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본기(史記 本紀), 항우본기 중 원사해골귀졸오
*項王乃與范增急圍滎陽, 漢王患之, 乃用陳平計閒項王, 項王使者來, 爲太牢具, 擧欲進之, 見使者, 詳驚愕曰, “吾以爲亞父使者, 乃反項王使者”, 更持去, 以惡食食項王使者, 使者歸報項王, 項王乃疑范增與漢有私, 稍奪之權, 范增代怒, 曰, “天下事大定矣, 君王自爲之, 願賜骸骨歸卒伍”, 項王許之, 行未至彭城, 疽發背而死(항왕내여범증급위형양, 한왕환지, 내용진평계간항왕, 항왕사자래, 위태뢰구, 거욕진지, 견사자, 양경악왈, “오이위아부사자, 내반항왕사자”, 갱지거, 이악식식항왕사자, 사자귀보항왕, 항왕내의범증여한유사, 초탈지권, 범증대로, 왈, “천하사대정의, 군왕자위지, 원사해골귀졸오”, 항왕허지, 행미지팽성, 저발배이사).
항우가 범증과 함께 급히 형양을 포위했다. 유방이 이를 근심하다가 진평의 계책을 써 범증과 항우를 이간질했다.
항우의 사자가 오자 태뢰(太牢, 소.양. 돼지고기)의 음식을 준비해 내놓았다가, 항우의 사자를 보고는 짐짓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부(범증)의 사자인 줄 알았는데 항우의 사자였구나!”
그러고는 음식을 물린 뒤 형편없는 음식(惡食)으로 사자를 대접했다.
사자가 돌아와 항우에게 보고하자 항우는 범증이 유방과 사통하는 것으로 의심했다. 조금씩 그(범증)의 권력을 빼앗기 시작한 이유다.
범증이 대로했다.
“이제 천하의 일이 대략 정해졌으니 앞으로는 군왕 스스로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늙은 몸이 사표를 내고 귀향한 뒤 일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
항우가 이를 허락했다.
범증은 팽성에 이르기도 전에 등에 악성 종기가 나 죽었다.
*위 부분은 사마천의 사기 본기(史記 本紀) 중 항우본기(項羽本紀) 중 일부를 발췌해 본 것으로 한고조 유방의 천하통일의 공신 중 하나인 진평이 수세에 몰려 형양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항우와 항우의 책사인 범증을 이간책을 써 범증을 항우로부터 떠나게 한 대목에서 항우가 진평의 이간책에 넘어가자 범증이 항우의 어리석음에 대로하여 항우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한 여생을 마치고자 간하는 내용입니다.
*만일 전쟁의 신이라 할 수 있는 항우가 범증의 간언을 들어 홍문연이나 위와 같이 유방이 수세에 몰렸을 때 범증의 간언을 들었더라면 유방을 패사(敗死)하였을 것이고, 만일 그리하였다면 항우가 천하통일을 하거나 한신과 항우가 천하의 패권을 다투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해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일각에서는 성공학과 대비되는 실패학의 기본 텍스트로 항우본기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평도 나오게 된 배경이 되었습니다.
*사마천(司馬遷, 자는 子長, 기원전 145년~86년, 한경제의 치세인 기원전 145년 전후에 사관으로 재직한 사마담의 아들)의 필생의 역작 사기(史記)(太史公記, 또는 太史公書로 불리기도 함)는 오제부터 한무제까지 제왕의 역사를 기록한 본기(本紀), 역대 제왕과 제후의 연표를 기록한 표(表), 고대 중국의 역법, 치수, 경제를 기록한 서(書), 역대 제후와 공신들의 연대기인 세가(世家), 정치가, 학자, 군인, 자객, 해학가 등 각종 인물의 흥망사를 기록한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사마천은 한무제 때 천문역법을 관장하는 태사령이 된 후 49세 때 황제를 무고한 혐의로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부친의 유한과 사마천 개인의 통한을 승화시킨 작품인 사기를 작성하기 위해 당시 죽음만도 못한 것으로 여긴 굴욕적인 궁형(宮刑, 거세형)을 자청해 죽음을 면한 후 세기의 역작 사기를 저술하여 후대에 역사를 거울로 삼아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이치를 깨닫는 사감(史鑑)의 전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사기를 관통하는 핵심어는 대의멸친(大義滅親)으로, 치국평천하의 대의를 위해 친인척으로 상징되는 소의(小義)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마천은 기본적으로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극도로 싫어하는 호리오해(好利惡害)를 인간의 본성으로 파악했고, 사기 중 열전은 사기 총 130편 중 70편에 달하는 것으로 사기의 꽃에 해당한다고 하고(열전을 읽지 않으면 사기를 읽지 않은 것과 같다고 표현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열전만 따로 번역한 책이 많이 출간되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