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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3. 묵상글 (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 이웃이 되어 준 사람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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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3.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이웃이 되어 준 사람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이웃사촌만도 못하다(잠언27,10)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실제로 표현되어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에는 “네 친구와 아버지의 친구를 저버리지 말고 불행할 때 형제의 집으로 가지마라.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잠언27,10).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이가 이웃입니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는 마음이 불타오르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되었는데 마침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는 지나가 버렸고 또 레위인도 지나갔는데 그도 역시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료해 주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입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율법교사가 자신 있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10,37) 하고 대답하였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누가 이웃이며, 이웃이 아닌지에 대해서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당한 사람을 남으로 보았고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행동이 다르게 표현된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것이,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사실“우리가 병들고 궁핍한 사람을 만지는 것은, 곧 고통을 받는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것입니다”(성 마더데레사). 그리고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묻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려고 마음을 먹을 때 이웃이 보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이웃입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이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까지 미워하는 셈이며 멸시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의하면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저 '어떤 사실을 보는 사람'으로 머물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라 납니다.”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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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3.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두 번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기는 하나, 율법교사의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스스로의 ‘행실’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은 그분께 메여있는 ‘존재’임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은 ‘무엇을 하느냐?’는 행위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라는 존재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소임을 맡느냐가 중요하기보다, 사랑으로 그 소임을 수행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곧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루카 10,27)이 되는 일입니다.
<두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마르 10,29)
이 질문 뒤에도 역시 그의 옹졸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사랑의 대상에는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마르 10,36)
예수님께서는 누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대답하기보다, 오히려 ‘모든 이웃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우리는 모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이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모두에게 이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단지 이웃이 아니라 형제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문제보다, ‘나는 이웃이 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먼저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나의 형제인가?’묻기에 앞서, ‘나는 그의 형제가 되어주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곧 내가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루카 10,37)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주님, 저희가 자비를 입었으니, 저희도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대화의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37)
이 말씀은 아는 것에 멈추지 말고, 행동으로 실행하라는 요청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 하라는 말씀이요, 의무적으로나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 때가 아니라, 그렇게 실행할 때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루카 10,36)
주님!
초라해진 저의 모습을 봅니다.
초주검을 당해 쓰러진 이들이 여기 저기 웅크리고 있는데,
저는 그들과는 반대방향의 열차에 앉아 길을 피해 달아납니다.
강도 맞은 이를 여관으로 옮겨 돌보아 준 사마리아인의 용기와 사랑 앞에,
부끄러움의 고개를 숙입니다.
말없는 그의 헌신과 뒷날까지 챙겨주면서도 고요히 떠나는 그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주님! 제 안에 사랑을 담을 수 있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용기를 담을 수 있게 하소서!
제 안에, 기꺼이 손해 보는 자유를 담을 수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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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3.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알람이 저를 깨워줍니다. 똑똑한 스마트폰은 새벽 4시를 알려주고, 오늘의 날씨도 알려주고, 뉴스도 전해줍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알람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이른 새벽에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복음서에는 잠을 깨우는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한번은 제자들이 호숫가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두려워 떨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배에 누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함께 계셨음에도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아셨고, 풍랑을 잠잠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우리는 미사참례를 하고, 성체를 받아 영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쩌면 풍랑을 만났던 제자들처럼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흔들리곤 합니다. 믿음이 부족한 우리는 오늘도 제자들처럼 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번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실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가야파, 헤로데,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을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모욕과 조롱을 받으실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실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깨우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되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두려우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오늘은 정호승님의 ‘수선화에게’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말씀입니다. 복음은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외의 복음은 헛된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지금 강도당한 이의 따뜻한 이웃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복음은 가끔은 외로워서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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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3.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평화방송을 시작하면서 더 바빠졌습니다. 여기에 외부 강의도 늘어나면서 다른 곳에 신경 쓰기가 힘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시간 없어.”
