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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했던 산길이 어느덧 숲길이 되었습니다. 휑하니 다 보이더니 이제는 코앞에도 잘 안 보입니다. 그렇게 풀과 잎들이 무성해지고 있습니다. 비가 오락가락해서인지 나뭇잎들의 초록색 연두색이 빛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바닥에 풀꽃들이 여기저기 피어나고 있습니다. 나무에 높이 달린 것만 예쁜 것이 아니지요. 자칫 밟고 지나칠 수 있지만 가만 내려다보면 이 또한 예쁘게 빛을 내고 있습니다. 세상에 하찮은 존재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찮게 생각하는 것뿐이지요. ’나‘라는 존재도 세상에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반가운 사람이고 기뻐 맞이해줄 사람입니다. 사는 맛은 대단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소소해서 느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반드시 골맛을 보아서가 아니라 열심히 뛰었기에, 후회 없이 임했기에 스스로 자랑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끝에 가면 그게 다 그겁니다.
옷을 입었다 벗었다, 진작 동복을 치웠던 것이 후회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날씨 장단 맞추기가 그렇게 어렵던 한 주간이었습니다. 4월이 다가도록 고달프게 만듭니다. 그래도 이제 주일을 지내고 나면 계절의 여왕을 맞습니다. 오늘도 비 예보가 있기는 한데 그래도 이전처럼 추워지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만하면 됐지요. 더구나 여왕이 납시는데 어디 감히!! 아무튼 산불 말고는 이 무서운(?) 4월이 올해는 큰 탈 없이 지나갑니다. 그것도 감사한 일이지요. 시원하게 보냅니다. 5월의 희망을 안고 멋진 주말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주말을 빕니다. ^)^
2023년 4월 29일 김종우 목사 드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로마서 7 :23 - 24)
<웅남이>
억지로라도 웃으라고 합니다. 그냥 일부러라도 웃으라고 합니다. 웃음은 만병통치약이라고도 하지요. 세상 어느 피조물이 웃을 줄 알겠습니까?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특징이고 그로 인한 면역력 또한 대단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웃음이 나올 때는 구태여 참을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껏 웃으면 웃는 만큼 효과가 커집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돈 드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의 건강에 매우 높은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웃을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런데 세상 삶이 웃기기는 해도 웃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렵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를 만들려고 코미디를 보는 것입니다.
예전에 ‘내 안의 그 놈’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역시 일인이역의 이야기입니다. 전혀 다른 성격의 사람을 내놓고 서로 반대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어기적어기적 걷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모습을 상상해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걸음 자체가 웃기게 만드니까요. 그것을 노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걷게 만듭니다. 그것을 아주 곱상한 사람,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행동으로 나타낸다면 그 자체가 웃기는 일입니다. 그것을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지요. 조폭이 얌전한 학생으로 돌변하거나 반대로 얌전한 학생이 조폭으로 변신하여 돌발행동을 합니다. 무섭다기보다는 놀라기도 하고 웃기기도 합니다.
비슷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조금은 색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는 평범한 순경과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조폭이 서로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어느 쪽인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거의 같은 복장을 하고 나타났으니 서로가 놀랍니다. 겉모습은 같지만 하는 행동거지는 차이가 있습니다. 실력도 차이가 있지요. 서로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 그 점에서는 막상막하가 됩니다. 진짜 조폭을 잡으려 순경이 조폭의 모습을 꾸미고 나타나 대결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본인들은 압니다. 물론 그 행동을 통해서 조폭의 두목이 알아챕니다. 그리고 뒷일을 맡기고 자리를 떠납니다. 늠늠하게 도피하는 것이지요.
같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입장에서 격투를 벌이지만 이게 그냥 같은 모습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그것을 눈치 챕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업무를 떠나 둘의 마음이 통합니다. 그런 것이 혈육의 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이 있는 것이지요. 절벽으로 향하던 두 사람의 관계가 화합으로 마무리되는 과정입니다. 사실 그다지 극적인 장면은 안 됩니다. 그렇게 꾸미기에는 다소 상황이 어렵기는 합니다. 아무튼 어느 쪽의 승리나 패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막다른 골목에서 합해지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니 절망이 꼭 끝장을 부르는 것은 아니겠다 싶습니다. 속된 말로 끝은 새로운 시작이지요.
