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대기근과 청과 조선의 식량사정
병자호란 이후,조선으로부터 매년 1만 석씩의 공물을 받아 버티던 청은 몇 년치 공물을 미리 땡겨 받고 10만 석을 따로 또 내라고 하면서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보충했습니다. 조선은 10만 석 이상을 지원해줄 정도의 여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이는 곧 어두운 그림자를 가져왔고, 1649년 함경도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조선은 반대로 청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고, 청은 잉여 곡물을 구매하게 해달라는 조선의 요청을 선선히 받아들입니다. 바로 곡물이 풍부한 강남 지역을 이 즈음인 1645년 경에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선은 더 이상 청에게 곡물을 지원할 이유는 없었고, 그런 대로 숨통을 틔게 되죠. 옹정 2년에 들어서서 1만 석에 달하는 곡식은 60석, 40석으로 차근차근 줄어들게 되니까요.
17세기 전반 소빙기의 한랭하고 건조한 날씨로 지속적인 기근에 시달리던 명은 숭정 13~15년의 대기근을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계갑대기근을 비롯한 잦은 기근에 시달렸던 조선은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그렇지만 소빙기의 기후변동이 절정으로 치달았던 17세기 후반에는 조선도 파멸적인 대기근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 정점에는 경신대기근과 을병대기근이 있었죠. 1650년대 주목되는 기근으로는 효종 4~6년인 1653~1655)년의 기근을 들 수 있습니다.
소빙기 동안 이상저온과 변덕스러운 날씨는 매우 흔했는데 이때의 한재는 특히 심했죠. 전국 곳곳에서 한여름에 눈과 서리가 내렸고, 1655년 봄에는 동해가 얼고 여름에는 제주에서 900여 필이 얼어 죽었으며 심각한 기근이 찾아오면서 유랑민이 크게 늘어납니다.
10여 년 뒤인 현종 1~2년, 1660년에 들어서면 한 여름에 눈과 서리가 내리는 빈도가 더더욱 잦아집니다. 국가적으로 구황 대책과 대비책을 추구했으나 조선의 생산량이 이미 급감한 상태에서 방법을 찾기는 사실 좀 어려웠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경신대기근으로 약 140만 명 정도가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전체 인구에서 11~14%에 해당하는 규모였으며 이세구는 경신대기근 때의 참상이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계갑대기근 때보다 훨씬 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계갑대기근을 겪고 80여 년이 흐른 뒤에 조선은 ‘국가의 존망이 결단 날 수도 있는, 망국’의 대기근을 당하게 됩니다.
결국 조선은 청에게 지원을 요청하고자 했으나 첫 번째 지원 요청에 대한 조정 내 논의는 갑론을박으로 치닫게 됩니다. 정묘/병자년의 치욕을 당하고서 손을 내밀면 뭐가 되겠느냐는 여론이 거세서 실패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경신대기근은 수그러들기는 커녕 더더욱 피해를 가중시키게 됩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지방의 비상곡물도 모두 방출하여 국고는 완전히 탕진했을 지경이었죠. 최소 3년 이상 버틸 곡물을 저장하고 있던 조선이 저 지경으로 허덕였으니 국왕은 물론, 조정 신료들도 긴장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때 흥미롭게도 청의 강희제는 조선의 극심한 기근의 정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조선이 보낸 동지사에게 '너희 나라 백성들이 빈궁하여 살아갈 수 없어서 장차 모두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한 까닭이다' 라고 청의 지원을 반대하던 조선의 대신들을 직접적으로 까는 이야기를 합니다.
현종이 사망하고 뒤를 이은 숙종까지도 경신 대기근의 여파는 남아 있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을병대기근이 닥쳐오자 조선은 더욱 버티기가 어려웠습니다. 1670년대부터 1690년대까지는 소빙기의 한랭하고 변덕스러운 기후현상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으며 이로 인해 기근은 끊임없이 발생하고 강도도 점차로 강해져갔습니다. 그리고 그 절정이 을병 대기근이었죠.
인육을 먹는 다는 이야기가 들려올 정도로 을병 대기근은 경신 대기근으로 힘이 빠진 조선을 제대로 타격했고 1693년에서 1699년의 7년 사이에 무려 141만여 명이 사망했다고 실록에서는 보고 하고 있으며 최근의 조선사 연구는 당시의 실제 희생자가 400여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할 지경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경신/을병 대기근으로 조선은 최소 400만 이상의 희생자를 낸 셈이며 전체 인구의 25~33%가 기근으로 날아가버린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결국 숙종은 1696년에 청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미 상황을 인지한 청은 조선의 요청을 받아들여줍니다.
경신대기근 때는 주저하며 끝내 거부했던 곡물원조를 을병대기근때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청의 예부에서는 조선의 요청을 거부하고자 했으나 강희제가 직권으로 조선의 지원 요청을 승인한 덕에 숨통이 틔입니다.
강희제의 명령에 따라 즉시 6만 석의 곡물이 중강으로 운반되어 조선에 넘겨졌으며 이 덕분에 조선은 큰 위기를 벗어나게 됩니다. 물론 명나라처럼 65만 석에 달하는 곡식을 무상으로 공여하듯이 조치를 한 것은 아니고 2만 석만 무상 공여한 후 나머지는 조선에서 은자를 받아가는 식으로 돈을 좀 짭짤하게 벌어들이게 됩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강희제의 조치는 조선이 생각한 것을 상회할 정도로 빨랐으며 덕분에 큰 위기를 벗어나는데 큰 도움이 되죠. 물론 강희제 본인은 이것을 두고 '내가 너희를 살렸으니까~'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숙종 이하 조선의 대신들은 이러한 무례함에 놀랐었다고도 합니다.
명말부터 청은 조선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곡물을 공급받아야 했던 상황이었으나 병자호란 덕에 매년 1만 석에 달하는 세미를 조선으로부터 공급받아 중원을 제패했고, 이어 17세기 후반의 혹독한 소빙기 기후변동 속에서도 청은 외국에 국제적인 원조를 할 정도로 경제적인 안정을 확립하게 되면서 조선을 오히려 도와주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죠.
사실 경신 대기근보다 을병 대기근이 더 많은 희생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요새 사람들이 많이 잊은 듯한 분위기인데 전체 인구의 35%가 사라질 지경이었으니 말을 다한 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