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직전고(官職典故) 독서당(讀書堂)
세종이 처음으로 집현전을 설치하고, 나이 젊고 재행(才行)이 있는 자를 뽑아 휴가를 주어서 글을 읽게 하였다. 세종기(世宗紀)에 상세하다.
○ 병오년에 권채(權採)ㆍ신석견(辛石堅)ㆍ남수문(南秀文) 등 3명에게 글 읽기를 명하였는데, 규범(規範)은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의 지시를 받게 하였다. 〈세종기〉에 상세하다.
○ 임술년에 또 신숙주(申叔舟) 등 6명을 독서당에 보내 글뜻을 조용히 연구하고 깊이 완미(玩味)하여 그 힘을 크게 펴도록 하였다. 조위(曺偉)의 독서당기(讀書堂記)
신숙주 등에게 휴가를 주어서 진관사(津寬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용재총화》
○ 문종 신미년에 또 홍응(洪應) 등 6명에게 휴가를 주었다. 조위의 〈독서당기〉
장의사(藏義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용재총화》
○ 세조 병자연 간에 집현전을 폐지하고 독서당도 또 폐지하였는데, 독서당 설치한 지가 21년이었다. 조위의 〈독서당기〉
○ 성종이 즉위하여 맨 먼저 예문관을 개설하고, 옛 집현전의 제도를 회복하였다. 병신년에 다시 조종조의 고사(故事)를 답습하여서 채수(蔡壽) 등 6명에게 휴가를 주었다. 조위의 〈독서당기〉
채수 등에게 장의사에서 글 읽는 휴가를 주어서 상시(常時)의 조참(朝參)에는 모두 참여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때에 이를 ‘문장접(文章接)’이라고 일컬었다. 하루는 조반(朝班)의 모임에 홍문관 하리(下吏)가 사헌부의 거안(擧案)에 채수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문장’이라고만 하고 우연히 ‘접(接)’ 자를 빠뜨렸는데, 사림(士林)이 모두 웃으면서 채문장ㆍ권문장이라고 지목하였다. 《소문쇄록》에는 권은 곧 권건(權健)이라고 하였다.
계묘년 봄에 또 김감(金勘) 등 8명에게 휴가를 주고 장의사에 가서 글 읽기를 명하였는데, 사옹원(司饔院) 관원은 쌀을 공급하고 어주(御酒) 맡은 사람은 단술을 준비하였으며, 때때로 중사(中使)를 보내 음식을 하사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조위의 〈독서당기〉
그때에 홍문관의 관원에게 차례로 글 읽기를 명하였다. 또 상사(上巳 음력 3월 3일)ㆍ중추(仲秋)ㆍ중양(重陽) 등의 가절(佳節)에는 교외에 나가 놀기를 명하고 잇달아 술과 풍악을 하사하였다. 《용재총화》
계묘년에 용산(龍山)에 있는 폐사(廢寺)를 글 읽는 곳으로 하였으나 명칭은 없었다. 윤현(尹鉉)의 〈문회당기(文會堂記)〉
남호(南湖)의 귀후서(歸厚署) 뒤 언덕에 예부터 절이 있었는데, 세간에서는 16나한(羅漢)이 영험이 있다고 하여 향불이 끊어지지 않았다. 상운(尙雲)이라는 중이 그 절에 있으면서 장가를 가고 자식도 낳았으므로, 사헌부에서 중을 국문하고 벌주어서 속세에 되돌아가게 하였으며, 불상(佛像)은 흥천사(興天寺)로 옮겼다. 드디어 그 절을 홍문관에 주고 차례로 글을 읽게 하였는데 그 집을 독서당(讀書堂)이라고 하였다. 《용재총화》
조위(曺偉)에게 독서당기(讀書堂記)를 짓고 독서당이라는 3자(字)를 액(額 큰 글로 쓴 현판)으로 쓰도록 명하고, 술과 풍악을 내려주고 승지를 보내 낙성(落成)하게 하였다. 독서당에서는 사은하는 잔(盞 표문의 일종)을 올리면서 붉은 보자기로 함(函)을 싸서 메고 갔는데, 그뒤에는 여악(女樂)을 따르게 하였으니, 임금께서 하사한 것을 영화롭게 여긴 것이다.
