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계량화할 수 없다 - 베르그송과 영
하나의 음이 음악이 될 수 있는가
미국의 미니멀리즘 음악가 라 몬테 영(La Monte Young, 1935~)이 작곡한 〈컴포지션 1960 7번〉은 그 유명한 케이지(John Cage, 1912~1992)의 음악 〈4분 33초〉(4´ 33˝, 1952) 못지않게 특이하다. 연주자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서스테인 페달을 누른 채 피아노의 한 음만을 강하게 내리친다. 서스테인 페달 때문에 강하게 내리친 음은 빨리 소멸하지 않고 오랫동안 잔향을 남기며 지속된다. 1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음이 지속되며 더 이상 잔향이 남아 있지 않게 되면 연주는 끝이 난다. 물론 이 곡은 첼로나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로 연주해도 무방하며, 전자악기를 이용하면 1분이 아닌 수십 분 혹은 수백 분 동안 지속될 수도 있다.
영, 〈컴포지션 1960 7번〉 Composition #7, 1960
한 음을 누르는 게 전부인 음악. 현대의 문명은 공간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생명의 본질은 공간화해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본질은 오히려 영이 표현한 ‘윙윙대는 소리’와 같은 순수한 지속이다. 베르그송이 던지고자 한 메시지 또한 이것이다. 삶은 공간화하거나 계량화할 수 없다.
https://www.youtube.com/watch?v=U7e75cIc6Qs
이 특이한 음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혹자는 이를 음악이 아닌 퍼포먼스로 이해할지도 모른다. 이 음악은 하나의 음만 계속 진행할 뿐 여기에는 멜로디나 박자 혹은 리듬이 존재하지 않는다. 멜로디나 리듬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여러 음이 단속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간단한 동요 〈산토끼〉만 하더라도 ‘솔, 미, 미, 솔, 미, 도, 레, 미, 레, 도, 미, 솔’ 하는 식으로 분절된 음이 이어지며, 각각의 음은 특정한 길이를 갖는다. 그러나 영의 음악은 하나의 음이 그저 윙윙댈 뿐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멜로디나 리듬도 없는 이 연주를 음악이라고 생각할 턱이 없다.
영 자신도 그의 곡에서 연주되는 이러한 지속적인 음을 전통적인 음악의 ‘음(tone)’이라기보다는 ‘윙윙대는 소리(drone)’라고 불렀다. 그런데 영이 이 ‘윙윙대는 소리’를 자신의 음악 재료로 사용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어린 시절 시골의 자연환경을 접하면서 유난히 청각적 감수성을 지녔던 영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소리는 계곡의 물과 바람, 나뭇가지의 흔들림과 같은 자연의 소리였다. 이러한 소리는 전통적으로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나 베토벤, 혹은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의 음악이 내는 인위적인 소리와는 전혀 다르다. 그는 생명의 소리를 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자연의 소리, 즉 생명이 있는 소리의 특징은 그것을 악보에 기록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악보로 담는다는 것은 공간적으로 배열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가령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은 ‘다단조’라는 조성을 지닌다. 그 유명한 첫 두 마디 ‘빰빰빰빠암, 빰빰빰빠암’은 ‘G, G, G, E♭, F, F, F, D’로 표기되며 이를 오선지 악보에 정확한 높이와 길이로 공간화할 수 있다. 그러나 영이 만든 ‘윙윙되는 소리’는 일정한 높이도 길이도 지니지 않는 하나의 지속적인 음일 뿐이다. 그것은 결코 공간적으로 나타낼 수 없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이 현대인들에게 던지고자 한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생명이란 결코 양적으로 나타내거나 공간화될 수 없다. 그런데 현대의 모든 물질문명은 공간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이 지닌 본질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생명의 본질이란 공간화해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닌 마치 영이 표현한 ‘윙윙대는 소리’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순수한 ‘지속(durée, dur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명의 본질인 순수한 ‘지속’을 수량화하고 공간화한 것이 바로 현대의 문명, 혹은 나아가 전통적인 서양문명에 내재한 사상인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나의 음이 음악이 될 수 있는가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