곰의 수한이 25년인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자신의 수명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직서를 내고 고향에 내려와 부모님과 함께 삽니다. 곰처럼 먹어대기만 하고 바보처럼 빈둥대며 삽니다. 그래도 힘은 역시 곰입니다. 그리고 냄새 맡는 능력이 대단합니다. 놀거나말거나 든든한(?) 아들이 옆에 있는 것이 아비는 좀 탐탁지 않지만 엄마는 좋기만 합니다. 사실 아비는 아들의 비밀을 알고 있기에 뭐라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얻은 아들인데요. 그러나 이 잘난 아들이 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백수로 사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엄마의 바람은 아들이 다시 경찰로 복직하는 것입니다. 멋진 경찰복을 입고 있는 아들을 그리며.
동생을 따라 일확천금 도박장에 갔다가 그만 경찰의 급습으로 현장에서 붙잡힙니다. 범죄자가 되어 잡혀가면서도 미안하면서도 겁에 질려 바라보는 동생에게 미소로 손을 흔듭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모습입니다. 인적사항을 조사하는데 전직 경찰입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대규모 범죄조직을 조사하던 형사가 조직 내의 막강 실력자의 얼굴을 조회하다가 아주 비슷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바로 도박장에서 현장 체포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꾀를 만듭니다. 경찰로 복직시키는 조건으로 그 조폭으로 변장시켜 저들의 계획을 무산시키려 합니다. 저들이 상품 인도하는 현장을 급습하여 현행범으로 두목을 잡아들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단 경찰이 조폭을 대신할 수 있습니까? 이런저런 훈련을 하는 자체가 코미디죠.
우리네 단군신화에 현대 조폭 이야기를 가미하고 세균전을 만들어 백신 장사를 하려는 무리와의 대결을 만듭니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모두 익숙합니다. 그 모든 것들을 비빔밥처럼 버무려 웃기는 연기로 치장한 것입니다. 다소 억지스런 모습도 보이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어느 정도 덮어줍니다. 25년 수명이라고 독백한 것이 사실은 발정기 시작 나이라는 설정이 조금은 나아보이는 코미디입니다.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저냥 조금 피식거리면서 볼 수 있습니다. 영화 ‘웅남이’(woongnami)룰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기근
새로운 것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호기심으로 시작하여 적응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낯설기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대체로 호기심 쪽에 반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이든 사람들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낯익은 것을 선호하지요. 위험 부담이 있는 것을 피하려 합니다. 안전과 안정 제일주의로 나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노인들은 특히 환경도 웬만해서는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새로 익히기에는 시간도 걸리고 불편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래서 피하려 합니다.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지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성취욕 등이 삶을 이끌고 갑니다. 그래서 이 배우려는 욕구가 사람을 젊게 살게 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는 욕망이 남아있다면 젊은 사람입니다. 그에게 나이는 말 그대로 숫자에 불과하지요. 인생이 어느 만치 왔든 젊게 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유대 사회를 많이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기존의 질서를 무시하는 듯한 예수님의 행동이었지요. 그런데 그 말을 들어보면 대놓고 반박할 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그 행동이 미워서 혼내주고 싶은데 무슨 근거를 댈 수가 없으니 속상하고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납니다. 예컨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반드시 지켜야 하지요. 그 날에는 어떠한 노동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별로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처신하는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빌미를 잡을까 고심하지요. 마 12 : 9 - 10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들 마음속에는 병을 고치는 노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고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11 - 1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고쳐주십니다. 말인즉 맞는 말인데 그 하는 짓이 괘씸합니다. 그래서 죽이고 싶어 하지요.