글도 매일 써야 하고, 방송과 외부 강의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성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지 일도 그대로 해야 하기에 매일 바빴습니다. 그래서 좀 쉬고 싶더군요. 바로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을 때, 원고 청탁 전화가 왔습니다.
예전에 홍보실장으로 있을 때, 원고 청탁의 어려움을 느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다짐했었습니다. 제게 원고 청탁하면 절대로 거절하지 않겠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일이 많다는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마음이 너무 불편했습니다. 그러다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시간’ 때문에 하나씩 포기하게 되면, 결국 내게 남는 건 먹고사는 일의 고단함과 공허함밖에 없다.”(정김경숙)
시간 없는 것이 아니라 안 되는 일을 찾으려는 마음이 더 컸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능력과 재주를 저 편한 대로 다뤄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고단함과 공허함을 남기지 않기 위해 ‘시간 때문에’라는 핑계 만들기보다는 할 수 있는 긍정적 마음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는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워낙 유명한 비유인데, 이 비유에서 세상의 시선과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야기이지요. 사실 우리 사회의 관심은 범죄자 체포 여부가 관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강도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또 얼마나 잔인하게 강도질했는지를 궁금해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의 관심은 피해자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이 세상은 범죄자를 처벌해서 사회를 바로 잡으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사랑으로 사회를 옳게 이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제, 레위인은 민족의 거룩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네들 직무와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피해자가 죽은 줄 알고 시체에 손을 대서 부정을 타지 않으려는 율법 준수가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어떤 이유도 필요 없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서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만이 진짜 이웃임을 강조하십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만드는 가짜 이웃은 안 됩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사랑할 수 있는 진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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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 아마도 그것이 시간이 하는 역할일 것이다(제이슨 모토, 미국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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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3.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여정, 사랑의 훈련, 사랑의 전사
-사랑밖엔 길이 없다-
오늘은 단기 4355년, 서기로는 2022년 10월3일 개천절입니다. 단군이 최초의 민족국가인 고조선을 세운 날로 4대 국경일중 하나입니다. 제 어렸을 때만해도 달력에는 단기와 서기가 함께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하늘이 열린 날’이라는 개천절開天節 뜻도 새롭고, 개천절 가사 1절도 오랜만에 찾아 노래해봤습니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단군이시니를 하느님이시니로 읽으면 더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서력기원전 2333년에 하늘을 열고 나라를 세워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애국가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가 흡사 성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한민족 국가임을,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유구한 전통의 문화민족, 하느님의 백성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강론은 믿음에 대해 나눴고 오늘은 사랑에 대해 나눕니다. 믿음 대신 사랑을 넣어 “사랑의 여정, 사랑의 훈련, 사랑의 전사-사랑밖엔 길이 없다-”로 정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전반부는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란 사랑의 이중계명이 나오고, 후반부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평생 사랑의 학교에 재학중인 우리들은 또 사랑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이제는 사랑의 이중계명에 자연의 피조물 사랑까지 더하여 사랑의 삼중계명 시대에 돌입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올해의 배피해도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 섭리란 깨달음입니다. 평년 수확의 반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배농사는 잘 되었는데 본의 아니게 피조물인 까마귀, 까치, 벌레들과 함께 나누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올해 교회일치적 기념의 시기는 9월1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시작하여 내일 10월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에 끝나며 우리 수도자들은 그동안 매일 끝기도 때마다 공동으로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문을 바쳤습니다. 바로 이와 맞물려 9월 피조물들과 나누다 보니 배밭농사가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된 것입니다. 교황님의 담화문중 일부를 인용합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찬가에 우리도 동참합시다. ‘저의 주님, 주님의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찬미받으소서.’ 시편저자와 함께 ‘숨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여라.’(시편150,6) 노래합시다. 안타깝게도 이 아름다운 노래에도 비통에 찬 울부짖음의 합창이 따릅니다.
먼저 우리의 누이이며 어머니인 지구가 울부짖습니다. 지구는 우리의 소비주의적 만행의 희생양이 되어 흐느끼며 우리의 남용과 지구의 파괴를 멈추어 달라고 간절히 요청합니다. 울부짖는 피조물들도 있습니다.
