 늦게 되었다.
하늘나라의 문 도령과 인간 세상의 자청비가 결혼하여 정착하기까지의,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는 복잡한 신화다.
중국도 상고시대의 신화에 신농씨(神農氏)라는 농업신이 등장하고, 주나라 때에 이르러는 후직(后稷)이라는 사람이 농업신으로 떠받쳐진다. 그런데 이들 농업신은 우리나라의 농경신인 자청비와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신농씨는 나무를 잘라서 쟁기의 보습을 만들고, 나무를 휘어잡아서 곡괭이를 만들어 씨를 갈게 했으며, 농사지을 때 김을 매는 일이 매우 이롭다는 것을 천하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시장을 열어 천하의 백성들을 오게 하여, 필요한 물건을 서로 바꾸어 얻게도 했다. 즉 그는 농경문화와 물물교환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후직(后稷)은 주(周) 부족의 시조인데, 어려서부터 농작물 심기를 좋아했다. 이 때문에 일찍이 요(堯)와 순(舜)의 농관(農官)을 지내면서 백성들에게 경작을 가르쳐 공덕을 쌓아, 후에 중국의 농업신(農業神)으로 받들어졌다.
이와 같이 중국의 농업신은 인간에게 단순히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청비는 온갖 고생을 겪고서 하늘에서 오곡의 씨앗을 가지고 왔다. 비유컨대, 지구라는 공간적인 배경에서 본다면, 중국의 농업신들은 우리가 하늘에서 가져온 씨앗을 얻어 가지고 가서 그것을 뿌리고 거두는 법만 백성들에게 가르친 셈이 된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아무런 고생도 하지 않았다.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기 위해 천상에서 불을 훔쳐 온 프로메테우스는, 그 형벌로 코카사스의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제우스로부터 받았다. 프로메테우스가 그러한 혹독한 과정을 겪은 덕분으로 인간은 불을 사용하여 편리한 삶을 영위하고, 나아가 찬란한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우리의 자청비도 그 못지않은 고난과 시련을 겪은 끝에 우리에게 곡식 씨앗을 가져왔다. 이 덕분에 우리는 배불리 먹고 잘 살게 되었다. 신화는 그 민족의 현실과 이상을 함께 담고 있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자청비는 무수한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이 땅의 모성의 다른 이름이다. 웅녀는 그 매운 마늘과 쑥을 먹으며 어두운 동굴 속에서 삼칠일을 견뎌내고 사람이 되었다. 자청비 또한 웅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고난을 겪었다.
자청비가 여자이면서 남장을 했다는 것은, 여성이란 모성을 가지면서 함께 남성적인 용기를 지녔다는 것을 암시한다. 자청비란 이름도 ‘비를 스스로 청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농사에 첫째가는 것이 비다. 우리의 농경신은 그만큼 활력 있고 사려 깊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는 인내력의 소유자다.
또 메밀 씨를 잊고 와서 하늘에 가서 다시 가져왔기 때문에 메밀은 수확 시기가 조금 늦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메밀은 구황작물이다. 날이 가물어 벼 같은 본 작물을 심을 수 없을 때 늦게나마 뿌려 거두는 대체작물이다. 본 작물을 심을 수 없을 때 그 대신 조금 늦게 심는 작물이다. 또 메밀은 아무데서나 잘 자란다. 메마른 박토에서도 잘 자란다. 우리의 농경신은 이 땅의 백성들이 가뭄에도 굶지 않고 목숨을 이어갈 수 있도록 세세한 배려를 했던 것이다. 신화 속에는 이러한 깊은 뜻이 들어 있다.
우리가 오늘날 수많은 시련을 딛고 풍족한 산물을 거두면서 만방에 우뚝 설 수 있는 나라를 만든 것도, 모두가 그러한 농경신 자청비의 정성이 그 밑에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첫댓글 저도 메밀을 한 해 농사지어 보았습니다. 농막 지은 첫해라서 생땅에 뿌렸는데, 잘 자라 주었습니다. 묵을 만들어 먹어보았습니다. 그것이 모두 자청비의 은덕이었군요. 공부 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