먹는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보겠습니다. 마 15 : 1 - 2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장로들의 유전’이란 그들의 전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비롯되었지만 문자에 매여 왜곡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깨우치십니다. 3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문자에 매이면 하나님의 말씀하시고자 하는 영적인 뜻을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 예를 오늘날도 범하는 것을 봅니다. 마 6 :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잘 아는 주기도문의 내용 중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필요도 날마다 주님께 구하라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욕심 때문에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한 달 쓸 것 또는 1년 쓸 것을 구한다고 질타를 받으며 이 말씀을 배웠습니다. 들으면서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렇구나.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라는 말씀이로구나, 그렇게 깨달았지요. 그런데 과연 그런 뜻입니까?
그 바로 뒤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31 - 32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먹을 것 입을 것 그런 것 구하지 말랍니다. 왜냐? 그런 건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랍니다. 이방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일용할 양식이 말 그대로 일용할 육신의 양식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은 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가르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방인이 되기를 예수님이 바라시는 겁니까? 말이 안 되지요. 누구 잘못입니까? 예수님이 잘못 가르치신 겁니까, 우리가 잘못 이해한 것입니까? 예수님이 잘못하실 리는 없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 6 :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영을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육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문제지요.
그런데 이 영의 양식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영의 세계에 하나님편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 편에서 쫓겨난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사역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역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마귀의 손아귀에 빠져 있으니 이 세상을 어서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로 회복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것을 누구에게 맡기십니까? 바로 하나님 백성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약속하신 바도 그것이었습니다. 출 19 : 5 - 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세상을 마귀의 손에서 되찾고 즉 정복하고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 나라로 회복하는 것이지요. 피조물도 그런 세상을 바라고 있습니다. 롬 8 :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영의 양식에도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대체로 교회에서 증거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의 양식이 두 가지이기 때문에 분별해서 먹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사람의 계명이 있고 하나님의 계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계명은 세상에 있고 하나님의 계명은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둘 다 하나님 백성 가운데 즉 교회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사회 속에 사람의 계명이 지배하고 있던 것처럼 말이지요. 구약 시대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백성 속에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이 가득 차서 먹을 것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기근이고 기갈이 생기는 것이지요. 암 8 :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나님 말씀 속에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는데 그 뜻은 모르고 육으로 가르치고 배우고 지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백성이 기근에 처합니다.
그런 유대 사회 속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기근으로 굶주린 백성은 예수님의 말씀을 주는 대로 받아먹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눅 6 : 20 -21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하지만 스스로 부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먹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24 - 25 “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으로 부자가 아니라 마귀의 말로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먹어서는 안 될 양식으로 부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난하고 주린 자들에게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요 6 : 48 - 5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그랬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신 양식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배를 채워주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먹고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시는 양식은 먹으면 죽지 않는답니다. 다시 말해서 영생의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귀가 번쩍 뜨일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양식이 예수님의 살이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유대인들 속에 소란이 생깁니다. 52절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제자들 속에서도 문제가 생깁니다. 60절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그래서 결국 떠나는 제자들도 생기지요. 66절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하나님의 백성이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남은 자들에게 묻습니다. 67절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그 때 베드로가 나서지요. 68 - 69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여 누구나 하나님 말씀을 다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함께 있어도 그들이 모두 하나님 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자 하는 마귀의 세력은 어디에나 숨어 있습니다. 70 - 71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그렇다고 하나님이 당장에 쓸어버리시는 것도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때가 있는 것이지요. 악한 자도 악한 때에 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게 마련입니다. 잠 16 : 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이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신 것은 말 그대로 육체의 살과 피를 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말씀이지요.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며 영생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은 곧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영생을 얻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 영이 살아 성장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을 먹음으로써 즉 들음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없고 겉으로는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사람의 계명만 하나님 백성들 속에 차고 넘쳐 기근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그 가운데 오셔서 생명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문제는 그 말씀을 받아 누리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지요. 그들의 입장에서는 생소한 말씀입니다. 여태 알고 있던 말씀과 다릅니다. 그래서 배척합니다. 영의 말씀을 육으로 들으려 하니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지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마 11 : 15, 13: 9, 43) 사실 예수님께 온 사람들 가운데 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물론 눈에 보이는 그런 귀가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기근이고 기갈이었을까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하나님 말씀 곧 성경을 들으며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늘 하나님 말씀이 강론되었지요. 그런데 왜 말씀이 없는 기갈이었을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누구나 소유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서기관 바리새인들, 율법사와 제사장들이 늘 백성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가르쳤을까 하는 것이지요. 대부분 역사와 교훈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하나 지키는 데만도 부가된 율법 조항이 백 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그 예가 성경에도 나옵니다. 행 1 :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안식일에 얼마만큼 이상을 걸으면 노동이 되기 때문에 그것도 규정해 놓았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율법을 지키기 위한 세부사항들을 만들고 그것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정작 구원과 영생에 관련된 메시야에 대한 예언에는 무지했다는 말입니다.