창조 사업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중심성에서 완전히 어긋나는 ‘자의적인 인간 중심 주의’에 휘둘려 수많은 생물종이 멸종하고 있고, 그들의 찬양 노래가 들리지 않습니다.”
참으로 피조물인 자연사랑과 더불어 생태적 회개의 절박성을 깨닫습니다. 요즘 수도원 쓰레기장을 보면 산같이 쌓이는 쓰레기들에 저절로 탄식이 나옵니다. “아, 먹는 것이 죄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대부분 택배를 비롯해 식품과 관계된 쓰레기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 어렸을 때 50-60년대 버리는 쓰레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배설되는 오물들은 밭으로 갔고, 음식물 찌거기와 구정물은 돼지나 닭이 먹었습니다. 모두가 저절로 지속가능한 순환시스템의 삶이었습니다. 나무와 흙과 짚과 돌들로 이루어진 집들도 허물어지면 그대로 자연으로 돌아갔습니다. 감상적 회고가 아니라 오늘날의 심각성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사랑의 여정중인 우리들이요 평생 사랑의 전사로 사랑의 영적전투와 더불어 사랑의 영적 훈련에 전념해야 할 우리들입니다. 어제는 미사중 ‘사랑의 전사로 평생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다가 영적전투중 부상으로 인해 병이 들어 주님의 수난에 참여하여 주님과 하나 되고, 보속補贖과 대속代贖의 삶이 된다면 이 또한 축복이요 감사가 될 수 있겠다.’하는 깨달음에 위로가 되고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끝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영적전쟁중 부상이나 상처의 아픔을 잘 관리하고 보살피며 한결같이 사랑의 영적 전투에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다 보면 하느님 친히 도와 주실 것입니다. 오랜 군생활의 백전노장들이 전투에 부상도 많은 것처럼 평생 주님을 위해 영적전투를 하는 수도자들 역시 훈장처럼 병도 상처도 많을 것이며 전혀 부끄러워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정작 부끄러워할 것은 병이 아니라 죄요, 정작 무서워할 것은 병으로 인한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죄로 인해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영혼의 죽음’입니다.
제1독서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의 전사, 사랑의 전사, 그리스도의 종인 바오로 사도는 하나인 복음에 대해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자체가 바로 복음임을 일깨워 줍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얻은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을 오늘 루카복음서에서 배웁니다. 새롭게 마음에 와닿는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우리 사랑의 전사가 명심하여 지켜야 할 내용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율법교사가 이처럼 사랑의 이중 계명을 대답했을 때, 주님이 주신 답변은 사랑의 전사들인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저는 여기 사랑의 이중 계명에, “네 주변의 이웃인 피조물 자연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를 더하여 사랑의 삼중계명의 때가 도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착한 사마리안의 출현이 놀랍습니다. 사랑의 전사들인 우리에겐 신선한 충격이요 모범이 됩니다. 종교인도 유다인도 아니면서 자비하신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있는 인물이 사마리아인입니다.
사제도 레위인도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이를 피하여 갔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시종일관 최선의 사랑을 다해 살려 냅니다. 사랑의 전사라면 모름지기 “누가 나의 이웃인가?” 내 중심이 아닌,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할 것인가?” 곤궁중에 있는 이들을 중심에 두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한 하느님의 세 특징을 지녔음을 봅니다. 초주검이 된 이를 살려 내는 과정에서 사마리아인의 ‘친밀함closeness, 연민compassion, 부드러움tenderness’ 의 세 모습에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특성이 잘 드러납니다. 마지막 주님과 율법교사가 주고 받은 대화가 우리에게는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사랑은 관념이나 추상명사가 아니라 행해야 하는 동사입니다. 사랑의 전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사랑의 수행자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의 전사, 사랑의 수행자되어 살게 하십니다. 그러니 주님의 다음 말씀대로 자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10.37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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