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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들은 폭력의 부메랑을
폭력의 상처로 나타난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W. 휴 미실다인 저 "몸에 밴 어린사절"은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의 필독서가 되었습니다.
내적 치유의 교과서라고도 할 수 있는 몸에 밴 어린 시절은
상담과 치유 사역자들에게 많이 읽혀졌습니다.
상처받은 내면의 어린 자아는
성인이 되어서 저지르는 모든 범행의 내적 동기라고 보고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들에게는
죄는 없고 상처받은 자아만 있습니다.
폭력의 되물림은
결과적으로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긍정적으로 인식합니다.
폭력의 부메랑 현상은 대를 이은 폭력의 되물림이요,
상처받은 자아의 악순환, 그 자체라고 합니다.
내적 치유의 문제는
죄를 심리적인 병리 현상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죄를 심리적인 병리 현상으로 생각하는 내적치유를
성령의 내적 치유라는 개념으로 교회는 받아들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성령의 내적 치유는
내적 치유의 가면이요, 심리학을 인본주의 신앙으로 승화하였습니다.
의인과 악인 사이에 존재하는 자아는
어떤 환경의 요인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고 내적 치유를 받아 회복해야 된다고 합니다.
결국 죄의 용서는 없고
상처의 치유만 있습니다.
신앙의 상담학적 역활은
가정 사역과 치유 사역으로 나타났습니다.
신앙은 믿음과 불신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상처를 내적 치유로 회복하는 것이 종교의 역활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곧 인본주의 신앙의 목적이요,
마음의 상처를 내적 치유로 회복하는 것이 오늘날 종교적 목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긍정적인 마인드는 내적 치유의 활검이요,
부정적인 의식은 자기를 죽이고 또한 다른 사람을 해치는 살검이라는 인식입니다.
긍정적인 마인드는
최고의 영성이라는 종교적 가치와 경지를 융합하였습니다.
긍정의 가치는 치유의 활검이요,
종교적으로 최고의 영성이라는 경지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아니며
성경의 복음적인 가르침이 아니요, 구원을 인치는 성령의 사역이 아닙니다.
폭력의 부메랑은 성장하는 자아의 내면에 흐르는 폭력의 되물림이 아니라
행한대로 보응받는 형벌입니다.
죄의 폭력과 파괴성은 치유가 아니라
용서받아야 할 죄요, 그 악입니다.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 전문가들 조차 용서의 능력을 갖지 못하니까
치유와 회복의 건강 복음을 제시합니다.
용서는 치유가 아닙니다.
용서는 긍정적인 의식으로 도달할 수 있는 영성의 경지가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의를 힘입는 것이요,
믿음은 하나님의 용서를 은혜로 누리는 생명의 빛입니다.
최근 어린이집 교사의 아동 폭행에 대한
전국민의 분노가 들 끊고 있습니다.
어떻게 저럴수가 있는가?
아동 폭행에 대한 사이코패스다고 분노의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천인공로할 아동 폭력에 대해 분노하는
그 사람들은 또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힘입지 못한
또 다른 대상일 것입니다.
용서받은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분노의 돌을 던지지 않습니니다.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사죄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은
분노의 돌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온유와 관용의 사람입니다.
용서의 십자가를 가진 사람은
용서받지 못한 사람의 십자가를 온유와 관용으로 대합니다.
그러나 용서받지 못한 십자가를 가진 사람은
자기 죄로 죽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죄를 분노하며 질책합니다.
사랑의 복음으로 변화되고 성숙하지 못한 우리 사회는
과연 건강한가?
우리 사회는 남의 탓에 길들여진 분노의 돌을 던지는
바로 그 죄상으로 가득하기만 합니다.
언제 마녀 사냥감이 되어
인민 재판으로 공개처형될지 모르는 불안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를 보고 질책하는 세상입니다.
메스컴에 의해 폭력으로 길들여진 세상은
모두들 그저 미쳐갈 뿐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킬링필드의 참상, 그 자체입니다.
전국민의 눈을 폭력으로 물들이고도
메스컴은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켰다고 보도의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성경의 다윗은 사울을 죽이고 또 요나단의 죽음의 소식을 알렸던 그 병사를
칭찬과 상은 커녕 오히려 죽였습니다.
좋은 소식은 행복의 미소를 꽃피게 하지만
나쁜 소식은 분노로 험악한 얼굴을 일그러지게 합니다.
19금이 없는 무차별적인 보도는
선한 어린 양심을 아주 멍들게 합니다.
어린 아이들까지 동원한 분노의 현장은
행복의 본질을 잃어 버린 또 다른 우리 사회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메스컴의 역기능은
여론을 조작하고 마녀 사냥몰이를 하고 자유와 권리를 억압합니다.