폐사(廢寺)를 고쳐 지어서 당(堂)으로 만들었다. 중종 10년에 두모포(豆毛浦)에 옮겨 지었다. 《여지승람(輿地勝覽)》
○ 성종이 상으로 궁중의 술을 하사하면서 수정배(水精杯)로 먹기를 권하였다. 관(館)의 관원이 도금(鍍金)으로 잔대를 만들었는데, 김일손(金馹孫)이 명(銘)을 짓기를,
맑아서 흐려지지 않고 비어서 능히 받아들인다 / 淸不涅虛能受
그 물건 주심을 감사히 여겨 저버리지 말기를 생각한다 / 德其物思勿負
하였다. 《대동운옥(大東韻玉)》
뒤에 또 서문을 지었는데, “잔이 처음에는 반(盤)이 없어서 공장을 시켜 만들었는데, 구리 바탕에 도금을 하였다.” 하였다. 반면(盤面) 네 둘레에는 임희재(任熙載)의 8분체 글씨로 명을 볼록하게 새기고, 반 한가운데는 강사호(姜士浩)의 전(篆)자 체로 ‘내사독서당(內賜讀書堂)’ 다섯 자를 오목하게 새겼다. 뒤에 맡아 지키던 자가 훔쳐갔는데, 가정(嘉靖) 연간에 조사수(趙士秀)가 중국에서 구해 사들여서 고사를 보충하였던 것이다. 《패관잡기》
○ 연산군 갑자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제도를 폐지하니, 당(堂)은 드디어 궁인(宮人)이 차지하게 되었다. 〈문회당기(文會堂記)〉
○ 중종이 반정한 뒤 맨 먼저 옛 제도를 회복시켜서 정업원(淨業院)에 우선 우거(寓居)하게 하였다. 〈문회당기〉
병(丙)ㆍ정(丁) 연간에 김세필(金世弼) 등 6, 7명에게 휴가를 주었다.
○ 신미년에 이행(李荇)ㆍ김안국(金安國)ㆍ성세창(成世昌)ㆍ홍언필(洪彦弼)ㆍ소세양(蘇世讓)ㆍ정사룡(鄭士龍)ㆍ황여헌(黃汝獻) 등 7명을 고쳐 뽑아서 장번(長番)으로 삼았다. 윤현(尹鉉)의 독서당 규칙을 고치자는 논의에 있다.
○ 을해년에 동호(東湖)에 있는 월송암(月松庵) 서쪽 기슭에 터를 잡아서 건축하기 시작하여 다음해 정축년에 준공하였고, 윤4월에 나가서 우거하였는데 곧 이른바 호당(湖堂)이다. 〈문회당기〉
○ 중종조에 고시(考試)하는 법을 매우 엄하게 하여 만약 잇달아 입격(入格)하지 못하면 퇴학시켰다. 독서당에 물건을 하사하여 총애 우대(優待)함이 옥당(玉堂)보다 못하지 않았다. 《지소록》
○ 윤현(尹鉉)이 당상관이 된 뒤에 다시 휴가를 주었으니 특이한 대우였다. 박민헌(朴民獻)도 당상관이 된 뒤에 다시 휴가를 주었다. 윤현의 자는 자용(子用), 호는 국간(菊磵), 시호는 문장(文壯)이며, 호조 판서를 지냈다. 박민헌의 자는 희정(希正)이고, 벼슬은 북병사(北兵使)이다.
○ 임진년 뒤로부터는 호당(湖堂)이 텅 비어 남은 것이 없었고, 휴가 주는 것도 오랫동안 폐하였었는데, 무신년에 대제학 유근(柳根)이 다시 설치하기를 청하여서 우선 한강(漢江) 별영(別營)을 독서하는 장소로 삼았다.
○ 독서당은 40세 전인 사람을 뽑아서 맡겼던 예가 있었는데, 이후백(李後白)이 처음으로 40세가 되어서 들어갔고, 이이첨(李爾瞻)은 48세로 들어갔으니 역시 파격이었다. 당상관으로 있으면서 그대로 겸무한 자는 박민헌(朴民獻)ㆍ이덕형(李德馨)이었다. 《지소록》
○ 인조조에 정백창(鄭百昌)ㆍ이명한(李明漢)이 당상관이 된 뒤에도 그대로 겸무하였다. 《택당집(澤堂集)》
○ 숙종 기사년에 대제학 민암(閔黯)의 아들 민창도(閔昌道)가 처음에는 가려 뽑는 데에 들지 않았었는데, 제학 유명천(柳命天)이 창도가 상피법(相避法)에 걸려서 뽑는 데에 들지 못하였다는 뜻으로 아뢰었더니, 뽑는 데에 들게 되었다. 《택당집》
○ 국조(國朝)에서는 문을 숭상하여 정치를 잘하려 하였으므로, 그 인재를 가려 뽑는 것의 중함과 예(禮)로써 대우하는 것의 융숭함이 호당에 이르러서 지극하였다. 대성(臺省)의 좋은 명예와 관각(館閣)의 고상한 명망이 없으면 호당의 뽑힘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관에서 급여(給與)함이 그 대우가 특별하여 태관(太官 궁중 음식을 맡은 관청)의 진미(珍味)와 소부(少府 궁중의 의복과 보화를 간수하는 관청)에 간수하였던 것이며, 천한(天閑 임금의 마구간)의 훌륭한 말[馬]과 옥으로 장식한 굴레, 아로새긴 안장을 하사하는 것이 서로 잇달았었다.혹 중사(中使 내시)가 어제(御題)를 받들어 불시에 와서 그 자리에서 회보(回報)하는 글을 독촉하기도 하는데, 칠보시(七步詩)를 짓는 재주가 아니면 가끔 군급(窘急)함을 면치 못하였으나, 그 영화로움은 지극하였으니, 그 책임이 중하고 그 임무가 실상 어려웠다. 계곡(溪谷) 호당계(湖堂契) 병풍서(屛風序)