모르는 것까지는 좋은데 자기 생각대로 해석하고 가르치니 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계명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하나님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 묵시가 이루어질 때까지는 봉해놓으셨습니다. 그러면 이루어질 때까지 잠잠히 기다려야 하지요. 사 29 : 11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단 12 : 9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찌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사실 다니엘이 자기가 받아 기록은 했지만 자신도 무슨 말씀인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이루어질 때까지는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중간에 밝혀지면 마귀가 방해할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봉해놓은 것이지요. 그러므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보았다고, 안다고, 아는 척하고 나팔 불고 다닙니다. 그러면 그게 하나님 말씀이겠습니까? 자기 말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 9 :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사람의 계명으로 만들어 가르치고 배우면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영을 좇아 하는 짓입니까? 성령이 아니라 악령이고 마귀의 종노릇 하는 것이지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와 교훈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물론 그 속에도 예언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요한 내용은 예언서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미리 직접 말씀해주신 것도 있지요.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 24장입니다. 우리가 흔히 ‘종말장’이라고 말합니다. 마 24 :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이 재림과 세상 끝에 대하여 물었기에 예수님이 그에 대하여 길게 답을 해주십니다. 그러니 예언과 같은 말씀이지요. 당연히 이룰 때까지는 봉해져 있습니다. 이 사실이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계 5 :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잘 보십시오. 봉해져 있는데 ‘안팎으로 썼고’ 라고 말씀합니다. 봉해져 있는데 써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그러므로 ‘봉해져 있다’는 말은 물리적인 뜻이 아니라 상징적인 말이지요. 비유로 감추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보았다, 깨달았다 하며 나름대로 강해를 하고들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 뜻입니까, 자기 뜻입니까? 소위 사람의 계명이란 말입니다. 여전히 말씀의 기근이지요. 언제요? 오늘날 말입니다. 그러니 기근이 아프리카의 기근도 아니고, 지진이, 지진이 아니고, 전쟁이,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열리는 때가 옵니다. 소위 마지막 때입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사항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도 그러한데 하물며 기다리고 있는 우리는 더욱 궁금하고 알고 싶어 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빌미로 이거다 저거다 자기 멋대로 추정하여 가르치거나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고하신 것이 있습니다. 잠 30 : 6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하나님 앞에 거짓말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계 22 : 15)
여기 거짓말도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이해할 줄 압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더하거나 빼거나 하는 것을 가리켜 성경에서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영입니다. 그것을 자꾸 육으로 해석하면 거짓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지도 못합니다. 앞에서도 예를 들었듯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기도문에서 이 양식을 육의 양식으로 생각했다가는 우리는 이방인이 구하는 것을 구하는 꼴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육의 양식을 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의 양식을 구한다면 말이 되는 일입니까? 오늘날 우리가 왜 기근 속에 있는지 이해합니까?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말씀으로 신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질타하십니다. 마 15 : 8 - 9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그 때의 실수를 우리가 또 반복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 하나님 예수님은 이기는 자를 통해서 ‘감추었던 만나’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계 2 : 17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그러니 우리는 이 감추었던 만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이것을 찾아 먹어야 기근을 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하셨지요. 마 24 :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마지막 때 예수님이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을 찾으십니다. 그는 하나님 가족에게 때를 따른 양식을 나눠준답니다. 이 양식이 바로 마지막 때까지 감추었던, 그 마지막 때에 맞는 찾아먹어야 할 영생의 양식입니다. 이것을 모르니 기근이지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배워서 깨닫고 알고 신앙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달린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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