대다수 선량한 국민은 상업적 뉴스 보도의 갑질 횡포로
적지 않는 마음의 상처로 트라우마를 겪고 날마다 방송의 폭거에 농락당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집 교사의 폭행에 희생당한 어린이만 트라우마를 겪는 것이 아니라
그 영상을 방송으로 보고 욕을 하면서 미친 분노의 돌을 던지는 대다수 국민은 모두 그 폭력에 감염되었습니다.
폭력에 피해를 입은 어린이는 병원치료를 받아 회복하겠지만
미친 분노의 돌을 던졌던 마음의 악을 표출한 그 상처는 누가 치료를 합니까?
모든 국민을 상대로 폭력을 즐기는 사이코 패스로 만들어 가는 거친 뉴스 보도는
누가 질책하며 양심의 항거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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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부메랑......
그 대표적인 성경의 인물은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폭력의 상처, 그 트라우마를.......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삶으로 극복하였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바로 그 폭력적인 바리새인의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바울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환란과 박해를 주도하였던 인물로
스데반의 죽음에 가편투표를 하였고 석형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스데반에게 죽음의 돌을 던진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둔 것이 말해주듯
바울의 주도로 종교적 편견과 독선에 의해 로마법을 무시하고
공식적인 재판의 절차도 거치지 않고 돌발적으로 석형을 집행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후 유대교의 기독교에 대한 분노가 폭력적인 감정으로 이어졌고
예수 믿는 사람을 찾아서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살기 등등한 악당이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전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잔해하였던 자라는 것을
신앙간증으로 고백하였습니다.
딤전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고전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 하였습니다.
갈1:13-14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빌3:5-6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붙잡혀 두 쇠사슬로 결박되고 소요를 인하여
성문 안으로 들어가 층대에서 천부장과 백부장과 소요를 일으킨 유대 무리를 향하여 자신을 변호하였습니다.
행22:3-5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받게 하려고 갔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아그립자 왕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행26:9-12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빛 가운데 만나기 전에는
극악무도한 죄인의 괴수, 그 자체였습니다.
폭행자는 격분하는 분노의 폭발로 가득할 뿐......
일말의 양심이라고는 없습니다.
상습적인 폭행은
폭력의 사이코패스로 살인마의 첩경입니다.
종교적 열심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고 교회를 잔해하였던 바을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을 때 폭력의 부메랑이 되돌아 왔습니다.
폭력을 심고 고난을 거두는 바울의 모습은
인과응보의 형벌이었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순교의 길이었습니다.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바울의 모습은
지난 날 자신의 모습으로 폭행의 부메랑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행21:30-33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혔습니다.
저희가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의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저가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저희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쳤습니다.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기 전......
복음을 전하는 전도여행 길에서도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폭력의 가해자가 폭력의 피자가 되어
핍박자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복음의 실상이 되었습니다.
지난 날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심히 격분하고 교회를 핍박하고 잔해하였던 바로 그 분노가
이제는 바울 자신에게 고난의 이름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후11:23-27절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하였습니다.(고후11:28-30 )
고후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일행이 당하는 극심한 환란과 핍박을 ....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는
믿음의 연단으로 받았습니다.
고후4:8-12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세속의 부귀와 영화를 기대하지 않았고 ....
오직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는 정신으로 깨어있었습니다.
고전4:9-14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롬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같이 바울은 폭력의 부메랑에 대해서
양심의 항거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소위 말하는 권리침해를 받았다고 소송하지 않았고
인권유린을 당하였다고 세상 법에 송사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
고백한 바울의 입장은 진정한 사도의 길이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초대형 교회의 성공신화는
선지자와 사도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울은 고난받는 사도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초대형 교회의 복당으로 자리잡은 맘몬 신앙으로는
고난으로 만물의 찌꺼기가 된 바울의 삶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복음의 본질적인 고난의 삶을 신앙으로 교훈하지 않는
초대형 교회의 비주얼은 영적 바벨론일뿐입니다.
폭력의 상처는
법으로도 양심의 항거로도 치유될 수 없습니다.
바울처럼 오직 고난의 신앙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열린 십자가의 길에서
용서와 평강을 영원히 얻을 수 있습니다.
폭력의 트라우마를 그리스도 안의 신앙으로 극복하고 영생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던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종이요, 신실하고 충성된 사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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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단과 사이비의 쓰나미를 맞고 강단과 SNS는
소위 그 거짓의 성을 지키지 위해 서로 욕하고 비난하며 사탄, 마귀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습니다.
실로 유대교와 로마의 박해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믿음의 연단으로 성숙한 신앙을 가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사도 바울이 가진 예수의 그 흔적을 잃어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