○ 한창 성할 때에는 휴가를 주어 글을 읽게 하였는데, 예(例)대로 12명을 뽑고 두 차례로 나누어서 일직ㆍ숙직을 하게 하였다. 대제학이 날마다 제술(製述)할 것을 맡겨서, 등급을 매겨 한 달에 세 번씩 올리는 것이다. 어주(御酒)를 하사하면 별도로 제술이 있고 상이 있는데, 당원(堂員)은 모두 3사(三司)의 명관(名官)으로 벼슬이 자주 옮겨지고, 혹 말미를 청하는 까닭으로 항상 차례의 수가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며, 혹 3, 4명뿐이기도 하였다. 예에 따라 한 달 양식으로 쌀과 콩을 각 15섬씩 공급하고, 내섬시(內贍寺)에서 날마다 술 한 병과 소채ㆍ시탄(柴炭 땔나무와 숯)을 흡족하게 공급하였다.출입할 때에는 역마를 탔고, 두 척의 방주(方舟)를 장식하여 잔치 놀이에 대비하였으며, 장악원(掌樂院)에서는 기악(妓樂)을 제공하여서, 비록 중서사인(中書舍人)이라도 감히 먼저 차지하려고 다투지 못하였다. 관에서 조석반(朝夕飯)을 공급하지마는, 당원이 또 수용을 요구하면 안팎 관원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서리(書吏) 9명과 사예(使隸) 8명은 모두 급료를 받았으며, 노비 80여 호가 당(堂) 곁의 둘레에 살았다. 《택당집(擇堂集)》의 〈당기(堂記)〉
○ 독서당이 두모포(豆毛浦) 북쪽 산꼭대기에 있었다. 성종이 수정배(水精杯)를 하사하였고, 중종이 선도배(仙桃杯)를 하사하였다. 명종 기유년 여름에 당에 어주를 내리면서 혜호배(蟪䗂盃 혜호는 벌레 이름인데, 술을 먹이면 곧 죽는다. 이것을 형상하여 잔을 만든 것은 ‘술을 경계하라’는 뜻이다)를 하사하였다. 심수경(沈守慶)이 사은하는 전(箋)을 지었는데, 그 한 구절에,
수정배 선도배를 함께 전하니 / 與水精仙桃而竝傳
성종과 중종에서 더욱 빛나다 / 于成宗中廟而益顯
하였다. 정유길(鄭惟吉)이 당중고사(堂中故事)에 쓰기를, ‘실록(實錄)이다.’ 하였다 《청천견학록》
홍천민(洪天民)의 부인 유씨(柳氏)는 몽인(夢寅)의 누이이다. 만년에 두모포를 지나는데 마침 독서당이 비었으므로 올라가 보았다. 지키던 노파가 예로부터 전해오던 백옥(白玉) 잔을 내보이면서, “이 잔은 호당선생(湖堂先生)이 아니면 마시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내 비록 부인이지만 존구(尊舅 시아버지인 춘경(春卿))께서 호당에 들었고, 지아비가 호당이 되었으며, 아들 서봉(瑞鳳) 이 호당이고, 지아비의 아우 성민(聖民) 와 나의 조카 유숙(柳潚)ㆍ유활(柳活) 가 모두 호당이 되어서 이 잔으로 마셨는데 내 홀로 이 잔으로 못 마실 것인가.” 하니, 그 당시에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하였다. 《홍씨가승(洪氏家乘)》
○ 세종 초년에는 특명으로 휴가를 주어서 정원(定員)이 없었고, 이졸(吏卒)이 정수가 없었으며, 공급하는 것이 정한 액수가 없었으나, 뽑힌 사람은 각자 학문에 힘쓰고 문사(文辭)를 닦아서 감히 지나치게 사치하지 않았다. 뒤에 관청을 설치하고 규제를 정함에 그 고과(考課)하는 것은 엄한 듯했으나, 공급은 사치함을 면치 못하고 풍습은 노닥거림을 면치 못하였으니, 전후에 인재를 양성한 효과가 다름을 가히 볼 수 있다. 《택당집》
[주D-001]칠보시(七步詩) : 위(魏) 나라 문제(文帝)가 그의 아우 조식(曺植)을 죄 주려고, “일곱 걸음[七步] 걷는 동안에 시를 지으면 놓아주겠다.” 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출처] 관직전고(官職典故) 독서당(讀書堂)